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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6장에서도 계속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1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3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4 이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은밀한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 자선행위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는 경건한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선을 베풀 때는 칭찬을 받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과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5~8절을 보겠습니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자선을 베풀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 중에는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러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진솔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기도할 때는 오래 동안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지 말고, 꼭 필요한 말만 간결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기도할 때 시간에 의미를 두고 기도하는 분들이 많은데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해야 할 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9~13절을 보겠습니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기도하라”며 예수께서 친히 알려주신 주기도문입니다. 성서에 기도할 때의 태도를 지적한 말씀은 많지만, 이렇게 기도의 내용을 직접 알려주신 말씀은 주기도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이고 후반부는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십계명과 구조가 같습니다. 십계명도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후반부는 사람에 관한 계명이었습니다. 율법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하는 구조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경천애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1997년에 개정된 개역개정판부터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제대로 되어 있는데, 그 이전의 번역본까지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어법에 맞지 않게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초기 한글번역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참여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말 주어에 붙는 조사에 ‘이’와 ‘가’가 있습니다. 주어에 받침이 있으면 이가 붙고, 받침이 없으면 가가 붙습니다. 그러면 ‘나라’ 라는 주어에는 받침이 없으니까 ‘나라가’ 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문법체계를 잘 모르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격조사에는 ‘이’라는 조사가 붙는다는 것만 생각하고 ‘나라’라는 주어에다 ‘이’라는 주격조사를 붙여서 ‘나라이’라는 어색한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하다가 발음이 어색하니까 ‘나라에’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에 임하옵시며’ 라고 발음하면서 대부분이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임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찾아와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즉 우리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 사회를 바꾸어달라는 기도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예수 믿고 천국가면 된다.’ 라는 생각은 비복음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본문의 예수께서 명확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그러니까 곳간에 곡식이 가득 차 있는 사람도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음은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할 테니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는 탄원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당시의 신앙관을 반영합니다. 공중을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과 궤를 같이 하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원래 주기도문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는 신앙고백이 덧붙여졌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주기도문에서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지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15절을 보겠습니다.
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이런 조건을 달아놓은 이유는, 누군가에게 용서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용서하며 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서 16~18절을 보겠습니다.
16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말아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보기 싫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라.
18 그래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데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금식할 때는,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고 오히려 외모를 깨끗이 잘 단장하랍니다. ‘나 이렇게 금식 열심히 하는 사람이오’ 하고 자랑거리로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진지하게 대면하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본문은 금식할 때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지 금식을 꼭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은 금식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금식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면, 예수님은 당시 민중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겼던 분이고, 금식은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도 많았기에, 그들이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분하지 못해서 복음서에 금식에 관한 본문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둔갑한 것 중에는 종말론도 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은 종말론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종말론도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착각해서 복음서에 기록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금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움이 되는 분들은 하셔도 좋지만, 금식에 메일 필요는 없습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 무리하게 금식하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도움이 안 되고 건강도 크게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19~21절을 보겠습니다.
19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랍니다. 이 말씀을 헌금 많이 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 교회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이고, 깨끗하고 바르게 예산을 집행하는 교회라면, 일정부분 동의해줄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과 자기 교회의 증축만을 생각하며 그런 설교를 한다면 그건 오히려 재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와 하늘을 동일시해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곧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는 해석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술수에 불과합니다. 이웃과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큰 의를 이루기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이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입니다. 좀 길지만 재물에 대해 계속 이어지는 본문을 보겠습니다. 24~34절입니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28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32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먹고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결해주실 것이니 돈에 매이지 말고 오롯이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보면, 이 말씀에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에는 치열한 경쟁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세계도 마찬가지구요.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앞에서 동물이나 인간이 가진 힘은 한없이 나약할 뿐이라서 엄청난 비극에 집단적으로 내몰릴 때도 많습니다.
21세기 들어 지진이나 쓰나미로 한꺼번에 수만 명이 죽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하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지구마을 곳곳에서 음식과 물이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인권단체들의 호소를 거의 매일 TV를 틀 때마다 봅니다.
그 아이들이 악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을 일일이 먹여주고 입혀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고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라고도 묻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에 일일이 간섭하시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 같은 분이 아니라, 우주에는 우주원리를, 자연에는 자연법칙을 주셔서, 그 섭리에 따라 운행되도록 하신 ‘궁극적 실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시고, 하나님만 잘 믿으면 만사가 잘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세계에 대한 바른 진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소중한 이성과 판단력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으니,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이치를 잘 깨달아,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라고 현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천년 전 고대인들이 당시의 세계관 아래서 생각하고 기록한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본문은 이제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도 성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때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고백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를 정직하게 또한 합리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이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메시지는, 의식주 문제도 중요하고 잘 관리해야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