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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의는 2013년 60-70학사회 신년예배후 신년특강시간에 가의해주신 주옥같은 말슴입니다
제개인적으로 여러면에서 도전을 받고 실천하고자하는 다짐을 갖게한 말씀이었지요
제목: 생활의 헌신
본문: 스가랴 14:20-21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몇주전에 EBS 방송에서 “자본주의”에 관한 특집을 하였습니다. 그 마지막 장면에 마하트마
간디의 일곱가지 악덕에 대한 언급을 한 장면이 페이스북에 캡쳐되어 돌았습니다. 간디는
다음과 같이 일곱가지 사회의 악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철학없는 정치, 도덕없는 경제, 노
동없는 부, 인격없는 교육, 인간성없는 과학, 윤리없는 쾌락, 헌신없는 종교 가 그 일곱가지
악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앞에 언급된 6가지 악덕들은 결국 마지막 “헌신없는 종교”때문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 헌신없는 종교에 대한 비판은 다른 말로 더욱 종교생활에 시간과 몸을 바쳐
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도 그런 의미가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
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어떤 것도 잃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자기 가족의 안정을 위해서 찾는 그런 종교를 말하는 것이라면 “너네 시
간과 물질을 더 희생해야 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로 하는 지나친 헌신은 맹신과 광신에 가까운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헌신있는 종교가 나머지 다양한 삶, 정치, 경제, 부, 교육, 과학, 쾌락에 부정적인 이
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신없는 종교”라는 비판에 대한 응답을 함에 있어서 중
요한 논점은 어떤 헌신이냐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헌신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부분, 교회안에서의 헌신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비
근한 예로 주로 헌신이라는 말뒤에 예배라는 단어가 붙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헌신예배를
드린다 하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만 대게
그 의도는 헌신예배를 드리는 부서의 사람들이 그 부서의 일에 헌신하겠다는 것으로 시작해
서, 조금 더 넓게는 교회일에 헌신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같습니다. 헌신예배가 무
엇입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짜 성경적 헌신은 교회일에 헌신하는 것, 교회안에
서만의 헌신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헌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헌신은 말 그대로 하면 드릴 헌에 몸 신자를 써서 몸을 어떤 대상에게 드리는 것입
니다. 몸을 드린다는 말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의 상황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의 제사의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짐승의 몸을 불태워 바치는 방식
으로 헌신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몰록을 섬기는 이방인들은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불태
워 바치는 방식으로 제사를 통해 신에 대한 헌신을 보이기까지도 했습니다. 엘리야와 대결
하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면서까지 자신들이 헌신과 간절함을
보이려고 하는 것도 성경을 보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드리는 자들의 간절함의 표현이 제
사를 통한 신에 대한 헌신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은 쓸데없이 자
해하거나 자신의 자녀를 드리는 인신제사를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구
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며 헌신하도록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며 헌신할 것인가는 하나
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알려 주셔서 구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막과 제사장에 관한 자세한 규례들을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제사를 통해 헌신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록이 출애굽기
25장에서 31장까지 길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출애굽기 28장 36절에서 38절을
찾아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 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두
어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과 관련된 죄책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
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여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받으시는 성물, 그 제사, 그
예배, 그 헌신을 받으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였습니까? 당연히 구별되고 거룩한 제물을 사용
하여야 했습니다. 당연히 구별되고 거룩한 그릇들과 용기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제
사를 드리는 사람들인 제사장들을 구별되고 거룩하게 구별해야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갖
추고도 하나님은 "여호와께 성결"이라 쓴 순금패를 제사장이 머리에 띠로 띠고 하나님앞에
나오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구약의 제사, 구약의 예배, 구약의 헌신은 시간과 공간을 떼어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것을 드려야 제대로 된 예배요 헌신이기 때문에 예물도, 예
물을 보관하는 그릇도 거룩한 것이 있고 거룩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
해, 이런 제사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 무엇인지를 배
웠고, 성막과 성소안에서만 제사를 드리고 헌신할 뿐 아니라, 이 거룩을 생활로 가져오는
법을 또한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제사를 드리는 일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레위기에도 19장에 보면 제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거룩을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해야 하
는 지 세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절과 2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한 이후 농사를
짓고, 재판을 하고, 집을 짓고, 사회생할을 하는 데 있어 어떻게 거룩을 추구하며 헌신된 삶
을 살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 율례대로 행하
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례대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제사를 드
리지 못하게 되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흉내내기도 하였습니다. 거룩을 배우고 참된 헌신
을 배우는 제사가 무너지니 생활과 삶속에서의 거룩의 추구도 무너졌습니다. 거꾸로 생활과
삶속에서 거룩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그저 종교적인 생활에서만 제사를 드리며 거룩을 흉내
내는 자리에께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원래 .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을
배우고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서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방향을 상실하고 그저 종교적인 생활속에서 흉내만 내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헌신을 종교적인 자리에서만, 예배를 거룩을 공간적으로 성전에서만, 시간적으
로 성일에만 국한시켜 버렸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성전과 성일에만 헌신을 받으시는 하나님
으로,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갇힌 하나님, 너무나 작은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레미야 7장을 보십시오. 먼저 4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
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왜 이렇게 강조하여
말합니까? 사회적인 삶속에서 거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삶에서 참된 거룩,
헌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또 21절과 22절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
니다. 열심히 종교적인 제사와 헌신을 하는 양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않았다고 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바벨론으로 가서 거기서 자녀를 놓고 집을 짓
고 통치자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라"라고 이야기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족
에게 매국노로 몰리고 오해를 받아 평생 눈물을 흘려야 했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
야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바벨론에게 넘어가게 하시고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전에 드리던 성전제사를 드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하신 것은 다시금 거룩과 예
배와 헌신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약속한 70년이 지나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과 성문이 다시 수복되기는 하지만 학개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동치 않을 성전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예언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함게 읽은 스가랴의 예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스가랴 14장으로 돌아
옵시다.
스가랴는 그날을 이야기합니다. 그날이 언제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하는 그
날은 마치 지리산과 같습니다. 지리산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
이 가면 갈 수록 지리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여러 봉우리와 골짜기를 가진 산들의 집합체
인 것을 알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말하는 그날을 종말, 말세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세, 종
말은 전체로 보면 하나의 날처럼 보이지만 여러 역사적인 봉우리와 골짜기를 거칩니다. 그
러나 분명한 것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는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국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포함하는 그날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그날입니
다. 그래서 우리는 말세라고 하는 시기를 이 시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가랴선
지자가 말하는 이 말씀은 언제 적용되는 말씀입니까? 지금 현재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그날이라는 때가 오면 뭔가 변화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구약에서 "여호와께 성결"이란 문구는 언제 어디에다 썼습니까? 제사장의 관위에다
매어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날에는 어디에다 기록한다구요? "말방울"에 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말방울이 무엇입니까? 요즘
의 클락션아닙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거룩하기 힘든 곳이 있다면 어디겠습니까?
차안입니다.(에피소드), 이천년도 더된 고대에 현대의 우리의 고민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이
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과거에는 구별된 것으로 거룩과 성결을 이해하고 그
것을 통해 제사와 예배와 헌신을 했다면 이제는 너무나 평범한 저자거리의 것에도 거룩과
성결을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스가랴의 말씀을 보시면 바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드릴 때 쓰는 솥이
있었지만 그 날에는 모든 솥이 거룩한 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쓰는 것만 거
룩하고 집에서 쓰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생각은 이런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하는 생각입
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전것들은 그림자가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실체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이 거룩하며, 모든 것이 성결하며 모든 것
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히 8 :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
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고 되어 있
습니다.
또한 히 9 :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
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고 그리스도께
서 참 실재가 되신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히 10 : 1은 "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림자 예배, 그림자 거룩을 추구할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
헌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참된 제사, 참된 예배
에 대해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잘 아는 말씀이요 헌신예배때 자주 듣
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
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
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
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의 영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을 드리는 영적 예배는 장소적으로 거룩한 장소, 시간적으로 거룩한 시간, 행위에 있어
서 찬양, 기도, 말씀보기 등과 같은 거룩한 행동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만 예배할 뿐 아니라 예배당 바깥에서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
는 주일에만 거룩할 것이 아니라 평일에도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목사님의 서재와 본당
만 거룩하지 않고 우리의 차안과 우리의 침실도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 우리의 거룩은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
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드
릴 헌 몸 신 헌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교회생활, 성경읽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
하는 것들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단언하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은
생활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신앙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 학교생활, 교우관계, 이성관계, 이 모든 생활
세계가 신앙과 연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헌신없는 종교에 대한 비판의 중요한 의미입
니다. 종교의 어원은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교에 헌신한다는 것은 종교제도에 헌
신한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소위 종교적인 일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
라 일상생활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누리는 생활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헌신의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
습니다. 종교생활, 교회생활에서의 헌신을 넘어서서 모든 생활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
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생활속에서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생활을
주께 예배하듯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
려야 합니다. 생활신앙으로 신앙생활하여야 합니다.
첫댓글 학사님들 이 특강내용 음미하면서 읽어보시지요
세상속의 삶을 다시 생각케 하는 좋은 말씀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