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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왕조 ┓♥ 스크랩 연산군 (燕山君)
윤대화 추천 0 조회 222 12.09.24 17: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산군                燕山君

 

 

 

 

 

 

 

연산군(燕山君) .. 1476년 출생하여 1506년 31세의 나이에 귀양지인 江華島에서 병으로 죽었다.그의 재위기간은 12년.. 성종(成宗)의 맏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윤씨(尹氏)이다. 연산군은 1498년, 유자광(柳子光) 등 훈구파(勳舊派)의 계략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삼아 사림파를 제거하는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고,

 

 

1504년에는 생모인 페비윤씨(廢妃尹氏)사건을 이유로 윤필상(尹弼商) 등 훈구세력을 몰아내며,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이었다.연산군의 12년 治世는 개국 100년의 조선에 한 시대의 劃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사태가 잇따라 일어나 그 것은 宣祖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당파정치로 확대 악화되었고,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난(國亂)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된다.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燕山君. 1476.11.7 ~ 1506.11.6. 재위 1495 ~1506)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군주일 것이다. 그 명성은 물론 오명(汚名)이다. 12년에 걸친 길지 않은 치세(治世) 동안 두 번의 사화(士禍)를 일으키고,극도의 폭정을 자행하다가 결국 조선 최초(最初)의 반정(反正)으로 폐위(廢位)되었다는 사실은 그런 오명(汚名)의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그 당대(當代)에 확고히 내려졌다. 일번적인 국왕에게 부여되는 '조(祖)'나 '종(宗)'이 아니 '군(君)'이라는 묘호(廟號)가 붙여졌고, 그의 시대를 다룬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日記)'로 불렸으며, 종묘(宗廟)에서 배제되고 격식을 갖춘 능(陵)이 아닌 초라한 묘(墓)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판정을 대표하는 외형적 상징들이다.

 

 

연산군이 자신의 치세(治世)를 파탄시킨 일차적인 원인과 책임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그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보여준 심리(心理)와 행동은 분명히 기이(奇異)하고 부당한 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그 개인(個人)에게 국한하는 소박한 판단을 넘어 시대적인 맥락을 넓고 깊게 고려해 파악하는 시각은 연산군과 그의 시대를 좀더 정확하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수령(樹齡) 860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은행나무이다. 연산군의 묘가 강화도에서 이 곳으로 이장(移葬)되어 묻히는 모습을 지켜 본 역사의 증인이다. 권력의 영욕과 무상함, 그리고 인생의 덧 없음을.... 묘소 입구에 서 있다.

 

 

 

 

 

 

 

 

 

 

이 곳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 부부(夫婦) 그리고 처형 당한 연산군의 딸과 사위 그리고 그 신분에 이론(異論)이 있는 의정공주조씨(義貞宮主趙氏) 등  5基의 묘가 같이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맨 앞에 딸과 사위의 묘가 있고, 가운데에 의정궁주조씨 묘  그리고 뒷 편에 연산군 부부의 묘가 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겨 난 연산군은 강화도로 귀양을 가, 그 곳에서 두 달만에 병으로 죽는다. 그는 두 부인(婦人) 사이에서 4남2녀의 자식을 두었지만, 네 아들은 모두 사약을 받고 죽었고, 딸과 그 사위와 이 곳에 묻힌 것이다. 연산군의 묘는 원래 강화도(江華島)에 있었으나, 그의  사후(死後)  7년되는 해에 그의 부인 신씨의 탄원에 의하여 이 곳으로 이장(移葬)되었다.

 

 

 

 

 

 

 

 

 

 

 

                                       

                                          王은 王이로되,  王이 아닌王  

 

 

 

 

 

 

 

조선 역대의 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소설, 연극,영화 그리고 드라마에 등장한 인물도 없다. 그 동안 수 많은 작품에 등장한 연산군은 한결같이 폭군(暴君)으로 묘사되었고,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엄마 콤프렉스에 힘들어 하는 동성애자(同性愛者)로 그려져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을까? 그 근거는 ?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實錄)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로 남아 있다. 그 내용 또한 연산군이 저지른 패악(悖惡)으로 가득 차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공부하고, 소설,연극,영화,드라마를 읽고,보고 들은 우리는 모두 그를 그저 폭군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의 추구

 

 

 

 

연산군은 매우 순조로운 조건에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성종(成宗)의 적장자(嫡長子)로 태어나 7세 때 세자(世子)로책봉되었고, 12년 동안 충분한 세자 수업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유일하지만 중요한 결함(缺陷)은 모후(母后)가 사사(賜死)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충격적이고 비통한 사건임이 분명하였지만, 암투(暗鬪)와 치정(癡情)이 난무하던 전근대의 궁중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연산군은 이처럼전체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실패하였다. 그런원인을 분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주제는 삼사(三司)이다. 잘 알듯이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이다. 그 관서(官署)는 국왕과 국정에 대한 광범하고 강력한 간쟁(諫爭)과 감찰(監察)을 기본 임무로 지니고 있었다.

 

 

비판적 언론기관인 삼사(三司)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시기는 성종(成宗) 시절이었다. 우선 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됨으로써 삼사(三司)를 포함한 주요 관서들은 그 기능을 법률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와 함께 세조(世祖) 이후 과도하게 팽창되어 왔던 대신(大臣)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국왕의 의도(意圖)가 작용함으로써 삼사(三司)는 국정의 필수적인 관서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이었다.

 

 

이것은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젼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국왕이 최고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儒敎政治)를 구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王權)의 전제성(顚制性)이 상대적으로 약화(弱化)된 구조라는 사실도 분명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은 부왕(父王)의 치세(治世)에 이루어진 이런 체제를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목표에 저해되는 모든 행동을 ' 윗 사람을 능멸한다 '는 의미의 ' 능상 (凌上) '으로 규정하였고, 그것을 척결하는데 재위기간 내내 전력을 기울였다. 그 대상은 처음에는 삼사(三司)이었지만, 점차 신하(臣下) 전체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능상(凌上)의 혐의가 번져가는 과정은 폭정의 격화와 동일한 의미이었다.     

 

 

 

 

 

                                                    연산군 바로 알기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그들 공신세력에 의하여 쓰여진 " 연산군일기 (燕山君日記)"..... .그들은 연산군을 한껏 폭군으로만 묘사하는 반정(反正)의 시각에서 작성하여야 반정(反正)  즉, 쿠데타를 정당화(正當化) 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한 술 더하여 후대의 작가(作家)들은 자신의 작품에 흥미 본위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극적(劇的)인 완성도(完成度)를 높이기 위하여 그를 폭군으로 과장하여 그렸다. 작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1900년 이후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연산군은 그저 폭군이었다. 그러한 흐름은 일제(日帝)의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일조(一助)한 셈이었다. 일제(日帝)는 조선을 이조(李朝)로 폄하하고, 사색당쟁(四色黨爭)에  패망할 수 밖에 없는 국가로 매도하여 자신들의 한반도(韓半島) 침략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우리는 반복되는 학습에 익숙해 진 것이다. 역사 바로 알기는 이래서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 연산군 일기 "는  누가,  어떻게 썼을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한마디로 압축하는 첫 장 총서(總書)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연산군은 성종강정대왕(成宗康靖大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페비윤씨가 병신년 11월7일 낳았다. 계묘년 2월6일 세자로 책봉하고, 한명회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6일에 황제가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가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면, 이를 매우 못 마땅해 하였다.   

 

즉위하여서는 궁 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치 못 하였고, 정사(政事)에 대하여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酒色)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악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大臣, 臺諫, 侍從을 거의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어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강화도 교동(喬洞)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그 기록성(記錄性)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문화유산이지만,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객관성(客觀性)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여러 장치를 두었지만, 적자(嫡子) 또는 방계(傍系)의 왕통(王統)문제와 실록(實錄)기록 당시의 집권 세력에 따라서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특히 연산군(燕山君)은 신하(臣下)들에 의하여 ?겨난 인물.. 연산군이 죽은 후에야 기록되는 실록.. 연산군을 폭악무도(暴惡無道)한 폭군으로 깎아내리고, 인륜(人倫)을 파괴한 패륜아(悖倫兒)로 낙인찍어야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을 얻을 수 있고, 정당화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맞춤형 기록일 수 밖에 없었다. 승자(勝者)의 기록일 뿐..연산군은 철저한 패배자이었다. 여기에  후대의 작가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 자극적으로 덧칠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학습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연산군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이었다. 두 사화(士禍)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앞서 말한대로 능상(凌上)의 척결이었다.연산군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과 삼사(三司)는 수륙재(水陸齋)의 실행, 외척(外戚)의 임용, 폐모(廢母)의 추숭(追崇) 등 많은 사안에서 충돌하였다.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의 공방(攻防)도 격화되었다.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은 대간(對諫)의 간언(諫言)을 거부한 연산군의 행동을 ' 영주(英主)의 위엄있는 결단 '이라고 칭송하였고, 사간원 정언(正言) 조순(趙舜)은 그런 '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 '고 극언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연산군과 대신들은 당시의 가장 심각한 폐단이 삼사(三司)라는데 합의하였고, 신중히 기회를 노린 끝에 첫 번째 숙청에 착수하였다. 그 사건이 무오사화이다.       

  

 

 

 

                                                            

                                                            무오사화                   戊午士禍

 

 

 

 

 

 

사림파(士林派)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成宗)의 왕권 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사림세력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된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하게 성장하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勳舊派)는 이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훈구파의 계속되는 비판에도 성종(成宗)의 사림(士林) 중용(重用)에 따라, 훈구파는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 한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여기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훈구파의 이극돈(李克敦)은 사림파의 거두(巨頭)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조의제문(弔義祭文)이 사초(史草)에 올라 와 있음을 알고, 이 조의제문은 세조(世祖)의 즉위(卽位)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유자광(柳子光)과 모의하여 연산군에게 보고한다.  

 

 

이에 연산군은 관련자들을 보름간 스스로 심문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金宗直)은 시체를 꺼내어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명하고, 이에 동조하는 사림세력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내어 일거에 제거하였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 노사신, 유자광 등은 논밭과 노비를 상으로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사림파는 중앙 정계에서 일단 후퇴하게 된다.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세조(世祖)를 비판한 김종직(金宗直)과 김일손(金馹孫)의 불온한 문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사초(史草)이었지만, 앞서 말한 상황적 맥락을 고려할 때 궁극적인 목표는 삼사(三司)의 능상(凌上)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연산군과 대신(大臣)들은 치밀한 계획 아래 제한된 숙청을 단행하였다. 피화인(被禍人 .. 사화에서 처벌된 사람)은 52명으로 사형 6명, 유배 31명,파직과 좌천 등이 15명이었다. 이러한 형량(刑量), 특히 사형이 매우 적다는 사실과 해당 인원은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라는 거대한 사잉성에서 예상하기 쉬운 결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러한 외형은 그 사건이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경고(警告)이었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삼사(三司)는 일단 움츠러들었다. 왕정의 원리상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그 행사는 그리 잘못된 목표가 이니다. 그러므로 무오사화까지 연산군의 통치는 일반적인 수준에서도 그 정당성(正當性)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뒤부터 시작되었다. 연산군은 삼사(三司)를 제압하여 확보한 왕권을 국정개혁이나 경제 발전 같은 건설적인 분야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기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집중하였다. 그 과정은 유례 없는 폭정으로 이어졌다.     

 

 

                                                    

 

 

                                       갑자사화                    甲子士禍

 

 

 

 

 

무오사화로 인하여 사림(士林)세력들은 크게 위축되었고, 이제는 연산군과 훈구(勳舊) 세력들 간에 주도권(主導權)을 잡기 위한 긴장관계(緊張關係)가 형성되고 만다. 특히 사림파에 의한 언론(言論)의 견제가 약화(弱化)된 상황에서 연산군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국가재정은 궁핍해졌고, 그 재정부담을 백성뿐만 아니라 훈구파 세력들에게도 지우자, 왕과 재상들의 갈등은 더욱 악화되었다.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삼사(三司)는 상당히 온순해졌고, 연산군과 대신의 권력은 그만큼 증대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본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이 시점에서 연산군은 결정적인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그는 자의적(姿意的)인 욕망의 충족과 해소를 자유로운 왕권 행사와  혼동하거나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행태는 연회, 음행(淫行), 사냥에의 탐닉, 금표(禁標) 설치와 민가(民家)의 철거, 발언(發言)의 통제 등 극한적이고 기이한 황음(荒淫)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궁극적인 결과는 과도한 재정지출에 따른 국가경제의 파탄이었다. 무오사화 이듬해인 재위 5년부터 세출(歲出)은 세입(歲入)을 초과하였다. 재위 7년에는 이른바 ' 신유공안(辛酉貢案)'을 제정하여 기존의 공납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민생의 부담과 재정(財政)의 유용(流用)은 급증되었다.  

 

 

 

 

 

                                                      구체적 계기

 

 

 

 

 

갑자사화의 구체적 계기는 연산군의 생모(生母)인 윤씨(尹氏)의 복위 문제이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통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성종(成宗)은 그를 페비(廢妃)시키고, 다음해에 사사( 賜死)하였던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임사홍(任士洪)에 의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지고, 연산군은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成宗)의 후궁인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죽이고 그의 아들 두명도 귀양보낸 후 죽였다. 

 

 

이 때가 연산군 즉위 6년..연산군이 생모(生母)의 사건을 모를 리 없었고, 즉위 초에 그에 관한 서류를 올리라 지시하기도 하였고, 윤씨의 오빠는 이미 벼슬에 있었다. 소문 많은 궁월 안에서 연산군이 임사홍(任士洪)의 고자질에 의하여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연산군을 이를 빌미로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파들을 제거하려 획책하였으므로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 결과 윤씨의 폐비(廢妃) 및 사사(賜死)에 찬성하였던 윤필상,이극균 등이 사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명회,정창손,정여창,남효온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훈구(勳舊)세력 거의를 망라한 것이었고, 홍귀달 등 중앙에 남아 있던 사림세력도 모두 피해를 입게 되었다. 모두 연좌제를 적용하여 그 피해는 무오사화를 웃돌았다.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된 연산군은 이제 정당성과 권력기반을 상실하게 되고, 폭정의 피해가 심해지자,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결속된 반격(反擊)으로 연산군은 폐위된다.

 

 

 

 

 

 

                                           유자광 (柳子光) 그리고 임사홍(任士洪)

 

 

 

 

 

 

무오사화는 유자광(柳子光)의 김종직(金宗直)에 대한 개인적(個人的)인 원한(怨恨)으로, 갑자사화는 임사홍(任士洪)의 개인적인 권력 욕구로 생겼다고 정의해도 지날 칠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간신열전(奸臣列傳)에서 1,2 등을 차지하는 대표적 간신 ... 그들에게 전능(全能)의 힘은 물론 없었지만, 상황을 이용하는 잔꾀와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는 무한한 집념이 있었던 것이다.

 

 

 

 

                                            유자광                    柳子光

 

 

 

 

  

그는 세조시절 남이(南怡)장군을 모함하여 죽게한다. 남이장군이 전공(전공)을 세워 세조(세조)의 총애가 깊어지자, 한명회,신숙주 등과 공모하여 남이(南怡)의 시(詩)...남아이십미평국(南兒二十未平國)을 남아이십미득국(南兒二十未得國)으로 조작하여 남이(南怡)를 죽인다. 

 

 

그리고 연산군시절, 김종직(金宗直)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삼아 그 김종직과 반대세력을 모두 죽이게 한다. 성종(成宗)시절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갔을 때 그 곳 정자 학사루(學士樓)에 걸려있는 유자광의 시(詩)가 쓰여진 현판을 철거하고, 불태워버렸다. 남이장군을 죽인 유자광을 김종직은 몹씨 경멸하고 있었다.

 

 

 

 

 

                                                             경남 함양에 있는 학사루(學士樓)

 

 

 

 

 

 

                                             임사홍                  任士洪 

 

 

 

 

 

임사홍(任士洪), 그는 출세(出世)를 위한 길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치 않았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 사건을 연산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훈구파(勳舊派)의 재산을 노리던 연산군의 속셈을 알고,새삼스레 폐비윤씨(廢妃尹氏) 사건을 10년만에 들먹이며  연산군에게 그들을 제거할 빌미를 제공한다. 갑자사화는 결코 연산군 생모(生母)의 억울함에 대한 복수극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그들 훈구세력들이  불편하기만 하였던  연산군과 임사홍이 합작(合作)으로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고의적(故意的)인 참살극이었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任熙載)는 아버지와는 달리  일찍이 사림파(士林派)의 길을 걸었다. 임희재는 일찍 김종직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그들과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희재는 무오사화 때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를 간다. 그가 유배에서 풀리고 어느 날,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방문하여 병풍에 씌여 있는 임희재의 시(詩)를 발견한다.  

 

 

그 시(詩)의 내용은 " 요(堯), 순(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그렇게 백성을 괴롭혔는지..." 라는 글귀를 보고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연산군이 임사홍에게 '저 시(詩)는 나를 진시황에 비유한 것이 아닌가 ? "라고 묻자, 임사홍은 " 예.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임금께 아뢰올 참 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이에 크게 노하고, 임희재(任熙載)는 갑자사화 때 귀양가서 처형(處刑)을 당했다. 아들 임희재가 처형되던 날, 임사홍은 일부러 잔치를 벌이고, 흥겹게 노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시켜 임사홍의 동정을 살피던 연산군(燕山君)은 이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충신(忠臣)이라고 하며 벼슬을 높혔다.  

 

 

 

 

 

 

 

 

 

 

 

 

                                                   연산군의 신언패 (愼言牌)와  미네르바 구속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모든 권력을 임사홍과 함께 독점하면서 더욱 방탕을 일삼게 되지만 한편 두렵기도 하였다. 주위의 시선이... 그도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 아님을 잘 알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연산군은 신언패(愼言牌)제도를 시행한다. 처음에는 내시(內侍)들에게만 적용하였으나, 후에는 모든 신하들에게  적용하여 이 패를 목에 걸고 출입하라 지시하였다. 신언패(愼言牌)란 직사각형의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고, 줄을 달아 목에걸고 다니도록 한 것을 말한다. 이 신언패에는 다음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구시화지문      口 是 禍 之 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설시참신도      舌 是 斬 身 刀        혀는 몸을 베는 칼일지니

                          폐구심장설      廢 口 深 藏 舌        입은 다물고, 혀는 깊이 간직하면

                          안신처처뢰       安 身 處 處 牢        몸이 어느 곳에 있건 편안하리라.

 

 

 

 

힘은 있지만, 자신의 일에 잘 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어, 무언가 두려워 하는 권력자의 발상이었다. 이 정부가 미네르바를 구속하여 결국 무죄 석방되어 조롱거리가 된 것은 현대판 신언패(愼言牌)에 대한 권력자의 향수아닐까?  미네르바의 무죄 판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구속, 처벌하려 했던 시도와 발상 자체가 문제의 본질인 것을.... 미국 고기의 수입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여준 오만과 독선이 문제의 본질인 것처럼...

 

 

 

 

 

 

 

 

 

 

 

                               

                                  연산군의 생모 페비 윤씨(廢妃 尹氏) 사건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성종)보다도 12살이 많았으며, 시어머니인 소혜왕후(후일, 인수대비)와는 불과 8살 차이이었다고 하나 정확한 생년월일은 모른다. 1474년 성종의 정비(正妃)인 공혜왕후가 죽자, 당시 후궁인 숙의(淑儀)의 위치에 있던 윤씨가 왕비가 되었고, 그 해 연산군을 낳았다.

 

 

 

 

 

                                                                    손톱자국

 

 

 

 

 

평소에 질투와 시기가 심하였다고 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하기만 한 성종(成宗)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는 들르지도 않고, 다른 후궁에게만 출입하던 성종의 얼굴에 윤씨는 손툽자국을 남긴다. 이 것이 발단이 되어 1479년 폐비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 녀가 폐비(廢妃)가 된 이후 뉘우치는 모습을 보고, 또한 세자(世子)의 생모(生母)인 점을 고려하여 살려주자고 하지만,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후일, 인수대비)와 성종의 세번째 부인 정현왕후 등의 사주로 인한 궁녀들의 허위 보고로 1482년 드디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인수대비 등의 사주(使嗾)라 함은 윤씨의 처소에서 독약이 발견되었고, 이는 성종(成宗)을 죽이려 하였다는..)는 모함이었다.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연산군의 패악 사례(悖惡 事例)

                  

        

 

 

 

○ 주색(酒色)에 빠져 제사 지내는 일을 폐한 것. ○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승하며, 두번에 걸친 사화(士禍)로 수많은  대신들을 죽인 것. ○ 생모의 폐출에 관여하였다 하여, 成宗의 后宮인 귀인 정씨와 그 아들들을 죽인 것.특히 귀인(貴人) 정씨(鄭氏)를 직접 죽인 것. ○ 날마다 기생들과 더불어 음탕한 짓을 일삼고, 남의 부인들까지 거리낌없이 간통한 것. 특히 자신의 숙모인 월산대군 부인을 간통한 것. (그러나  월산대군 부인은 당시 60세에 가까웠다.) ○ 흥청(興靑)과 운평(雲平)을 만들어 국고를 탕진 한 것. (흥청,운평은 기생들의 관리 조직이었다.) ○ 도성 사방 100리(里) 이내에 금표(禁標)를 세우고, 민가(民家)를 철거하여 사냥터로 만든 것.           

○ 무리한 건설공사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것.○ 낙신(烙訊 ..단근질로 심문하는 것), 촌참(寸斬...마디마디 잘라 죽임),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시체를 꺼내어 목베임), 쇄골표풍(碎骨飄風 ..뼈를 빻아 바람에 날려 보냄) 등등 잔인무도한 형벌을 사용 한 것.○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생모 폐출을 주도하였다고 하여 욱박지르다가, 머리로 들어받아 그 충격으로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것. ○ 즉위 이후의 사초(史草 ..실록이 정식으로 편찬되기 전에 사관들에 의하여 작성된 초고)에 직언당론(直言當論)이 있으면 모두 삭제하게 한 것.

 

 

 

 

 

  

 

 

 

 

 

 

 

 

 

 

 

                       미사춘연류        眉 似 春 娟 柳        눈썹은 봄 날의 버들가지

                       안여노악방        顔 如 露 愕 芳        얼굴은 이슬 맺힌 꽃송이

                       주순개호치        朱 脣 開 皓 齒        붉은 입술에 하얀 치아 드러내면

                       능단탕부장        能 斷 蕩 夫 腸        바람둥이들 애간장을 끊으리라

 

 

                                                  

 

 

 

  

 

 

 

                                       연산군의 치적(治積)과  이해하기

 

 

 

 

 

 

조선의 2대 폭군,광해군(光海君)과 연산군(燕山君)..그러나 광해군은 정치적 역학관계(力學關係)에 따는 희생에 의한 측면이 강하여 재 조명 받을 이유가 충분하지만, 연산군의 경우 아무리 "연산군일기"의 기록이 객관성을 잃었다 하더라도 재조명에는 주저된다.

 

과장(誇張)과 왜곡(歪曲)은 있을지언정 그가 패륜아(悖倫兒)이었슴을 부인 할 수는 없다. 왕권강화를 위하여 불가피한 연산군의 선택이었다고 재조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도 또 하나의 다른 왜곡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연산군은 19세에 즉위한다. 즉위 초에는 성종대(成宗代)의 평화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국가는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연산군 초기 4년은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頹弊)풍조와 부패상(腐敗狀)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즉위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道)에 암행어사(暗行御使)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었으며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하여 별시문과(別試文科)를 실시하여 33人을 급제시켰으며,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지방의 안정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학문과 문화를 중시했지만

 

 

 

 

 

문화정책에서도 文臣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주어 학문에 전념케 하였으며, 국조보감을 편찬하여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또한 그 자신 감성도 풍부하여 시(詩)에 능하였다. 학문의 깊이가 없으면 쓰지 못하는 칠언절구(七言節句)이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모두 불태워졌지만, 연산군일기에 그의 詩 100여편이 남아있는 것이다. 

 

 

아버지 성종(成宗)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파(士林派)를 중용하고, 왕권(왕권)을 강화하였다. 연산군시대에 이르러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은 깊어지고, 사림파의 왕에 대한 견제도 여전하였다. 왕권 강화를 위하여 훈구파의 도움이 절실하였지만, 훈구파의 부정부패에 대한 사림파의 비판으로 그들도 운신의 폭이 넓지는 못 하였다. 

 

 

장자(長子)로서, 정식의 세자(世子)로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의 정통성(正統性)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은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 정통성을 근거로 왕권 강화를 이하여 노력한 것이다. 조선은 장자승계(長子承繼)의 원칙이 있었지만, 문종(文宗), 단종(端宗)을 제외하고는 큰아들이 왕위를 물려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定宗, 太宗, 世宗 그리고 世祖 또한 연산군의 아버지인 成宗도 한명회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힘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정통성(正統性)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은 이해 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즉위 4년 후, 1498년 무오사화를 일으킨다. 갑자기 폭군(暴君)으로 변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결과적으로는 무오사화를 통하여 사림세력들을 제거하였고, 갑자사화를 통하여는 훈구세력과 남아 있는 사림파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권력을 독점한다. 이 것이 왕권(王權)의 강화는 아닐 것이다. 그의 패륜아적인 여러 패악(悖惡)들....그 동기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용질임신십재회      庸 質 臨 臣 十 載 回        용렬한 자질로 위에 있은지 10여년

     미부관정괴난쟤      未 敷 寬 政 愧 難 裁        너그러운 政事를 못하니 부끄러움 금할 수 없네

     조무면필사종사      朝 無 勉 弼 思 宗 事        조정에 보필하고, 종사를 생각하는 자 없으니

     도자충오핍덕회      都 自 沖 吾 乏 德 恢        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려

 

 

 

 

연산군은 이러한 시(詩)를 지으면서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 승정원에 내려 보내어 답시(答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자신의 실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하들과 교감하여 詩的 토론을 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산군 3년에 지은 시(詩)이다. 초기(初期)에  연산군은 이러 하였다.

 

 

 

 

 

                                          

                                        

 

 

 

                                             장녹수 ... 실록의 기록

 

 

 

 

 

 

실록에서 장녹수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이 황음(荒淫)에 빠져 들기 시작하던 연산군8년(1502)이다. 같은 해 11월25일,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이었다. 제안대군은 예종의 외아들로 원칙대로라면 왕위에 올라야 하지만, 한명회의 계략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 주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장녹수는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다.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했으므로 시집을 여러번 갔다. 그러나 제안대군 집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창기)가 되었다. 특히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가 30여세 이었는데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연산군)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을 맞아 들였다. 이후 녹수를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하였다. 얼굴은 중인(中人)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런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창고의 재물을 모두 그 집으로 보냈고, 금은옥주(金銀玉珠)를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 전답, 가옥 또한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다 하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賞 주고 罰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

 

 

 

훗날 반정(反正)이 일어나 장녹수와 같은 날 참형을 당하게 되는 전전비(田田非)도 연산군으로 부터 장녹수 못지 않은 총애를 받았다. 게다가 장녹수와 전전비는 인사(人事) 청탁을 받고서 공공연하게 인사에 개입한 번에서도 비슷했다. 반정의 거사가 일어나기 직전인 연산군 12년 8월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나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다가 갑자기 인생무상을 노래했다. 이 때 나인들은 몰래 비웃었지만 장녹수와 전전비 두 사람만은 슬피 흐느껴 울었다, 이 때 연산군이 말했다. " 지금 태평한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 " 그러나 변고는 일어났다. 결국 9월2일 장녹수, 전전비 두 숙용과 숙원 김귀비는 참형에 처해졌고, 가산(家産)은 모두 적몰 당했다.

 

 

 

 

 

 

                      

                      

 

 

                                                       흥청망청

 

 

 

 

원래 조선에는 "양기"라고 하는 기생들이 있었다. 연회 때마다 춤과 노래를 맡아하는 전문 예술인들로 3년에 한번씩 선발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을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채홍사, 채청사라는 벼슬을 만들어 전국에 파견하여 기생 2,000명을 뽑아 흥청(興靑)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관리하게 하였다. 

 

 

계급에 따른 칭호도 흥청, 운평, 지과, 계평 등 135종류나 되었다, 제 1이 천과흥청(天科興靑),그 다음이 지과흥청(地科興靑)이었다. 조선은 왕의 나라이므로 백성이든, 풀 한포기이든 모든 것은 왕의 것이다..라는 군주론을 펼치며, 엄청난 수의 여인들을 관리하느라고 창덕궁 안에 여러 채의 건물을 지었으며 (7院3閣), 흥청들이 사용할 그릇이 부족하다고 백성의 가게에서 그릇을 강탈하기도 하였다.  흥청들에게는 막대한 재물이 하사되었고, 여기서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겼다.  또한 "흥청망청"이라는 가마를 만들어 봄이 되면 뚝섬으로 나아가 온갖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여기서 흥청망청이란 말의 유래가 된다.

 

 

 

 

 

 

 

 

 

 

 연산군 묘 앞에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의 묘가 있다. 조씨는 연산군의 후궁이라는 설, 태종의 후궁이라는 설, 연산군을 끝까지 모셨던 궁인(宮人)이라는 설..등등 그 관계가 분명치 않다.

   

 

 

 

 

                                                    연산군의 최후

 

 

 

 

 

 

 

12년 간 왕위에 있었던 연산군이 여자와 사치, 향락을 일삼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정치를 잘했던 통치자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모정(母情)에 굶주린 정신장애자로 강조되어 공정하게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조선의 절대 왕권은 약해졌고, 성공한 쿠데타에 맛들인 신권(臣權)이 입맛에 안 맞으면 왕을 갈아치우거나 독살(毒殺)하는 일이 벌어진다. 신권(臣權)이 커지면서 기드권을 이루자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매관매직을 일삼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로 인해 백성들의 고초가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중종반정은 민초(民草)들과 상관없는 지배층의 정권 다툼이었고, 연산군은 실패한 왕이었을 뿐이다.     

 

 

 

                                                     연산군의 최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은 강화도(江華島)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 9월24일 폐세자(廢世子)와 창녕대군, 양평군 등은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주장에 따라 사사(賜死)되었다. 반정(反正)이 일어난 이틀 후부터 반정세력들은 중국에 보낼 사신에게 왕이 바뀐 연유를 구하는 각본을 짜기 시작하였다. 9월 21일 병으로 인해 연산군이 중종(中宗)에게 양위하였다는 가본이 완성되었다. 다음은 중종실록 1506년 9월21일의 기록이다.

 

 

만약 전왕(前王 ..연산군)의 병(病) 증세를 물으면 어릴 때부터 풍현증(風眩症)이 있었는데, 세자가 죽은 뒤 애통과 상심(傷心)이 정도를 지나쳐 전의 증세가 다시 도져 심신(심신)이 안정되지 못하며, 공연히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혼미(渾迷)하고 현기증이 나며 방 안에 깊이 거처하면서 창문도 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만약 세자(세자)의 병 증세를 물으면 창진(瘡疹)으로 요사(夭死)하였다고 대답한다. 만약 전왕(前王)의 소재를 물으면, 별궁에 있다고 대답하나. 만약 전왕의 아들이 몇 사람이냐고 물으면 다만 딸 하나가 있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대답한다.

 

 

폐세자에게 아직 사약을 내리지 않은 때이지만, 이미 죽이기로 계획한 것이이 기록에서 드러났다. 이로부터 이틀 후 폐세자는 사약을 받고 죽는다. 반정 세력의 시나리오는 치밀하였고, 연산군은 상국이 중국에서 쿠데타의 전모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어야 한 존재이었다.

 

 

연산군이 역질(疫疾)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이 괴로워 한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1506년 11월 7일, 중종(中宗)은 의원(醫員)을 보내라고 지시하였으나 다음 날인 8일 ' 연산군이 6일 죽었다 '는 소식이 들어온다. 유배된지 겨우 두 달만에 30세 젊은 나이의 연산군을 죽음으로 몰아간 역질(疫疾)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역질의 정체는 12월9일의 기록에서 드러났다. 언제 장사를 지냈는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으나 왕자의 예에 따라 3달 동안 장사를 치르게 했으니, 장례를 마쳤을 때거나 아직 땅에 묻지 않았을 시기이었다. 

 

 

사위사(辭位使) '김응기'와 승습사(承襲使) '임유겸'을 중국으로 보낸 후인 12월 9일, 혹여 중국 사신이 와서 폐주(廢主)의 일을 물을 경우를 다시 대비하려는 논의가 벌어졌다. 공조참의 '유숭조'가 중종에게 ' 폐주가 교동에 내?겨 죽었으니, 만약 중국에서 와서 그 이유를 묻는다면 미리 의논하여 대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아뢴다. 연산군을 내?은 이유를 그럴듯하게 조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숭조'는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지난날 총애를 받지 못한 뭇 계집은 안에서 고혹하고, 아첨하는 자는 밖에서 비위를 맞춰 임금을 도(道)로써 인도하지 아니하였기에 크게 인시을 잃었고, 거의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연산군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민심이 쏠리는 중종(中宗)에게 스스로 양위(讓位)하였다는 작위된 내용이다. 그리고 유배된 폐주(廢主)에게 찬에 정성들여 몸을 봉양하였다 .. 시종고 여자를 보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 호위까지 붙여 불의의 변을 막게 하였고 옷과 물품을 들고 연산군을 찾아가는 사람이 줄을 늘어설 만큼 보살폈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도 연산군이 병으로 죽자 중종(中宗)이 밥도 먹지 않고 애통해 하였다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중국으로 보낼 모범답안인 소설 여기서 연산군(燕山君)이 독살(毒殺) 당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발언이 나온다.  복어(服御), 물선(物繕)을 받들고 가는 자가 줄을 잇게 하였으되, 불행히 학질(虐疾)에 걸려 죽으니, 전하께서는 애통하고 슬퍼하여 수라를 거두고.....  

 

 

학질(虐疾)이란 무엇인가. 학질모기에 물려 발병하는 말라리아를 학질이라고 한다. 한방에서 말라리아을 학질이라고 하며, 이는 여름철에 걸리는 병이다. 연산군이 죽은 것은 11월 6일이고, ㅅㄹ록은 음력으로 기록하였으니, 대충 12월 초순이라 보면 추운 겨울에 돌연 나타난 학질모기에 물려 병에 걸려 죽었다는 말이다. 학질모기에 걸리면 1주일에서 2주일 정도 병원체 잠복기간이 지난 후 증세가 나타난다. 학지에 걸렸다고 해도 젊은이가 하루 이틀 사이에 죽지는 않는다. 학질의 특징은 하루아침에 돌연 급사(急死)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다. 

 

 

겨울철에 학질(虐疾)이라는 터무니 없는 병으로 젊은 연산군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었다는 기록은, 폐세자와 왕자들을 성급하게 죽여버린 반정세력들이 눈엣가시인 연산군을 독살(毒殺)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다음 해인 2월 15일, 연산군이 병으로 아우에게 양위(讓位)하니 허락해 달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중국에 갔던 김응기와 임유겸이 돌아왔다. 연산군이 죽기 전까지 허락해 줄 수 없다는 중국의 답변을 가지고 돌아온다.

 

 

연산군을 이미 죽인 후라 이에 걸맞는 핑계를 대면 될 일이었다. 어쨋든 중종(中宗)과 반정세력들에게 연산군은 죽어줘야 할 존재이었던 것이다. 그날 김응기와 임유겸은 조선 출신 내시(內侍)들을 언급하며 뇌물을 주자고 청하고 중종(中宗)은 이를 허락하였다.         

 

      

 

 

 

 

 

 

 

 

 

 

 

 

                      

연산군은 부인 '신씨'와 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금슬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있다. 연산군이 죽을 때 남긴 말은 '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 '는 전언(傳言) 밖에 없었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 출생한 7남1녀 중 살아남은 아들은 폐세자 '황'과 창년대군이다. 연산군이 폐위되자 22일 만에 폐세자는  10세의 나이로 유배지 정선에서, 창녕대군은 그 나이 5세에 황해도 수안에서, 양평구는 제천에서 각각 사사(賜死) 당하였다. 서자(庶子) 이돈수도 그날 사약을 먹고 죽었다.     

 

 

 

 

                                                    연산군의 자손들

 

 

 

 

1506년 9월 24일, 영의정 '유순',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 청천 부원군 '유순정 등 여러 재추(宰樞) 1품이상이 빈청에 모여 왕자들을 죽이자고 하자, '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 '는 중종에게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은 우리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차마 못하겠다고 하면 안된다고 거의 협박수준으로 왕에게 압력을 가해 일어난 비극이었다. 폐세자 '이황'이 죽자 중종은 장례라도 후하게 치러주자고 하였으나, 공신들은 이마저 ' 관곽이나 써주면 후한 것 '이라며 묵살하였다.

 

 

반정 세력들이 나이 어린 세자와 왕자들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발빠르게 사약을 내려 죽여버린 일은 조선시대에서 유래 없는 사건이었다.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世祖)도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사건이 일어나자 4개월 만에 사약을 내렸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겨난 광해군(光海君)은 천수(天壽)를 누렸다. 광해군의 폐세자는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들키자 자살한 것이지 사약을 내려 죽은 경우가 아니었다.

 

 

연산군이 병으로 아우에게 양위한다는 구실을 댔으니, 세자가 살아 있으면 중종(中宗)은 왕위를 지킬 수 엇었고, 반정세력의 크데타도 들킬 우려가 있었다. 폐세자와 왕자들을 황급히 죽여버린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젊은 연산군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왕자들의  죽음으로 연산군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다. 

 

 

'신씨'는 연산군과는 달리 반정세력에게도 현숙하고 바른 왕비이었다고 인정을 받았다. 연산군이 죽어 강화도에 묻히자 신씨는 1512년 현재 자리로 이자하게 해달라고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중종은 죽은 형을 위하여 콩과 쌀 100석, 면포 150필, 정포 100필, 참기름 2석 등을 내려주고 이장(移葬)을 허락하였다.              

 

 

 

 

 

     

                                  내시 김처선                         內侍 金處善 

 

 

 

 

 

 

연산군과 함께 내시 김처선도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집을 돕고자 스스로 내시가 되었다고 하는데, 기록은 없다. 그가 처음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단종 1년인 1453년이다. 실록은 다만 김처선을 유배에서 풀어 주라는 왕명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유배의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 날이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란의 사흘 후인 것으로 미루어, 김종서 등의 미움을 받아 유배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이듬해에 단종 복위운동의 금성대군에 연루되어 결국 관노(官奴)가 되었다. 그러다가 3년 후에  官奴에서 해방되고, 다시 3년 후에는 3등공신으로 책봉된다. 아마 이 사이에 내시로 복귀한 듯하다. 

 

 

그러나 김처선은 비가 온다는 이유로 왕을 수행하지 않아 곤장을 맞거나, 왕의 여자인 궁녀를 건드리고, 술에 취하여 큰길에 누워 있었다는 죄로 곤장 100대를 맞는다. 그런가하면 世祖의 후궁이 최연소 영의정 기록 보유자인 귀성군 "이준"에게 반하여 연애편지를 보내게 되는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한다. 세조실록에는 김처선때문에 골치 아파하던 기록이 몇 군데나 있는 것이다.

 

 

 

 

 

 

 

 

 

 

 

 

 

김처선을 신임하였던 성종(成宗)이 죽자 김처선은 성종의 능(陵)을 돌보는 시능내시(侍陵內侍)로 임명된다. 역시 성종의 배려이었다. 이렇게 연산군 초기에는 시능내시로 있으면서, 3년상이 끝난 후 궁궐로 복귀한다. 그리고 연산군 10년에 또 무슨 일로 곤장을 맞고 하옥 당한다. 그리고 이듬해 연산군은 김처선과 그의 양아들 이공신을 죽인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그저 죽였다는 기록만 있는데, 자세한 기록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군이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번 정성을 다하여 간(諫)하였으나,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감쳐두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김처선은 "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는 말을 남기고 입궁(入宮)하여 연산군에게 거리낌없이 말하기를 " 늙은 놈이 네분 왕(王)을 모셨고, 책을 조금 읽었지만 고금(古今)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고 하였다.  

  

 

연산군이 화를 못 참아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비뼈에 맞히자 ,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두려워 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왕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더 쏘아 김처선을 땅에  넘어트리고..땅에서 일어나 걸어 다니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김처선은 王을 쳐다보며 전하께서는 다리거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연산군은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김처선은 죽을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김처선을 죽인 후에

 

 

 

 

 

연산군은 김처선의 가족을 모두 죽이고, 그의 집은 연못으로 만든다. 그것도 부족하여 김처선의 처(處)와 선(善)에 대한 사용 금지 명령을 내린다. 모든 문서에서 사용하지 못 함은 물론 24절기의 하나인 처서(處署)도 조서(阻署)로 고치라는 명을 내렸다. 연산군을 비난하는 백성의 상소가 올라오자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고, 처(處)를 사용한 과거의 급제도 취소한다. 성몽정이라는 사람은 그 글자를 사용하였다고 하여 연산군의 국문을 받기도 하였다.

 

  

연산군이 ?겨나고, 일부 신하가 김처선을 포상할 것을 주장하나, 中宗은 술에 취해 한 말에 불과하다고 이를 허락치 않았다. 김처선이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의 연산군 조치나 화살에 맞으면서도 直言을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면 평소의 소신을 가감없이 말 한 것 같다. 연산군에 아부, 아첨하다가 반정(反正) 당일 얼굴 한번 비추거나 ,줄을 잘서서 공신이 된 대신들보다는 김처선이 더 강직하고 용기있었다. 김처선의 直言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것은 1757년 英祖代이었다. 그가 죽은지 253년만이었다.

 

 

 

 

 

 

 

 

 

 

 

                              

                                             연산군시대의 세계 역사

 

 

 

 

 

연산군시대의 유럽은 콜럼버스, 바스코다가마 등의 탐험에 의하여 아메리카대륙, 인도,남아프리카 등에 상륙하여 신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준비하던 시기이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제로 등의 "최후의 만찬 " "다비드상 " 등의 작품을 ?아내던 시기로, 이탈리아에서는 소위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또한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여, 세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연산군이 묻혀 있는 이 곳, 도봉구 방학동은 옛날부터  파주윤씨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연산군의 묘를 강화도에서 이 곳으로 옮긴 것도 아마 이런 연유가 작용된 것은 아닌지...그 생모가 파주윤씨이었으므로... 당시의 샘물이 위와 같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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