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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
[정의]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전쟁 때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활동했던 공산 비정규군.
[개설]
빨치산이란 여수·순천 사건의 잔류 반란 세력과 탄압을 받은 좌파 인사들, 6·25 전쟁 후 인민군 잔류 세력이 지리산 등에 입산하여 전개한 공산 게릴라를 이른다. 빨치산이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역사적 배경]
해방 후 남로당 활동에서 유격 투쟁을 배합하게 된 것은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비롯된다. 미군정 당국은 1947년 8·15 해방 기념 대회의 옥외 개최를 금지시키고, 이를 구실삼아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 등 수많은 간부들을 구속했으며, 모든 좌익계 신문을 폐쇄하였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활동에 대한 탄압과 주요 핵심 인물에 대한 검거 선풍이 남로당이 폭력 전술로 노선을 바꾸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4월 13일 여기까지
[남로당과 여수·순천 사건]
남로당은 1948년 ‘2·7 투쟁’과 ‘5·10 선거 반대 투쟁’을 통해 부분적인 무장 투쟁 전술을 채택해 비폭력적인 정치 투쟁을 지원토록 했다. 4·3 제주 항쟁의 여파로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 반란 사건이 일어났고, 14연대는 반란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11월 하순에 유격 거점을 마련했다.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은 14연대 반란군이 주축이 된 지리산의 반란군과 합세해 곳곳에서 관공서를 습격했다. 한동안 전라남도 구례 지역에 국한되었던 관공서 습격은 11월 중순 이후 전라남도 곡성·광양, 전라북도 남원·무주·장수, 경상남도 거창·함양·산청·진주·하동 일대로 번져 갔다.
하동 지역에서는 12월 5일 일단의 빨치산이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출몰, 대한청년단 기동대와 경찰 병력 300여 명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격퇴했다. 이날 빨치산 대원 사살 4명, 소총 12자루와 실탄 120여 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튿날 다시 의신리에서 접전을 벌여 유격대 중대장을 사살하고 대원 3명을 생포했다.
1949년 3월 육군 본부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약칭 지전사(智戰司)]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로 개편하여 토벌 작전을 강화했다. 반란군 지휘자 홍순석(洪淳錫)과 김지회(金智會)는 4월 9일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당했다. 주력이 와해됨으로써 5월 9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면서 토벌 작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일부 잔여 반란군이 있었고,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간인 출신 유격대원들이 계속 충원됨으로써 유격대들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유격 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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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격화와 동계 대토벌 작전]
1949년 가을 남한의 유격대들은 산악은 물론 관공서나 군부대, 경찰서가 위치한 도시에 대한 대담한 공격 작전으로 나왔다. 이를 9월 공세 또는 아성 공격(牙城攻擊)이라 하며 9~10월 중에 25개의 대도시, 읍에 대한 습격이 강행되었다. 북한은 9월 총공세를 지원하기 위하여 유격대를 남파시켰다. 유격대의 강력한 투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의 일부 산악 지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고 불리며 대한민국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리산 유격전 구내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부활되었으며, 부분적으로 토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유격대 투쟁의 격화에 대해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1949년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국민보도연맹 자수 기간을 설정하여 물리적 공격과 감시 체제 구축에 나섰다. 국민보도연맹은 30만 조직원을 포괄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좌파 투쟁에 동원되었다. 자수와 밀고가 장려되자 많은 좌파들이 전향하면서 좌파 조직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로 인해 1949년 말에는 남로당의 거의 모든 당 조직들이 파괴되어 마비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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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1949년 9월 말에 게릴라 근절과 지방 좌파 뿌리 뽑기에 나섰다. 이른 바 동계 대토벌 작전이다. 군경 토벌대들은 전략촌 건설 및 소진(消盡), 소개 작전(疏開作戰)을 폈다. 1949년 여름까지 매월 평균 3백~4백 명을 기록했던 토벌에 의한 게릴라 사상자 수는 9월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8백~1천 명까지 달했다. 군경 합동으로 진행된 1949년 12월부터의 동계 토벌은 사살 365명, 생포 187명, 귀순 4,964명이라는 전과를 올리고 1950년 3월에 막을 내렸다. 동계 토벌 작전은 무장 유격대에게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한때 수천 명에 달했던 남한 유격대는 거의 완전히 붕괴했다. 유격대들은 이동과 은신에 유리한 소규모 조직으로 재편하여 민간 속에 잠입하거나 지하 투쟁으로 전환했으나 이는 생존 전략 수준을 넘지 못했다.
[6·25 전쟁 후의 빨치산]
1. 빨치산 토벌 작전
인민군이 퇴각한 1950년 9월 이후 인민군 패잔병, 구 빨치산, 인공 부역자 등이 모두 입산해 산간 지대 인민 유격대의 숫자는 급격히 불어났다. 한때 전국적으로 5~8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였던 입산자 수는 일시 산중으로 피신했던 정규 인민군 병력 중 대부분이 북상 길을 택한 이후인 1950년 10월 말에는 약 2만 5천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들 중에는 점령 치하에서 인공의 당정 조직에 관여했다가 인민군이 후퇴하자 부역 행위가 탄로나 처벌을 받을까봐 두려워 산으로 달아났던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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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중순이 되어 11사단이 새로 창설되어 호남 지구와 지리산 지구의 토벌을 전담하게 되었다. 11사단이 토벌 작전에 들어가면서 내세운 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작전 지역의 산간 부락이 거의 소실되고 주민들은 고향에서 내몰렸다. 이 작전은 주민들의 반감을 키워 자진 입산자를 늘리는 역효과를 냈다. 1951년 2월 10~11일에 9연대 3대대가 저지른 ‘거창 양민 학살 사건’도 그러한 무리한 작전의 수행 과정에서 빚어진 참사였다.
11사단의 소탕 작전[1950. 10. 14~1951. 4. 15]에서 유격대는 2천 명 전사, 2천여 명 생포라는 피해를 입었다. 그 뒤를 이은 8사단의 소탕 작전[1951. 4. 15~5월]은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1951년 봄까지 지속되었던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상황은 해소되고, 제2전선을 구축하려던 유격대들의 기도는 좌절되었다.
정부와 미군은 1951년 11월에 백야전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사령관 백선엽 장군]를 설치하고 유격대 토벌 작전을 펼쳤다. 1952년 3월까지 지속된 이 작전에는 3개 사단과 4개 전투 경찰 연대, 7개 경찰 대대 등 4개 사단 규모가 동원되었다. 12월 2일부터 15일까지 지리산 지역 유격대를 대상으로 한 제1기 전후반 작전을 통해 사살 940명, 생포 1,600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12월 20일부터 1952년 1월 4일까지의 제2기 작전은 지리산을 빠져 나간 유격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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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성골 전투와 빨치산의 붕괴
유격대의 전라북도 부대는 전라북도 운장산, 내장산, 회문산, 성수산, 장안산 일대에서 1,500~2,500명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박영발(朴永發)과 김선우(金善祐)가 지휘하는 전라남도 유격대는 백아산, 조계산, 백운산 일대에 약 2천 명 정도가 있었다. 토벌대의 주된 공격 목표가 되었던 전라북도 유격대와 전라남도 유격대는 이 작전으로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 토벌대의 주민 선무 공작과 전략촌 설치 등으로 유격대와 주민의 접촉이 차단되면서 유격대들은 보급 투쟁 명목으로 주민들을 습격했다. 이에 주민들이 등을 돌리자 점점 더 생존을 위한 반민간인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1952년 1월 6일 개시된 제3기 작전에서 수도 사단의 지리산 포위 공격으로 남부군 직속 81사단, 92사단과 경상남도당의 57사단은 거의 전멸했다. 1월 18일에 있었던 화개면 대성골 전투에서 유격대원들은 3개 연대의 포위 하에 박격포 공격과 공군기들의 폭격을 당하여 3백여 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생포되었다. 이 숫자는 당시 대성골에 몰려 있던 유격대원의 절반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유격대는 떠돌이 부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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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작전을 통하여 전개된 전투에서 남로당 경상남도당 위원장 남경우를 비롯하여 부위원장 허동욱, 조영래, 조직부장 강명석, 선전부장 안병하 등 14명의 경상남도당 수뇌부가 전멸했다. 1월 말까지 계속된 제3기 작전으로 수도 사단은 사살 1,867명, 생포 1,055명의 전과를, 8사단은 사살 1,715명, 생포 1,972명의 전과를, 서전사는 사살 102명, 생포 615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의의]
빨치산 투쟁은 기본적으로 미군과 한국 정부의 좌익 탄압의 결과로 발생한 수세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총공세 등은 북한 지도부의 군사적 모험주의의 소산으로써 남한 내의 좌파 정치 역량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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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로당(남조선 노동당)
개요
해방 후 한국에서 만들어졌던 좌익 계열 정당. 약칭은 '남로당'이다. 1945년 11월 23~24일 박헌영 주도로 결성된 후 남한 지역에서 각종 투쟁과 같은 공산당 활동을 펼쳤다. 같은 시기 북한 지역에 만들어진 김일성 주도의 북조선노동당과의 세력 경쟁을 하는 가운데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사건', 1947년의 '3·1절 충돌사건', 1948년의 '2·7총선 방해투쟁', '제주4·3사건', '여수·순천사건', 1949년의 '국회프락치사건'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간부들은 북한으로 넘어가서 북조선노동당에 흡수되는 양상을 보였다. 1950년 이후 남로당 조직은 거의 붕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주요 간부들은 북한에서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다.
4월 20일 여기까지
창당 배경
남로당은 해방과 함께 결성, 창당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등 3당이 합당하여 결성된 정당이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20일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발족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에 의해 9월 11일 결성되었다. 이 조선공산당은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간주되어, 이보다 앞서 1945년 8월 16일 이영(李英)·정백(鄭栢)·안기성(安基成)·이승엽(李承燁) 등에 의해 결성된 장안파 조선공산당과, 최익한(崔益翰)·이우적(李友狄)·하필원(河弼源) 등에 의해 결성된 또 다른 조선공산당 들은 8월 24일 해체하여 박헌영을 중심으로 결합했다.
조선공산당에서는 1945년 10월 23일 평양에서 발족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승인했고, 12월에는 김일성이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북조선분국이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이라고 명칭을 변경함에 따라,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은, '북조선공산당'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의 좌익 세력을 결집하기로 하고 여운형(呂運亨) 주도의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과 백남운(白南雲) 주도의 남조선신민당(南朝鮮新民黨) 등과 합당을 추진하게 되었다.
4월 21일 여기까지
남조선공산당 창당
1946년 8월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은 "조선 민족통일의 기초를 구축하고 민주진영의 주도체를 완성"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남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에 3당 합동을 제안했다. 그러나 합동과정에서 조선인민당 내의 48인파와 31인파, 남조선신민당 내의 간부파와 대회파, 조선공산당 내의 추진파와 반대파 등이 각각 찬성과 반대로 분열했다. 결국 박헌영 계열이 중심이 되어 11월 23, 24일에 천도교의 한 분파인 시천교 교당에서 3당의 찬성파를 중심으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박헌영 주도의 남조선노동당은 결성 대회에서 각 지방대의원 508명 및 중앙대의원 628명이 참석하여 허헌(許憲)의 개회사에 이어 임원선출과 강령·규약 등을 통과시켰다. 허헌은 개회사에서 "근로인민의 역량을 결집하고 좌익진영의 통일을 강화하여 반동세력을 분쇄하고 조국의 민주독립을 전취할 수 있는 강력한 정당을 창건할 것"을 역설했다. 그러나 여운형·백남운 등은 박헌영 주도의 남로당에서 이탈, 사회노동당을 결성했고, 좌우 합작 등 보다 중도적이고 점진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4월 22일 여기까지
정책과 조직
1946년 9월 4일 3당합동준비위원 연석회의에서 발표한 남로당 강령을 보면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장제 실시, 주요산업의 국유화,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신앙의 자유, 20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 부여, 남녀동등권, 초등의무교육제 실시, 진보적 세금제 실시, 민족군대 조직과 의무병제 실시, 평화애호국가와의 친선강화 등을 주장했다. 조직에는 중앙상무위원회를 두었고, 조직부·간부부·선전부·노동부·농민부·청년부·부녀부·구호부·재정부·협조부·문화부·조사부·총무부 등이 있었다.
4월 23일 여기까지
활동
남로당은 당시 세계적 조류인 전위 정당의 대중정당으로의 전환 추세와 북조선노동당의 창설에 맞추어 결성되었지만, 이미 1946년 9월 7일 박헌영 등 주요 좌익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좌익에 대한 탄압이 강화됨으로써 오히려 지하조직화해갔다. 남로당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사건', 1947년의 '3·1절 충돌사건', 1948년의 '2·7총선 방해투쟁', '4·3사건', '여수·순천사건', 1949년의 '국회프락치사건' 등을 거치면서 대중 조직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일부는 무장유격투쟁으로 전환했다.
4월 24일 여기까지
소멸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남로당 무장 세력에 대한 토벌이 강화되자, 대부분의 남로당 간부들은 북한으로 도피했다. 남로당과 북로당은 연합을 위한 연합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1949년 6월에는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이 되었는데, 실질적으로는 남로당 세력이 북로당 세력에 흡수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북로당의 부위원장이던 김일성이 통합된 조선노동당의 위원장이 되면서, 남로당 출신 인물들의 주도권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결국 남로당 조직은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대부분의 남로당 출신 간부들은 1953년 8월과 1955년 12월 열린 특별군사재판에서 간첩과 이적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4월 25일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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