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자이언 국립공원 - 설악산의 경쟁력
우리 나라에서 최고의 자연 관광지는?
십중팔구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셋 중에 하나로 답합니다. 통일이 되면 금강산도 꼽히겠죠. 한라산은 제주도의 이국적인 면이 특징이고, 지리산은 깊은 맛, 금강산은 화려함이라면, 설악산은 화려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우리 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합니다. 숲과 암벽의 기막힌 조화. 수려함과 장엄함의 공존. 가을 단풍, 겨울 설경, 여름의 녹음. 게다가 동해바다가 지척입니다. 여름 휴가 때마다 설악산 고려 안하는 사람 있습니까? 콧구멍에 바람 넣고 싶으면 아무 이유 없이 대관령, 한계령, 진부령을 넘어 한바퀴 휘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외국의 유명 관광지를 다니다보면 우리 나라의 관광 산업이 덜 발전한 이유는 한국 관광 공사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우리 나라 자연 자체의 낮은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관광경쟁력은 한 눈에 뻑가는 화려함이 생명입니다. 수수하고, 은근하고, 기품 있고, 뭐 이런 건 반복하고 곱씹고 되새김질하며 느끼는 맛입니다. 이런 거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같은 해외 여행지를 드나들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애국심으로 극복할려고 해도, 바다는 동남아나 폴리네시안 열대 지방에 밀리고, 눈 덮인 산은 캐나다나 알프스에 밀립니다. 사진 한 장 보면 가보고 싶어 동공 열리고, 허파 벌렁이고, 삭신이 근질거리는 섹시한 매력포인트가 있어야 합니다. 외국인 위한다고 그들 입맛에 맞는 햄버거 가게 세우고 영어 안내문 몇 개 더 붙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장마, 태풍, 혹서, 혹한을 피해서 여행 일정 잡는 게 외국인들에게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딱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여행을 다닐수록 설악산 만큼은 세계 어디다 내놔도 품질 경쟁력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괜히 우쭐합니다.
우리 나라의 자연과 비슷한 자이언 국립공원
미국에도 설악산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두 개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요세미티 (Yosemite) 국립공원' 과 유타주에 있는 '자이언 (Zion) 국립공원' 입니다. 그 중에서도 굳이 고르라면 요세미티가 더 설악산과 비슷합니다. 두 국립공원은 미국에서 가장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입니다. 인기 만땅이죠.
실제 방문객은 그랜드캐년이나 요세미티가 더 많지만, 그랜드써클 내에 있는 자이언 국립공원은 험준 고령으로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어 체감 인원은 더 많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고 하니 자동차의 천국 미국에서 자이언 국립공원의 메인 도로는 자가용 통행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대신 셔틀버스가 운행을 하죠. 공원 안내문에 셔틀버스가 다니기 전에 차량이 몰려 오도가도 못하게 꽉막힌 길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다른 국립공원도 셔틀버스가 다니는 곳은 있습니다만, 자이언 처럼 자가용 출입을 전면 통제하는 곳은 그랜드 캐년 정도입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곳이 바로 이 두 곳입니다. 미국 사람들 만나면 이곳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합니다. 반면 한국 사람들 만나면 시큰둥합니다. 좋긴 좋은데 설악산만 못하다는 게 이유입니다. 바위 덩어리는 설악산보다 큰데, 더 멋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네요.
인기절정의 관광지니 숙박료도 상당히 비쌉니다. 휘리릭 둘러보고 떠날 곳이지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구석구석 둘러볼 곳이 아니라고들 합니다.
자이언 국립공원에 오기 전에 캐피탈리프 국립공원의 숙소에서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에서 온 한 미국인 가족을 만났는데, 다음 목적지로 자이언 국립공원에 간다고 하니까, 자기도 그곳을 매우 좋아한다면서 '매그니피슨트(magnificent)하고 그랜디오스(grandiose)' 하다는 겁니다. 크고 웅장한 기세를 강조합니다.
가는 길에 있는 '카프크릭폭포 (Calf Creek Falls, 해석하면 이름도 정겨운 '송아지 개울 폭포')' 도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이 폭포는 패뷸러스(fabulous)하다네요. 패뷸러스라는 말은 정말 좋지 않으면 잘 안쓰는 단어입니다. 칭찬 잘 하는 유명한 미국 선생들이 학생들 평가할 때 100 점 만점에 95 점 받아도 이렇게는 얘기 안합니다. 거의 만점을 받아야만 붙여주는 말이죠.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 보면 불국사의 미를 외국 전문가에게 설명하니까 감탄에 감탄을 하면서 내뱉은 말이 이 말입니다. 자이언은 그냥 간 김에 훌쩍 둘러보고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하던 딴지 컨설턴트 몽고 선생님의 의견과는 너무나 틀렸지요.
제가 들고 갔던 책자에도 그렇고 동네에서 나눠주는 여행안내문에도 그렇고 카프크릭폭포를 꼭 가보랍니다. 그래 안 갈 수가 있습니까. 가는 중간에 12 번 국도(1편에 얘기했던 '전미최고길빠닥')상에 있는 카프크릭폭포를 들렸죠. 한가한 시즌이라 수금원은 없었지만, 그래도 국립으로 폭포 하나 보는데 입장료 3 불을 내야 하는 곳이더군요. 카프크릭폭포.. 멋있습니다. 1 시간 30 분을 걸어가야 볼 수 있는데, 폭포 줄기 시원하고, 바위와 숲에 둘러 쌓여 아늑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 장면에 그렇게 큰 칭찬을 해야할지는 의문입니다.
이런 의문은 자이언 국립공원까지 보고 난 후 다른 방식으로 풀렸습니다. 예전에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가본 후 이곳이 인기 있는 이유는 샌프란시스코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넓은 호수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하프돔이니 거울호수니 하는 것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리적 접근 용이성이 인기의 비결이라고 여긴 거죠.
그러나 자이언 국립공원까지 본 후에 내린 결론은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리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요세미티, 카프크릭폭포, 자이언 등 설악산 같은 느낌의 자연은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패뷸러스' 한 수준의 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설악산의 높은 경쟁력입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위와 계곡이 조화를 이루어 장엄하고도 화려한 장면이 연출되는 곳을 매우 좋아합니다. 너무 자주 다닌 곳이라 이 곳의 가치를 오히려 모르고 있었죠.
자이언 국립공원과 설악산의 다른 점이 있다면 바위의 색깔이 흰색이 아니라 붉은 색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우리 나라의 악산은 흰색이 주조를 이루고 매우 단단한 화강암의 악산이지만, 미국의 자이언은 붉은 색의 화강암보다는 약한 사암입니다.
자이언 국립공원은 라스베가스의 동북쪽에 있습니다. 서쪽에서 오면 네바다주와 아리조나주의 사막이 끝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푸른 숲의 공원입니다. 사막의 다채로운 땅의 색깔과 모양은 화려하지만, 척박한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듭니다.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죠. 낯선 자연에 지친 우리 나라 여행자에게 친숙한 휴식을 주는 곳입니다. 자이언이라는 말이 원래 히브리어로 '도망자의 안식처' 라는 뜻이라네요.
어떤 느낌인지는 설악산 등산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설명 안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친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 편안함이 주는 행복감은 생각보다 큽니다.
첫댓글 한때 설악에 미쳐 1년에 13번 간적도 있었는데 지금도 설악 가고 싶다.
잘 보고 갑니다. 오늘은 더 바쁘네요
패뷸러스(fabulous) 설악산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