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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기원/ 조종남 박사
I. 들어가는 말
1-1) 요즈음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적인 정체성을 밝혀야 하겠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교회운동이나 신학운동이 어느 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는 그 자체에 대한 신학적 고찰(reflection)이 뒤따르곤 했다.
오늘의 한국 성결교회는 그 역사는 짧지만 크게 성장을 했다. 근래에 와서는 교회 수가 1,700개를 넘으며 70만 성도에, 해외 선교까지 활발히 하고 있다. 교단 신학교인 서울신학대학도 개교 80주년을 맞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우리 교회의 신학적 배경, 계통, 그리고 그 정체성(identity)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논의를 함은 당연한 일이다.
1-2) 특별히 이런 논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대두되는 듯하기에 이에 대한 연구가 긴절(緊切)한 것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서, 혹자는 '동양 선교회의 창설자 카우만, 길보른씨가 시카고에 있는 무디 성경학교에서 수학을 하였기에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계통은 무디 신학교 계통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우리 성결교회가 심프슨이 강조하는 사중복음을 고조해 왔으니 우리 신학은 심프슨 계통'인 양 생각한다. 그렇다면 "A. B. 심프슨은 장로교 목사이고, 무디 학교는 철저한 칼빈주의 학교이니 우리 성결교단도 장로교 계통이란 말인가?
어떤 이들은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은 요한 웨슬레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성결교회는 한국의 감리교와는 어떻게 다른가? 또 어떤 이들은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 계통은 알미니안-웨슬레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주장인가? 그런가 하면 최근에 항간에서는 성결교회는 한국사람이 어떤 선교단체의 도움 없이 세운 자생적 민족교회 또는 토착교회 이므로 우리에게는 특정한 신학적 배경이 없었고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으로 표현된 열렬한 신앙과 확신만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확신을 근간으로 하는 신학수립의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이런 각이한 의견과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은 어느 계통인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이 어떤 유래로써 헌법에 '전도표제' 또는 '복음의 요제'로 수용되어 왔으며, 사중복음이 우리의 신학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과연 우리 성결교회는 자랑할 만한 신학적 유산이 있는 것인가? 있다면 그 신학적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확인할 학구적 작업이 요망된다. 이런 작업은 감상적이거나 '정치적'일 수는 없다. 이는 정직하고 학구적이라야 한다.
1-3) 그러면 어디에서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계통을 밝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역사적 문헌과 자료로써 성결교회 헌법(1925, 1933, 1936, 1945, 1955, 1973, 1983)과 동양선교회의 역사 문헌, 그리고 그 외 관련된 자료에 의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함에 있어서, 당시의 산 증인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이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런 해석학적 접근은 고대 교회에서 권위 있게 수용되었던 방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의 일이나 교리에서 뜻이 불분명할 때, 우선 예수님의 제자, 아니면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에게 가서 알아보고 문제를 해결하곤 했던 것이다. 오늘의 이 과제에 있어서도 이런 해석학적 접근은 현명하고도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찾아야 할 이런 사람은 누구인가? 이는 당연 이명직 박사라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명직 목사가 주창(主唱)한 성결교회의 신학적 계통과 입장이 무엇인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명직 목사가 성결교회의 초창기에 있어서의 차지했던 위치는 어떠했나?
II.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계통에 관하여
2-1)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계통은 무엇인가?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조직되어, 교단의 교리신조를 제정할 때, 헌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본 단체에서 주창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별 교리가 아니오, 오직 옛날 웨슬레 씨와 감리회의 초 시대 성도들의 주창하던 교리 곳 하나님의 단순한 근본적 진리니라. . . 곳 최초 감리회에서 주창하던 진리 그것 뿐인 대 웨슬레씨의 주창하던 진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나니라.
곧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은 웨슬레의 신학과 최초 메도디스트 운동에 있다는 것이다. 이명직 목사는 그의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약사(1929)"에서 다음과 같이 주창(主唱)하고 있다.
혹시 동양 선교회(성결교회)는 어떤 교파이며 어떤 계통인가 알고자 하는 사 람이 있을 줄 안다. 그런데 우리 동양 선교회는 결코 창립자 자신이 어느 교파에 반대하고 니러남도 아니오(빌립보서1:15) 무삼 교리에 불평이나 불만이 있어서 새로운 교리를 창도(唱導)하고 니러남도 아니오, 오직 감리교회의 개조(開祖)인 요한 웨슬레를 니어 니러나 곳 초시대(初時代)의 감리교회와 갓치 ... 복음을 고됴(高調)하며 미신자(未信者)에게는 진격적(進擊的)으로 전도하야 뎌들을 바른 길노 인도하고자 함이니, 곳 우리 교리나 정신은 순 초시대 감리교회로 인정하여야 틀림이 업슬지니라."
이명직 목사야말로 성결교회의 기원, 그리고 성결교회가 시작될 때의 신학과 그 배경에 관하여 가장 권위 있는 증인임을 의심할 바가 없다.
2-2) 이런 입장은 초대 성결교회에서 발행한 여러 문헌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당시 활천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동양선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동양 모든 나라에 대하여 순젼한 복음을 전하기로 목적하는 단톄이다. 그 특색은 지금부터 1백80년 전에 요한 웨슬레씨가 전하던 복음 그대로 강령은 요한 웨슬레씨가 증거한 성결 그대로 일호도 가감 없이 선전함이다. 그런고로 누구던지 동양선교회를 알고저 하면 초시대 감리교회를 알면 넉넉하고, 성결을 알녀 하면 감리교회 창립자 요한 웨슬레씨의 심령상 경험을 드러보면 넉넉하다. 우리 동양선교회가 탄생한 이래 20년간 하나님의 크신 축복하에서 금일까지 니르게된 것을 감사하는 바이다. 수 년전까지는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복음전하는 것으로만 목적을 하였으나, 사셰와 형편에 의하여 교회로 조직이 되였난대, 죵래의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을 변경하고 성결교회라는 새 명칭을 가지게 되였다.
당시의 성결교회 헌법(1925,1933,1936)은 그 서문에서 동양선교회의 기원을 밝히면서 본 단체가 주장하는 교리는 이명직 목사의 주창과 동일하게 옛날 웨슬레와 초대 메소티스트의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2-3) 어떤 이는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성결교회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는 감리교회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에 우리는 다시 이명직 목사에게 묻고자 한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노 말매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레의 성경해석의 근본적 교리와 "만국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주 강생 1925년에 공포하야 성서학원과 온 교회와 신도들에게 가라쳐 영구(永久)하도록 직히는 신경(信經)으로 하나니라.
이 말은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이 웨슬레 신학과 그 초기의 운동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이 계통이 19세기 미국에서 불일 듯 일어났던 만국성결운동을 통하여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성결교회가 그 신학적 기원을 감리교회와 같이 웨슬레 신학에 두고 있지만 그 강조점과 특징에 있어 다른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 이미 웨슬레 계통의 감리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결교회는 새로운 사명을 띄고 설립된 것이다.
2-4) 그러면 이 만국성결운동의 강조점은 무엇인가? 19세기 미국 남북 시민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의 대부분의 감리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침체되고 있었다. 교회는 극심한 형식주의에 빠졌고 원래 감리교회에서 가장 중심적이었던 성결의 도리는 거의 망각되고 그저 교리로만 남아 있는 정도였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몇몇 감리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강한 부흥과 전도(revivalism and evangelism)운동을 일으키셨다. 이는 요한 웨슬레가 외친 성결(기독자 완전)의 부흥운동이었다. 이것이 교파를 초월하여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성결-오순절 운동(holiness-Pentecostal movement)이라고 부른다. 사이난(Vinson Synan)이 지적한 대로 이 운동의 영적, 지적 아버지는 18세기 영국 메소티스트의 개조인 요한 웨슬레였다. 이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신자는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사도행전에 있는 오순절 사건이며 모든 신자, 교회가 다 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구원에 있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의인(義認)을 강조하였다면 이들은 그 후에 두 번째로 받는 은혜를 함께 주장함으로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과 순복음(the full Gospel)을 제창하였다.
이런 성령운동은 기사와 이적을 동반했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의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증거하며 신유의 복음을 말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운동은 당시 교회가 말하고 있는 지상천국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확신케 되었다.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믿어 예수님의 전 천년 왕국 재림(the premillennial return of Christ)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데이튼(Dayton)이 지적한 대로 이 성결-오순절 운동에서는 구원, 성령 세례, 신유, 재림의 네 가지 테마(themes)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여 순복음의 제하에 이 사대표제(四大標題)를 고조하기에 이르렀다. 심프슨은 사대표제를 사중복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순복음을 고조하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 나름대로 복음, 특히 성령 충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달라짐에 따라 각각 이름을 달리하는 교파로 조직하여 갈라지게 되었다.
2-5) 이 와중에서 웨슬레안 성결파들, 곧 성령 충만을 웨슬레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여러 단체와 교회를 조직하였다. 1880년과 1925년 사이에 무려 25개나 되는 성결교단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1897년에 냅(Knapp)과 리-스(Rees)의 지도 하에 만국 성결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웨슬레가 가르친 중생과 성결의 도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당시에 고조하고 있는 순복음도 보존하기를 원하였다. 실은 당시에 일부 성결단체에서는 캠프집회나 신유, 예수의 전천년 재림과 같은 교리를 반대하며 세계 선교를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이들은 순복음의 제하에서 강조하는 신유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는 재림을 적절히 가르치는 것이 성결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성결의 복음과 함께 신유와 재림도 힘써 가르치며 세계선교에 이바지하기를 원했다. 이 점에서 만국성결회가 발족케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단체는 1913년에 확장, 재조직되면서 그 이름을 만국 성결교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라고 불렀다. 또 그 후(1919-1925), 특히 1922년에 여러 성결 단체들이 합류하여 필그림 성결교회(The Pilgrim Holiness Church)로 발전했다. 동양선교회의 창설자인 카우만과 길보른씨는 바로 이 만국성결교회에 의하여 선교사로 안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동양에 나와 이 만국성결교회와 맥을 같이하는(same lines with) 선교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만국 성결회의 헌장을 보면, 그들은 (1)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성령을 존귀케 하기 위하여, (2) 성서적 중생과 모든 신자들이 받아야 할 성령의 불세례를 강조하며, (3) 주님의 세계복음화의 대분부를 순종하여 이 성결의 복음을 온 세계 방방 곡곡에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된 웨슬레적 전도 운동이었다. (4) 이런 취지에서 시작한 성결운동은 당시의 부흥운동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유와 재림도 함께 고조하였다.
2-6) 이 때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신앙개조'(1925, 1933, 1936)를 보면 교회의 목적과 신앙개조(General Statement of Belief)도 만국 성결교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 1913)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를 다시 웨슬레의 25개 신앙개조와 대조해 보면 성결교회는 웨슬레의 것을 일부 가감 수정하여 작성한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기할 것이 있다면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신앙개조 중 '교회'란에서 본 교회의 사명은 국내외에 순복음을 전파하는 일, 곧 (이 순복음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죄에서의 구원( 중생, 성결)과 재림, 신유를 전하는 일이라고 확대 설명할 뿐 아니라, '성령'란에서 성령의 역사를 성결과 연관하여 확대 설명하였다. 그리고 또한 신앙개조에 성결, 신유, 재림, 운명의 조항을 새로 첨가한 일이다. 이런 수정은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계속 웨슬레의 신학적 입장에 서서 나오되, 19세기의 웨슬레적 성결운동에서 노출되었듯이 웨슬레의 성결의 도리를 특별히 강조하되 이를 성령충만의 역사와 결부시켜 성령론적으로 설명하며 순복음(The full gospel)의 전파를 교회의 지대한 목적과 사명으로 삼는 당시의 배경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교회 헌법이 명시하고 있듯이 "사도들의 모범을 쫓아서 성서적 성결의 은혜를 받게 하며 복음이 땅끝까지 보급되기 위하여 순복음을 전"하는 것 을 교회의 목적으로 여겼다. 곧 순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서적 성결운동과 세계 복음화에 불가결의 것(essential)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성결교회는 웨슬레가 주장한 성결의 도리와 함께 사중복음을 함께 고조하게 된 것이다.
2-7)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신학은 위에서 인용한대로 그리스도와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 곧 성서를 신학의 원천으로 하고 그를 웨슬레의 성서해석에 의한 근간교리와 만국성결운동을 통해 재강조된 웨슬레의 성결의 도리를 중심으로 하여 세워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성결교회는 웨슬레가 주장한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는 사명하에 창립 초창기부터 사중복음을 함께 고조하는 전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명직 목사가 성결교회의 신학의 기초와 계통은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노 말매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레의 성경해석의 근본적 교리와 "만국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하여 세워지고 계승되었다고 주창하신 의미이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 성결교회는 웨슬레신학이 아니라 알미니안-웨슬레 신학이라고 하는 데, 이는 무슨 뜻인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반대하는 신학주장을 알미니안주의라고 이해한다. 이는 알미니우스가 예정론에 대한 큰 논쟁을 일으킨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웨슬레가 칼빈의 이중 예정론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알미니우스와 그 입장을 같이한다. 이런 견지에서 흔히들 알미니안-웨슬레신학이라고 통용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레의 성결에 대한 가르침이나 강조에 있어서는 그가 알미니안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다. 만국 성결교회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강조한 것은 웨슬레의 성결의 가르침과 강조이다. 이런 면에서인지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회의 신학적 계통을 설명함에 있어서 성결교회가 알미니안-웨슬레 신학이라고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헌법책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
더욱이 최근 신학계에서 웨슬레는 이중 예정론을 반대하지만 철저한 은총의 신학자요, 위대한 신학자-전도자인 것이 자명해졌다. 그런가 하면 후대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대명사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여기에 오늘의 웨슬레학자들은 자신들이 알미니안-웨슬레안이라고 불리어지기를 꺼린다. 이 시점에서 왜 우리가 자랑스러운 웨슬레신학이라는 말 대신에 알미니안 웨슬레안 신학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이명직 목사가 부른 대로 웨슬레, 아니 초시대의 웨슬레신학이라고 부르기를 자랑스럽게 여기자.
2-8) 어떤 이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것이 1945년의 재흥총회를 거쳐 오늘의 성결교회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가고.
사실, 1945년의 재흥총회를 통하여 재조직된 본 교회는 명실 공히 '역사적 신 발족'을 한 것이다. 일제(日帝)의 강권에 의하여 1943년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해산을 당했다가 1945년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본 교회가 재흥될 때에는 교회의 명칭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로 변경할 뿐 아니라 헌법도 새로 제정하고 그 안에 있는 신앙개조도 일부 가감 수정하면서 자립하는 교회로 '역사적 신발족의 제일보(第一步)'를 내딛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국성결운동을 통해 전수되어 온 성결교회의 웨슬레 신학적 입장은 1945년 11월, 재흥총회를 통하여 본 교회가 새 발족을 할 때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945년 재흥총회의 헌법에 명시되고 있는 대로, 본 교회는 카우만과 길보른이 시작한 동양선교회에 의하여 기원되었고 "대한 성결교회의 목적은 성결교회 초대 창립자들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하여 "국내외에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영혼을 구원하며, 일반신자에게 성결의 은혜를 전하여 교회로 하여금 거룩되게 하기를 힘쓰는" 데 있다. 헌법은 본 교회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더 구체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우리의 초대 창립자들이 성결교회를 창설하였음이 무슨 교파를 마구 만들려 고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받은 바 신앙의 체험을 통하여 복음의 도리를 세상에 더 한층 높이 드러내려는 열의에 있었음이다. 저들은 17세기 영국을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구원한 요한 웨슬레의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하에 일어났으니 이 조류(潮流)를 밟아 일어난 우리들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여 모든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며, 교인들을 성결한 신앙에 인도하여, 주의 날에 주름 잡힘이 없는 영화로운 교회로 서게 하기를 기할지니라.
이런 내용은 그 후 성결교회가 헌법을 몇 번 개정한 바 있지만 그대로 계승하여 내려오고 있다. 웨슬레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기독교 대한성결교회는 그 "교회의 기초교리는 일반적으로 믿는 복음주의" 신학과 호흡을 같이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 성결교회는 넓게 말하면 개신교회의 복음주의 신학이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웨슬레신학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결교회가 창립 당시부터 고조해온 사중복음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심프슨의 사중복음에서 온 것인가? 그리고 사중복음은 어떻게 우리 성결교회의 전도표제가 되었는가? 그러면 이명직 목사는 사중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강조하였는지 그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III. 성결교회의 전도표제인 사중복음에 대하여
3-1) 우리는 이미 위에서 사중복음이 어떻게 웨슬레의 성결의 도리와 함께 고조되기에 이르렀는가를 간단히 언급했다. 곧 19세기 미국의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성행한 순복음 전도운동에서 순복음의 내용으로 강조된 사대표제(구원, 성령충만, 신유, 재림)를 수용하여 만국성결회는 웨슬레가 강조한 중생과 성결과 아울러 신유의 권능을 증거하며 예수님이 재림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참 성결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만국성결회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의 맥을 따라(same lines with) 조직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도 그런 이해에서 웨슬레가 가르친 대로 중생과 성결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재 림과 신유도 함께 고조하여 온 것이다. 이런 입장은 초대 선교사 길보른의 말에서 분명하게 뒷받침된다.
길보른씨는 그가 선교 초창기에 쓴 책에서 동양선교회는 바로 이 만국성결회를 대표하는 것(their representatives)으로써 전체 성결운동의 아이(child)가 되고 있다고 하면서 동양선교회의 목적은 바로 순복음(full gospel)을 전파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동양선교회의 순복음은 무엇인가? 길보른에 의하면 이는 곧,
첫째로, 요한 웨슬레가 가르친 대로 의롭다함을 입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두번째로 받는 은혜로써의 성결과,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왕의 왕로써 전 천년 전에 재림하셔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신다는 재림과, 하나님의 대속과 약속을 믿는 신앙의 응답으로써 육신의 치유를 받는다는 신유를 의미한다.
한국에 들어온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도 그와 같이 초창기부터 웨슬레가 주장한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 하에 사중복음을 힘있게 전파하여 온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고도 남는다. 그러기에 당시의 헌법(1933,1936)은 순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서적 성결과 세계복음화에 불가결하다"고 하며, 그 신앙 개조 급 조례(1925)와 헌법(1933,1936)에서 본 교회의 사명은 순복음(The full gospel) 곧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국내외에 전파함에 있다고 천명하고 있다.
3-2) 이렇게 이해하고 표현하였던 것을 1945년의 성결교회 재흥총회에서는 '우리 교파의 사명'과 '성결교회의 전도표제'라는 조항을 새롭게 만들어 다음과 같이 이를 수용 정리하면서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의 초대 창립자들이 성결교회를 창립하였음이...영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원한 요한 웨슬레의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하에 일어났으니, 이 조류를 밟아 일어난 우리들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여 모든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며 교인들을 성결한 신앙에 인도하여 주의 날에 주름 잡힘이 없는 영화로운 교회로 서게 하기를 기할지니라.
곧 1945년의 재흥총회는'신유'를 교리장(章)에서는 삭제하였지만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순복음의 내용으로 설명하였던 4대표제, 곧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리를 함께 묶어 이를 '성결교회의 전도표제'로 부각시켜 강조하였다.
성결교회 (헌법 1955)는 우리의 전도표제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를 호칭하되 때로는 19세기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통용한 용어 '4대표제(four themes)'로, 때로는 심프슨이 사용한 용어 '사중복음'이라고도 부르고, 또 어떤 때는 이를 '4대복음' 또는 '복음의 요제'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본 교회는 점차적으로 심프슨이 애용한 사중복음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 교회는 심프슨의 사중복음 중에서 그가 사용한 '구원'을 '중생'으로 개칭하며 특히 성결의 교리를 그의 해석과는 달리 웨슬레의 입장에서 해석 설명함으로 19세기 미국의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강조되었던 4대표제 또는 4중복음을 본 교회가 전파하는'복음의 요제'요, 또한 특색 있는 성결교회의 전도표제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그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3-3)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교회가 심프슨이 애용(愛用)한 '사중복음'이라는 용어를(다른 용어, 사대표제, 사대복음, 복음의 요제, 순복음 등 보다) 선호해 왔으나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심프슨의 것과는 다르며 또한 그에게서 직접 온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교회 안에서 적지 않은 인사들이 우리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심프슨의 사중복음인 양 말해 왔다. 이는 아마도 사중복음이라는 용어가 심프슨이 처음 사용하였고 그의 책 사중복음이 일본과 한국에 소개됨에서 온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실은 필자도 한 때 우리의 사중복음의 내용이 웨슬레신학과의 만남에서 발전되었지만, 사중복음 자체는 심프슨에서 직접 유래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본 결과 성결교회는 위에서 말한 대로 이미 만국성결회가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고조되던 사대표제를 웨슬레의 성결운동의 맥락에서 수용하여 특징 있는 성결교회의 순복음으로 정리한 것을 전수하고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3-4) 그러면 이명직 목사에게 물어 보자. 그는 사대표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우선 이명직 목사의 글에서 사대복음이 심프슨에게서 유래되었다는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 이명직 목사는 그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약사에서 성결교회의 교리와 신조는 위에서 거듭 언급했듯이 옛 웨슬레와 만국 성결교회의 것을 토대로 하였다고 하면서 사대표제를 언급하고 있는 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를 소개하였다. 이는 이명직 목사가 사대표제를 성결교회가 전하는 순복음의 내용이요, 이 순복음은 웨슬레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만국 성결운동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다고 이해하여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선 이명직 목사는 심프슨의 용어를 따라 사중복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대복음(四大福音)이라고 부른다.
이명직 목사는 그 다음해(1930) 활천에 기고한 '참된 복음'에서 "참된 복음을 증거하라 ... 만일 우리가 참된 복음을 증거하지 아니하면 주의 종이라 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이명직 목사에 의하면 '참된 복음'은 중생(사죄), 성결, 재림,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다. "이것은 심령의 구원과 영육의 구원과 육체의 구원인데 영적 물질적 금생래생(今生來生)의 구원이 포함되었나니라." 성결교회는 바로 "사대복음이라는 명목을 세워 구원의 복음을 전함이니... 우리는 사대복음을 각자가 체험한 후에 자신 있게 순전(純全)한 복음을 열심으로 증거하여 고통과 번민과 의심과 불행에 빠진 인생에서 널리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니라"고 이명직 목사는 주장한다.
이명직 목사는 1952년에 기독교의 4대복음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이명직 목사는 사대복음을 심프슨의 사중복음과는 달리 중생, 성결, 재림, 신유로 표현할 뿐 아니라 성결에 대한 해석이 철저하게 웨슬레적이다. 이는 일본의 나까다(中田重治)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사중복음(四重福音)이라는 용어는 심프슨에서 빌렸지만 심프슨과는 달리 이를 신화(新化), 성화(聖化), 강화(康化), 영화(榮化)라고 불러 전도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변화를 강조할 뿐 아니라 그 내용, 특히 성결에 대한 해석은 웨슬레적이다.
3-5) 사중복음과 관련하여 한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중복음은 전도표제가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전도표제'라는 용어는 어떤 한 개인이 만든 용어가 아니라 1945년의 재흥총회 이후 본 교회가 총회적으로(헌법에서) 부르는 용어이다. 혹자는 전도라면 미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어떻게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이 전도표제가 되느냐고 반문한다. 이는 전도(Evangelism)에 대한 신학적 개념의 차이에서 기인된 반문이다. 학파에 따라 전도의 정의가 좀 다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전도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선포(proclaim)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로잔 언약이 채택한 정의이다. 그리고 로잔의 마닐라 선언문은 이 복음(기쁜 소식)은 온전한 복음이라야 하며 이는 곧 죄에서의 해방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건설, 사탄의 지배에서의 해방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리고 로잔 세계복음화 운동은 세계의 온 교회가 온 세계에 이 온전한 복음을 전파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외치던 순복음이 메아리치고 있음을 감지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사실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에서는 순복음, 곧 웨슬레적인 중생, 성결 그리고 신유, 재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겨왔다. 더 나아가 이 순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among Christians) 전하는 것이 우선적 목적이었다. 그래서 이 전도를 흔히 성결-전도(Holiness Evangelism)라고 불렀다. 실은, 만국성결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는 세계적 성결전도를 통해 진격적인 영혼 구원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을 우리가 전하여야 할 '복음의 요제', 또는 '전도의 표제'로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신학적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사료된다.
3-6) 어떤 이는 더 나아가 사중복음이 전도표제가 아니고 성결교회의 근간적인 교리, 곧 신학이라고 한다. 사중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는 이의가 없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리를 본 교회가 전도표제로 택했다는 그 자체가 이 교리들은 본 교회가 주장하는 많은 교리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교리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리가 중요하기에 이것이 바로 본 교회의 신학구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결교회의 중요한 교리들과 그 골격은 신앙개조에 표시되어 있다. 이제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살펴 보기로 하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1925년에 16개조로 된 신앙개조를 제정 공포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이 16개조로 된 교리들은 철저하게 웨슬레 계통으로 알려진 만국 성결교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의 것으로 그 신앙개조 가운데 '방언'에 대한 교리 하나만을 빼고 그 전부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신조의 구성은 웨슬레가 작성한 신앙개조를 가감 수정한 것에다 신유, 재림, 운명(최후 심판)의 조항을 첨가한 것이다. 그런데 성결교회가 1945년의 재흥총회 이후에 정리한 신앙개조는 거기에서 신유에 관한 조항을 삭제하였을 뿐, 그 내용 전부를 거의 다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3-7) 그러면 이렇게 구성된 신학의 골격과 계통은 어떤 것인가? 16개조의 신앙개조를 검토해 보자. 과연 사중복음이 그 골격을 이루고 있는가?
이 신앙개조는 첫째로, 삼위 일체(하나님, 예수, 성신)에 대한 교리로 시작하여 본 교회의 교리가 사도적 전통에 서 있음을 밝힌다. 다음으로 4조에 성서의 충족성과 경전을 규정함으로 본 교회가 복음주의적 개신교 전통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5조 이하에서 원죄, 자유의지, 칭의, 성결, 칭의 후의 범죄, 교회 등등을 다루면서 교회의 중요한 교리들이 웨슬레의 해석에 따랐음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유, 재림, 운명(최후 심판)의 교리를 첨가함으로 본 교회가 만국 성결운동의 강조점을 가미한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면은 교회의 교리 설명에서 본 교회의 사명이 순복음을 전함에 있다고 주장함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본교회의 신학과 신앙개조(신학)는 이명직 목사가 이미 지적한대로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노 말매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레의 성경해석의 근본적 교리와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음이 틀림 없다.
3-8) 그렇다고 해서 사중복음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중복음은 본 교회가 전하여야 할 순복음의 요제이기에 매우 귀중한 교리이다. 특히 순복음의 전파(Holiness Evangelism)를 교회의 사명으로 하는 본 교회는 사중복음을 계속 귀중하게 여기고 힘있게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 헌법이 성결교회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음은 바로 이를 힘있게 뒷받침하는 것이다.
"곧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하에서 본 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힘있게 전하여 모든 사람을 중생하게 하며 교인들을 성결한 신앙생활로 인도하여 주의 재림의 날에 티나 주름없이 영화로운 교회로 서게 하려는 것이다."
IV. 성결교회의 기원에 대하여
4-1) 마지막으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와 같은 결론은 오늘의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가 그 신학적 계통과 입장에 있어서 1945년 이전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와 더 나아가서는 동양선교회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 이들은 성결교회가 자생적 토착교회라고 하여 이 신학적 연속성을 인정치 않는 듯한 말을 한다. 혹자는 성결교회의 신학은 한국 사람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말한다. 1907년에 정빈과 김상준씨가 동경 성서학원에서 돌아와 전도관을 세운 것이 어느 선교단체의 도움 없이 한국사람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기에 성결교회는 민족 자생교회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면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이명직 목사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4-2) 이명직 목사는 그의 성결교회 약사(1929)에서 "주 강생 1907년에 김상준, 정빈 량인이 일본 동경 성서학원에서 졸업하고 환국하여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붙이게 된 것은 조선에 동양선교회가 비로소 탄생된 때다" 고 증언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그런고로 "1907년은 동양선교회가 조선 전도에 착수한"해요, 본 교회는 "우리의 제1세 총리 카우만과 길보른으로 말매암아 니르키섯"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명직 목사의 말은 1907년의 전도관에서 정빈과 김상준씨가 전도 사역을 하였으나 혹자의 말처럼 그들이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동양선교회의 사역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때의 복음전도관은 명실 공히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혹자의 말처럼 복음 전도관이 1907년에 한국사람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이것이 1910년에 토마스 목사가 감독으로 나오기까지는 한국사람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운영되어 온 것으로서 이때의 복음 전도관은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 아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명직 목사는 1929년에 "성결교회 제1회 년회에 대하야'라는 제하에서 활천의 주간(主幹)으로써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주강생 1907에 비로소 우리 조선에 탄생되어 1921년 9월까지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하에 략 15년간을 정치도 업섯고 오직 선교사의 지도를 밧아 왓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유일의 규측이엿섯다. 그러나 이와 갓흔 상태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족의 축복을 보게되어 1921년에 니르러 복음전도관을 성결교회라는 개제하(改題下)에 비로소 목회에 착수하는 동시에 ..교회를 치리하여 왓스나, 아직것 각교회와 교역자에게 단체일에 대하야 참의(參議)의 특권을 가지지 못하엿섯다. 그러나 이제는... 성결교회 제1회의 년회(年會)가 조직되게 된 것이다. 이제는...피보호자에게 가독권(家督權)이 생긴 것이다...."
이명직 목사의 이와 같은 견해는 1945년의 재흥총회가 헌법(1955,1974)에서 본 교회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명함으로써 권위있게 뒷받침되고 있다.
"본 교회는 주강생 1901년에 미국인 씨.이.카우만과 이.에이.길보른 양인(兩人)이 하나님의 크신 사명하에 동양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의 순복음을 전하고자 함에 기원(起源)하였다. 한국에는 1907년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東洋宣敎會 福音傳道館)이란 이름으로 서울에서 전도를 개시하다. 그 후 교세가 확장됨으로 1921년 9월에 드디어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朝鮮 耶蘇敎 東洋宣敎會 聖潔敎會)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조직하였으며. . ."
이와 같이 성결교회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오히려 이명직 목사의 말대로 본 교회의 기원을 동양선교회의 사역에서 보고 있음이 틀림 없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4-3) 위와 같은 사실은 동양선교회의 기록이나 일본인이 쓴 역사책들도 명확히 뒷받침하고 있다. 그 당시(토마스 목사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동양 선교회의 문서에 서울 복음전도관은 OMS의 Station 또는 a Full Gospel Mission in Seoul로 취급되어 있었고, 전도관에서 사역하고 있던 정빈, 김상준(鄭彬, 金相濬)은 동양선교회의 임명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어있고 이미 동양선교회의 교직자로 취급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에서의 동양선교회의 사역에 책임을 맡은 자들로서 수시로 사업보고를 하고 있었다.
당시의 동양선교회의 기관지인 Electric Messages를 보면 1907년에 정빈, 김상준(鄭彬, 金相濬)양씨가 귀국할 때에 카우만과 길보른씨도 함께 나와서 복음전도관 건물을 얻어 주고 사역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국에 시작한 새로운 선교(this New Mission in Korea)를 위해 기도와 헌금을 해 달라고 호소했다. 카우만과 길보른씨는 1908년에 다시 한국에 나와 150명 가량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건물을 구해주고, 얼마 동안 매일 전도관에서 함께 사역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계속 모금하여 서울에 세울 건물과 땅값을 마련하였으며 대지를 구입했다. 이 때에 외국인의 이름으로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미국 공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0년 12월에 토마스 목사가 한국에 나와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의 사역을 친히 감독하였다.
우리는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하면서 고국의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직접 복음을 전함으로 한국에서의 본 교회 탄생에 크게 기여한 정빈, 김상준(鄭彬, 金相濬) 두 분의 공헌을 높이 기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에 독자적인 교회를 시작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명직 목사와 함께 한국의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성결교회의 신학은 그들이 만국성결운동을 통하여 전수한 (성결의 복음에 부합한) 순복음을 고조하는 웨슬레 신학 계통이라고 결론 짓는다.
V. 맺는 말
5-1) 성결교회의 신학적 계통과 입장에 관한 위와 같은 결론과 확신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의를 안겨준다. 이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우리 성결교회는 자생적인 토착교회로서 그 초창기에는 열정적인 신앙체험과 확신만 있었고 신학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훌륭한 신학과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혹자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 교회는 창립자들의 신앙체험과 확신을 근간으로 하여 앞으로 신학을 수립하는 '과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위대한 유산을 발견하고 이를 새롭게 빛내는 특권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5-2) 특히, 오늘의 신학과 선교에 있어 18세기의 진부했던 교회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했던 국가와 사회를 그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구원한' 웨슬레의 신학운동이 재발견되어 각광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19세기 미국에서의 웨슬레적인 성결 부흥운동에서 강조하며 전파한 순복음(the full gospel)이 오늘의 세계복음화 운동에서 온 세계 교회(the whole church)가, 온 세계(the whole world)에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전파하여야 한다고 호소하며 강조하는 물결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5-3) 이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성결교회가 19세기 성결운동을 통하여 이어받고 있는 웨슬레의 신학, 특히 성결의 도리와 순복음이 얼마나 귀한 유산인가를 새삼 깨달아 감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이 놀라운 유산(the grand depositum)을 생생하게 간직하며 빛내기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