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를 지었던 김부식이 330개이상의 지역명을 써 놓고도 어딘지 몰랐다는 대륙지명>
1)「백제」는 중국 廣西地域 에도 진출
오래전부터
廣西(광서)지역의 지도상 에는 ‘百濟(백제)’라는 표기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또한 그곳 주민들은 수백년동안 그 땅의 이름을 「百濟墟(백제허)」라고 불러왔는데
진작 우리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년전 모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서 그 지역의 역사를 처음으로 보도함으로서
비로서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광서지역의 ‘백제’ 마을 사람들은 주로 ‘장족(壯族)’들인데
그들은 1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서 옛적 「백제」의 영화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이다. 「廣西壯族自治區 邕寧縣 百濟鄕 百濟墟(광서장족자치구 옹령현 백제향 백제허)」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기도하다.
그 동안 우리와 일본의 역사사서는 대부분이 「백제」 의 ‘실체’를 축소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에 익숙해온 사람들에게 「백제」는 참으로 큰 나라로서 먼 남방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다고 해도 그것을 믿을 사람은 그리 많치 않을 것이다. (주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倭王)이라는 천황(天皇)에게 해마다 조공을 받쳐 왔으며 또한 그들의 왕자들은 천황에 ‘인질’로 와 일본에서 어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海南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산간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옛 「대백제」의 향수를 한 몸에 안은 체 살아가는 한 무리의 중국 소수민족 ‘장족’이 있다. (주; 한 주민(장죽)의 말에 의하면 이지역의 ‘장족’들은 오래전에 山東(산동) 반도의 白馬江(백마강) 지역에서 온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이 여기에 오게된 이유는 전쟁 때문에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한 장사를 하러 왔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송(宋)나라 이후의 남조(南朝)사서에는 의래히 「백제」의 대륙진출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백제」는 진말(晉末;서기 400년 전 후경)에 ‘요서군’과 ‘진평군’에 진출해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하고 그것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梁書』百濟條 「晉時句麗旣略有 遼東, 百濟亦 据有 遼西;晉平郡 矣, 自置 百濟郡」
그러므로 당시의 「백제」는 상당히 큰 세력을 가진 해양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것을 직접 행사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광서 지역의 ‘백제허’도 「백제」가 실지로 진출한 지점으로 보이며 ‘진평군’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백제군’의 한 도읍지로 추정된다.
(주;『中國古今地名大辭典』 晉平縣條 「南朝宋置 南齊因地 今當在廣西境」)
응령현 백제향(邕寧縣 百濟鄕)」으로 가는 길
필자가 ‘백제허‘ 를 ‘진평군’ ‘백제군’의 옛 도읍지로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백제허(墟)’라는 그 지명 자체에 있는 것이다. 여기의 ‘허(墟)’는 사전에 의하면 그 뜻은 ‘성터’ 또는 ‘유적지’로써
그것은 ‘백제군’의 옛도읍지가 아니고서는 생길 수 없는 지명이다.
그러므로 ‘백제허’는 동북아시아의 고대사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가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을 꼭 한번 방문해서 그곳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심정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지난달 초(10월 초) 桂林(계림)을 경유해서 같이 갈 사람(통역)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단신으로는 여행을 할 수 없는 오지마을인 것이다.
필자는 계림(桂林)에서 고속버스 편으로 南寧(남영)을 경유해서 근교에 위치한 邕寧(옹령)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桂林-南寧간의 거리는 약 500km인데 5시간정도의 운행시간이 소요되었다.
버스는 비교적 새차로서 편리한편이었다. 차내에는 이차는 우리 나라의 대우(大宇) 자동차가 만들었다고 하는 표시가 있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비교적 잘 정리가 되어있는데, 통행차량이 거이 없기 때문에 운전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차도 연변에는 한참 자라고 있는 사탕수수로 밭은 꽉 차있어, 중국 남부 지방의 풍요로운 농촌 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南寧의 외각도시인 邕寧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백제향‘ 행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침 날씨는 화창하고 선선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열대지대라서 하루에도 한두 차례씩은 ‘스콜 squall’이 온다고 해 나는 비에 대한 대비를 하고 떠났다.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볼 겸 나는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차체가 워낙 고물이라서 외국인이 여행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편이 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로도 포장이 되고 도로 사정이 좋아져서, 운행시간은 퍽 단축되었다.
‘백제허’까지의 거리는 약 150㎞인데, 종전에는 3, 4 시간걸였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그 절반인 1시간 30분 정도 면 그곳에 갈 수가 있다.
2) 마을에는 ‘백제’ 기명의 간판으로 일색
필자가 방문한 ‘백제허’는 인구가 약 1,300명정도의 작은 농촌 마을이다 (‘백제향’의 총인구는 3,300명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장족’들로서, 그들은 오랜 세월을 「백제」의 역사를 간직하고 사러온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백제허‘는 오지(奧地)마을로써, 주민들의 생활여건은 아주 열약한 편이고
외지인의 왕래도 거의 없는 편이라서 여행자가 묵을 만한 숙박시설은 전무하고, 또한 식사를 제데로 할 만한 식당도 눈에 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소위 근대화와 개발의 바람은 불어 거리는 말끔히 포장이 되고, 하수공사등 여러가지 지반 공사가 한참 중이었다.
마을에 들어서니 마을 유지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서 외지 에서 온 우리 일행을 근처의 한 골목길로 안내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백제허’에서는 제일 번화하다는 골목인데 그 이름은 ‘百濟街(백제가)’라 하였다. 골목 양측에는 제법 깨끗한 벽돌집이 줄서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그곳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다른 주민들보다는 난 편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에서는 ‘향’ (우리의 면(面)에 해당)의 이름도 ‘백제’이고 마을의 이름도 ‘백제’ 그리고 마을의 유일한 골목길의 이름까지도 ‘백제’ 라고 하니 그야 말로 ‘백제’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동네에는 그밖에도 많은 간판이 눈에 띄었는데, 모두 ‘백제’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것 뿐이었다.
「邕寧縣地方稅局 百濟稅務所(옹령현지방세국 백제세무소)」,
「邕寧縣百濟鄕 人民政府(옹령현 백제향 인민정부)」 등의 지방정부의 간판과,
「百濟文化院(백제문화원)」,
「百濟旅社(백제려사)」 등 수없이 많은 간판들은 모두 ‘백제’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많은 ‘백제’ 라는 이름을 표기한 간판은 본 일이 없다.
나는 수년전 일본 九州(큐슈) 宮崎縣(미야사끼현)의 南鄕村(난고촌)이라는 한 작은 산간마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백제」 멸망후 「백제」를 탈출한 한 왕족의 가족들이 망명해서 이곳에 와서 살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옛날에는 ‘백제왕 신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도 ‘백제’의 이름이 들어 있는 간판은 여기저기에서 볼 수가 있었다. 먼저 마을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百濟の里(백제마을)」라는 대형 입간판이 보이며 마을 큰길가에는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큰집이 있는데 그것은「百濟の館(백제관)」이다. 그리고「百濟茶室(백제다실)」, 과「百濟書店(백제서점)」등등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숫자로서는 廣西지역의 ‘백제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3) ‘장족’들은 지금도 ‘백제’를 「大百濟(대백제)」로 호칭
필자가 이 마을에 와서 더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장족’들은 마을의 이름을 ‘백제허’ 라고 쓰고 그것을 발음할 때는 우리말로「대박제;DaejBakcae」라고 해, 글자 그대로 발음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일본에서 「백제(百濟)」라고 쓰고 그것을 「구다라;くたら」라고 발음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일본 학계는「구다라;くたら」의 어원을 밝히기를 꺼려하는데,
이것은 ‘큰 나라’라는 우리의 고대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주;우리말에는 큰 뱀을 가리켜 ‘구렁이’라고 하는데 이 ‘구’자는 크다는 우리의 고어이다)
그 옛날 「백제」는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실체’였던 것이다. ‘백제향’의 ‘장족’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백제」의 위엄을 잊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지워져 없어지게 마련인데, 이곳 ‘백제허’ 사람들은 「대백제」의 찬란한 영화를 ‘백제墟’라는 고(古)지명으로 이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허’ 주변에는 많은 고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단성”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가면 옛 성터와 같은 유적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시간 관계상 그곳에는 들리지 못했다.또한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그 지역에서는 제일 큰 마을인 ‘大王灘(대왕탄)’이 있는데 그 지명을 통해서 볼 때 지금의 尺江(척강)은 그 옛날에는 大王川이라 불이었을 것이다. 백제인 들은 어디를 가나 의례히 ‘대왕천’, ‘대왕포’, 나 ‘대왕궁’, 또는 ‘백제궁‘ 과 같은 「대백제」의 존재를 상징하는 이름을 여기 저기에다 표시하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고대 일본(왜국)에서 본 바가 있다. ’백제허‘에서 동쪽으로 얼마를 가면 ’那樓墟(나루허)‘가 있는데 ’장족‘들은 이것도 우리말로 「대나루;DaejNaru」라고 부른다. 지명(地名)의 생명력은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곳 “백제향”의 고지명도 그 숨은 뜻을 통해서 볼 때, 「백제」는 분명 그 옛날 이 지역에서 「대왕국」으로서의 위엄을 떨친 것으로 보인다.
武寧王(무녕왕) 대의 「백제」를 말한 것으로 보이는『양직공도(梁職貢圖)』에 의하면 이 시대에 「백제」는 22개의 “담로”로 나라를 경영했다고 하는데 이 지역도 그런 담로지역의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지역에서도 「백제」는 왜국(倭國)땅에서 본바와 같은 「大王年;대왕년」의 년대를 통용했을것으로 보인다.
(주;『오사카 가이드』 ( 오사카府 경찰부 편) 에 의하면 현재의 나마노區(옛날의 百濟野)는 1천년전에는「百濟郡 百濟鄕」으로 불렀다고 한다)
원광대 소진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