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귀부.
보물 제70호.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있는 높이 1.04m의 조형물로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이다. 김인문(金仁問)의 공적을 새겼던 비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영귀루(永歸樓) 북쪽 받침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에 새겨진 글과 『삼국사기』「열전」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졌으나, 네 발로 힘 있게 바닥을 딛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거북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네모난 대석 위에 거북을 조각하고, 거북의 등 한가운데 비신을 끼워 넣을 수 있게 직사각형의 비좌(碑座)를 깊이 팠다. 이 홈 둘레에 양각된 연화문은 꽃잎 끝부분이 뾰족하게 들린 이 시기의 전형적인 연꽃 모양이다. 비신을 꽂았던 비좌 양 쪽에는 탑에서 볼 수 있는 동자주(童子柱: 가운데 세우는 짧은 기둥)와 우주(隅柱: 모서리기둥)가 조각되었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진덕여왕 5년(651)에 당나라에 일곱 차례나 왕래하며 삼국 통일 전후 당나라와의 외교에 큰 공로를 세운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김양은 무열왕의 9대손으로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화평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인문은 글씨도 잘 써 태종무열왕릉 비문을 썼다.
김양(金陽) 墓所
신라의 왕족. 808년(애장왕 9년)~ 857년(헌안왕 1년), 자는 위흔(魏昕). 태종무열왕의 세손. 828년(흥덕왕 3)에 고성 태수(固城太守)로 지방관이 되고 계속하여 중원대윤(中原大尹)ㆍ무주도독(武州都督) 등을 지냈다. 흥덕왕이 죽은 후 아들이 없으므로 왕의 당제(堂弟) 균정(均貞)과 헌정(憲貞)의 아들 김제륭(金悌隆 : 희강왕(僖康王))이 서로 왕위 계승의 싸움을 할 때, 그는 균정의 편을 들어 싸우다가 실패하여 균정은 피살되고 그는 산에 숨었다. 837년(희강왕 2)에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장보고(張保皐)와 결탁하여 희강왕을 치려고 할 때 김양이 같이 공모하였고, 838년(민애왕 1)에는 서울로 쳐들어와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임금으로 내세우니 이가 신무왕이다. 신무왕이 불과 수개월 후에 죽자 그는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을 내세웠다. 그가 50세로 사망하자 임금은 그에게 대각간(大角干)을 추증하고 태종 능렬(陵列)에 배장(陪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