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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6일 치러진 ‘2017년도 서울시 9급 지방공무원 추가선발 필기시험’의 한국사 과목 5번 문항 [사진=사이버국가고시센터 시험문제 갈무리] |
[헤럴드경제=정경수 기자] 서울시가 지난해 12월 치러진 공무원 임용시험에서 한국사 과목을 다시 채점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부장 함상훈)는 수험생 임모 씨가 서울시 제1인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불합격 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7일 밝혔다. 판결이 확정되면 서울시는 ‘2017년도 지방공무원 공개경쟁 임용 추가시험’에 응시한 수험생들의 한국사 점수를 전부 다시 산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최종 합격 여부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문제가 된 것은 한국사 5번 문항이다. 고구려와 관련된 지문을 제시하고 1~4번 보기 중 고구려에 대한 설명이 아닌 것을 고르는 문제였다. 임 씨는 서울시가 정답으로 발표한 1번 ‘전쟁에 나갈 때 우제점을 쳐서 승패를 예측했다’도 고구려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사료는 소를 죽여 발굽의 모양을 보는 우제점을 고구려의 풍속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5번 문항을 ‘정답 없음’ 처리해달라고 요구했다.
재판부는 임 씨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문헌 ‘위략’과 1996년 집필된 고등학교 국사 국정교과서 등에는 부여의 우제점과 같은 풍습이 고구려에도 있었다고 기술돼 있다”며 “수험생들은 고구려에 우제점 풍습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해 학계 다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정을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이 문제는 정답 없음으로 처리돼야 한다”며 “한국사 점수가 다시 산정된다면 임 씨가 합격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밝혔다. 임 씨는 한국사를 포함한 다섯 과목에서 총 334.53점을 받았고 합격선인 336.67점과 2.14점 차이로 불합격했다.
서울시는 재판 과정에서 최근 고등학교 교육과정이나 학문적 권위를 가진 개설서 등에서 우제점을 모두 부여의 풍속으로 설명하고 있어 문제에 이상이 없다고 반박했다. 정답 이의신청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과 외부 전문가들이 문제를 검토했지만 마찬가지 결론을 내렸다. 법원은 서울시의 해명에도 문제에 오류가 있다고 봤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16일 사회복지직 공무원 294명을 뽑는 시험을 실시했다. 수험생들은 필수과목인 국어, 영어, 한국사와 선택과목 두 개, 총 다섯 개 과목에 응시했다. 필기 합격자를 대상으로 면접시험을 봤고, 올해 2월 최종 합격자를 발표했다.
법원 “작년 서울시 공무원 시험 다시 채점하라”
기사입력 2018-12-17 09:10
지난 3월 24일 치른 2018년 서울시 지방공무원 7급 필기시험 '한국사 A형' 7번 시험문제가 저렇단다. 이걸 두고 말이 많다. 어느 유명 학원강사가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이 문제를 문제삼았으니, 만인이 보는 인터넷 강의에서 지랄 같다 하는가 하면, 좇같다 했으니, 간평하건대 저 학원강사 말 중에 단 하나도 틀린 대목 없으며, 이런 시험문제를 낸 놈이나, 이걸 감수하고도 그대로 시험문제로 출제를 강행한 놈이나 쳐죽여야 한다.
물론 그 나름으로는 변명이 있으리라. 문제 출제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변명을 들을 수는 없으나, 변별력을 고려해 아마 저런 말도 안되는 문제를 냈을 성 싶다. 그래 내 세대에 행정고시며 사법고시며 하는 국가고시에서 이런 문제도 나온 적이 있었다는 말을 나는 기억한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분량이 총 얼마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단다. 그 말을 고시를 준비하는 내 친구한테 들었을 때 나는 대략은 맞추었으니, 500여 권이다. 이는 내가 고교 국사교과서에서 나온 대목을 기억하는 까닭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저런 식의 문제를 내면 안 된다.
가뜩이나 역사는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거니와, 저런 문제는 문제로서 자격도 없는 점은 고사하고, 역사는 덮어놓고 외워야 한다는 당위를 유감없이 증명없이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저 문제가 문제은행에서 고른 것인지, 아니면 특정 전문가가 만든 것인지 자신은 없으나, 그 어떤 경우건, 저 문제를 만든 이는 볼짝없이 대학에서 역사로 밥을 빌어먹고 산다는 교수놈이다.
그건 그렇고 저 보기로 든 고려 후기 역사서 네 종을 보건대, 더욱 심각성을 더하는 대목은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종은 이미 존재조차 망실되어버린 소위 일서(逸書)라는 사실이다. 더 간단히 말한다. 나머지 세 종은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다. 왜? 이미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물론 후대 기적적으로 발견될 가능성까지 없는 않다.)
보기가 제시한 저들 네 종 완성에 얽힌 기록들을 찾아봤다.
고려사절요 권제 24 충숙왕(忠肅王) 정사 4년, 원(元) 연우(延祐) 4년(1317) 조를 보건대 "여름 4월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 민지(閔漬)가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찬술(撰述)해 올렸다. 위로는 건국 초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고종(高宗) 때까지에 이르렀는데 책이 모두 42권이었다. (민)지는 문장에 조금 재주가 있었으나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했다. 그가 소목(昭穆)을 논하면서 주자(朱子)의 논의를 그르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이 소견이 편파적이었다"고 했으니, 이를 통해 본조편년강목 찬술 시점이 1317임을 확인한다.
<제왕운기 서문 마지막(오른쪽)과 본문 첫 대목(왼쪽)>
다음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제왕운기는 무엇보다 이승휴 자신이 쓴 서문이 있어 이에서 서문 마지막에 이승휴 스스로가 "지원(至元) 24년(1287) 3월 일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 신 이승휴(李承休)"라고 한 점을 참조한다. 이를 통해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완성한 시점을 1287년으로 본다. 한데 이는 문제가 적지 않다. 서문을 쓴 시점이 반드시 그 책이 완성된 시점을 말하는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문을 미리 써놓기도 하고, 훨씬 나중에 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저 시점은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추단'하는 증거 중 하나가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제왕운기가 완성된 시점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제왕운기는 완성 시점이 1287년 무렵이라는 정도만 확인한다.
다음으로 허공[許珙]의 《고금록(古今錄)》이 문제거니와, 그 찬성시점을 이승휴가 제왕운기 서문을 쓴 시점보다 불과 3년 빠른 1284년을 제시하거니와, 나로서는 아직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지는 못했다. 이 고금록은 『고려사』 권제105, 열전18 허공[許珙] 열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이거니와,
허공은 정당문학 윤극민(尹克敏)13)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 죽은 후 자기 집에서 길렀던 처제의 딸과 재혼하고서 헌사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새로운 관직 제도에 따라 직함이 바뀌자 왕에게 사례했으나 허공만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뒤에 판밀직(判密直)·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역임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자 왕은 도지휘사(都指揮使)를 각지로 보내어 전함의 건조를 독려했다. 허공은 경상도로 가고 홍자번(洪子藩)은 전라도로 갔는데, 홍자번이 반도 못 마쳤을 때 허공은 벌써 일을 완료하고 돌아오니 홍자번이 그의 능력에 탄복하였다. 참문학사(參文學事)·수국사(修國史)로 옮겨 한강(韓康)·원부(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하였고 이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었다.
이것만으로는 찬술 완성 시점을 확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같은 고려사 권제107, 열전 20 한강(韓康) 열전에는 이에 관여했다는 직접 증언이 없으며, 나아가 같은 고려사 권제 107, 열전 20 원부(元傅) 열전에서는 원부가 "충렬왕 초에 찬성사(贊成事)·판군부(判軍簿)·수국사(修國史)로 있으면서 유경(柳璥)·김구(金坵)와 함께 『고종실록(高宗實錄)』을 편찬했다. 이때 전 추밀부사(樞密副使) 임목(任睦)의 사고(史藁)를 개봉해 보았더니 백지였으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그를 탄핵해야한다고 건의했으나 원부와 유경(柳璥)은 말을 막고 사고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원부가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을때 역시 사고를 바치지 않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대목만 보이고, 고금록에 관한 기술은 보이지 아니한다.
다음으로 이제현의 사략은 틀림없이 史略을 말할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저술로 이 이름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의 문집인 익재난고 중 부록에 실린 그의 연보를 보면 원 순제(元順帝) 지원(至元) 17년 정유 선생 71세 대목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집에서 국사(國史)를 찬수(撰修)할 적에는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다 모였었는데, 뒤에 국사는 병화(兵火)에 잃어버렸다. 또 《금경록(金鏡錄)》을 선(選)하였다. 또 국사가 미비함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년(紀年)ㆍ전(傳)ㆍ지(志)를 찬수하였는데, 뒤에 홍건적(紅巾賊) 난리에 유실되고 오직 태조(太祖)에서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의 기년(紀年)만이 남았다. 8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의 소목위차(昭穆位次)를 정하게 하니, 선생이 이에 대한 의(議)를 올렸다.
저 시험 문제 보기 중 하나가 말하는 사략이 이 중 어느 것을 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저런 문제를 낸 담대함이 나로서는 참으로 기이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