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암동(安岩洞)이라는 동명 유래의 대하여 문헌(文獻)상으로는 기록(記錄)이 남아 전(傳)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오래 살아온 노인(老人)들의 전하는 말로는 지금 안암동 3가 136의 1호에 있는 대광(大光) 아파트단지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어 20명이 앉아 편하게 쉴 만하여 그 바위 이름을(앉을 바위)라 하였으며 그것을 한자(漢字)로 편안 안 (安)자와 바위 암 (岩)자를 옮겨 쓴 것이 안암이란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안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高宗)4년 (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 안암계로 되었고 갑오개혁(1895년)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궁리(宮里) 원리(園里) 중리(中里) 부석리(剖石里)로 칭(稱)하였다, (*궁리는 세종대왕 5자 광평대군이 이성계의 7자 방번의 후사로 정하여 사당이 있었고, *원리는 이공대에 영명원(永明園) 정조대왕에 후궁 원빈홍씨 묘(墓)가 있었고, 중리는 궁리 원리 중간, 부석리는 2가쪽에 구둘장을 만드는 채석장(採石場)일명 덤바위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改稱)하고 이때의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안암리가 되었고 1914년 4월 1일에는 성(城) 외면 많은 지역을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하였다, 이때에 숭신면 일부 인창면 일부가(숭신면 숭(崇)자와 인창면 인(仁)자 첫 글자를 따서 숭인면이 신설되었음) 숭인면이 생기면서, 궁리, 원리, 부석리를 합하여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로 하였다,
1936년 4월 1일(총독부령 제8호) 경성부 확장 때 편입되어 경성부 안암정이라 하였다, 이때에 경성부로 편입된 지역은 성북리, 돈암리, 신설리, 안암리, 종암리, 답십리, 전능리, 청량리, 제기리, 용두리, 회기리, 이문리, 휘경리, 이때 정능 일부가 돈암동에 편입 되었다, 숭인면으로 남게 된 지역은 정능리, 미아리, 장위리, 석관리, 번 리, 우이리, 수유리, 상월곡리, 하월곡리다,
1943년 6월 10일 동대무구의 편입된 지역은 구청에서(전 동부출장소, 위치 신설동 87번지) 관리하고 남게 된 지역은 숭인면 출장소에서 관리하였다, 숭인면 출장소는 안암동 5가 86번지의 164, 165, 166 167호 자리에서 미아리 숭인시장 부근으로 이전하고 빈 사무실 건물은 1953년까지도 있었다, 1949년 8월 13일 숭인면의 남은 동이 서울시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1943년 6월 10일 경성부 동대문구에 편입되면서 안암동부정회(安岩東部町會) 안암서부정회로 하였다가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안암정을 안암동으로 바뀌면서 1, 2, 3, 4, 5가 법정동으로 구분 하고 5가 일원을 안암동부동회(安岩東部洞會) 그 외 지역은 안암서부동회로, 1949년 8월 15일 성북구가 신설되었고 1955년 4월 18일(시조례 제66호) 동제 실시에 따라 안암동 5가 일원을 동암동사무소 안암동 3, 4가 일원을 남암동사무소, 안암동 1, 2가 일원을 서암동사무소 관할구역으로 정했다, 이어서 1970년 5월 18일(시조례 제618호)에 안암동 1, 2, 3, 4가를 안암제1동사무소, 안암동 5가를 안암제2동사무소로 정했으며 1977년 9월 1일(시조례 1185호) 안암동 1, 2, 3, 4, 5가를 통폐합하여 안암제2동사무소로 합병(合倂)하면서 안암동이 되었다,
이때에 안암 제2동은 안암로 노타리 중심으로 남쪽은 용두동으로 동쪽은 제기동으로 일부가 편입되었고 안암제2동사무소는 이층에는 성북노인지부회 1층 뒤채에는 안암동 시립노인정으로 사용하고 1998년 7월 1일부로 노타리에 있는 안동파출소가 폐쇄되고 성북경찰서 안암지구대가 안암동2가 140번지에서 안암동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 안암동 지역 인구집적추이(人口集積推移)
안암동은 역시 오래전부터 인구가 집적한 지역으로 1915년부터 인구통계가 있는 지역이다, 1915년의 인구는 345명 이었고 그 후 5년인 1920년에는 892명, 다시 10년 후인 1930년에는 1,718명으로 다소의 증가세를 보였으나 아직은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1949년에는 27,692명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1953년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7,779으로 줄어 들었으나 1961년에는 14,599명으로 다시 증가세를 회복하더니 1970년에는 27,692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가장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 시기는 1970년대로 1980년에는 46,801명으로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증가하더니 다음해부터 줄어들기 시작 1990년에는 44,191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는데 역시 안암동 1가에서 4가에 연하는 가로변의 상업업무기능의 상대적 확장(擴張)으로 인한 주거기능의 상대적 감퇴가 원인인 것 같다,
※ 안암동의 경계는 1가 쪽이 동선 2동이고 안감천을 경계로 건너편이 보문동이고 안암로 건너편이 동대문구 용두동이고 안암 노타리 건너편이 제기동이고 지할철 고대역(종암역) 교우회관옆 북악산길 경계로 종암동이다, 안암동은 문헌상 나타나는 서울의 동명중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 나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성계(李成桂)는 한양정도 이듬해 태조 4년 1395년부터 수능(壽陵)(즉,,자신의 만년유택)을 정할만한 산지를 찾아 과천(果川) 광주(廣州)등 산수 좋은 여러 곳을 왕래하였다,
태조 5년 1396년 8월 13일 무술년에는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난 이틀 후인 15일에 태조가 백의(白衣) 백관(白冠)으로 능지를 친히 보러 안암동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가 일찍부터 안암동 산록(山麓)의 지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1일에 다시 안암동으로 나가 산지를 정하고 다음날 명하여 능기(陵基)를 개굴하기까지 하였는데 의외로 물이 솟아나서 중지하고 다음날 취현방(聚賢坊) 북원(北原) (지금의 중구 정동)으로 나가서 능지를 정하였다,
※ 광평대군(廣平大君) 사당(祠堂)
1914년 안암리로 칭할 때 궁리(광평대군의 사당이 있기에 궁리 지금은 안암 3, 4가쪽) 원리(영명원이 있었기에 원리 지금 안암동 5가) 부석리(채석장 즉 덤 바위가 있었기에 부석리 지금 안암 1, 2가쪽)궁리라는 마을은 세종대왕의 5자인 광평대군 및 그의 아들 영순군(永順君)이 대를 이어 광평대군 일가의 사당이 있으므로 사당 말 또는 사당을 중심으로 하여 위에는 상리 아래는 하리라고도 불러 쓰며 또한 세종은 왕자의 난 때 희생당한 태조의 7자 무안군(撫安君) 방번(芳蕃)의 후사를 광평대군으로 양자하여 무안대군 방번과 그 부인 왕(王)씨를 위시하여 광평대군 그 부인 신(申)씨 및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과 그의 부인 최(崔)씨 3세를 봉사(奉祀)하는 사당이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지금은 강남구 수서동 산 10의 1호에 유형 문화재 48호로 지정된 광평대군 일가의 묘소와 사당을 비롯한 조선 왕손들의 무덤 700기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조선 고종때에는 고종황제의 6촌이 살면서 서당을 운영하였고 그 후에는 유해창 자손들이 1980년 중반까지 사시다가 삼익아파트가 생겼다,
※ 안암동 일한신궁봉경회(日韓神宮奉敬會) 전말(顚末)
안암동 124번지 어좌봉(御座峰)(이공대 후문쪽) 중심으로 일대를 한일신전(韓日神殿)을 설립 할 계획으로 보안림(保安林) 일부를 융희(隆熙) 3년(1910) 농상공부 대신(大臣) 정중응(鄭重應)가 농상공부 고시 제30호를 고시하면서 한성부, 답십리 안암리 민유삼림(民有森林) 면적(面積) 이반삼무이보(貳反參畝貳步){전답의 면적 단위 6척 사방을 步 100步를 무(畝)라함}해제 하였으나 자금사정으로 중단 되었다, 1937년 12월에 발간된 경성부시가지계획 풍치지구지정 자료조사서에 의하면 성북정, 돈암정, 안암정, 일대의 삼림(森林) 상태를 발표한 내용 중 안암정은 고목이 울창하여 백주(白晝)에 암흑(暗黑)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안암동은 얼마나 솔 나무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년 광복 전만 하여도 개운사 부근 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였는데 전라도에서 이사 온 정씨란 분이 밤마다 나무를 도벌(盜伐)하여 얼마 남지를 않았는데 1950년 6, 25 사변이 나고 휴전 후에 보니 거의 없어지고 아가시 나무만 있었다, 1960년 때만 하여도 절 뒤 고대 기숙사 안이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장난하고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여 넓은 바위에다 빨래를 널어 말리던 곳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당시에는 현재 개운산에 일본군 고사포 부대가 있었다, 부대로 가는 군사도로는 안암동 5가 127번지 이공대쪽에서 산 능선을 따라 병원옆(현재 개운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겨우 마차 1대가 지나갈 산 능선 길을 일군이 마차에다 군 장비를 실고 다니던 길이 였는데 지금은 이공대쪽은 학교 부지로 개운산쪽은 차가 다니는 길이 되고 산동네는 광복 후에는 무허가 집단촌 산동네를 이루더니 2002년에는 개발하여 삼선아파트가 들어 셨다, 일반인이 통행하는 길은 인촌로가 개통하기 전에는 변전소옆 전에는 말간과 승마장(현재는 이공대) 을 지나 동사무소로 넘어가는 길을 기도(祈禱)고개라고 하였는데 인촌로가 생기면서 이 길은 이공대 부지(敷地)로 되었다,
그린공원 개운산은 안암동, 돈암동, 종암동경계가 되며 내봉산까지(미아리 고개쪽) 1977년에 고시하여 1983년에 시설을 구비하여 현재 공원으로 사용하고 공원 내에 운동장에서는 돈암동 노점상주체로 영세민의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휴식공간, 배드민트 클럽이 수십 군데 있고 585 군부대, 성북구의회 및 스포스 센터는 2000년에 건립하여 사용하고 있다,
※ 사찰로는 안암동 5가 157번지의 개운사(開運寺)가 자리 잡고 있다, 영도사(永導寺)라고 불렀던 이 절은 태조 5년 1396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현재 이공대 자리에 창건한 것인데 정조(正祖) 3년 1779년 5월 정조대왕의 후궁 원빈홍씨(元嬪洪氏)가 세상을 떠나자 능 영명원(永明園)을 조성하여 현 위치로 이전 한 것이다, 한편 조선조말에 절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영도사의 도문스님 처소에서 자랐는데 왕위에 오른 다음 절 이름을 새롭게 연다는 뜻으로 개운사로 고쳤다는 것이다,
개운사는 태고종 대처승이 운영하였는데 1955년 이승만 정권당시 비구들의 준동으로 발생한 불교분규에 의해 조계종에서 승리하자 대처승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全國布敎師大會)를 개운사에서 개최하였으나 밀려나고 처음에는 비구(여승)이가 관리하였다, 대처승 최장용 스님은 가정집에다 부처님을 모시고 보문사라 하고 권스님도 관음정사 란 절을 살림집에서 운영하다 모두 폐지되고 김규식 스님도 칠성암을 운영하다, 1980년경 조계종 보타사로 인계 되었다, 또한 일부 대처승 스님들은 요정을 운영하여 한때나마 회갑 잔치 집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1981년경 경운사내에 승가대학이 생기고 정문도 웅장하게 만들고 대웅전(大雄殿)을 약 100m 뒤로 옮기면서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승가대학도 2002년에 김포쪽으로 이교하였다,
보타사는 안암5가 7번지에 있는 절이다 고종 15년(1878)에 절 뒤 큰 바위에 관음보살의 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보타사 아내문에는 고려말이나 조선초기로 돼 있어 유형문화제 제89호로 되어있다, 1925년에 이벽봉(李碧峯)이 낡은 절을 헐어버리고 새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칠성암으로 대처승이 괄리 하던 것을 1980년경 조계종에서 괄리 하면서 보타사라 하고 대원암과 같이 운영하고 있다, 대원암은 같은 경내 안암5가 8번지에 있으며 헌종 11년(1845)에 지겸(知謙)이 창건하고 1927년에 영호(映湖)가 강원(講院)을 개설하여 1938년에 독서당(讀書堂) 4간을 증설하였다, 6, 25 사변 이후에는 한때 고아원(孤兒院)으로 사용 하였다, 또한 경내에는 중앙승가대학 비구니 수행관을 1993년 12월 28일에 기공식을 하여 1995년 3월 22일에 준공식을 하고 비구니 수행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동국대학교 기숙사 자리에는 승가원(僧伽院)으로 법인사무국 주간 보호센터 순회재활센터 상락원 주간 보호쎈터로 장해 어린이를 양육하고 있다, 산각산과 연결된 개운산 아래 자리 잡은 절들은 깊은 산곡에다 경내가 송림 이 울창하고 무성하고 마침 삼태기 같이 생겨 그윽한 곳 이서 호랑이가 산다하여 안암골 호랑이라는 명칭도 있다,
※ 민간신앙으로 안암동 5가 쪽에는 언제부터 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으나 갑오개혁(1895)당시에 작은 나무 하나와 돌로만 싼 성황당은(41의 7호) 고개 마루에 있었고 성황당 앞 고개 길이 각시고개라고 하여 말 탄 사람 가마 탄 사람은 모두 내려 걸어서 넘어갔던 길은(동암2길) 기업은행쪽 구길에서 너머가는 언덕을 말하는데 동네에서는 시체가 고개를 넘으면 동네가 재앙(災殃)이 든다하여 못하게 하였던 것을 1970년 때 까지만 하여도 지켜지고 있었다, 41-9호에 사시는 신대성 장인을 장지로 모시기 위하여 구 길에다 영구차를 놓은 것을 홍장관 어머님께서는 기독교 신자인대도 극구 만류하여 각시고개를 넘지 못하고 86번지(동암길)로 영구차를 돌려놓은 일도 있었다, 1961년 김병학씨 장례식 때 상여로서는 안암동 5가 쪽에서는 마지막 이었다,
41번지 일 때가 주택이 늘자 성황당이 철거위기에 노이자 대처승 버번스님 박수명(朴壽命)께서 안암 5가 12-56호에다 작은 당을 짓고 관리하였는데 그 일 때에도 주택이 늘자 12번지 스님 댁 뒤 마당에다 모시었다가 1970년경 그 집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자 안암동의 성황당은 사라졌다, 지상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은 안암 5가 15-36 청암 고시원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 장승이 서있었고 앞이 개천이고 소나무가 울창하였는데 1943년경 안암동을 주택지를 조성하면서 개천을 개운사에서 노타리 쪽으로 직선으로 내면서 장승백은 안암동에서 살아졌다,
수도(水道)가 들어오기 전 안암동 5가 쪽 93의 5호 뒤 담 쪽에 대동우물은 1년의 1번씩 이운복(李雲福)씨가 주관하여 제일(祭日)며칠 전부터 토착인으로 그날 제일 일진과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는 제관 1명을 선출하는데 선출된 제관은 그날부터 출입을 삼가 하고 매일 목욕제계(沐浴齊戒)를 해야 하며 내외를 금함은 물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 경비(經費)는 형편에 따라 출렴으로서 하고 제수는 일반 집에 고사지내는 식으로 하고 제를 올린다음 출렴을 낸 집에다 떡을 돌려 나누어 먹는다,
대동우물은 항시 물이 많아 동네에서 식수로 사용을 하였으나 인구가 점점 늘자 1958년경 8통장 서강윤 아주머니 외 15명이 수도계를 하여 신설동에서부터 연결하여 처음으로 수도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동제는 이운복씨가 마지막으로 지내고 살아졌다, 그러자 우물을 방치 하였는데 93의 5호 장흥탕 집주인 꿈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 내가 숨이 막혀 죽겠으니 우물을 치어달라고 하여 동네 청년들이 청소하고 뚜껑으로 막았다, 도시계획으로 인천로가 생기고 골목길 정화사업으로 우물을 매워 골목길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 우물을 지키는 신은 할아버지였기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은 원리(園里)(안암5가쪽)에서 유명한 우물이 였던 것이다, 산신제는 고대기숙사 부근에서 1980년까지 지내고 그 후 사라졌다,
※ 교육기관으로는 안암동 1번지에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가 자리 잡고 있다, 사학(私學)의 명문인 고려대학교는 1905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보성전문(普成專門)으로 출발해서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지도자에 의해 운영되다가, 1932년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가 운영을 맡아 1934년에 이곳에 교사를 건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본관과 구도서관은 사적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후 1946년에 고려대학교로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걸(人傑)을 배출하였다, 1971년 12월에는 우석대학교 부속병원을 흡수하여 1991년 10월 8일 헤화병원(惠化病院)을 안암갬퍼스로 이전 하고 고려대학병원으로 고쳤다,
용문 중,고등학교(龍文 中 高等學校)(안암 2가 96-1)는 사립 일반계 남자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46년 11월에 창신동에 설립된 성도중학교(城都中學校)로 출발하였다, 1949년 4월에 제단법인 겸산학원(兼山學院)이 성립인가를 얻어 학교경영을 책임지게 되었고 1952년 학제 변경에 따라 강문고등학교(康文高等學校)로 개편되었다, 이어 1953년 8월에는 겸산학원을 해산하고 재단법인 강문학원으로 변경되었으며 1964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70년 3월 1일에는 학교법인 용문학원으로 변경 인가를 받아 교명도 용문 중 고등학교로 변경하였다, ※ 안암초등학교(안암2가 93)는 일정 때 위생소 분뇨(糞尿) 우(牛) 마차(馬車)를 보관 관리하고 있던 곳 이였는데 1956년 3월 24일에 안암초등학교로 설립하고 사용하다가 1995년 구(舊)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현대식으로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 전설(傳說) 안감내(安甘川) 다리의 유래(由來)
전설(傳說)에 의하면 안암동을 안감내라고도 하였다, 옛날 채소(菜蔬)를 심어 문안에 갔다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암동 남쪽에 안감내라는 개천이 흐르고 거기에 안감내 다리가 있다,(1997년 9월 1일에 안암동이 통폐합으로 인하여 현재는 용두2동으로 편입) 옛날 이 동네에는 안감이라는 사람이 채소를 문안으로 가서 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동대문 밖 주막(酒幕)에서 돈이 없어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술값을 주었는데 그 영감이 문안에 오거 던 꼭 우리집을 찾아 달라고 하여 그 후 찾아가보니 큰 부자 집이였다,
영감이 반가이 맞으면서 주안상까지 차려 대접하고 전날에 고마웠다는 인사를 한 다음 나에게 배푼 은공(恩功)을 갚겠으니 소원(所願)이 있으면 말하라 하였다, 그러자 그까짓 것이 무슨 은공입니까 그러실 것 없습니다, 하였다, 영감은 소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터이니 말 해보라고 하였다,
안감이 사양(辭讓)을 해도 영감이 계속 다 그치니까 안감이 안암동은 서쪽으로는 성북동에서 흐르는 개천이 있고 동쪽으로는 영도사(永導寺)(지금은 개운사)에서 흘러 내러오는 개천이 있는데 비만 오면 두 개천의 물이 흘러 안암동은 섬 같이 되어서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 개천에 다리 하나 놔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소원이라면 자기의 이익추구(利益追求)에만 집착하는데 이 사람은 채소장수로서 동네일을 말하는데 감동(感動)하였던지 영감은 쾌히 승낙하고 동네 앞에 다리를 놓고 이 사람의 이름 안감을 따서 동네 다리이름은 안감내 다리 개천을 안감내라고 부르도록 했다,
또한 다른 전설이 있다, 안암동에서 오래 사신 노인(1900년생) 홍광윤 공(公)의 이야기에 따르면 안감내 다리는 신설동 한빛 길에서 용두2동과 경계 지점이 두 물이 합친 곳이고 그곳에 다리가 안감내 다리인데 상감님이 선농단(先農壇), 동구능(東九陵)을 거등 할 때에 편안히 상감님이 쉬었다 가셨다 하여 안감내 다리라고도 한다,
※ 학더미의 유래 안암동의 학(鶴)더미라는 지명은 북바위(고암(鼓岩)부근 (지금의 지하철 고대역 1번출구 쪽) 논 가운데 있던 더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옛날 이곳의 논들은 정능천이 흐르고 있어 물이 풍부하무로 비옥(肥沃)한 농토였는데 학 더미라는 논은 매우 비옥하여 세마지기에서 나는 쌀로 10식구가 살아갈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욕심 많은 주인이 곡식을 더 많이 내어 먹으려고 논 가운데 있는 큰 더미를 파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더미를 파 들어가자 속에서 학이 나와 날아가고 그 뒤로는 비옥했던 땅이 박토(薄土)로 변하였다
고대지하철역 1번 출구 광장 앞에 길은 동대문에서 신설동, 용두동 안암동을 거쳐서 원산가는 대로였는데 길옆 바위가 사람이 쪼구리고 않아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고개를 숙인 것 같은 바위가 있어서 북 바위라고 하였으며 옆에 편편한 바위를 닭 바위 (닭 발자국 같은 것이 있어서)라 불렸다 바로 옆 학교 쪽으로 계단식 논이 있었는데 그중 약 서너 평(坪) 되는 논을 흉년에 배가 곱아 밥 한 사발하고 바뀌어 먹었다고 하여 사발 논이라고 불렀던 곳이 1961년전 까지만 하여도 잘 보존 되었는데 도로가 확장하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