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초계정씨대종회에서 발간한 종사백선(1979년)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인용 글귀가 있다.
『조상의 착함이 있어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이를 밝혀내어 후세에 전하지 않음은 不仁 』이다. 몇 번이고 위의 글귀를 되새겨 보다가 결국 주회암 선생의 글에서 용기를 내어 정간공의 최종관직을 다시 살펴보는 글을 쓰게 되었다.
깊게 숨을 들이 마셔 머리를 맑게 하여 조상의 행적을 온전히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작 지방에서 이공계를 졸업한 나는 정간공의 행적을 다시 밝혀 종인들에게 알려야 하는 사명감으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으며 아는 바 지식도 없고 글도 서툴러 이에 대해 여러 종인들이 회초리를 든다면 달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Ⅱ. 줄거리
우리는 족보나 비문 등에 의해 대부분의 선조님들의 정보를 알고 있으며 2세조 정간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숙종때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을 지내고 검교사공, 예부상서를 지낸 뒤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고 알고 있었고 고려사에도 위와 같이 실려 있다. 그러나 여러해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선조자료를 검색하던 중 정간공의 기록이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는 내용 대신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여러곳에 있음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동안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널리 종인들에게 알려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Ⅲ. 본론
가. 종전의 정간공 기록
① 고려사 열전
문종때 과거에 급제하고 선종 즉위후 직한림 겸 사문조교에 발탁되고 전중내급사, 지제고, 지개성부사,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숙종때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을 지내고 예종이
즉위하고 검교사공, 예부상서를 지냈으며 사후에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
(※ 해설 : 검교사공, 예부상서를 지냈으며 돌아가신 이후에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
② 민족문화대백과사전(네이버에서 정문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자료)
유복자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뒤 문종때 비서랑이 되었고 선종이 즉위하면서 직한림원 겸 사문조교에 발탁되었다. (중간생략)
일찍이 서경에 호종하여 기자의 사당을 세우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죽은 뒤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 (※ 해설 : 사후에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
③ 두산백과사전(네이버에서 정문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자료)
예종이 즉위하자 검교사공 예부상서가 더해졌다. 왕을 모시고 서경에 가서 가자사를
세웠으며 후에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
(※ 해설 : 검교사공, 예부상서를 지냈으며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
고려시대의 정사기록인 고려사의 열전과 최고 권위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서술하고 있는 내용 및 우리 문중의 자료인 족보와 신도비등도 모두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 검교사공 예부상서을 지내고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런 기록만 존재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 정간공 관련 다른 기록
① 초계정씨(네이버에서 초계정씨로 검색하면 나오는 두산백과사전의 내용)
고려초의 문신 정배걸을 시조로 한다. 그는 사숙을 열고 후진을 양성하여 홍문공도(또는
웅천도)라 불렸다. 그의 아들 정문은 청렴.공정하여 형조를 10여년간 맡았으며 숙종때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을 거쳐 특진 좌복야 참지정서를 지냈다.
(※ 해설 :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을 지냈고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냈다)
② 정복경(네이버에서 정복경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
본관은 초계, 자는 세귀. 광유후 정배걸의 손자로 좌복야 참지정사 정문의 아들이다.
(※ 해설 : 문장의 내용으로 보아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낸 정문의 아들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앞에서의 정간공 자료와의 내용의 불일치를 약간의 애매한 상태로 봉합한 정도이다)
③ 정복경(네이버에서 정복경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두산백과의 내용)
본관은 초계이고 자는 세귀이다.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낸 정문의 아들이다.
(※ 해설 ; 정간공은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내셨다)
다. 그 외 종중 내부자료(족보, 비문, 신도비문 등)
족보, 비문, 신도비문 등에 기록된 정간공의 기록은 우리 종중 내부의 자료이므로 대외적으로는 인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참고자료는 될 수 있으나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자료는 될 수 없다고 본다.
라. 기록 차이에 대한 의문점
고려시대의 정사인 고려사에 명백히 사후에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냈다는 자료가 어떻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고려사의 기록에 필적할 만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어떤 자료나 유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지 않고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두산백과사전에 이러한 자료가 등재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 정복경 묘지문
새로운 사실의 등장 배경에는 정복경 묘지문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사람이 죽으면 묘지 내부에 묘지문을 같이 부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묘지문이 수백개가 발견되었는데 우리 문중에서는 정복경 묘지문이 유일하게 발견되어 지난번 대종회보 (22호 ; 22.9.1일 발행)에서도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묘지문은 묘지 내부에 보존되므로 오랜 시간이 흘러도 풍우에 글자가 마모가 덜되어 중세사 연구에 고려사, 고려사절요와 더불어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하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자료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정복경 묘지문 원본이 보관되어 있고 발견된 묘지문을 모아 번역하여 고려묘지명 집성이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 묘지문은 복경공의 사망당시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와 함께 글자 한자 한자가 우리 종중에게는 진귀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① 정복경 묘지문 내 정간공 관련 기록
공의 성은 정씨이고 이름은 복경이며 자는 세귀로 초계사람이다.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냈으며 추증된 시호가 정간공인 문의 아들이며,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이자 수태위문하시중 광유후 배걸의 손자이다(이하 생략)
② 정복경 묘지문 원문
公姓鄭諱復卿字世貴草溪人 左僕射叅知政事贈諡貞簡公諱文之子
弘文廣學推誠賛化功臣守大尉門下侍中光儒侯諱倍傑之孫 (이하 생략)
(※ 묘지문 원문에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냈다고 했지 추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묘지문을 해석한다면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내고 시호가 정간공에 추증된 휘 문의 아들이 다’ 라고 해야 당연할 것이다.)
③ 묘지문 탁본 자료-인터넷 자료 참조
바. 정간공 관련 역사기록
① 고려사절요 숙종 명효대왕 10년(1105년)
여름 6월에 위계정을 태자태부, 최홍사를 중서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 겸 태자태보, 윤관을 태자소보 판상서병부사, 이오를 수사도 태자소사, 정문(鄭文)을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 태자빈객, 임의를 추밀원사 이부상서, 왕하를 지추밀원사 병부상서, 오연총을 동지추밀원사, 이위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 해설 : 고려 숙종10년은 숙종께서 붕어하신 해로 아마도 숙종은 자신의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태자를 보좌할 믿을만한 대신들을 발탁하여 태자를 보좌하도록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보이는 위계정, 최홍사, 윤관, 이오, 정문 등을 모두 태자의 스승이자 태자를 보필할 것을 명 받았으며 일종의 고명대신과 같은 분들이다.
또한 충직한 신하들로 하여금 왕명출납과 군사기밀을 다루는 추밀원의 고위 관리와
백관의 인사를 관리하는 이부, 병부상서를 임명한 것은 모두 숙종 이후 태자 중심으로 안정적인 정국을 위한 포석으로 보이며 숙종은 이로부터 4개월뒤 붕어하셨다.
② 고려사 예종 즉위년(1105년)
11월 무술일에 종실(宗室) 영(瑛)을 수태위(守太尉)로, 원(源)을 검교태위 수사도(守司徒)로, 위계정(魏繼廷)을 수태위 문하시중 상주국으로, 최홍사(崔弘嗣)와 이오를 문하시랑 동 평장사로, 윤관(尹瓘)을 중서시랑 동 평장사로, 임의(任懿)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정문(鄭文)을 검교사공 예부상서로, 김경용(金景庸)을 태자태사(太子太師) 수사공으로, 왕하를 이부상서 추밀원사로, 오연총(吳延寵)을 지추밀원사 어사대부로, 이위(李緯)를 형부상서 지제고(知制誥)로, 고령신(高令臣)을 비서감 직문하성으로, 강증(康拯)을 지어사대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 해설 : 1105년 10월 숙종이 붕어하시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단행한 최고위급 관리의 임명에는 부왕이신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 여름 6월에 태자의 스승이었던 관리들을 대거 등용하여 요직에 앉히는 인사를 단행했다. 숙종때 태자의 스승들이었던 위계정, 최홍사,
윤관, 이오, 정문은 모두 승진하여 발탁하였으며 그 외 임의, 왕하, 오연총, 이위 등도
모두 승진시켜 선왕때부터 임금을 보필하던 중신들을 중용하였다.
③ 고려사 열전에 보이는 정간공의 졸기
숙종 10년에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 태자빈객으로 임명되었으며 검교사공 예부상서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급병으로 인하여 담가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으나 미구에 죽으니 왕이 매우 애도하고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고 국비로 장사를 치러 주었다.
※ 해설 : 음력 11월에 검교사공 예부상서로 임명되어 급병으로 담가에 실려갔다고 하니
정간공의 사인은 아마도 오래된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기 보다 뇌혈관 질환이나
심장 질환 등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추정된다.
필자가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다른 사람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니 내의를 보내 치료 받게
한 일도 드물고, 왕이 매우 애도하였다는 기록도 별로 없으며, 국비로 장사를 치러 주었다는 기록도 찾기 어려웠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시조께서도 많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정간공께서도 50대 중반의 나이에 애석하게 돌아가셨도다.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에 임명된지 6개월만이며 검교사공, 예부상서에 임명된지 1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다.
만약 정간공께서 10~20년만 더 생존해 계셨다면 새로운 임금인 예종을 보필하여 고려의 황금기를 이끄는 주역으로 교과서에서 정간공의 이름이 자주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또한 3세 3위분들께 더 많은 음덕이 내려져 집안이 더 번성하였으리라는 생각이다.
④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 임명 경위 추정
정간공의 집에 치료를 위해 파견된 내의는 정간공의 상태를 왕에게 수시로 보고했을 것이고 예종은 자신이 즉위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중신이 사경에 이르름에 매우 애통해 한 것으로 보인다. 신료들이 많지만 정간공께서는 태자시절에 숙종의 명으로 태자빈객으로 태자를 가르치던 스승이 아니던가? 묘지문에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냈다는 기록을 볼 때 예종 즉위 후 음력 11월에 검교사공, 예부상서에 임명되고 12월에 갑작스런 질병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세가 위중해 지자 다시 돌이키기 어려울줄 아시고 태자시절부터의 스승에 대한 도리와 부왕때부터의 중신을 우대하여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를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열전에 국비로서 장례를 치루도록 조치했다 고 했는데 고려사 열전 전체를 살펴보아도 국비로서 장례를 치루어 주는 조치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Ⅳ. 맺음말
고려사 열전에 명백히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고 기록된 사실이 있는데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기타의 백과사전등에서 아무런 근거없이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냈다고 기술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며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각 백과사전 내에서도 서로 자료간 불일치가 되는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고려사는 정간공이 돌아가신지 약 350년이 지난 시점에서 편찬위원들에 의해 자료가 수집, 정리되어 발간된 자료이며, 정복경 묘지문은 복경공이 돌아가실 당시에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이며 1차적인 역사자료이다.
사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어떤 자료를 우선시하여 채택해야 하는지는 아주 쉽고 간단한 문제 이지만 현재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내용도 무시하기는 어려우므로 우리 종인들부터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