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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동주(尹東柱)론
(1917-1945) 북간도 출생. 1941년 연희전문 졸업 및 1943년 일본 동지사대 영문과 수학. 중학 재학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구 사나」, 「거짓부리」 등을 발표했으나 정식으로 문단활동 한 적은 없음. 초기시에서는 화해로운 유년세계에서 자족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습작기 동시에서 드러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이후 자기자신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자아 응시가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순수 동경의 세계와 현실의 갈등 관계로 분화된다. 내면적 인간의 자아 성찰과 이에 수반된 부끄러움의 미학을 통해 비극적 인식 속에서 자아의 윤리적 완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유고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가 있다.
2. 작가 연보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 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 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 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 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 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 시집, 1948)
3. 윤동주論 - 화해와 융화의 세계 열어 준 윤동주
한국 현대시인 중에서 특히 윤동주(1917-1945)의 생애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심성, 시인과 사회적 배경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들어 있는 전편의 시들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맑고 밝아서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색깔, 어디서 우는지 몸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흐르는 산 속의 샘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씻어 내린다. 그와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친구인 문익환 씨의 회고에 따르면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가 보여 주고 있는 전기적 요소와 시적 사유의 결합은 자의식의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시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근원적 질서 속에서 그의 본질은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주 속에서 느끼는 세월과 그 흐름이 가져다주는 변화, 그 모든 것은 생명과 죽음, 존재와 소멸의 내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괴로움은 어둡고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보편적 상황과 함께 어두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괴로움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분리되어 있는 자아를 직시하는 자기 성찰의 과정에서 그의 부끄러움의 시어가 탄생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대부분 진실을 추구하는 의식 세계와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윤동주는 유별나다고 할만큼 시대적 현실을 포함한 세계를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감지했다. 그의 예민한 촉수는 늘 세계를 향해 곤두서 있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 쉽게 쓰여진 시 전문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길의 일부
울함, 아까움 같은 것을 마음속에 조용히 새기고는 늘 변함없는 미소로 사람을 대하던' 그의 성품은 밤비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열쇠를 사람들 사이의 연대 의식으로 융화하려는 시 정신과 일치된다.
그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행위는 괴로워하는 자기가 희망을 가지라고 부추기는 또 다른 자기에게 내미는 악수였고, 나와 타자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연결의 통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들은 이웃과의 연대 의식을 우리 모두에게 깨우치는 따뜻한 화해의 시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4. 尹東柱의 삶과 문학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全文
데 이 책에는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래서 윤동주는 '죽어서 시인이 된 시인'이다.
앞에 적은 그의 시 서시의 깨끗함에 비해 그의 죽음은 너무나 처참하다. 맑게 살고 싶은 그의 뜻과는 정반대의 죽음이었다. 그는 2년 선고를 받고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죄목도 대단히 애매 모호하다. 43년 한국 학생 대표들이 중국 장개석(張介石) 총통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가던 도중에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조선 독립을 도와 달라는 탄원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일경(日警)은 한국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멍청한 학생은 빼고 공부 깨나 한다는 학생은 무조건 잡아갔다. 공부밖에 모르는 윤동주가 여기에 휘말린 것이다.
이 무렵 그의 고향집에 2통의 전보가 배달되었다. 먼저 온 것이 '2월 16일 東柱 사망 시체 가져가라.'였고 후에 온 전보는 '東柱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사망 시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구주 제대에 해부용으로 제공함.'이었다. 그러니 먼저 붙인 전보가 나중에 도착한 것이다. 시체를 가져가라 한 것은 해부용으로도 사용하지 못할 만큼 몸이 엉망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시절부터 문학서라면 보이는 족족 밤을 새워 읽어 젖혔다. 간도(間島) 화룡현에 있는 明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용정 광명중학교를 오락가락하며 다니다가 38년 연희 전문 문과에 들어가는 동안 그는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 방면의 공부에만 전념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또 다른 故鄕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全文
1. 동주형의 추억 - 文益煥
2. 人間 尹東柱 - 張德順
3. 先伯의 生涯 - 윤일주(윤동주 동생)
4. 청순하고 개결한 젊음의 시인 - 신경림(시인)
1. 동주형의 추억(文益煥)
¿吠淪歐 ±×지없지¸¸ 나는 동주형의 추억을 써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무엇인가 동주형에 대해서 내가 아는 대로 써야 할 것만 같은 심정이다. 그와 나는 콧물 흘리는 어린 시절의 6년 동안을 함께 소학교에 다니며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으로 뼈가 굵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평양으로, 거기서 또 만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가장 민감한 십대에 세 중학교를 우리는 함께 편력하였다. 동주형에 대해서 무엇인가 쓰고 싶은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나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서로 길이 갈렸다. 그는 문학 공부하러 서울로, 나는 신학을 공부하러 동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으례 서로 만나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속을 털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문학에 관해서는 언제나 내가 듣는 평이었다. 아무튼 나는 인생의 민감한 형성기에 그와 함께 유랑하면서 인생과 시를 배웠다.
않을 것이다. 이국땅 만주에서도 신경의 거리를 헤매다가 해방의 종소리를 듣던 그 정오에 내 마음을 견딜 수 없이 쓰리게 한 것은 동주형의 환상이었다.
동주야, 네가 살았더라면......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가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면 최근작을 보여 달라곤 했다. 그러면 그는 아무 말 없이 공책이나 종이 조박지에 쓴 시들을 보여 주곤 했다. 조금도 뽐내거나 자랑하는 기색이 없이 좋았다. 그렇다고 그는 애써 겸손하지도 않았다. 다만 타고난 동주다움을 가지고 살고 생각하고 쓸 뿐이었다. 나는 그의 시를 퍽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알기 쉬워서 좋았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였다. 방학 때마다 사 가지고 돌아와서 벽장 속에 쌓아 둔 그의 장서를 나는 못내 부러워했었다. 그의 장서 중에서는 문학에 관한 책도 있었지만 많은 철학서적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한 번 나는 그와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해가 신학생인 나보다 훨씬 깊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도 쉬지 않고 공부하고 넓게 읽는 그의 시가 어쩌면 그렇게 쉬웠느냐는 것을 그 때 나는 미처 몰랐었다. 그의 시가 그렇게도 쉬웠기 때문에 나는 그의 시는 그다지 훌륭한 것이 못되거니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것이 그렇게도 값진 것으로 우리 문학사상 찬연히 빛나는 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에 나타난 신앙적인 깊이가 별로 논의되지 않는 것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곤 했었다. 그의 시는 곧 그의 인생이었고, 그의 인생은 극히 자연스럽게 종교적이기도 했다. 그에게도 신앙의 회의기가 있었다
. 延專시대가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존재를 깊이 뒤흔드는 신앙의 회의기에도 그의 마음은 겉으로는 여전히 잔잔한 호수 같았다. 시도 억지로 익히지 않았듯이 신앙도 성급히 따서 익히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 곧 난대로 익어 가는 시요 신앙이었던 것 같다.
2. 人間 尹東柱 (張德順)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殿堂)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靜튀?嗤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十字架)
<요한>과 동주는 은진중학의 동기동창이다. 나는 형을 졸졸 따라서 동주와도 농을 했다. 형은 왕왕이 나를 귀찮아했으나, 동주는 어느 때나 다정히 나를 감싸주었다. 우애 있는 휴머니스트였다.
오줌을 싸고도 부끄럽지 않아서 글까지 쓰고 또 자랑까지 한다.?
아니었을지.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였다. 심심할 때 홀로 하숙방 툇마루에 앉아서 이 노래를 불렀다. 또 그 좋아하는 휘파람으로 이 곡조를 먼 하늘에 날려보내기도 했다. 또 다른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哀訴하던 시인 동주는 정녕 그 원대로 일찍이 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3. 先伯의 生涯 -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년 봄 3학년을 마칠 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의 유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기었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 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의 의욕이 고조된 듯합니다. 이즈음 백석 시집 사슴이 출간되었으나, 백 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正字로 베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평양 유학도 끝을 막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용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 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誌에 童舟라는 닉네임으로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 있는 형님입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날로 양복은 벗어 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우셨습니다. 소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맷돌도 갈며 과묵하던 그도 유우머를 섞어 가며 서울 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태평양에서는 戰火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졌고 --- 하숙방에서 홀로인 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후의 악수.
({쉽게 씌어진 詩}에서)
음이 있었습니다.
4. 舍弟 一柱 謹識 - 청순하고 개결한 젊음의 시인
글 -신경림(시인) / 월간 우리교육 96년 11월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
- 「서시」 전문
우리 나라 시를 한두 편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이 유명한 시를 나는 지금은 고인이 된 성래운 교수와 함께 기억을 한다. 70년대 중엽 초대면의 술자리에서 그가 처음 암송한 시가 바로 이 시였고, 그 뒤로도 그는 시를 암송할 때면 꼭 이 시를 앞에 놓았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는, 당시 유신 독재를 반대하다가 강단(연세대)에서 쫓겨난 그의 각오와 심경을 더없이 잘 보여주는 시여서였다.
고 앞이 부옇게나마 밝아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었다. 또한 이 시에 넘치는 깨끗한 젊음과 개결한 의지도 독자들을 사로잡는 요인이 되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귀절을 읽으면 권력과 돈이 판치는 흐린 세상에 한 줄기 맑은 샘물이 솟는 것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새로운 길」 전문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같은 표현은 지금 보면 미숙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의 힘찬 리듬은 쉽사리 나를 바로 잡았다. 더욱이 "민들레가 피고...... / 바람이 일고"의 청순한 이미지는 이 힘찬 리듬에 상승으로 작용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신작로와 논둑길을 가면 절로 힘이 났고, 길가의 작은 들풀이며 돌멩이 하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비로소 이웃 마을로 전쟁통에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동무를 찾아가기도 하고, 강까지 나가 물위에 떠다니는 청둥오리를 구경하기도 했다. 좋은 시는 사람이 사는 데 힘이 된다는 구체적 예를 나는 지금도 「새로운 일」에서 본다. 윤동주 시인이 어떠한 생애를 살았는가를 알기 전이었으니 이 힘은 시인의 생애로부터 온 것이 아닌, 시 자체가 가진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전문
는 간도의 명동소학교(용정에 있는) 시절 급우들과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어 동시 등을 발표했고 광명학원 중학부 시절에는 연길에서 나오던 잡지에 동시를 발표했으며, 연희전문 시절에도 문과에서 나오던 {문우}지에 이미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졸업하던 해에는 19편으로 된 자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등은 알아두는 것이 윤동주 시인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같다. 이 사실은 대개의 항일민족시인이 항일운동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시인이 된 데 반하여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시인으로 살려니까 항일사상가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 「눈감고 간다」 전문
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 문익환 시 「동주야」 부분
이네들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을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별 헤는 밤」 부분
한국 현대시인 중에서 특히 윤동주(1917-1945)의 생애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심성, 시인과 사회적 배경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들어 있는 전편의 시들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맑고 밝아서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색깔, 어디서 우는지 몸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흐르는 산 속의 샘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씻어 내린다. 그와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친구인 문익환 씨의 회고에 따르면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줄 詩를 적어불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까?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 내용의 이해
에 체념하지 않고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온 세상에 가득한 어둠을 한 번에 없앨 수는 없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 등불을 밝혀 그것을 조금 내몰 수는 있다. 그는 이렇게 어둠과 절망을 견디면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린다. 이 때의 아침이란 좁게는 개인적 번민으로부터의 해방일 터이고, 더 넓게는 정직한 영혼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괴로워할 수밖에 없게 하는 시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때를 의미한다. 마지막 연에 보이듯이 그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결코 체념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잡는다. 이 때 두 사람의 `나'는 곧 현실 속에서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자아와 그것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는 또 하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김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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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 해설
(1) 그의 최후의 시로 알려진 쉽게 쓰여진 시?에는 손을 내미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대립이 있다. 이것은 작품 외적으로는 식민지의 청년 윤동주와 지배국인 일본으로 건너온 유학생인 자신과의 대립이며, 또한 일상적 인간과 시인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밤과 아침의 대립이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제 대립되는 세계 사이에서 좌초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신을 악수시킨다. 따뜻한 체온의 나눔이 감지되는 이 악수의 이미지는 먼길을 돌아온 시인의 또다른 자기 응시가 되는 것이다.
(1) 이 시는 윤동주의 최후의 유작으로 알려진 시이다.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동경에 잇는 立敎大 영문과에 적을 둔 바 있는데 이 학교에 재학하던 1학기 말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그해 가을에 미션계통의 동지사 대학으로 적을 옮겼고 다음해에 일경에 체포되어 1944년 복강형무소에 투옥되고 1945년 2월 사망하였으며 이 시는 윤동주의 개인 적 생애가 극한상황으로 마감되는 시점에서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42년 동경에 유학한 후 이국땅에서의 고절감과 상실감을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흰 그림자 등에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적 감정을 역사인식의 정신적 높이로 승화시켜 형상화한 것이 쉽게 씌여진 시?이다. 입교대 유학생으로서의 이국체험이 단순한 이국정서(exoticism)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철저한 자기성찰과 시대인식으로 현상화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적 탁월성이 개인적 체험과 정서가 보편적 체험과 정서에 접합되는 데서 찾아진다면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이 작품이다. 윤동주라는 유학생 한 개인의 이국체험이 개체적 정서에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시대상황과 현실인식에 의식의 추가 깊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 시가 시인으로서 성숙한 단계에 와 있고 또한 숙명적으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하는 상황에서 씌어진 만큼 시의 정신적 깊이와 정서적 폭은 여타의 윤동주시와 대비적인 위치에 선다.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에서 검출되는 시의식과 정신적 맥락이 총체적으로 융화되어 투사됨에 이 시의 특징이 있다. 이를 몇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 본다.
(2) 우선 윤동주 시의 근간을 이루는 실향의식 및 상실감의 표출이다. 일반적으로 실향의식은 세 개의 영역으로 범주화되는데 개체적 생장지로서의 육신적 고향, 민족·역사인식으로서의 이념적 고향, 자연존재자로서의 본원적 고향이 그것이다.(김윤식, 한국근대작가논고) 주지하다시피 윤동주는 육신적 고향과 이념적 고향을 달리하고 있으며 그의 최후의 일생을 마감한 것도 적국인 일본 후꾸오까 형무소였다. 뿌리뽑힌 자로서의 실향의식은 단순한 노스탈지아의 개체적 향수에 서 역사와 민족의 상실이라는 집단적 향수로 전이된다. 윤동주 시에서의 실향의식이 육신적 고향에서 이념적 고향으로 변전되어 가듯이 그의 상실감 역시 개인주변적인 것에서 역사, 민족적인 것으로 변전되어감을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들/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에서 나타나는 상실감과 향수는 분명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는 곧 적국땅 육첩방에서 조국과 민족의 생존권 회생을 희원하는 비장한 자기성찰과 시대의지로 변모되고 있다. 육신적 고향과 이념적 고향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아픈 역사인식이 적지인 동경거리 한 모퉁이의 육첩방에서 진한 상실감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식은 또 다른 고향?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육신의 고향인 간도를 타향으로 인식하면서 그의 실향의식이 역사와 시대인식의 지평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식민지 상황이고, 실향민은 곧 식민지인 일 수밖에 없다는 의식의 심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개체적 자아에서 역사적 자아로의 변모는 곧 인식발전의 거리를 의미하고 그러한 변모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3) 두 번째 부끄러움 의식의 표출이다. 윤동주 시의 부끄러움 의식은 그의 성격적 양심과 윤리도덕적 양심, 그리고 종교적 양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리적 자아완성이 시대상황과의 괴리와 갈등을 가져 오면서 부끄러움 의식이 시원(始原)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윤동주의 자의식은 순수한 자아갈등이 첨예화된 자화상?과 역사, 민족의 지평으로 시점이 이동된 또 다른 고향?, 참회록? 등에서 현저히 검출된다. 이 작품은 후자의 경우에 선다. 개체적 자아와 집단적 자아,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사이의 간격과 부조화에서 부끄러움이 싹트고 있다. 이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은 시인으로서 전인적 발전을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여러 사람의 증언이 있듯이 그의 타인에 대한 이해에는 유연했으나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때로는 자학에 가까운 번민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엄격한 순수의 내면지향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완벽성으로 표출되고 있다. 삶의 준엄성과 역사의 엄숙성 앞에서 무기력했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과 시인의 임무와 사명에 대한 뼈아픈 자기 성찰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구절로 집약되고 있다. 막스 쉴러(Max Scheler)의 지적대로 '부끄러움'이 높은 가치를 지향케 하는 動力요소라면 그의 시에 나타나는 부끄러움 의식은 개체적 자아에서 집단적 자아로 상승하는, 그리하여 그이 시가 개인적 체험의 시가 아니라 현실인식과 시대의식이 밑받침된 집단적 체험의 시로 승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씌어지는 시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시적 자아가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로 변신할 수 있었음은 이러한 사실에서 기인한다.
(3) 세 번째 어둠의식이다. 이 어둠의식 역시 그의 초기시에서부터 일관되게 검출되는 시의식인데, 이 시에서는 <육첩방>이라는 밀실이미지와 어둠(밤비)과 밝음(등불, 아침)의 병치로 극명히 드러난다. 밀실이미지는 돌아와보는 밤, 또 다른 고향, 자화상 등에서 방, 우물 등으로 표상되고 있다. 이 밀실이미지는 불안과 고독으로 표상되는 무명의 공간으로, 때로는 자기성찰과 세계인식이 이루어지는 사색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을 짖는 개, 풍화작용하는 백골, 쫓기는 영혼 등으로 불안상황이 나타나고 있고, 돌아와 보는 밤?에서는 능금처럼 사상이 익어가는 사색의 공간이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이 양면적 성격이 동시에 형상화되고 있다. 남의 나라 육첩방, 그것도 밤비가 내리는 고절의 공간에서 시적 자아는 무겁게 침전되고 있다. 짙은 향수와 상실감, 고독과 불안의식으로 휩싸인 어둠의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무명의 공간은 곧 사색의 공간으로 바뀌어 시적 자아는 쉽게 시를 쓰는 자신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성찰하고 있다. 방으로 표상된 밀실 이미지를 단순한 불안과 고독의 무명공간으로만 그린 것이 아니고 사색과 성찰의 공간으로 변전시킨 것은 윤동주의 시세계가 성숙한 단계에 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또 다른 고향과 돌아와 보는 밤의 이원적 세계를 통합하는 정점에 서 있는 것이다.
(4) 한편, 어둠의식은 개인적 어둠의식과 집단적 어둠의식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청년기의 불안감, 정신적 방황, 삶의 회의 같은 것이 전자의 경우라면 조국상실이나 식민지 상황의 암울한 시대인식은 후자의 경우로 볼 수 있다. 이 시에서의 어둠의식은 개인적 차원을 벗어난 집단적 차원에 정신적 물꼬가 닿아 있다. 이 시에서 '시대처럼 올 아침'은 '아침처럼 올 시대'로 바꿔 볼 수 있는데(김흥규), 아침의 여명이 올 때까지 어둠의 시대상황을 한 줌 등불로 밝히고자하는 시인의 극복의지를 엿볼 수 있다. 어둡고 암울한 시대상황을 인식함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강인한 저항의식이 드러난다. 이러한 시의식의 표출은 새벽이 올 때까지,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등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게외다'(새벽이 올 때까지),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 가는 하늘 밑에 흘리겠읍니다'(십자가). 이와 같은 시대인식과 극복의지로 인하여 시적 자아는 눈물과 위안으로 최초의 악수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나는 인생은 어렵다는데 쉽게 시를 쓰는 부끄러운 나일 것이고, 또 하나의 나는 아침의 여명처럼 올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며 암울한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한 줌 등불이고자 하는 자랑스러운 나일 것이다. 이 시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와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등의 대립적 병치가 주목되는데 이는 결국 지금까지의 무기력했던 자아를 성찰하고 그에 게 주어진 역사임무를 성실히 수행코자 하는 최후의 결단에 선 비장한 모습과 그 의지와 결단을 상징적으로 확인하는 최초의 몸짓으로서의 악수의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최후와 최초는 극한으로 치닫는 가열한 시대상황과 이를 인식하고 극복코자 하는 실전천적 지식인으로서의 치열한 저항의식이 뭉뚱그려진 동일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악수는 부끄러운 자의 회한의 눈물과 자랑스러운 자의 극복의 위안이 조
우하는, 다시 말해 반성적 자아와 실천적 자아가 합일하는 의미로서의 악수이다. 따라서 이 시는 '쉽게 씌어진 시'가 아니라 시대의 암울과 역사의 어둠을 내몰고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는 저항과 위안의 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해설
1. 진정한 자아와 현실 인식
1. 작품 해설
(1) 서정적 자아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고, 그 잃은 것을 차지기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고 있다.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자신이 잃은 것은 돌담의 안쪽에 있고 자신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들어갈 수 있는 쇠문은 굳게 닫혀 있다. 여기서 서정적 자아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는 제1연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제6연에서는 그것이 '담 저쪽에 있는 나'임을 밝혀 놓았다. 결국 서정적 자아는 현실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나', 곧 일제에 의해 도덕적인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참된 자아를 회복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에서 제6연과 제7연은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형성 평가
1. 이 시를 욕망이라는 측면엣 분석할 때, 빈칸에 알맞은 시어는 ?
(풀이)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지향하는 것은 담 저쪽에 있는 '나'의 세계이다. 이 시에서 '아침'은 조국의 광복을 상징할 수도 있으나, 화자는 그것을 역사의 순환 과정으로 인식했지 추구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화자가 그것을 역사의 순환 과정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추구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도래가 필연적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답) 돌담, 쇠문
2. 이 시의 제3연에 나타난 서정적 자아의 심정은 ?
① 염려 ② 궁금함 ③ 절망감
④ 초조함 ⑤ 안타까움
(풀이)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길 위에 진 그림자를 드리우고'에서 볼 수 있듯이, '쇠문을 굳게 닫'혀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시의 제3연에는 좌절감과 절망감이 형상화되어 나타나 있다.
(정답) ③
3. 이 시의 마지막 연(제7연)의 내용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
①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한 확인
② 자신의 존재 동기에 대한 확인
③ 자신의 존재 모습에 대한 확인
④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확인
⑤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한 확인
(풀이) 서정적 자아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을 찾는 데 두고 있다. 여기서 삶의 의미란 '존재의 의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존재의 동기'란 어떻게 하여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곧 존재하게 된 계기를 의미한다.
(정답) ⑤
①②③④⑤
㉮㉯㉰㉱㉲㉳㉴㉵
③④⑤㉮㉯㉰㉱㉲ ①②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내용의 이해
제1연에서 나의 희망 또는 목표는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햇빛'은 이상이나 희망의 이미지다. '십자가'는 시적 화자의 종교관이나 역사관 또는 인생관과 관련된 목표를 뜻한다.
1. 시에 있어서의 상징
(1) 이 밖에도 주요한 것으로 상징(象徵)이 있다. 상징이라는 것은, 태극기가 우리 나라를 상징하고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듯이, 형식적으로는 은유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나 상징은 은유처럼 서로 다른 것 사이의 비슷한 성질 위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태극기와 우리 나라 사이에 유사점이 없으면서도 태극기가 우리 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나라의 국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그 위에 못박혔다고 해서 기독교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은 이미지와 비슷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르다. 시에 있어서의 상징은, 전통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미리 정해지는 것이 있다. 윤동주(尹東柱)의 '십자가'는 이 두 가지 성격을 함께 갖추고 있는데, 그 첫 부분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십자가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상징이 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문맥에 의해 그 의미가 특수화되어 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시인 자신이 도달하기 어려움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동경하여 마지않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의 목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는 시적인 상황 전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띠는 경우도 흔히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내용의 이해
1. 진정한 이상향을 찾아서
현실적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백골'이라는 피압박의 자의식이 '나'를 따라와 함께 눕는다. '어둔 방'으로 표상된 불안과 고독의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 본래적 자아인 '나'와 사회적 자아인 '백골'과 이상적 자아인 '아름다운 혼'으로 분열된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어, '백골을 들여다 보며 / 눈물 짓는' 자아 성찰의 몸부림을 한다. 그러나 '나'는 '고향'과 '백골'을 벗어나 '또 다른 고향'과 '아름다운 혼'의 차원으로 승화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고향'과 '또 다른 고향', 그리고 '백골'과 '아름다운 혼'은 화합을 이루지 못한 채 끝끝내 대립을 이루게 된다.
1. 해설
자의식 - 자아성찰 - 나 현실 - 바람 -
2. 문제
1. 이 시의 "또 다른 고향"에 대한 설명으로 알맞지 않은 것은 ? (정답 ④)
① 고향과 대립되는 이미지이다.
② 백골이 따라올 수 없는 공간이다.
③ 아름다운 혼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④ 자아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된 공간이다.
⑤ 우주로 무한히 열려져 있는 개방적 공간이다.
2. 이 시에서 "또 다른 고향"의 문맥적 의미로 가장 알맞은 것은 ? (정답 ③)
① 현실의 고뇌를 벗어난 탈속적 세계
② 절대자에 귀의한 영원한 안식의 세계
③ 시대의 어둠을 극복하는 실천의 세계
④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세계
⑤ 순진무구한 동심이 가득한 추억의 세계
(풀이) 그 이유는 "또 다른 고향"은 백골 몰래 가는 곳인데 백골은 눈물의 대상이요, 그 눈물은 백골이 바람에 풍화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고향은 풍화를 거부하여 눈물이 없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조 놓은 개는 새벽을 밝히기 위해, 밤을 새워 어둠을 짖음으로써 풍화하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데, 내가 개에게 쫓기우듯 개와 더불어 어둠을 쫓음으로써 이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 다음 빈 칸에 들어갈 알맞은 시어는 ?
자의식 - 자아성찰 - 나 현실 - 바람 -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시의 시작
두 번째로 이 시에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이념에 대한 순결한 시인의 의지이다. '그의 생명인 심지',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라는 시행이 바로 그것이다. 등심(燈心)인 '심지'는 동음이의어인 마음에 품은 의지라는 뜻의 '심지(心志)'를 표상하며, '깨끗한 제물'과 신을 섬기는 '선녀'로 비유된 촛불의 자기 희생은 곧 어떤 이념에 대한 순결한 의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빨래줄에 걸어 논
지난 밤에 내 동생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동시의 모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화가의 모습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일상의 나와 원초적 나의 갈등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높은 것일수록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우물물은 동시에 밝은 것을 어둠에 의해서 보여주는 의미론적 역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물 속에 비친 하늘은 밤하늘이며, 그 계절 역시 가을로 되어 있다. 태양이 있는 대낮의 봄하늘과는 상반된다. 시냇물은 공자도 탄식했던 것처럼 주야로 쉬지 않고 흘러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한 유동적인 물을 한 곳에 가두어 고이도록 한 것이 우물물이다. 그것처럼 윤동주의 우물 속에 비치는 달 구름 바람 역시도 그 의미의 공통적인 요소는 다같이 물처럼 흐르는 것이지만 한 공간의 프레임 안에 유폐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우물속에 비쳐 있는 「사나이」로서 발견되는 「나」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우물물의 물질적 이미지를 통해서 쉽게 그 코드를 해독할 수 있게 된다. 우물처럼 심층적 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는 나, 그리고 시간이 정지된 원초적인 어둠의 공간인 하늘을 바닥으로 디디고 있는 나… 그것은 모태 속에 있는 나, 어둡고 무거운 생명의 양수 속에 빠져 있던 나의 영상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경계적-고립적-심층적 공간인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한 사나이」…모태의 우물물인 그 양수속에서 살고 있는 원인간으로서의 그 「나」는 누구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나인가.
우리가 흔히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라캉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상징계에 속해 있는 「나」인 것이다. 상징계속의 나란 바로 언어로 인식되는 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제도나 법규-규범, 그리고 외부에서 작용하는 온갖 기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인 것이다.
그러한 나는 「어머니의 몸」의 일부로서 모태 속에 있었던 현실계의 나와는 아주 딴판인 나인 것이다. 그러나 상징계속에 있는 우리는 언어 이전의 그 현실계속의 나와는 만날 수가 없다. 이 현실계와 상징계사이에 존재하는 나가 바로 우물물속의 사나이로 드러나고 있는 경상속의 나인 것이다.
라캉의 이론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 시의 텍스트 속의 두 「나」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면 그 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나는 우물을 찾아가 의식적으로 들여다본다. 그 행위는 바로 모태 속의 나와 만나서 그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행위와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우물속을 들여다보기를 그만두고 떠나버린다. 왜냐하면 반나르시스 행위로서 나는 그 사나이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볼 때에는 미움이 연민(가엾음)으로 바뀌고, 다시 떠나면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러한 미움과 사랑의 앰비밸런스(양가성-양가성)로서의 「나」(자신의 원모습)는 결국 추억의 나, 부재하는 나로서 정착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의 나인 것이다.
일상적인 나와 원초적인 나와의 끝없는 갈등, 그러면서도 그것과 결합하려는 나르시스와 반나르시스의 드라마가 윤동주의 시를 탄생시키는 자화상인 것이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식민지 백성과 환자
3연의 산문시 형태로 이루어진 이 시는 대상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시키는 한편, 현장감을 주기 위해 현재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묘사에 의한 시각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내용의 이해
* 북간도(北間島) 명? <지리> 간도 지방의 동부, 곧 두만강과 마주한 지역.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경지는 적고 임업이 성하며 광물 자원이 많음. 조선 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함.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내용의 간단한 이해
1. 어둠에서 빛을 탄생시키는 `마술'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신화적 인간
26. 다음 시조의 "두터비"와 가장 유사한 시적 기능을 하는 시어는 ?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달아 안자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白松骨)이 떠 있거널, 가슴이 금즉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험 아래 자빠지거고
모쳐라, 날랜 낼싀 망졍 에헐질 번하괘라.
① 토끼 ② 독수리 ③ 거북 ④ 용궁 ⑤ 프로메테우스
(해설) '파리'를 괴롭히는 '두터비'의 행위를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의 횡포라고 할 때, '두터비 - 파리'의 관계는 '용궁(용왕) - 토끼'의 관계와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거북'은 용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정답) ④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1. 간단한 이해를 위하여
13. 참회록
≪학습 목표≫
≪지도상 유의점≫
1. 사전에 '과제 학습장'을 제시하여 과제를 부과한다.
2. 실제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미리 생각하고 조사 . 정리해 온 '과제 학습장'을 바탕으로 토론식 내지 질의응답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여 ― 이 때 과제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수정 및 보충 설명을 하여 종합, 정리한다 ― 학습자 중심의 문학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유도해 나간다.
3. 문학 수업은 교사 위주의 일방적인 문학 지식의 주입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학습자의 문학적 체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학습자(수용자) 중심의 능동적, 적극적 문학(작품) 이해, 감상이 이루어지도록 교사는 적극 신경을 써야 한다.
≪본문≫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萬)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
≪과제 학습장≫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작자 윤동주는 언제나 의식은 선행하고 행동이 따르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교수-학습 전개≫
▷작가 윤동주에 대해 조사해 온 바를 발표해 보자.
▶윤동주(1917∼1945) : 시인. 북간도 명동촌 출생. 1934년 일경에 피검되어 1945년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옥사했다. 1934년 12월 24일로 부기(附記)된 '삶과 죽음', '초·한·대' 등이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적인 속죄양 의식과 자아 성찰의 깊은 내면의 고백을 담고 있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친구인 정병욱 등이 시 92편을 모아 간행)가 있다.
▷본시 교수-학습 목표 제시
1. 시어 및 시구의 상징적 의미
▷이 시는 상징적인 시어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자책과 부끄러움과 외로움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이 시에 사용된 시어 및 시구들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이 시를 이해.감상하는 출발점이 된다. 다음 시어 및 시구들의 상징적 의미를 말해 보자.
▶ 구리 거울 : 패망한 조선 왕조의 유물로 화자 자신의 정신을 비춰 주는 매개체
2. '거울'의 이미지
▷이상의 거울은 유리로 된 현대적 제품이고, 윤동주의 거울은 구리로 된 전래(傳來)의 것이다. 이러한 양자의 물질적 차이로 인해 성격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를 토대로, 이상의 거울과 윤동주의 거울의 성격 차이를 비교, 설명해 보자.(<참고자료 2> 참조)
▶(1) 이상의 거울 : 현대인의 자아 분열과 관계된 것으로 분열된 자아를 관조하고 절망하는 거울이다.
(2) 윤동주의 거울 : 역사의 유물로 남겨진 거울이며, 거기에 비친 '나' 또한 역사의 유물이다. 따라서 '나'이면서 나를 비춰주는 거울로서, 투철한 역사 의식을 동반한 끊임없는 자아의 내면 성찰(-역사의 성찰)이자 '나' 자신이기도 하다.
3. 주제
▷이 작품은 일제 때 쓰였으나(1942), 광복 후에 발견(1948)되어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 실린 시이다. 시어의 상징성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이 시의 주제를 말해 보자.
▶(1) 투철한 역사 의식을 동반한 끊임없는 자아 성찰
(2) 역사적 자기 성찰을 통한 진실된 자화상의 발견과 참회
(3) 역사에 대한 책임감과 참회
4. 참회 내용
▷이 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의한 역사적인 삶, 즉 무능한 자신에 대한 참회적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 시에서 참회의 의의는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단순한 개인의 과오가 아닌 '역사 속의 자아,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참회'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위와 같이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이 시에서 찾아보자.
▶어느 왕조의 유물
▷3연으로 볼 때, 참회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시인의 생애를 통해 지속되어야 할 근본적인 삶의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의 참회는 각각 그 참회 내용이 다르다. 각각의 참회 내용을 이 시를 토대로 설명해 보자.(<참고자료 1> 참조)
▶(1) 첫 번째 참회 내용 : 나는 지금까지 바람직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2) 두 번째 참회 내용 : 그러나 나는 행동화하지 못하고 내면적 부끄러움에 그치고 말았다.
5. 갈등 요인
▷이 작품의 창작 동기는 무엇일까?
▶욕된 역사에 대한 비판 의식과 그릇된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나약하고 소극적인 자신에 대한 참회 의식이다.
▷이 시의 화자(서정적 자아)는 어떤 사람일까?
▶(1) 역사라는 이름의 거울을 대하고 있으며,
(2) 그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망국민의 치욕적인 모습이며,
(3) 화자는 그 치욕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자성(自省)하는 사람이다. 그 자성 끝에 '역사의 때'를 벗기는 일이 자기가 해야 할 일임을 알고 그 일에 착수한다.
▷이런 화자는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의 요인은 무엇인가? 1, 2연을 근거로 설명해 보자.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희망도 없이 무의미하게(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본시 교수-학습 내용 요약·정리
▷차시 예고 및 과제 제시
≪평가 문항≫
1.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어느 즐거운 날'의 구체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10자 이내로 써 보자.
☞ 조국 광복의 날
2. '구리 거울'과 동일한 매개물이 나타나는 것은?
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②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에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③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④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⑤ 가자 가자 /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백골 몰래 /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3. 이 시의 주제와 관련이 없는 것은?
① 진실된 자아상의 발견 ② 민족적 현실에 대한 참회
③ 분열된 자아에 대한 성찰 ④ 미래 지향적인 자아 성찰
⑤ 역사 의식을 동반한 자아 성찰
4. 이 시를 단순한 개인적인 참회가 아니라 역사와 민족에 대한 참회로 이해할 수 있는 직접적인 단서가 되는 시구는?
① 구리 거울 ② 어느 왕조의 유물 ③ 즐거운 날
④ 어느 운석 밑 ⑤ 슬픈 사람의 뒷 모양
5. 화자가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 때문인가? 1, 2연을 근거로 설명해 보라. (35자 내외)
☞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희망도 없이 무의미하게(무기력하게)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1.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자기 응시와 성찰'을 통해 망국민으로서의 자신의 무력한 모습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참회하는 시인의 내면을 잘 보여 준다. 제1연은 망국민의 욕된 자화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제2연에서의 시적 자아는 자신의 삶 전체를 참회하고 있다. 그러나 제3연에서 시적 자아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무기력하게 절망만 하고 있는 자신을 미래의 즐거운 날에 또다시 참회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시적 자아는 현재의 참회가 근본적인 의미에서 참다운 참회가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단지 그것은 자성적인 삶의 내면성을 확보한 '부끄러운 고백'일 뿐이다.
이 시에서 진정한 의미의 참회는 현재의 자성적인 참회 자체가 반성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것은 제4연과 제5연을 통해서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난다. 흐린 거울을 전심전력으로 닦아 낸다는 시적 자아의 진술은 자아 성찰의 성실성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시적 자아는 현실의 자아를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하면서 고독하고 슬픈 자화상을 확인한다. 한편, 이 시의 핵심적 시상인 '거울'의 이미지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일제 강점기 시인들의 '자화상'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참고 자료≫ 2. 윤동주와 자기 성찰
윤동주 시의 출발점은 '자기 성찰'이다. 그의 자아 의식에는 그 골똘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사심 없는 초연함이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그의 자아 의식이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것은 아니다. 한쪽으로 그것은 관조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기묘한 자기 감응과 몰두를 나타내는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실존적 자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이 실존적 자각은 회의와 절망 가운데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삶의 밑바탕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는 행위일 수도 있고, 또는 보다 동적으로 삶의 가능성을 개척적인 생애 속에 구체화하고자 하는 자기 완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동주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동적인 자아의 자기 실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숙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가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하로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잠기고......
저--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서름.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딩구오......딩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목아지를 비틀어맨 한란계,
문득 들여다볼 수 있는 운명한 다섯 자
여섯 치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 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
가끔 분수 같은 냉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로 손구락질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8월 교정이 이상 곱소이다.
피 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세올시다.
동저고릿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
이렇게 가만가만 혼자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우에 섰다.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털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었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엿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가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통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으젓한 양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다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불 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 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인의 물레 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4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설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 함이어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따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 년 오래인 연륜에 짜들은 유암한 산림이,
고달픈 한몸을 포옹할 인연을 가졌나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 우으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 바람이
솨--공포를 떨게 한다.
멀리 첫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 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 날이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
정적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폭 젖었다.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세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
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 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세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아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빛 밤 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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