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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상룡 선생, 동심의 화엄경『소나무골 아이들』
겨울 방학 내내 많은 시집을 읽고나니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하였다. 특히 이상룡 선생의 동시집『소나무골 아이들』은 쉬우면서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치 어린 시절, 시골의 고향 친구들 같은 아이들을 만난 듯 하였다. 이상룡 선생이 직접 찍은 흑뱍 사진은 시와 잘 어울렸다.
선생은 1934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1975년『시문학』에서 시조 추천을 받았다. 동시집 『소나무골 아이들의 서문은 이원수 선생이 쓰고 발문은 이재철 선생이 쓰셨다. 』
내 삶이 어렵고 힘들 때에 이 동시집을 읽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기도 하였다. 시골, 고향의 정서가 글 속에 녹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서울의 [사계문학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하던 차였다. 이호관 선생이 사무 일을 맡아 보고 있었다. 나도 입회하여 활동을 하던 차였는데 이상룡 선생의 이름도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이호광 선생은 얼마 안 있어 유명을 달리하였기애 안타까움이 컸다.
이상룡 선생은 사계문학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으로 계셨다. 회보에는 아동문학가와 시조시인으로 소개하였다. 임원 중의 또 한 분은 『아리랑』편집국장이던 이형기(李亨基) 선생이었다. 1976년 『아리랑』에 시 한편을 발표하였다. 아마 이형기 선생께서 게재해 주신 덕분인 같았다. 사계문학회 회장은 황헌필 선생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참 따듯하고 정겨운 문학회였던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문학회의 체질을 몸에 습득한 것 같았다. 후일 강릉의 지역에서 [한울림문학회]와 [강호시조문학회] 창립을 한 것도 이런 정신을 배웠기에 가능했던 것 같았다.
1976년 시작된 나의 문학 활동은 [사계문학회]에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 보폭을 넓혀 나가게 되었다. 강석관 시인이 회장을 맡을 당시 사무국장이 이호광 선생이었다. 나는 몇 번 동인회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면 김지향 시인이 회원들의 작품 평을 해 주셨다.
이호광 시인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간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소찬 하시고 말았다. 그때 문병도 못 간 일이 내내 후회로 남았다.
이호광 시인을 위한,
추모시
남진원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한 형이여
한 평생 문학과 함께 젊음을 태워오신
형이여,
고뇌의 숲을 지나면서
청청한 시의 향기를 피우시고
허허로운 마음으로
생명의 밭을 경작하시던
그 빛나는 삶이여
젊은 날 사계문학의 동지로
크신 음성 울려 퍼지던 날이
어제런 듯 한데
하마 당신은 가셨구려
아직 새벽같은 이 땅에
형의 시는 우리를 깨우는데
유명을 달리한 지금
너무도 아픈 슬픔의 구렁에 빠집니다
님의 맑고 투명한 시혼은
바다처럼 푸른 울림이 되어
이 땅에 자랄 것입니다
형이여, 부디 영면하소서!
( 2004년 5월에)
문학평론 – 이상룡 시인의 동시 감상
- 동시집 『소나무골 아이들』을 중심으로 -
남진원
1. 감상을 하게 된 배경
이상룡(1934 ∼ )은 경북 청송 출생으로 2007년에 주왕산 국립공원 탐방안내 옆 잔디공원에 시비제막식이 있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이상룡 시인의 활동 상황을 알아보고 싶던 차였다. 인터넷에는 그의 시비 제막식 기사가 있었다. 시비 제막식에 기록된 시조를 읽으면서 고향의 주산인 주왕산에 대한 사랑이 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시조를 읽으면서 이상룡 시인을 만난 것처럼이나 반가웠다.
그간 이상룡의 동시집 [소나무골 아이들]을 읽고 거기에 대한 감상과 해설을 곁들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노드롭 프라이가 말한 원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쓸 때 제일 처음 만난 동시집으로 내게 영향을 깊이 준 책이기도 했던 것도 큰 이유이다.
주왕산 국립공원에 세워진 그의 시조‘내 고향 주왕 산색’은 불교적인 색채를 띠면서 주왕산의 이미지를 그리는데 힘쓴 작품이었다. 그는 사진 작가로서도 큰 명성을 얻은 것 같았다. 또한 사진을 찍으면서 그의 의식 심층에는 고향의 이미지와 같은 원형적인 심상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 고향 주왕 山色
(시비에 새겨진 시조)
기암봉 말이 없어 자하성도 외롭구나
주왕굴 낙수 소리 하서린 이끼 씻는데
암자는 천고의 적막 두드리는 목탁소리
사계절 이어지는 낭랑한 예불 소리
동자승 불을 밝힌 그날의 새벽길을
나그네 불심에 젖어 산빛 밟아 내린다.
시인 이상룡은 일본 아가베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청송과 대구에서 교편생활을 하였고 사진 연구소, 출판사 경영, 색동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경향신문 춘추문예에서 동시조가 당선되었다. 시조집으로 『세월의 나이테』, 『솔멧골 이야기』등이 있고 1975년 낸 동시조집으로 『소나무골 아이들』(세종문화사)이 있다. 호는 송산(松山)이다.
그가 살던 고향 마을은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소나무를 매우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호를 소나무를 넣어 松山이라 한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동시집도 『소나무골 아이들』이다. 마을에는 소나무들이 많아 ‘소나무골’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모양이다. 이 동시집에는 동시와 동시조가 함께 실려 있다.
나는 1975년 문학 창작에 관심을 보이면서 제일먼저 구입한 책이 시집이었다. 당시 강릉에는 두 개의 큰 서점이 있었는데 삼문사와 삼일사였다. 그곳에 있는 동시집을 모두 샀다. 거기에 있던 책 중의 하나가 이상룡이 지은 동시집 『소나무골 아이들』이었다.
이 동시집 속에 있는 작품을 읽으면서 마치 평화로운 고향에 있는 듯하였다. 사진 역시 어떤 신비함과 자연적인 힘을 있었다. 사진 속에 드러난 아이들의 모습 또한 어린 날의 내 모습이었다.
내가 평생 동안 아름다운 마음의 평화로움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은 흔하지 않다. 이상룡의 동시집 『소나무골 아이들』은 마음의 평화로움이 있는 그런 책이었다.
그가 펴낸 『소나무골 아이들』 ‘책 끝에’ 쓴 글을 보면 ‘소나무골’은 고향 ‘청송’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책을 펴내는 그의 겸손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소나무골은 곧 내 고향 청송(靑松)을 말하며 요기 나오는 아이는 나 자신이다. 그 언제부턴가 외로울 때면 책을 벗하였으며 울적할 때면 펜을 들곤 하여 그저 취미로 써 온 것을 버리기가 아까워 모아 두었다가 이번에 나를 아끼는 주위 선배님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보았으나 세상에 내어 놓기엔 너무 부끄러워 주저하다가 처녀가 선 보이는 심정으로 내어 놓는다.
이제 이 못난 책을 내는데 머리글을 주신 이원수 선생님, 꼬리글을 써 주신 이재철 선생님, 김종상 선생님 또한 책을 내어 주신 이종기 사장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 조그마한 책자를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바칩니다.
1975년 7월 15일
이 당시 한국아동문학가 협회 회장은 이원수였고 이재철씨은 『이동문학평론』발행인이었고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 분과회장이었다. 이상룡이 이 두분을 머리글과 꼬리글에 놓음으로서 한국 아동문학의 두 거물의 글을 동시에 받은 것이다. 이로써 이상룡은 문단에 나옴과 동시에 동시집을 발간한 셈이다.
이재철은 글 끝에 사진작가인 줄만 알았는데 동시를 쓰는 시인임을 알고 놀랐다는 말을 하였다. 또 겉으로는 도시에 사는 깔끔한 성격의 신사로만 알았는데 글을 읽고나서 구수한 시골정이 가득한 사람임을 새롭게 알았다고 하였다. 자연의 순수성도 자굼속에 깃들고 있음을 알고 놀라워했다. 또한 글이 아직은 미숙하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오직 바라는 것은 꾸준한 그의 정진과 매미의 탈바꿈’이란 말로 대신하고 있다. 실제로 몇몇의 작품들에서는 그런 징후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농촌의 서정과 어린이에 대한 사랑, 고향의 서사적인 내용을 시로 형상화한 점은 아주 높이 살만하다.
책 머리글은 이원수가 적었다. 머리글에서도 보면 이상룡 동시의 특징을 어느 정도 그려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인의 시는 반들반들 빛나게 닦은 구슬같은 것이요, 누구나 좋아가지던 강변의 예쁜 잔 돌멩이나 바닷가의 빛깔 아름다운 조개껍질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원수는 농촌의 정경 속에서 소박한 우리 겨레의 마음을 노래한다고 하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내가 이상룡의 작품에 매료한 것은 바로 직접적인 화법으로 농촌의 소박함과 정겨움을 주는 그런 모습 때문이었다.
다음 글은 책 꼬리에 붙은 이재철의 발문이다.
책 꼬리에
이재철
내가 이상룡 시인을 안 지도 그럭저럭 10년이 넘지만, 이번에 그의 동시집 초고를 함께 읽고 뽑으며 이제사 그를 옳게 알은 것 같다.
그것은 날카로운 인상 속에 정작으로 구수한 시골 정이 가득하고, 도시적인 깔끔한 몸차림에 자연의 순수성이 깃들고 있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경북에서도 산골인 청송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한때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대학원에서‘광고사진 계획과 표현에 관한 연구’란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국내외 사진전에 여러 차례 당선한 사진 작가 생활을 오래도록 해 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유능한 사진작가로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에 가리워져 참 어린이관을 가진 좋은 동시인임을 종종 잊어버리기 쉬웠던 것이다.
그의 동시와 동시조는 이른바 실험파에 속하는 전위시도 아니요, 또 도시적 감각성만 뒤쫓는 그런 사이비 시도 아니다. 그리고 말재주의 농간에 익숙한 처세꾼의 시도 아니요, 장난질로 어린이를 우습게 하는 시도 아니다.
도시의 빌딩 위 밤하늘에 기하학적 재롱을 부리는 별은 그에게는 없지만, 산골 옹달샘에 잠긴 맑고 깨끗한 별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또 사진작가적인 초점과 기교가 형식미를 돋구는 대신, 그에게는 때 묻지 않고 마음 가난한 어린이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것이다.
( 중략)
우리는 이제 많은 한국의 어린이 – 특히 농촌 어린이를 사랑하고 생각할 줄 아는 한 사람의 동시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직 바라는 것은 꾸준한 그의 정진과 매미의 탈바꿈 그것이다. 축하해 마지 않으면서.
1975년 7월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 분과 회장)
**제자는 ‘봉선화’ 동시조로 유명한 초정 김상옥의 글씨이다.
2. 작품 보기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1. 소먹이는 아이
2. 누굴 닮았을까
3. 산새
4. 산골동네
4부로 나눈 글에서 ‘산골동네’는 모두 동시조 작품이다.
이상룡 동시의 가장 큰 힘은 ‘정서情緖의 환기력喚起力’이다. 나는 어릴 때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한다. 나는 고향에서 생활한 12년의 활동은 내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늘 샘물처럼 솟아나는 힘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힘을 『소나무골 아이들』을 통해서 다시 환기하는 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먼저, 작품과 관련하여‘가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마을에 한동안 가뭄이 들면 논과 들이 바작바작 탈 뿐만 아니라 농부들의 마음도 타 들어간다.
개울에는 바닥이 드러나고 논바닥은 쩍쩍 갈라져 곡식은 타 죽기가 일쑤이다. 지금처럼 저수지나 댐을 많이 만들어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 옛날의 실태이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마을 어른들끼리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가 뭄
목마른 땅을 딛고
시든 나뭇잎
하늘 한쪽에
두어 송이 솜구름
쏟아져 내리는 햇살
무서운 불화살
마당에 물을 뿌린다
자꾸자꾸
물을 뿌린다.
(1959. 8.)
이 작품이 1959년에 창작되어진 걸 보면 당시 작가의 나이가 26세였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지은 동시이다.
나는 1960년 대 여름을 보낸 기억이 난다. 그때도 불볕 더위가 심하여 더위를 식히는라 마당에 물을 연신 뿌렸던 기억이 난다. 하늘 한쪽에 두어 송이 구름이 있어서 더욱 열기를 뜨겁게 하는 여름 하늘이었지. 햇살은 무서운 불화살이라는 표현이 실감난다. 나는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기에 더워도 더위를 잘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더우면 앞 냇가에 가서 첨벙거리다 보면 한나절이 휘익 지나고 뉘엿뉘엿 석양이 드리우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곤 했으니까. 저녁 무렵이면 멱도 감았기에 몸이 개운하고 서늘하여 기분은 최고였던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노는 일도 피곤하였던지, 잠이 소르르 왔다. 그러면 다음 날 새벽 푸른 매미소리에 잠이 깨곤 하였지.
가뭄이 들 때에는 논에 물을 대지 못하여 마을 어른들이 다투는 일도 보았다. 가뭄이 지속되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것 같다.
이번에는 산골 마을의 겨울밤 이야기와 눈 내리는 산마을의 이야기이다.
동시 [두견새]를 읽으면 깊어가는 겨울밤, 초가마을의 풍경이 어려 온다. 겨울밤, 달빛에 젖은 산골짜기는 바람도 앙상한 겨울 숲에 잠이 들었다. 초가 봉창에는 깜박이는 등잔불, 초가집 안에는 누가 잠들고 있을까? 어느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밤새의 울음소리. 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리움에 잠기는 밤이다.
눈오는 날
눈이 내린다
초가 지붕이 하이얗다
쌓이는 눈송이는
하이얀 옛 이야기
산골 마을에 꿈이 익는다.
짚자리 화롯가에
밤을 익히며
할머니를 졸라서
듣던 옛 얘기
눈이 쌓이고
이야기도 쌓이고
꿈이 깊는 아기 눈가에
졸음도 쌓이는데
도란도란 얘기 소리
눈에 덮여 꿈이 된다.
(1963. 11.)
시골 마을이 눈에 쌓인다. 눈 오는 날이다. 눈이 내리면 노랗던 초가지붕은 하얗게 모습을 바뀐다. 나풀거리며 쌓이는 눈, 눈 속에는 아름다운 추억과 이야기는 군밤처럼 익혀있다. 눈도 쌓이고 이야기도 쌓이고 졸음도 쌓이는 시골의 밤은 동화속 정경 같은 세상이다. 가난했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옛날 그 시절의 모습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산을 헤매던 일도 그 옛날 초기집 속에 살던 이야기이다.
산을 찾아다니며 잔대 뿌리를 캐 먹던 시절, 배고픔의 시절 속에서도 향긋한 봄을 느끼기도 했지.
요즘은 잔대 싹을 집에서 재배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잔대싹을 겉절이나 장아찌 등 밥반찬으로 하기 때문이다. 2Kg에 25000원 정도 한다니 수익성도 있는 모양이다.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산골 아이와 봄
제 키보다 큰
괭이를 들고
산을 오르는 아이
노오란 잔디를 헤쳐서
잔대를 찾는다
새 봄맛을 찾는다
묵은 싹을 더듬어
힘껏 괭이를 찍으면
괭잇날에 묻어나는
하이얀 잔대 뿌리
향깃한 봄맛이 풍긴다.
군침이 돈다.
그 옛날 고생하며 살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시골 마을에서 신화가 되고 하나의 역사가 되어 새롭게 읽혀진다.
할 머 니
열다섯 살에 가마 타고
시집 왔다는 할머니
물레도 잣고
길쌈도 하고
송아지가 딸린 암소를 몰고
꼴도 베었다는 할머니
터밭 긴 이랑에서
감자도 캐고
보리밭도 매고
뒷산 도토리 주워
묵도 만드시고
산나물을 뜯고
고사리 나물도
잘 만드셨다는
우리 할머니
지금은
그런 일 모두 버리고
혼자만 먼길 떠나셨다.
지금은 심심해서
어떻게 지내실까
뒷산 기슭의 할머니
(1967. 7.)
이 시 속에 나오는 할머니는 다름 아닌 우리 할머니이기도하다. 우리 할머니도 열다섯 살에 시집을 오셔서 물레 잣고 길쌈하고 또 나뭇짐을 해서 대가족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데 온 힘을 다하셨다. 그러니 골병이 들 정도였다. 봄이면 산에 들에서 나물 캐던 아가씨가 시집을 와서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면서 대한민국의 자녀들을 키워내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장날’에 관한 이야기이다.
장날 전날이면 집집마다 부산해졌다. 5일마다 오는 장날이다. 무엇을 내다 팔고 무엇을 사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를해서 파는 어른들, 소깝을 지고 나가는 아저씨, 좁쌀이나 보리쌀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가는 아주머니, 할머니들. 소를 팔러가는 소장수 강영감도 있다. 돌아올 때에는 꽃신이나 고무신, 고등어, 꽁치가 지게 뿔에 걸려있거나 장 바구니에 담겨 있다.
해가 저물면, 장에 가신 어른들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작은 희망에 마음이 떨리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 임계장에 걸어서 갔다. 그 길이 무려 40리나 되는 길이었다. 그날 운이 무척 좋았다. 장터에서 큰 고모님을 만났다. 고모님은 나를 데리고 가서 맛있는 찐빵과 홍시 감을 사 주어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안다. 아무런 돈도 없었던 어린 내가 그 먼 길 장 구경을 나섰으니 고모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
장 날
장작을 진 형님
소깝을 진 아저씨
분주한 시골 장길
좁쌀 팔아 멸치 한 줌
더덕 주고 굴비 사고
닷새 만에 돌아오는 바쁜 하루
장터에서 하루가 가고
땅거미 마을 길
아저씨의 지게 뿔엔
고등어 한 손
아주머니 자루 속엔
바늘과 인두와
고무신 한 켤레
동구나무 밑에 마중 나온
순이 등에 아기가
엄마 기다리다
잠이 드는 시골 장날
( 1967. 12.)
이상룡의 동시들은 최대 장점이 편안하게 읽히는 시들이란 점이다. 또한 옛날의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시가 독자에게 읽혀지는 시들은 일단 성공한 작품이다. 간결미와 압축미는 없어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통나무 같은 미의식이 있다.
동시 [일요일 교실]도 편안하게 읽히는 동시이다. 재미도 있고 참 마음이 편안해진다. 빗방울들이 일요일 빈 운동장에 찾아와 미끄럼도 타고 철봉도 한다. 교실 창문도 두드린다. 동화 같은 한 편의 동시이다. 일요일 학교가 조용한 모습인데 비가 와서 모처럼 신났다.
일요일 교실
비가 내린다
일요일 빈 운동장에
그네도
철봉도
비에 젖는다.
미끄럼이나 타 볼까
또르르
빗방울이 굴러 내리는
미끄럼틀
턱걸이도 해 보나
철봉에 매달린
빗방울들
문 좀 열어 주세요
교실 창문 두드리는
비, 빗줄기
비가 내린다
일요일 학교에
빗방울들이 신이 났다.
쉬운 시가 쉽게 쓰여 지지 않는다. 어려운 시가 쉽게 쓰여 지고 쉬운 시는 참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새로운 표현도 없어서 진부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진부함도 오히려 즐거움과 감동이 될 수 있다. 시를 꼭 새롭게만 써야 되는 것은 아니다. 신춘문예 응모시에 심사위원들이 바라는 것이 새로움이다. 그것은 신인의 미래를 예측해보고 작가적인 역량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산나물을 하러 가신 엄마]에서는 어서 커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도와드리겠다고 한다. 산골 어린이들의 동심과 부모님에 대한 착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동시 [소 먹이는 아이]에서는 아이들이 꼴짐을 지고 냇물을 건널 때 소에게 물을 먹이는 모습에 웃음이 생긴다.
시골 아이들 이름은 귀한 이름보다는 흔하게 널리 쓰이는 귀하지 않은 이름이 많았다. 이 동시집에 나오는 동시 [개똥이] 도 그런 이름의 하나다.
개 똥 이
“개애똥아”
“개똥아”
“개똥이 너 부른다”
“와 아 ……”
개똥이 엄마는
그렇게 불러야만 잘 큰다고 믿는다
“개똥이”
“말똥이”
“붇들이” 들은
오늘도
어머니의 소원을 담은
골목대장으로 자라는
산골동네.
내가 자라던 마을에도 여자 이름에 붇들이가 있었다. 어릴 때 낳은 아이들이 자꾸 목숨을 잃어서 자식을 잃지 않고 꼭 붇들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다. 개똥이 이름도 그렇다. 아무렇게나 나뒹굴어도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소원이 담긴 이름이었다. 귀하게 잘 되는 것보다 우선 건강하고 오래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릴 때에는 전기다리미가 없어 숯불 다리미로 옷이나 천을 다렸다. 둥그런 철제 그릇에 손잡이를 달아 그릇 안에 숯을 넣어 뜨거워지면 옷이나 천을 다렸다. 치마 같은 긴 천은 두 사람이 마주 잡고 다리미를 오르락 내리락 하였다. 그런 모습도 이 동시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숯불 다리미
촉촉이 녹은
아버지 바지를 다린다
구겨진 자욱이 펴지며
김을 피운다
어머니 치마는 참 길다
멀리 물러 앉아 바짝 당긴다
올라 갔다
내려 갔다
다리미가
미끄럼 탄다
내 저고리는
너무 짧아
다리미는 재미가 없다고
빨리 달린다
( 1959. 12)
동시 [엄마 젖]이란 작품을 읽으니 문득 아내와 결혼한 뒤 아이들을 키울 때가 그립도록 떠오른다.
엄마 젖
엄마 품 동생
젖 한 쪽 입에 물고
한 쪽은 움켜 잡고
어릴 적 내 모습도
저러했겠지
따스한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젖 빨던 그 때처럼 엄마 품에 안겨 볼까
엄마 곁에 다가 가니
내 손을 뿌리친다
동생이 젖을 문 채
엄마 젖은 제 것이란다.
(1965. 10. 22 대구일보)
우리 아이들이 엄마 젖을 먹으며 자라던 때가 생각난다. 딸아이가 한 손으로는 엄마 젖을 만지고 엄마 젖을 먹고 있던 그 귀여운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분 같았고 어린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순수 무구의 모습이었다.
동시 [엄마 젖]을 읽으면서 까마득한 신혼생활 때의 아이들 모습과 아내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나는 1981년 쓴 동시 중에 ‘싸리울’이란 동시를 썼다.
할머니 손등처럼
꺼칠하지만
다가서면
물씬 풍기는 흙냄새
아랫집 윗집
눅눅한 인정
싸리울 구멍으로 나누어주고
속마음까지
훤히 내놓고 산다.
- 「싸리울」(남진원) -
나는 위의 동시에서 보듯이 고향집 울타리를 보면서 속마음까지 내놓고 사는 고향 사람들의 마음을 그렸다. 이상룡은 울타리를 보면서 모든 것을 품어서 안고 살아가는 넉넉한 사람의 마음을 담았다.
울타리에는 호박 덩굴 안아주고 병아리를 놀게 하고 참세 떼 모여 앉아 놀다가고 잠자리들은 지친 날개를 쉬게 하는 엄마 팔이라고 여긴 것이다.
경쟁이나 욕심이 아닌, 이해와 사랑이 바탕이 되었다.
죽은 동생을 생각하며 전에 미워하고 고함지르고 때리기도 했던 행동에 대해 마음이 아파서 그린 작품 [동생 생각]은 많은 것을 기억나게 하였다.
동생 생각( 죽은 동생을 그리면서 )
어머니가 아침밥을 할 때면
부엌 쪽 문을 열고서
어 – 엄마 불렀지
날마다 울면서.
미워서
미워서
고함도 지르고
때리기도 했지
지금은
울음 소리도 그리워
부엌 문을 보면
울고 있는 그 얼굴이 …….
이 작품은 무척 깊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메시지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죽는 다는 것이다. 이런 평범한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간과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엄중하게 다시 기억해 낸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내일에 대한 행동이 전혀 달라지지 않을까.
학 교 길
달리다 벗겨진 신발
아예 벗어 손에 들고
행여나 늦을세라
서리 앉은 오솔길을
눈물을 글썽거리며
헐떡이던 학교길.
(1967. 11)
동시 [학교길]은 이상룡이 1967년 11월에 쓴 글로 되어 있다. 1960년대는 힘든 시기였다. 집집마다 가난에 쪼들렸다. 그래도 학교만은 꼭 보내려고 하였으니 ….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부모님들의 깊은 생각이 있으셨다.
당시에는 학교에 결석하거나 지각하는 것이 큰 사건이었다. 결석을 하려고 하면 미리 말씀을 드려 허락을 받았다. 무단으로 결석을 하면 산생님께 혼이 났다. 지각만 해도 선생님께 왜 늦었냐고 야단을 들어야 했다. 위의 작품 [학교길]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각하면 큰 일이기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헐떡대며 학교로 달려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조금만 몸이 아파도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이렇게 세상은 참 많이벼 변하였다.
고 추
한여름 가꾼 보람
조롱조롱 열렸는데
보람은 붉게 익어
노을 마저 타는 밭골
두 손도 바쁘게스리
쉴 줄 모른 울 엄마.
(1967. 11)
봄에 고추 모종을 하고 나면 여름이 끝날 무렵, 고추가 빨갛게 익어간다. 그러면 고추 따기에 여념이 없다. 위의 동시 [고추]에는 농촌의 풍경이 그림 같다. 조롱조롱 익어서 달린 고추들과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는 밭골, 그곳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어머니의 일하시는 모습에 평화로움이 묻어난다.
동시 [산골 동네]와 [농촌], [여름 고향] 동시는 아름다움의 보고寶庫 같은 농촌 모습이 60년대의 역사적인 기록물이 담긴 가치 있는 작품들이다.
산 골 동 네
산새소리 싣고 오는
솔숲에는 바람소리
또닥또닥 방망이는
앞 냇가에 빨래 소리
이따금 낮닭 소리가
그 사이로 수놓네
소쩍새 울음 소리에
오곡은 익어가고
보름달과 경주한
울타리 호박들
속이 텅 빈 것은 모르고
모양만을 뽐낸다.
(1967. 9)
냇가에서 빨래하는 방망이 소리가 바람을 타고 노래처럼 들려오는 마을 사이를 낮닭의 긴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타리에는 보름달과 경주한 호박이 노랗게 익어가고 뒷산 솔숲에는 산새들의 노래 소리가 마을을 한층 풍요롭게 하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순수한 소리와 빛깔이 그리운 오늘이다.
농 촌
농촌에 비가 오니
이리도 분주하다
논둑 물고 넘을세라
괭이 들고 뛰어가고
풀 뜯던 황소 걸음이
어린 손에 끌리고.
한가히 울던 낮닭
소나기에 털을 씻고
꼴짐 진 어린 아이
함빡 젖은 옷인데도
가뭄 끝 단비 온다고
차운 줄을 모른다.
(1968. 5)
여름날 갑자기 오는 소나기는 반갑다. 마구 쏟아지는 소나기는 어느 틈에 작은 여울을 흙탕물로 만든다. 논둑의 물고가 넘을까 괭이 들고 뛰어가는 사람, 여유롭게 풀을 뜯던 황소는 어린 소년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낮닭은 소나기에 홀딱 젖었다. 마치 소나기에 털을 씻은 듯하다. 꼴을 베어 한짐 가득 지고 오던 아이도 흠뻑 옷이 젖어도 오히려 시원하단다. 김홍도가 그린 민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여 름 고 향
지금 쯤 고향 뜰엔
짚 멍석 깔렸으리
그 위를 빗질하고
저녁상이 놓이고
풋고추 매운 입 다시며
가뭄 걱정 할 거야.
박꽃이 별이 되어
지붕에 피었으리
토담집 어둠 속에
소쩍새 울음 소리
모깃불 시름시름 피는 곳에
도란도란 말 소리.
(1973. 7)
타향에 살면서 가끔 돌아볼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여름 날 고향의 저녁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짚 멍석을 깔아놓고 식구들이 모여 앉아 마을의 소문에서부터 하루 일어났던 일들을 털어놓으며 식사를 한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한입 베어 물며 식사를 하던 그때의 일들. 추억의 그림으로 남았을 뿐이지만 돌이켜 보면 행복해진다. 고향의 추억이 어디 여름에 있었던 일 뿐이랴. 좋은 일 궂은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도 지나고 보면 모두 웃음을 지으며 돌아볼 수 있는 일들이다.
옛 집
앞에는 터밭 이랑
봄 보리 수염 나고
뒷 산에는 참나무 밭
뻐꾸기 울어주는
그 사이 조그마한 초가
내가 자란 시골집.
봄이면 산나물에
된장이 바닥 나고
여름이면 보리밥에
고추장이 달리어서
동생들 서로 다투던
툭구바리 장그릇.
짚자리 깔린 방에
배 붙이고 엎드려서
호롱불 가까이다
글을 읽던 그날들이
지금은 옛이야기 되어
가물가물 멀구나.
(1975. 해마다 피는 꽃)
3. 마무리하는 글
사람들이 고향집을 생각하는 이유는 각각 다르겠지만 내게는 때 묻지 않은 원형이 그대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내 고향에는 친구들의 해맑은 얼굴이 있고 순박한 농부의 마음이 담긴 감자꽃이 피었다. 숲속 어디선가 뻐꾸기가 친구처럼 신호음을 보내주곤 하던 고향집. 고추잠자리가 맴돌던 뒤울안에서는 댓잎처럼 푸른 매미소리가 들렸다. 특히 유년의 고향집 여름은 생동하는 기운으로 가득 찼다.
이상룡의 동시들은 내가 그리워하던 고향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내 고향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벌써 옥수수가 내 키보다 높이 자랐다. 옥수수밭을 지나다 보니 어릴 때의 고향이 생각났다.
나는 사계절 중에 여름을 참 좋아한다. 그 이유는 유년 시절 고향집에서 보낸 여름의 기억이 다이아몬드처럼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정선아리랑으로 유명한 강원도 정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선읍에서 130여리 떨어진 임계면 ‘골지리’라는 곳이다. 지금은 개명을 하여 ‘문래리(文來里)’로 바뀌었다.
시골 마을은 다 그렇지만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정겨움이 넘쳐흐른다. 내가 살던 유년의 고향도 그랬다. 포장이 안 된 동쪽, 산밑 도로를 따라 길게 집들이 지네처럼 붙어 앉았다. 그 앞으로 넓다란 논이 평야처럼 펼쳐지고 둑방 너머엔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문래산 밑을 감돌아 흐르는 골지천이다. 골지천은 허리가 패인 듯 굽어 흐른다. 굽은 곳은 물이 깊어서 산지골소(山祭谷沼이)라 불렀다. 우리는 여름이면 그곳, 산지골 소에 가서 물놀이를 즐기곤 하였다. 설익은 사과를 멀리 던져놓고 먼저 헤엄을 쳐서 줍기도 하고 물 속에 잠수하여 바위 밑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높은 돌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리기도 하고 추우면 밖에 나와 모래밭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리기도 하였다. 동그랗고 작은 돌멩이를 귀에 대고 돌을 치면서 귀 안에 있는 물을 말리는 아이도 있었다. 심심하면 모래밭 사이로 고무신을 벗어 자동차 놀이도 하였다. 해가 기울 무렵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갔다.
어둑어둑한 집에서 어머니는 참 바쁘게 움직이셨다. 마당에는 멍석이 펼쳐졌다. 얼큰한 장국수를 삶고 옥수수와 호박도 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옥수수와 호박이 상위에 펼쳐지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었다. 한쪽 거름무더기 옆에선 모깃불이 피어나지만 어디 모기들이 달아나던가 말이다. 모기란 놈이 뽀얀 다리 살에 연신 달라붙어서, 나는 다리를 찰싹찰싹 때리기에 바빴다. 그때 띄엄띄엄 반딧불이 날아다녔다. 하늘엔 별이 반딧불처럼 돋아났다.
옥수수를 먹다가 잠이 눈가죽에 달라붙으면 어머니가 슬며시 안고 방에다 눕혔다. 나는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어 일부러 잠이 든 척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방에 눕혀지기까지 난 잠이 들지 않았다. 방에 누워 눈을 떠 보면 컴컴한 방 천장에서는 징그러운 뱀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고 산속의 돌무더기에 숨어 있던 괴물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여 무서웠다. 그런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정말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일어나 가는 곳이 뒤란이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호박을 쪄서 광주리에 담아두었다. 어렸을 때는 배도 꽤 고팠지.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뒤란으로 달려가면 찬이슬에 맛이 달콤하게 삭은 호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숟가락으로 퍽퍽 떠 먹던 기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어린다.
지금 생각하면 유년의 삶은 너무도 신비한 나라 그 자체이다. 그곳에는 원시림 그대로 그리움의 동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아름다운 자연과 어머니, 할머니의 따스한 사랑 속에서 자랐다. 유년 시절, 고향이란 넉넉한 품이 없었다면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할 일이라고 여겨진다. 고향을 생각하는 것은 희망이요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 힘이다. 나는 지금도 어렵고 힘들 때면 그리움의 맛난 기억이 묻어나는 호박과 매미소리, 물소리가 살고 있는 내 유년의 여름 고향 숲을 상상 속에서 찾아간다.」
이상룡의 동시들은 이런 내 고향에 대한 의식을 더 확실히 일깨워주고 확신에 가까운 친밀함으로 다가왔던 것.
나는 지금 다시 생각해 본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시골마을이 없었고 초가집인 고향집이 없었고 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시를 쓰고 있었을까? 라고 말이다.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고향집과 고향마을은 아직까지 하나도 오염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염될 일이 없을 것 같다. 이런 나의 고향집이 있는 한 나의 시 쓰기는 한웅쿰 손에 쥔 별처럼 놓지 않을 것이다.
이상룡의 동시집 [소나무골 아이들]은 내가 고향집에 다가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깊고도 아늑한 평화로움 속에 항상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힘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평안에 들어서는 것은 그 기본이 자연의 원형적인 모습과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연과의 끊임없는 교감을 통해 빛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것. 이상룡 선생의 동시집 .『 소나무골 아이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의 고향이고 동심의 화엄경이었다. 나는 지금도 동시집 [소나무골 아이들]이 곁에 있는 한 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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