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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주문화유산답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오멍가멍
제247차 제주문화유산답사 후기
- 대구 도외답사, 달구벌로 달려가자 -
걱정은 걱정대로 붙들어 매는 편이 훨씬 건강에 이롭다. 답사회가 출동하는 시기가 되면 걱정하던 날씨가 예상과는 반대로 나타난다. 모두 푹푹 찌는 날씨를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면서 한 마디씩 한다. 아주 오래 전, 두 달 전부터 도외답사, 도외답사 계획 짜야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보채던 때가 한 참 되었다. 좀이 슬 듯 야금 야금 일자가 다가와 이젠 현실이 되었다. 티끌이 모여 먼지가 되고, 먼지가 쌓여 부를 이루나니 시간이 흘러 현실이 되고 보니 앞으로 전개될 장면이 기대되고 기대된다. 아침 8시30분에 스톤님을 동대구역에서 만나 함께 대구공항으로 간다. 누군가가 기다려 준다는 것, 즐거운 일이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더 큰 즐거움이다. 기다려주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는 삶은 참으로 퍽퍽하기 그지없다. 활기차고 윤택하게 살아가려면 그저 기다리고 기다려 주는 배려가 필요할지니 대구공항에서 회원님을 만나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는지 모른다. 기다린 시간만큼 만나는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착장에서 기웃거리고 있으면 배낭을 맨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보인다. 반갑다. 기다린 후에 보는 얼굴은 더욱 반갑다.
답사를 준비하면서 대구(달구벌)가 서원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선비의 고장임을 알았다. 팔공산이 대구의 동북쪽을 보호하고 있고, 비슬산이 남서쪽을 보호하고 있으니 폭 파인 안에서 사람들이 포근하게 살아온 고장이다. 우선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로 먼저 방향을 잡았다. 원래는 회장님이 운전전문가로 예정되어 있지만 자원하여 회장님을 대신한다고 빈센트님이 손을 들었다. 회장님은 그래, 그럼 원하는 대로.. 입가에 웃음기가 한 웅큼 있었다. 자원할 수도 없는 지경이 되는 것 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광경이다. 회장님을 운전전문가로 모시는 일이 부담되기는 했었는데 일이 술술 풀리는 첫 출발이다. 사람이 걱정만 한다고 풀리는 일은 없다고 한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경우도 있고 환경이 풀어주는 경우, 주위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례도 있어서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끙끙 앓는 일이 없어야 건강에 좋다고 한다.
동화사 마애여래좌상(大邱 桐華寺 磨崖如來坐像)은 보물 제243호로 통일신라 작품이다(자료집 6번 참조). 동화사 정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들어왔기에 마애여래좌상을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하여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그림으로 보아도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이 감동을 준다.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大邱 桐華寺 毘盧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은 보물 제244호로 통일신라 작품이다(자료집 7번 참조). 나중에 둘러 본다고 남겨 놓았다가 결국 시간이 부족하여 미처 보지 못한 곳 인데 그림으로 보아도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어깨가 좁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거의 손상되지 않은 모양으로 남아 있어서 전해 내려온 과정이 궁금하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도 보물 제247호로 통일신라 작품이다(자료집 8번 참조).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 형상이 아주 감칠 맛을 준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단 당했다고 한다.
보물을 보려고 왔으나 정작 사소한 시간 때문에 스쳐 가기만 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마음에 담아 가는 보물은 과연 무엇인지 되새겨야 하는 답사여정의 시작 지점이다.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大邱 桐華寺 金堂庵 東西 三層石塔)은 보물 제248호로 통일신라 작품이다(자료집 9번 참조). 동탑은 2단의 기단 대부분이 나중에 보수된 것이라서 돌을 다룬 수법과 끝맺음 처리 부분에서 조화를 잃어버리고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의 두 면에 가운데에만 기둥 모양을 새기고, 반대쪽 면의 기둥 사잇돌을 밀어넣어 그 돌로 모서리기둥을 삼았다. 두 탑은 부분적으로 없어진 머리장식을 빼고는 조각의 양식이나 끝맺음 수법이 서로 비슷하고, 균형 또한 잘 이루어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유수암소녀와 오멍가멍이라고 하면 비유가 될 듯하다.
동화사 극락전(桐華寺 極樂殿)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90번 참조).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숙종(재위 1674∼1720)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5*3칸 규모이며,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이고 있는 건물이다.
동화사 부도군(桐華寺 浮屠群)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91번 참조).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모두 10기에 이르는 부도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어 자리잡고 있다. 스님이 용맹정진 수행하고 있어서 들어 갈 수 없었다. 시간 조정을 잘 했더라면 후회했지만 언뜻 언뜻 보이는 그림자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자료를 보면 형태는 비슷하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바닥돌이나 기단, 탐신, 지붕돌이 조금씩 다르게 조성되었다. 스님생김 생김도 다르고 열반에 이르는 방법도 달랐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부도군에서 볼 수 없는 것은 탑 몸돌에 승려의 이름을 새겨두긴 하였으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은 드물다는 점이다.
대구 동화사 당간지주 (大邱 桐華寺 幢竿支柱)는 보물 제254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10번 참조).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당간(幢竿)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두 기둥이 66㎝의 간격으로 마주보고 전체의 형태가 경쾌한 맛은 없지만 장중한 느낌을 준다.
대구 동화사 삼장보살도 (大邱 桐華寺 三藏菩薩圖)는 보물 제1772호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용 불화이다(자료집 60번 참조). 대구 동화사 지장시왕도 (大邱 桐華寺 地藏十王圖)는 보물 제1773호이다(자료집 61번 참조). 모두 그윽하고 깊이있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동화사에는 성보박물관이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를 잘 보관하고 있다. 대형 약사여래가 가운데 있고 우측으로 들어가면 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불교문화원을 둘러 볼 수 있도록 조성되었고 그 아래에는 박물관으로 각종 탱화를 전시하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부도에 있어서 사리를 보는 경우가 극히 어려운데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사리 또한 처음이었다.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사명당유정 진영(자료집 45번 참조), 목조약사여래좌상복장전적 7점(자료집 48번 참조), 아미타회상도 3점(자료집 49번 참조), 보조국사 지눌진영(자료집 52번 참조), 삼장보살도(자료집 60번 참조), 지장시왕도(자료집 61번 참조), 제석도(자료집 131번 참조), 천룡도(자료집 132번 참조), 염불암 극락구품도(자료집 133번 참조), 칠성도(자료집 134번 참조), 지장삼존도(자료집 135번 참조), 인악당대사 의첨진영(자료집 136번 참조), 부도암 신중도(자료집 217번 참조), 죽암당 대선사 선찰진영(자료집 218번 참조), 금당 아미타극락회상도(자료집 226번 참조), 대웅전 신중도(자료집 227번 참조), 감로도(자료집 228번 참조), 사천왕도 4점(자료집 229번 참조)이 있는데 불교문화 전문가 구담님이 오셨더라면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고 모두 입을 모아 한 마디씩 하였다.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탱화를 잘 보관하고 있는 자체로도 커다란 위안이 된다. 훗날 대구답사 자료집을 들고 하나씩 대조해 가면서라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돌아선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동화사에서 보냈다. 그만큼 살펴야 하는 문화재도 많았다. 동화사에만 36종의 문화재가 있으니 대구지역 문화재 240종의 6.7%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사찰인 셈이다.
팔공산 남쪽에 사찰이 횡대를 이루면서 들어서 있는데 부인사도 그 중에 하나이다. 다음에는 오동나무가 활짝 피어 있는 동화사에서 못다 살핀 문화재를 둘러 보는 것으로 하고는 부인사로 향한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1시를 넘기고 나니 속이 탄다. 문화관광해설사와 부인사에서 11시 30분에 약속이 되었는데 실례도 보통 실례가 아니다. 해설사 혼자서 제주 손님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쁘다. 하지만 열화와 같은 성화를 이길 수는 없었다. 민생고가 해결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 서민의 기장 기본욕구인 식욕을 일단 해결하기로 하였다. 해설사님에게 전화하고 양해를 구하려고 해도 연락 방법이 묘연하였다. 소화되지 않는 위를 붙잡고 점심으로 먹은 산채비빔밥을 온몸으로 비볐다.
부인사석등(夫人寺石燈)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제64번 참조). 8각 석등으로, 네모난 바닥돌 위에 3단의 받침을 두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화사석은 다른 절터에 있던 것을 가져다 복원한 것으로 4면에 창을 두었다. 지붕돌은 처마가 길고 얇으며, 여덟 귀퉁이가 하늘을 향해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받침만 남아 있을 뿐 그 위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조각도 섬세하고 부드럽다. 탑돌 중간에 금이 가 있는 상태를 제외하면 참으로 호감이 가는 문화재이다. 금이 있어서 밀면 툭 떨어질 것 같다. 화사석(火舍石)은 불을 밝히는 곳이다. 측면에는 4개의 화창이 개설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양식이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8개, 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2개의 화창만이 마련되는 경우도 있다. 불을 밝히면 바람을 막아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8개 구멍이 있으면 바람을 막는 방법도 다양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어떻게 막았는지는 설명이 없다. 시대를 거스를수록 화창 개수가 많아지고 있다.
부인사서탑(夫人寺西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95번 참조). 금당터 주변에 쌍탑으로 건립된 2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으로,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그 받침돌만 남아있다. 지금의 위치가 원래 있던 장소인지는 분명치 않다.
부인사부도 (夫人寺浮屠)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06번 참조). 4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각 부분이 모두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의 윗면에 연꽃을 두르고, 옆면에는 4마리의 사자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꼭대기에는 최근에 새로 만든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문화재를 복원한다고 하여 색이 맞지 않는 상태로 새로 만든 구조물을 끼워 넣거나 올려 놓거나 받치는 경우가 많다. 부인사 부도 머리장식도 마찬가지로 새로 올려놓았는데 어색함이 극치를 이룬다.
부인사지(夫人(符仁)寺址)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165번 참조).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의 명복을 빌던 법당으로 ‘부인(夫人)’이란 선덕여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부처의 힘으로 외침을 막고자 새긴 고려 초조대장경판을 보관하던 곳이었으며, 고려 무신집권에 항거해 일어나 승려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였으나,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이 절터에는 축대, 초석, 당간지주 등 당시의 석조물이 많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건물초석, 석탑, 석등들이 흩어져 있다. 당시 부인사의 규모를 알 수 있다. 고려초조대장경이 보관되는 규모라면 승려 2,00여명이 생활 했을 것 이고, 한창 번성할 때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만의 승시장(僧市場)이 열렸던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 절터에 포도가 자라고 있다. 달큰한 포도가 자라고 있다고 위안을 삼을 수는 없었다. 한 술 더 떠서 91세 어르신이 쪼그려 앉아 하신 말씀 “전부 팔아 먹었어”라고 몸은 성하시지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전한 말이 허전함으로 밀려왔다.
다음 답사지는 파계사이다. 스님이 파계된 곳으로 오해할 수 있는 명칭이다. 파계사 답사를 마칠 무렵에는 계곡이 한 곳으로 모인다는 파계(把溪)를 사용했다는 무게있는 의미를 알았다.
파계사원통전(把溪寺圓通殿)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87번 참조).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3*3칸에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파계사설선당(把溪寺設禪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89번 참조). 7*7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옛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파계사산령각 (把溪寺山靈閣)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190번 참조). 1*1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전통 민간신앙이 불교에 습합(習合)되어 나타난 전각 중 하나이다.
파계사적묵당(把溪寺寂默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91번 참조). 6*6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소박한 옛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파계사진동루 (把溪寺鎭洞樓)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92번 참조). 5*3칸의 2층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파계사기영각(把溪寺祈永閣)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93번 참조). 3*2칸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이제 팔공산을 내려간다. 팔공산에서 느껴야 하는 기운을 받기 전에 급히 내려간다. 신라 말에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에 고려 태조가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 당하였다. 그 때 신숭겸(申崇謙)이 태조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이 때 신숭겸,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한다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언급되어 있다. 왕건과 신숭겸과 관련이 있는 문화재나 지명이 많다.
신숭겸장군 유적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163번 참조).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묻고 명복을 빌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모셨으며, 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해설사님의 설명으로는 왕건이 신숭겸에게 300결의 땅을 하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300만평이 될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 당시 왕건이 신숭겸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신숭겸 장군이 전사하여 목도 없고 찾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훼손된 시신을 왕건이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바닥에 있는 북두칠성을 보고 거두어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충과 신뢰의 일면을 느끼고 유적지를 나선다.
이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불로동 고분군은 사적 제262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유적이다(자료집 67번 참조).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총 212기의 무덤이 있다니 그 당시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는 것 같다.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201번 참조).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1912년 그의 후손들이 세웠다. 시조가 남긴 업적을 후손에게 전한다는 이유 외에도 옛 현인을 모셔 백성들에게 민족의 정기를 심어주기 위한 뜻도 있었다. 3*1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솟을대문에는 태극 모양을 그려 놓았다. 또한 206. 문창공영정 (文昌公影幀)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206번 참조). 초상화는 지리산 쌍계사본과 가야산 해인사본이 있는데, 이 그림은 조선 철종 11년(1860) 경에 해인사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신선세계를 배경으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며, 비단 위에 9가지 색을 이용하여 짙게 채색하였다. 신선도 형식의 민화풍 초상화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지만 문이 잠겨 있는 관계로 감사을 못해 아쉬웠다. 다음에는 문중에 사전에 연락하여 먼길을 달려온 회원님이 실망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하겠다.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73번 참조). 불로천변 절벽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어 주변환경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호라는 이유로 많은 관심을 모으는 숲이며, 지정당시에는 “달성의 측백수림”으로 불려왔다. 측백나무는 중국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자라고 있어 식물 분포학상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서거정 대구십영 중 제6영 북벽향림(北壁香林 : 북벽의 향나무 숲)이 바로 이곳이다.
제6영 북벽향림(北壁香林 : 북벽의 향나무 숲)
古壁蒼杉鈺槊長(고벽창삼옥삭장) 長風不斷四時香(장풍부단사시향)
慇懃更着載倍力(은근경착재배력) 留得淸芬共一鄕(유득청분공일향)
옛 절벽 향나무가 마치 옥으로 만든 긴 창 같고, 바람은 그치지 않아 사시사철 향기롭네,
은근히 다시 북돋아 기른다면, 맑은 향기가 온 고을에 머물게 되리라.
백원서원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서원의 고장인 만큼 둘러 보려 했으나 문창공영당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출입이 어려워 발길을 돌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전날 사전답사 하고자 이곳에 왔었다. 승용차를 빌렸는데 골목길이 워낙 좁았고 막다른길에 와서 차를 돌려 나가려다가 귀퉁이 기초돌에 옆문을 긁혔다. 가슴을 도려 내는 것 같았다. 이 후 사전답사를 모두 접어 두고 속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수리 비용이 얼마나 들어갈지 아득한 마음이었고 아직 비용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에 마무리 되지 않는 상황에서 솔직히 오늘 다시 그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픈 마음이 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핑계김에 측백나무 숲에서 일정을 간단히 마무리 하고는 저녁식사 후에 야경일정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대구에 오면 맛을 느껴야 하는 음식이 10가지가 있다. 대구 10미 중에 하나가 바로 막창이었다. 경북대학교 후문으로 가면 복현동 막창골목이 있다. 숯불에 막창을 구워 먹는 맛이 참 고소하다. 한 번 삶아서 익힌 막창을 토막 토막 썰어서 숯불에 얹으면 노릇하게 구워진다. 쌈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저녁 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손님도 우리 일행 이외에는 없어서 숨가쁘게 달린 오늘 일정을 디돌아 보고 야간에 있을 답사여정에 회원님 모두 기대하는 눈치이다.
청라언덕 게스트하우스에 일단 짐을 풀고 바로 반월당 지하철 역으로 간다. 오래 전에 해설사와 예약을 했기에 시간 맞추어 가야 한다. 청라언덕 주인이 차에 같이 올라탄다. 공식적으로 해설을 어떻게 하는지 경험하고 싶다고 같이 타고 가자고 한다. 집 주인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기도 하였거니와 지리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갔는데 웬걸 도움이 아니라 원수였다. 6시50분에 해설사와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장소를 주인장이 모르는 눈치이다. 좌회전, 우회전, 이곳 인가 저곳인가. 오히려 내게 묻는다. 화가 나서 아니 그것을 나에게 물어 보면 어떻게 하냐고 큰소리로 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제주도 사람 참 이해 안 된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일행에서 멀리 떨어져 갈길을 가고 말았다. 그로 인하여 시간은 7시30분, 약속시간이 훨씬 지나 이미 해설사 일행은 출발하였을 것이고, 우리는 오리알이 되었으니 참 난감하였다. 단독으로 찾아간다고 첫 번째 답사지 관덕정을 찾았다. 물어 물어 찾았다. 이미 어두워져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고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순사님 전화가 왔다. 정말 반가운 전화였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고는 그곳에 기다린다고 한다. 성유스티노스성당이 다음 목적지인데 길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도대체 없었다. 가게마다 들어가 물어도 모른다고 한다. 학생에게 물어도, 지긋한 어른에게 물어도 모른다. 관덕정 부근에서 맴돌기를 얼마나 했을까 다시 순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기다리다 못해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순사님이 오겠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움직이면 더욱 멀어지는 법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이렇게 야간답사를 시작하였다. 성유스티노신학교(聖유스티노神學校)는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204번 참조). 초대 대구교구장이었던 안세화 주교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1913년에 착공, 1914년에 완공한 신학교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 가까운 서구식 건물로 벽돌이 정교하게 쌓여진 우수한 건물이다. 대구카톨릭대학교 교정에 위치하여 일반 사람이 찾지를 못한 것 같다. 주위 모두 엄숙하고 경건한 기운이 감돈다.
근처에 있는 성모당(聖母堂)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107번 참조). 안세화 주교가 1918년에 루르드 성모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형상까지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각 부분의 비례구성이 아름답고 벽돌의 짜임이 정교한 건물로 지금까지도 그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어두운 밤에 기도하는 신도가 많이 보인다. 방해할 수 없어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기도와 함께 우리 일행도 사고 없이 답사를 마칠 수 있도록 빌었다. 야간 답사의 단점이 바로 사진촬영이다. 원하는 질적 수준을 얻을 수는 없었다. 문차일드님은 밝을 때 다시 오자고 하였다. 숙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아침 운동 삼아서 다시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앞서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환경이 해결하거나, 스스로 해결되거나 남이 해결하거나 하여간 걱정되는 뭔가가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120번 참조).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평면을 가진 소규모 성당이다. 전체 외벽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고 외벽의 붙임기둥에는 회색 벽돌을 쌓아 외관을 구성하였다. 지붕은 함석판 거멀접기로 마감한 박공지붕의 형태로 되어 있다. 대구에 현존하는 근대 서구양식 건물들 중에서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성당 건축의 양식적 특징과 한국근대건축사의 양식적 흐름을 대표하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된다.
자료에 의하면 거멀접기(Stand Seam System)를 했다고 하는데 도무지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계로 강판을 눌러 접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멀리서만 바라보니 거멀접기가 뭐던간에 도통 분간이 일단 안 되는 상황이었고, 수녀 모두 기도하는 시간이라서 가 볼 수 없는 시간이었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만 보고는 발길을 돌린다. 한 가지 천주교의 성지로서의 역할은 분명히 앞으로도 할 것 이라는 확신이 영적으로 느껴졌다.
같던 길을 더듬어 돌아 나온다. 3.1만세동산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기에 한참을 왔던 길을 다시 밟고 간다. 동산선교사 주택은 청라언덕에 있다.
선교사스윗즈주택(宣敎師스윗즈住宅)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102번 참조). 미국인 선교사가 살았던 주택으로 1910년 또는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현재는 선교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교사챔니스주택(宣敎師챔니스住宅)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103번 참조). 선교사 Reiner가 살던 집으로 191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의료박물관이다.
선교사블레어주택(宣敎師블레어住宅)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104번 참조). 선교사 블레어(Blair)와 라이스(Rice)가 살던 집으로 1910년경에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는 교육역사 박물관이다.
당시 선교사는 단독주택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구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지 모르지만 일반 시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청라언덕 노래를 합창하면서 마무리하는 야경투어 일정이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 ~ ”
3.1만세운동길로 내려오면 길 건너에 계산성당이 바로 보인다. 계산성당은 사적 제290호로 지정된 대한제국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68번 참조).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초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시기에 맞추어 성당을 오가는 신자 또한 부쩍 많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시기에 맞추어 대구지역 천주교 성지를 순례하고 있으니 성스러운 기운이 몸에 더욱 달라붙는다. 천국이 가까워지는 기운을 받았으니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로 간다.
이상화 고택은 항일문학가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이 1939년부터 1943년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늦은 시간이라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항일 숨결을 호흡할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을 쉼없이 달려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였다. 새벽을 달려 하늘을 갈랐고, 팔공산을 횡단하면서 사찰에 있는 문화재를 두루 두루 보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밤에도 걸으면서 자세히 근대문화유산을 만져보았다. 대구흥사단에 계신분이 제주 흥사단에서 온 일행을 맞으신다고 하였다. 지긋하신 분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과일도 주시고 맥주도 주시고 고마운 원기를 주시고 가셨다. 사철난님이 잘 아시는 대구문화관광해설사님도 물어 물어 전화를 수차례에 걸쳐 한 끝에 결국 숙소로 답사회를 찾아 오셨다. 내일과 모레 일정을 수정해 주시고 중요한 정보도 주고 가셨다. 두 분이 숙소를 방문하고 난후, 향후에는 도외답사에 공식적으로 유관기관과 유대를 강화하는 시간도 포함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수준 높고 질 좋은 답사여정을 마련하려면 묻고 요구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도 잊지 말아야겠다.
제4부 행사는 뭔가 허전한 기운이 느껴지는 회원님을 위하여 52인 놀이로 마무리 한다.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답사회 열정과 대구 정열이 만나 불타올랐던 열기가 서서히 침잠하는 시간이다.
다시 대구 정열이 오르는 시간이다. 아침 7시인데 왜 아직도 안 일어나느냐고 사철난님이 남자 전용 숙소 문을 열어젖힌다. 성별 구분을 잊으셨나 보다. 아니 이젠 남자 여자 구분이 필요 없는 지경이 되었나 보다. 여행은 무박으로 지내야 제맛이라고 했는데 잠을 안 주무심 모양이다. 우선 아침을 해결해야 한다. 회원님이 일어나기 전에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다. 앞집 식당도 닫은 상태, 주위를 둘러보아도 열려 있는 식당이 없다. 어제 밤에 사전 답사해야 하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냥 넘어가고 아침이 되어서야 몸을 움직인다. 지나가는 과객이 식당을 찾는지 묻는다. 어떻게 알았을까. 대구시민은 친절이 몸에 배었나. 지레 짐작으로 가볍게 던진 말 인가? 큰 길가에 열어 놓은 식당은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맛도 있다고 한다. 과객도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밝아 오는 아침과 함께 오늘의 일정도 무사히 잘 진행되리라는 예감이다.
청라언덕게스트하우스에는 문화 시설이라고는 없다. 그저 화장실과 목욕시설 외에는 달리 없다. 텔레비전, 인터넷, 소파, 전화와 같이 필요한 시설이 하나 없고 간단하게 잠만 자고 나오라는 심산이다. 그 덕에 저렴하게 지낼 수 는 있지만 문화재를 답사하는 문화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과 단절되는 역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와 소통하는 작업이 역사라고 했는데, 역사 속에서 문화를 찾는 일은 이곳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서둘러 아침을 해결한다. 순대 해장국을 대부분 선호했는데 사철난님은 새싹비빔밥이다. 새싹과 사철난님. 어울리는 궁합이다. 여행의 3대 구성요소라면 먹고, 자고 보는 거다. 자고 보는 일에만 치중했다는 생각이다. 아침이지만 먹는 즐거움도 큰 법이다. 행복한 세상은 아침으로부터, 아침은 먹는 것으로 부터다.
달성공원 앞에는 번개시장이 매일 선다. 바다에서 파시가 이루어졌다면 이곳에서는 육지의 파시인 셈이다. 폭우가 내리지 않는 이상 매일 장이 선다고 한다. 달성공원 앞길을 차량이 가득하다. 조금 일찍 왔더라면 중간에 끼어서 오도가도 못할 뻔 했다. 거의 파장 무렵이라 듬성듬성 빈 공간이 보이는 상황이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달성공원을 빙 둘러서 축조된 달성은 사적 제62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유적이다(자료집 66번 참조).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았고,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향토역사관이 정문 옆으로 있으나 이른 시간이라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는 잡는 다고 했는데...
대구 중심에서 북쪽으로 올라간다. 경북대학교박물관을 관람하고자 간다. 경비가 10시에 문을 연다고 했는데 30분이나 시간이 남아 야외에 전시된 석조물과 불상을 감상하였다. 반 지하에 무술명오작비는 요청해야 문을 열어 주기에 미리 부탁해 놓았다. 제주에서 왔다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였다. 시간도 앞당겨 10분 전에 열어 주었다.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이 4점 있다.
분청사기 상감연화문 편병(粉靑沙器 象嵌蓮花文 扁甁)은 보물 제268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2번 참조). 몸체 양 측면에 있는 덩굴무늬와 어깨부분의 연꽃 테두리를 바탕색 그대로 두고 있어 이채롭다. 몸체 크기에 비교해서 굽다리가 높아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각 부분의 비례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보물 제335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15번 참조). 당시 비로자나불의 얼굴이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인상인데 비해서, 이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과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깨가 좁아서 체구가 현저히 왜소해진 모습이며, 양 발을 무릎에 올리고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자세로 앉아 있다. 광배에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는 작은 부처 5구가 새겨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8각의 대좌(臺座)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동물상 등이 새겨져 있으나 상당히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목이 잘려져 나중에 붙인 흔적이 보인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奉化 北枝里 石造半跏像)은 보물 제997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29번 참조). 높이 1.6m 가량에 상반신은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과 다른 돌로 만든 둥근 연꽃무늬 발받침대만이 남아 있지만, 우수한 조각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반가상은 양식면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상과 비교될 수 있으며, 왼손의 위치, 오른쪽 무릎의 팽창, 사실적인 옷주름, 화려한 구슬 장식 등에서 뛰어난 조각기법을 나타낸다.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 戊戌銘 塢作碑)는 보물 제516호로 지정된 신라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8번 참조). 1946년 대구시 대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가 7, 8년 동안이나 행방을 알 수 가 없었는데, 그 후 다시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내용은 건립날짜와 저수지 축조내용 및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글자가 상당수 깎여나가 해석을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신라시대 수리시설이나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대구 시내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간다. 내일은 시내 답사를 하고 바로 공항으로 가는 편이 훨씬 편리하다는 대구문화관광해설사님의 조언에 따라 달성군으로 향한다.
달성 도동서원은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72번 참조).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 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낙동강가에 외부인이 출입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개를 넘어야 다다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에서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를 받기에 충분히 오래된 거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이 극찬했던 도동서원이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해 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서원이라는 설명에 더욱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올라가는 계단에 담긴 성리학의 철학, 김굉필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강학당 기초돌을 전국의 유림이 하나씩 보내와 쌓았다는 일화며, 단청을 칠하지 않아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할 수 있었고, 모란이 피어있는 흐린 날 습한 기운을 날리기 위하여 군불을 때는 순간 굴뚝 위로 연기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 연기가 깔리면서 모란 꽃과 어우러지는 연기가 만들어 내는 몽환적인 풍광이 어디가서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는 풍경이라는 해설에 넋을 잃기도 하였다. 밟고 지나는 부분마다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지나야 한다. 사적이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재보호법 전부 걸린다. 대구지역에서는 최고로 유명한 해설사님을 만났다. 사철난님도 인정하고 자칭 대구제일의 해설가로 소개하는 사람은 처음 만난다. 듣고 보니 그만한 자부심이 충분히 있음을 알았다. 화가이면서 해설가로 일주일에 한번 자원봉사한다는 천광호 화가이다. 전국을 주유하다가 25년전 도동서원에 반하여 정착했다니 인연의 끈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연결되는가 보다. 강학당에 앉아 보니 고액과외를 받는 느낌이다. 당시에도 성균관으로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도동서원으로 줄을 섰다고 하니 말이다. 도동서원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 하였기에 점심시간이 지났다.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를 충분히 보상받은 도동서원에서의 답사였다.
점심에는 현풍에서 추어탕을 즐겨 보라는 대구문화관광해설사님의 추천대로 현풍추어탕에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추어탕을 맑게 끓이고 전라도에서는 걸쭉하게 내온다. 미꾸리 맛이 진하게 올라온다. 먹지 못하는 회원님은 칼국수로 도동서원에서의 감흥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점심을 해결하고 나니 따가운 햇살이 본격적으로 대구의 아프리카라는 실감을 하게 한다. 외기 온도는 28도지만 체감온도는 완전히 아프리카를 방불케한다. 이제 대프리카에 온 실감이 난다. 어서 어서 시원한 곳으로 가야겠다.
달성 현풍 석빙고(達城 玄風 石氷庫)는 보물 제673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자료집 22번 참조).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조선 영조 6년(1730)에 축조되었다는 건성비가 발견되었다.
석빙고가 아래에 있고 사직단은 봉우리에 있다. 달성군민의 안녕과 풍년을 위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은 95년 7월부터 96년 9월말까지 사직단 2기, 홍삼문, 담장 등을 복원하였다.
현풍곽씨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정려비이다(자료집 209번 참조).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하게 되자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곽재훈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였으며, 곽재기의 부인 광주 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었고, 곽홍원의 부인 밀양 박씨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하였고,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는 남편이 병으로 죽게 되자 먹지 않고 따라 죽었다고 정려했다. 정려각 안에는 2개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건물과 현판은 최근 것이나, 12정려각은 그 유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중요한 유산이라 한다비만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을 어찌할까? 그것도 뭉텅이로 모여 있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는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가옥이다(자료집 181번 참조).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시대를 내다보는 눈이 탁월한 남평 문씨 일가이다.
일정을 진행하는 동안 갑작스럽게 돌출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프로야구 관람을 한다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될 가능성이 있으면 허락하고 아니면 불허하려고 했는데 유수암소녀가 끼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야구장에 내려 주고 말았다. 야구장으로 가는 길이 멀지는 않았지만 너무도 차가 막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약간의 장거리 여정이라 나머지 회원님은 지친 몸을 잠으로 달래기도 한다. 유수암소녀의 머리도 왼쪽으로 쳐지고 차가 멈추거나 출방하거나 요동을 치면 늘어진 머리카락도 같이 출렁인다. 부녀가 같은 방향으로 흔들린다. 하지만 피곤함을 이겨야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또 한번 저녁시간이 왔다. 우선 미각을 자극하는 식단을 생각한다. 유수암소녀에게 검색할 것을 주문한다. 찜갈비로 정했다. 양푼에다 찜갈비를 더덕더덕 담아 내온다. 안 먹으면 서운 할 것 같아. 찜갈비 골목으로 향한다. 4가지 종류다. 매운맛, 덜 매운맛, 보통, 안 매운맛으로 구분되어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으면 맵지 않은 종류를 주문해야 한다. 소갈비라 가격이 센 편이다. 호주산은 13,000원 국내산은 25,000원이다. 으이그 싼 걸로 일단 주문한다. 맛 보다는 지역 특산이라고 하니 먹어 본다는 정도였다. 피곤한 심신을 어느 정도는 달랠 수 있었다. 그래도 고기이지 않은가 말이다. 밤에도 국립대구박물관을 관람하는 여정이 남았기에 힘을 비축해야 하는 이유도 된다. 그런데 냉면을 먹는 회원님은 어찌 할까나.
국립대구박물관에서 관람해야 할 것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정했다.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龜尾 善山邑 金銅如來立像)은 국보 제182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1번 참조). 1976년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봉한 2동 뒷산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관음보살입상 2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네모진 얼굴에는 살이 올라 있으며, 예리한 선으로 눈, 코, 입을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몸에 달라 붙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龜尾 善山邑 金銅菩薩立像) 또한 국보 제183호와 제184호로 각각 지정된 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2번과 3번 참조).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상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로 서 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 봉오리를 가볍게 들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서 물건을 잡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물건은 없어진 상태이다. 대좌는 7각형이며,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박물관 내부가 약간 덥다. 국립이라서 전기를 절약하고자 온도를 높게 설정했는지 모른다. 주간과는 다르게 차분한 분위기에서 관람한다.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漆谷 松林寺 五層塼塔 舍利莊嚴具)는 보물제325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14번 참조). 1959년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면서 탑 안에 있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층 탑신에서는 나무, 돌, 동으로 만든 불상이 각각 2구씩, 2층에서는 신라의 사리 장신구, 3층에서는 나무 뚜껑이 덮혀 있는 돌 상자 안에서 부식된 종이, 5층 위에 있는 복발 안에서는 상감청자로 만든 원형 합과 금동으로 만든 원륜 2개가 발견되었다. 2층에서 발견된 거북 함 속의 금동 사리기와 유리 사리병은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유물로 사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김일손 거문고(金馹孫 琴)는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26번 참조). 조선 초기 학자 탁영 김일손이 사용하던 거문고로 크기는 길이 160㎝, 너비 19㎝, 높이 10㎝이다. 옛 선비들의 애완품으로 사용된 악기로서는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 고문서(密城朴氏 三友亭派 宗中 古文書)는 보물 제123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32번 참조). 조선 선조 때의 무신 박경신(1539∼1594)과 그의 두 아들 지남, 철남에게 내려진 각종 관련 문서다. 박경신은 선조 2년(1569) 31세 때에 무과 초시에 합격, 35세 때 전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양근병마동첨절제사 등에 제수되어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위하여 피난하고 고향 청도에서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도를 수비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무원종공신 1등과 호성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장남 박지남(1565∼1626)은 부친의 의병에 가담하여, 청도와 밀양 등에 전투에 참가하였고, 임진왜란 후 선무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박철남(1565∼1611)은 박지남의 쌍둥이 동생으로 3부자가 의병에 함께 참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후 선무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금동 당간 용두는 보물 제1410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문화재이다(자료집 39번 참조).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윗입술이 S자형을 이루며 위로 길게 뻗친 입을 벌려 여의주를 물었으며 아래 위의 송곳니가 모두 위쪽을 향해 날카롭게 휘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목과 만나는 입 안쪽으로 도르래가 장착된 구조로 되어 있어, 턱 밑을 뚫고 어금니 부분의 못으로 고정시켜 놓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도르래 부분의 부식이 심하여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다. 하지만 도르래의 사용에서 과학사적으로 참고가 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헌국 호성공신교서(李憲國扈聖功臣敎書)는 보물 제1617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50번 참조). 임진란에 이헌국이 선조와 세자를 모시고 함께 따라간 공로로 난후인 1604년에 이헌국에게 내린 것이다.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 연구 및 고문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흥선대원군 기린흉배(興宣大院君 麒麟胸背)는 중요민속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75번 참조). 흉배는 조선시대 백관의 관복인 단령(團領)의 가슴과 등에 붙였던 사각형의 장식물이며 장식의 목적과 함께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품계에 따라 문양을 달리하여 만들었다. 관복과 같은 색의 사(紗)나 단(緞)에 다양한 문양을 직조하거나 수놓았는데 계급의 표시가 되는 동물 도안을 중심에 배치하고, 구름, 여의주, 파도, 바위, 불로초 등을 주위에 배열하였다.
진주하씨묘 출토유물(晉州河氏墓 出土遺物)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자료집 79번 참조). 1989년 현풍곽씨(郭氏)의 후손이 경상북도 달성군에 있는 12대 조모인 진주하씨(河氏)의 묘를 이장하다가 발견한 유물이다. 출토된 유물에는 부녀자가 나들이할 때 머리에 써서 몸을 가리던 장옷을 비롯하여 창의, 저고리 등 의복류와 이불, 베개, 돗자리 등 침구류, 머리 빗는 도구를 담아두던 빗첩 등 81점이 있고 또한 그의 남편인 곽주와 그의 시어머니 등이 쓴 편지와 금전출납을 기록한 것 등 서간문 168점이 있다.
국립박물관이기에 기대를 했는데 생각만큼 많은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정을 조정하면서 야간개장에 맞추어 전체적인 답사여정을 계획했는데 그에 대한 보답을 생각만큼 받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바깥이 오히려 시원했다. 금동 당간 용두를 지주에 달아 올려 놓은 기둥이 보인다. 처음에는 국기 게양대 인 줄로 알았다. 약간의 노력을 보이려는 흔적이다. 순사님이 박물관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순찰하는 우리 순사님이다. 야구장에 갔던 팀도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응원하는 팀이 진 모양이다. 그것도 차이가 많이 점수로 지면 중간에 빠져 나온다고 했다. 야구장에서 빈센트님, 알뜨르님, 유수암소녀님이 체험한 색다른 일이 오히려 국립대구박물관을 관람한 사건 보다 훨씬 특이하고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본다. 경북대학교 박물관과 국립대구박물관을 관람하였지만 박물관 관람이 그리 흥미진진하지 못하였다. 뭔가 생동감과 현장감이 떨어진다. 박물관이 소장품을 관람하는 경우에는 꼭 관람해야 하는 중요한 문화재를 설명하는 자료를 작성하던가, 박물관 큐레이터에게 설명을 부탁하여 생동감 넘치는 답사가 되도록 하여야겠다. 박물관 전자관람을 이용하고 완전히 답사계획에서 배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둘째 날의 여정도 마무리되었다. 대구흥사단과 대구문화관광해설사님이 선물로 사 오신 수박이 숙소에 잘 보관되어 있는 것이 생각났다. 잘라서 시원하게 먹었어야 하는데 칼이 없어서 숙소에 두고 나왔는데 오늘 수박 파티를 벌여야겠다.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하고 나면 52인 놀이로 다음날 즐거움도 기약하고 얇아진 지갑을 두툼하게 복원하는 기회, 구경하면서 사람과 사람과의 진한 정도 두텁게 하기로 한다.
납작만두가 대구 10미에 속한다. 반월당 네거리에 가면 납작만두를 먹고자 줄이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간식거리로 알맞은 생각이 들어 52인 놀이를 응원하다가 말고 선선한 거리로 나섰다. 답사하면서 숙소 근처를 얼마나 왔다 갔다를 반복했는지 이젠 익숙한 곳이 되었다. 청라언덕 주인이 어제처럼 건수가 있는지를 보려고 도로에서 방황하고 있다. 눈에 띠지 않으려고 얼른 몸을 숨겨 본다. 오늘도 한 잔 걸치신 모양이다. 숙소라도 주인장이 얼굴 한 번 비치는 법이 없다. 계좌입금하고 문자로 방을 배정 받고, 도착해서는 전화로 어디라고 안내받고 참으로 편리한 세상인 것 인지 야속한 세상 인심인지 변해도 많이 변했다. 내일 아침 식사를 해결할 만한 장소도 보면서 느린 걸음으로 왔는데도 목적지에 다 왔다. 납작만두가 다 팔렸다고 한다. 산더미로 쌓아 놓은 물건이 다 팔릴 정도면 비싼 임대료를 충분히 충당하고도 남을 것 이다.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몇 편 남아 있는 만두를 보고는 그거라도 주세요 했더니 군만두와 섞어서 반 값에 해주겠다고 한다. 일부 회원님이 그나마 가기 전에 맛이라도 볼 수 있겠다는 기쁨에 숙소로 걸음을 재촉한다. 이제 52인 놀이가 한참 흥이 오른 모양이다. 사철난님 손놀림이 가붓하다. 자리 앞에 수북하게 그에 대한 보상도 받은 모양이다. 구경꾼의 손놀림에 납작만두가 완전히 납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납작하게 오늘도 엎드린 님은 바로 스톤님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회장님의 기운은 힘을 더하고 새벽으로 가는 스톤님의 시간은 기운을 차릴 줄 몰랐다.
어제는 전날 보다 더 늦은 시간에 잠이 들어 아침이 되어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 여지없이 사철난님이 방문을 열었다. 남녀구분이 없어진 성별을 초월하는 터라 별 상관이 없는 듯 하다가 이내 문을 닫는다. 7시30분에는 빈센트님이 광주로 떠나야 하기에 이제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세면을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6명이 욕실을 들락거리면 최소한 30분이 걸린다. 운전전문가로서 2일 동안 능숙하게 원하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던 빈센트님을 문차일드님과 알뜨르님이 고속터미널까지 배웅을 했다. 대구10미인 따로국밥을 먹겠다고 시내로 나선다. 유수암소냐가 검색하여 찾은 맛집이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와도 가까운 곳에 있기에 오늘도 출발이 좋다. 마무리도 좋을 것 이다. 해장국과 선지국 그리고 곰탕이 한 군데 모인 성격이다. 특 따로국밥을 주문했다. 보통이 아닌 특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마무리도 잘 하자는 의미이다. 이른 아침에 사람들이 많이 왔다간 흔적이 보인다. 오늘은 순사님이 안내를 본격적으로 하는 날이다. 원래는 숙소로 9시에 오기로 되어 있는데 일찍 숙소를 나서는 바람에 식당으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 이미 식사를 했다는 순사님. 어제 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안내 준비를 했을까. 이런 참 무던한 사람. 순사님이 안내를 준비한 실력은 경상감영공원에서 시작되었다.
선화당(宣化堂)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81번 참조).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징청각(澄淸閣)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관아건물이다(자료경상감영공원 내에 있는 징청각은 경상도 관찰사가 살림채로 쓰던 건물이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화당, 응향당 등 여러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4칸이며,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선화당과 함께 대구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옆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뭔가 설명해 주려고 안달이 났다. 경상감영공원은 아직 한산한 모습이다. 어르신 몇 분이 의자에 앉아 비상을 반복하는 비둘기를 보고 있다. 서울 종로에 있는 파고다 공원과 같이 어르신 천국이다. 강영을 보고 나니 시간이 남는다. 대부분의 관광지가 10시에 문을 연다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방황을 해야 하는데 다행이도 근대역사관은 9시에 문을 연다고 하였다. 얼른 역사관으로 들어간다.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韓國産業銀行 大邱支店)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건물이다(자료집 126번 참조).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2008년 대구도시공사가 이 건물을 사들여 대구시에 기증했으며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단장돼 2011년 1월 문을 열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박물관에는 근대기 대구의 모습과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상설전시장과 기획전시실, 체험실, 문화강좌실 등을 갖추고 있다.
입구 바로 오른쪽에 은행 금고가 유치장처럼 육중하게 자리하고 있다. 북성로 일대를 영상으로 재현하고 가상버스를 타면서 느낄 수 있도록 체험관도 있다. 국채보상운동, 전화기, 인력거, 화폐 등등 일제강점기와 근대유산을 많지는 않았지만 잊지는 않을 만큼 전시하고 있다.
순사님이 재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중부경찰서 역사체험관은 10시에 개방하기에 20분 정도 시간이 있으니 북성로 일대를 둘러보자고 한다. 북성로에서는 오늘 물총 축제가 열린다고 관계자가 길을 막고 부스를 설치하고 준비가 한창이다. 태국의 송크란 축제와 비슷하게 운영할 모양이다. 무료라면 참가할 의향이 조금은 있었으나 유료인 모양이다. 천리교, 천주교, 기독교 건물이 나란히 있는 곳을 지나면서 능소화가 늘어진 곳을 본다. 북성로는 이제 공구기계 산업 골목이다. 일제강점기 번성을 누렸던 영화가 쇠락하여 침잠을 거듭하였다가 공구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더욱 활기를 불어 넣고자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다.
공구박물관은 도심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일제 강점기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일제건축물을 원형으로 보전하고, 한국 최대의 산업공구거리인 북성로를 상징하는 거점장소로 만들고자 기획되었다. 그리하여 쇠퇴하고 있는 북성로 공구거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자 공구박물관이 설립되었다. 휴업상태인 삼덕상회를 카페로 재생하고, 철원상회의 녹슨 옛날 철물을 포함한 1,000여점의 공구, 철물, 생활물건 등을 기증받아 공구박물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북성로 거리는 대구산업공구 골목을 대변하는 거리이다. 원래 북성로는 서성로, 인교동, 서문로, 수창동, 태평로 등을 아우르는 거대한 권역을 통칭한다. 1905년 일본인이 북성로 입구에 대구역을 개설하면서 주변에 인구가 밀집하게 되었다. 태평로에는 미곡 송출을 위한 도매, 운수계통의 식민지 기업이 자리를 잡았고 수창동과 함께 거대한 물류창고 기능을 한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에는 기계, 철물상가가 북성로 주면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토건회사, 금속상도 들어서면서 기계, 공구 유통거리로서의 초기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화점, 집창촌, 상가, 은행 등이 즐비하였던 북성로를 나와 감영공원 쪽으로 발길을 다시 돌린다. 10시가 되었기에 경찰역사관으로 가본다.
경찰역사체험관은 대구중부경찰서에 100년이 넘는 역사와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경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주고자 유치장을 활용한 체험관이다. 몽타주 만들기, 지문 찍어보기, 유치장 체험, 과학수사 등 경찰에 대해 더욱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어린이가 아니더라도 색다른 체험을 하는 곳 이라 회원님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어제의 죄를 조사하기도 하고, 회장님을 문책하여 사기죄를 묻기도 하였으며, 방조죄, 선동죄 등등 경찰역사를 체험하는 동시에 어제 52인놀이에 대한 죄를 조목조목 따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죄를 씨고 나니 얼마나 상쾌하던지.
52인 놀이에서 획득한 불로소득을 소비하는 기회를 찾으려고 창 밖을 계속 보고 있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봉산 가구거리 쯤에 와서야 간신히 한 군데가 보인다. 주문을 받고 보니 다양하다. 8잔을 한 번에 주문하니 주인장이 당황한다. 30분을 지체한 것 같다. 커피를 구입하면 입을 즐길만한 요기거리도 있어야 한다. 옆집이 빵집이다. 사철난님이 갓 구워낸 빵으로 요구한다. 말랑말랑한 빵 냄새가 차안에 퍼진다. 오래 기다린 만큼 맛도 기가 막히다. 또한 52인 놀이의 결과 회원 모두가 혜택을 받은 것이니 더욱 맛이 있는 것 이다. 점심은 건너 뛰고 답사를 계속하자는 의견에 달리고 또 달려 본다. 대구향교로 가는 길에 건들바위가 있다.
건들바위(大邱笠巖)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자료집 164번 참조). 이름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그 모양이 갓 쓴 노인같다고 해서 삿갓바위라고도 불리었다. 200년 전에는 이 바위 앞으로 맑고 깊은 냇물이 흘러 많은 시인들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던 경치 좋은 명소의 하나였으며, 서거정 선생이 노래한 대구 10영 중 제2영 입암조어(笠巖釣魚, 삿갓바위에서 낚시놀이)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烟雨空懞澤國秋(연우공몽택국추) 垂綸獨坐思悠悠(수륜독좌사유유)
纖鱗餌下知多少(섬린이하지다소) 不釣金鰲釣不休(불조금오조불휴)
안개비 부슬부슬 물위에 가을이 찾아드니, 낚싯대 드리우니 혼자앉아 유유자적하네,
미끼아래 물고기 제법 헤엄쳐 다니나, 금오(金鰲:금자라)를 낚지 못해 그만 둘 수 없구나.
조선 정조 때 시가지 일대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더 이상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는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렸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현재는 바위 앞으로 도로가 설치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주차 장소가 마땅치 않아 운전전문가인 동시에 사진전문가가 뛰쳐나가 대표로 사진을 찍는다. 낚시를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 이었다는 점이 상상이 안 된다. 도시 건물과 차량으로 혼돈스러운 이곳인데. 하지만 잠시 차량을 멈추고 생각해 보면 지나왔지만 건들바위 근처에 있는 대구제일중학교 자리가 연귀산인데 서거정이 대구에서 아름다운 곳 10곳에서 시를 읖조렸다는 구수춘운(龜峀春雲 : 연귀산의 봄구름) 제3영이다.
龜岑隱隱似鰲岑(구잠은은사오잠) 雲出無心亦有心(운출무심역유심)
大地生靈方有望(대지생영방유망) 可能無意作甘霖(가능무의작감림)
연귀산 봉우리 흐릿하여 금오산 같은데,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뜻이 있으리,
대지의 생물들도 모두 다 바라는 바 있으니, 아무 뜻 없이 단비를 내리겠는가.
아무 뜻없이 단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무생물도 다 의미가 있다는 역설이다. 건들바위 위에서 낚시를 했던 의미라도 새길 수 있도록 기념물이라도 지정한 일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뜻이 있다고 하면 대구상수도사업본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일제강점기 배수지 시설을 보게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다. 대구상수도사업본부에서 배수지를 답사하겠다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하니 약간은 놀라는 눈치다. 열쇠가 맞을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정작 꽁무니를 쑤시니 찰칵하고 열리는데 말이다.
대구 대봉배수지(大邱 大鳳配水池)는 대구광역시 등록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문화재이다(자료집 234번 참조). 대구 지역 최초의 수도 시설 가운데 하나로, 수도산 기슭에 대봉 1호 배수지를 건립한 후 급수 수요가 증가하자 2호 배수지를 추가로 건립하였다. 대봉 1호 배수지는 원통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11개의 원형 창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으며, 창 주위에는 곡선형 테두리를 돌려 장식하였다. 붉은 벽돌과 정교하게 가공된 화강석을 사용해 화려하게 장식한 접합정을 비롯하여 염소 투입실, 돔 형태의 작은 건물 등 여러 시설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명과 같이 대봉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자연적인 고저 차이로도 수압이 발생하고 물 공급이 잘 될 것 같아 배수지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대봉배수지 앞길로 죽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향교가 보인다. 대구향교 대성전(大邱鄕校 大成殿)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등록된 조선시대 국립교육기관이다(자료집 184번 참조).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대구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졌다.선조 32년(1599)에 달성공원 근처에 다시 세웠다가 선조 38년(1605) 교동으로 옮겼고,1932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문묘, 삼문 등이 있다. 내삼문을 열고 뒤채로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3*3칸 규모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지었다. 대성전은 대구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교의 중심 건물로 전체적으로 엄숙하고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대구향교에 배치된 해설사님이 방문록을 들고 다가온다. 어디서 오셨나는 물음에 제주에서 왔다고 하니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방명록에 기록해 줄 것으로 부탁한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음으로 대구와 제주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대구향교 해설사님도 우리처럼 철저히 준비하여 답사를 다니고 있는 답사회를 만나는 일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제 3일간의 여정을 서서히 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대구스타디움의 광변하고 웅장한 경기장이 모습을 보인다. 경기장 동쪽에 사직단 고분 발굴된 곳이 있고 언덕 위에 사직단이 있다. 현풍에서 만난 사직단은 달성군민을 위한 사직단이요, 노변동 사직단(盧邊洞 社稷壇)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문화재이다(자료집 178번 참조). 문헌상으로 확인되었던 조선시대 사직단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발굴된 것으로 조선시대 사직단의 구조와 규모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사직단이 있는 언덕 아래에는 발굴된 고분이 있는 그 모습으로 유리를 씌워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노변동 고분을 보고 나니 청동기시대로 가고자 하는 의욕을 연결하여 지석묘가 있는 곳으로 간다. 아파트 숲이 있는 중심으로 가고 있어서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였다. 분명 아파트 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을 것 인데 하여간 아파트 단지 내에 지석묘 4기가 모여 있다.
사월동 지석묘군(沙月洞 支石墓群)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 청동시대 유적이다(자료집 171번 참조).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4기가 무리지어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1.7∼2.37m, 너비는 1.1∼1.6m이며 받침돌 높이는 0.7m∼1.27m 정도이다.
간식으로 먹은 빵이 소화가 되었는지 이제는 허기진다고 운전전문가가 연상 먹고 가자고 보챈다. 마지막 답사지니까 마치고 시내로 들어가 대구10미의 하나인 누른국수를 먹자고 설득하였다.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앞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전체 답사여정의 마지막 장소인 고산서당이다.
고산서당(孤山書堂)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으며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자료집 197번 참조).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이황 선생과 정경세 선생이 강의하였던 곳 이라 하여 150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16년(1690)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서원 옛터에 강당만을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4*2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사당 자리 뒤에는 이황, 정경세 선생의 강학유허비가 있다.
서당에서 공부하고 나오니 마지막 답사지가 되었다. 이제 광주로, 전주로, 제주로 헤어지는 일만 남았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대구10미 중에서 누른국수를 먹기로 하고 시내로 간다. 일요일이기에 대구역 앞 동성로에 인산인해다. 차가 통행할 수 없을 지경이다. 유수암소녀가 맛집을 찾아 가기가 정말 힘들 정도이다. 문화재가 있는 곳에 사람이 뜸한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쉽고 편한 장소에 사람이 몰린다. 몰리면 복잡해지고 복잡하면 다시 사람이 사라지고,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면서 변화의 줄기가 커진다. 대구백화점 유료주차장으로 할 수 없이 들어간다. 사람에 밀려서.
맛집으로 검색한 누른국수집은 그 주소에 가보니 없어졌다. 맛집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눈에 띠는 집으로 들어간다. 만만한 곳이 비빔밥. 전주 육회비빔밥과 냉면으로 살짝 허기진 몸을 달래고 번화가 동성로로 나선다. 순사님이 “이젠, 가보겠다”고 한다. 회원님과 앞으로 일정을 전달하는 동안 순사님은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국보가 사라진 상태였다고나 할까. 하여간 답사회와 질긴 인연의 끈으로 3일동안, 아니 답사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자문해주고, 답사기간 중에는 아낌없이 지원했으나, 답사를 마치고는 서운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순사와 서운하게 헤어지고 난 후 답사 최초로 1시간 동안 자유를 드리고 쇼핑, 관광, 음식, 관람 등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하였다. 한 군데 답사 더 할 곳이 없나고 반문하는 회원님도 있었다. 대단한 집념과 열정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답사 일정으로도 회원님이 소화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에,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일도 의미가 있었다.
동성로는 대구백화점을 중심으로 하루 50만명의 유동인구가 오가는 대구의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이다. 그곳에서 회원님에게 자유시간을 주었지만 답사에 익숙한 지라 어디 가지는 못하고 결국은 버스커(Busker, 길거리 공연가) 공연장에 모두 모여 들었다. 답사로 지친 마음을 치유하려는 마음이 다 통했나 보다. 1시간 동안 음악과 함께 긴장을 풀고 나니 한결 가벼운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공식적인 답사를 갈무리하는 시점이다. 대구지역을 답사하면서 특히 경제, 사회, 문화, 예술적인 측면에서 대구에 비하여 많이 부족한 제주문화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제주만의 문화재를 찾고 보존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희미한 서광을 보기도 하였다. 대구지역은 크게 조선시대 서원문화, 근대에 와서는 골목문화로 발달된 특징을 보인다.
대구광역시 문화재 240점 중에서 83점을 3일 동안 둘러보았다. 주마간산 격으로 35%를 훑고 지났다. 마음 같아서는 대구지역 문화재를 100%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다. 달구벌로 달려가자를 기치로 하였기에 정말로 달려만 간 것 같아 회원님께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제주 문화재를 더욱 잘 이해하고자 대구문화재와 비교하면서 회원님과 짧은 2박3일 동안 동고동락하였다. 대구지역 문화재를 이해하는 일면도 있지만 회원님 한 분 한 분과 정을 쌓았기에 향후 답사활동에 또 다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은근한 리더쉽으로 회원 모두를 끌어 주신 회장님, 성남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달려오신 스톤님, 운전전문가로 말없이 적극적으로 소임을 맡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신 빈센트님, 항상 앞서서 답사현장을 누비신 사진전문가 문차일드님, 번득이는 기지와 질문으로 답사의 품격을 높이신 알뜨르님, 끊임없는 대화로 일정 내내 호기심을 유발시켜 깨어있는 답사가 되도록 유도하신 소나기님, 항상 기록하여 지식 창고로 거듭나시는 윤아님, 회장님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뭔가 행동하도록 유도하여 주시고 문화관광해설사와의 폭 넓은 교류로 질적으로 수준 높은 답사가 되도록 지원하신 사철난님, 지루한 시점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유수암소녀님, 그리고 매일 일정 조정을 지원하고 철저하게 안내하여 고품격의 답사가 되도록 열정을 쏟은 순사님을 비롯하여 모두 모두 한 덩어리로 뭉친 결과 무사히 답사를 마치게 되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2014년 8월20(수)
제247차 제주문화유산답사 - 대구도외답사, 달구벌로 달려가자 - 후기
오멍가멍 임영훈
첫댓글 제주흥사단소속 <제주문화유산답사회>에서 대구를 다녀가셨습니다. 대구에 대하여 즐거운 인사을 가지고 가신듯 합니다.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8월 15~17일 2박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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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도 자료집을 만들 계획이 있나요? 있다면 제주도민이빈 달구벌 이란 주제로 4~5편 글을 실었으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