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씨 시조 및 본관의 유래
☞ 시 조 :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
묘소 : 경북 영양군 영양읍
☞ 일세조 : 영양관(英陽貫) 남홍보(南洪輔)
의령관(宜寧貫) 남군보(南君甫)
고성관(固城貫) 남광보(南匡甫)
남씨가 성(姓)을 얻게 된 것은(得姓) 신라 때부터 비롯하였으니, 전하는 기록에 당나라 천보 (天寶) 14년(신라 경덕왕 14년 서기755년)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행차(行次)할 때에 시종(侍從)한 김충(金忠)이 안렴사(按廉使)로서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漂流)하다 신라 예주(禮州)에 도착하니, 곧 지금의 영해(寧海 현제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 죽도)이었다.
公이 말하기를 중외가 하나의 천하이니 모두가 왕토라 이곳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경덕왕이 당나라 천자(天子)에게 아뢰어, 이곳에 살겠다는 소원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이에 경덕왕은 중국 여남(汝南)사람이라 하여 “南”씨 성(姓)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개명하여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여 영양(英陽) 땅에 살게 하고 호적을 받게 되었다 라고 한다.
그 후 고려 후기에(1,200~1,300년대로 추정) 형제 3인이 계셨으니. 군기주부동정(軍器主簿同正) 홍보(洪輔)와 추밀원 직부사(樞密院 直副使) 군보(君甫)와 고성군(固城君) 광보(匡甫)이시다.
홍보(洪輔)는 이어 영양을 본관으로 하고, 군보(君甫)는 의령으로, 광보(匡甫)는 고성으로 이관하여 계보(系譜)가 비로소 3관(貫)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중략~ 지금 족보 중에 기록된 것을 보면 수적(受籍)한 때로부터 이관(移管)한 때 까지는 500여년이나 되었는데, 서첩(書牒)에는 겨우 7代 뿐이니 그 간에 빠진 것이(遺漏) 많았음을 가히 알 것이다.
천보년대(天寶年代)에 당 현종(玄宗)이 촉(蜀)에 행차할 때 시종한 신하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에 표착하였다는 기록은 당서(唐書)에나 동사(東史)에 하나도 없고, 안렴(按廉)이란 직명도 또한 천보년대에는 없었으니, 이것이 모두 후세 사람들이 말로만 서로 전해서 들은 대로 기록하였으니, 고증(考證)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와서 오직 “밀직공(密直公) 이상은 의심스러우나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밀직공 이하는 믿을 수 있으니, 믿는 대로 전할 뿐이다”함이 마땅한 것이리라.
민마부(閔馬父)의 시를 인용한 말에서 이른 것은 멀고 먼 조상들이 정하신 법을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지금 그의 의심나는 것과 믿어 운 것이 유래한지가 오래 되었으니 어찌 감히 없앨 수 있으리오. ~중략 ~
상기 내용은 남씨 최초의 족보인 의령 남씨 계유보(癸酉譜)의 원본 해설본이다.
계유보는 1693년(숙종 년)에 함경감사 남익훈(南益熏)공이 발행하엿는데,
여기에서 영의정을 지내신 남구만(南九萬)공이 서문(序文)에서 인사말은 생략하고 바로 남씨 시조와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 기록에 의해 최초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의문이 가는 것은 의문을 가지고 전하고, 믿음이 가는 것은 알려진 그대로 전한한다(疑以傳疑 信以傳信)”라고 하면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고충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후에 의령보에는 “공은 진사과(進士科) 출신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성좌시중(門下省左侍中)으로, 당시 당 현종은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촉(蜀)나라에 피난가 있어 길이 막혀 복명(復命)할 수 없어 신라땅에 머물게 되었느데, 이때의 공의 나이는 40여세 였다”고도 하고,
해동인물총기(海東人物叢記)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유래로 살게 되면서 경덕왕에게 시급한 일을(時務) 가려 건의 하고 사람의 도리와 질서 관계(彛倫)를 정립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찬술하여 올렸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 축산항 유적






좌측 바닷가 섬이 죽도(竹島)이며 입구에 망향대(望鄕臺)대가 있다. 전면 중앙 산 능선으로부터 유허비(遺墟碑), 월영대(月影臺), 일광대(日光臺)가 있다.
이부동(吏部洞) 비각 : 공이 처음와서 사시던 곳으로 김이부동 (金吏部洞)이라 전해오고 있으며 185년에 이곳 사람이 벼랑에 이부동 석자를 새겼다고 함.
통사동 : 비각 서쪽 망령아래 남쪽 기슭. 이곳 역시 공이 사시던 곳으로 같은해 벼랑에 동명(洞名) 석자가 새겨졌다고 함
해마다 공이 축산항에 도착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부터 지방 축제를 벌여오고 있는 장면
◉ 공의 산소

공의 산소는 처음 영양현 일월산 부용동 아래 영양군 영양읍 동부동 대흥구로 되어 있었으나, 이곳에 7개의 무덤이 얽혀있어 그중에 어느 무덤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그래서
1670년부터 작약봉 아래 기슭 대흥구 오른편 묘소가 마주보이는 곳에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려 왔다.
1674년에 후손 남상주(南尙周)가 구덩이를 파고 지석을 찾으려 다가 뇌우로 실패하고
1675년에 도항동 서쪽 기슭에 단을 모아 매년 10월 상순에 제사를 지내 왔음
1687년에 후손 경상 감사 남태량(南泰良)이 표석을 세움
1957년에 남씨 대종회 회장 남상철(南相喆)이 흐리고 비가 오는 것을 무릅쓰고 삽을 들고 일을 하니 날이 개이고 5척여를 개봉하고 정확한 증거를 얻어 개사봉축하고 모든 석물을 세워 10월10일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재사(齋舍)와 여남 서원 강당

1677년 제단아래 향당근처에 사당을 짓고 1681년에 향현사(鄕賢祠)라 이르고 사당을 영의공 묘(英毅公 廟)라 하더니, 1687년 경상감사 남태량(南泰良)의 주선으로 재사를 크게 짓고 영의공 재사(英毅公齋舍)라 액자를 걸었다.
그 후 1830년 이곳 선비들의 주청에 따라 서원으로 승격되어 춘추제향의 제사를 관에서 받들어 오더니 1866년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따라 폐원되었다. 1909년 강당 마당에 여남서원유허비가 세워졌고, 1920년에 강당 건물이 중건되었다.
* 편집자 주(註)
우리나라의 남씨 시조 이전에 중국에는 이미 남씨가 있었다.
알기 쉽게 이야기로 꾸민 중국사 (1996년 권중달 감수> 390P를 보면, 당나라에는 이미 남씨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본다.
천보 14년이면 서기 755년으로 신라 경덕왕 14년이고, 당나라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이니, 시대적으로 동시대였음이 확실하다.
바로 그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남재운>이란 장수가 장순과 함께 6,000여명의 군사로 13만명에 달하는 반란군의 장수 윤자기를 상대로 115일 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수양성을 지켜 왔다.
여러 차례 전투중 남재운은 반란군의 장수 윤자기의 왼쪽눈을 명중시켜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도 하였으나, 숫적으로 우세한 반란군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해왔다.
이에 남재운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 임회로 가서 지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오던 중 반란군에게 체포되었고, 수양성도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그래서 남재운과 장순등 수양성을 사수하던 장수들은 생포되었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고 의연하게 장렬한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덕분으로 수양성이 함락된지 3일 만에 장호가 거느린 지원병이 윤자기 일당을 물리쳤고, 또 7일이 지나자 곽자의가 거느린 왕실 군대가 수양 이남의 강희지역을 쉽게 수복할수 있었고, 반란군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볼때 남씨 성은 이전부터 중국에 있어 왔고, 지금도 100위권 이내에는 들지않지만 남씨는 존재하고 있는데, 중국의 남씨와는 그 유래가 다른 것으로 이해하여야 될 것으로 본다.
영양김씨와 같은 유래
한국인의 족보(198.7.21. 한국인의 족보 편찬위원회발행)에 영양 김씨의 시조 및 본관 유래를 보면 우리와 똑 같다.
본래의 이름 김충(金忠)이 남씨 성을 하사받아 남민(南敏)으로 개명하여 일신양성(一身兩姓)이 되었다.
그래서 큰아들 석중(錫中)은 영양에 살면서 그대로 김씨의 혈통을 이어 왔고, 작은 아들은 남씨성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김충>의 후손들은 그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누대(累代)를 밝히지 못하므로, <김충>을 원조(遠祖)로 후손 충황(忠晃 ; 상호군)을 시조로 하여, 본관을 <영양 김씨>로 계승하고 있다.
참고로 그들의 재사(齋舍)는 남씨와 같은 <경북 영양의 향현사>이며, 후손들의 집성촌락은 경북 영천군 화산면 연계동에 30여호, 경북 봉화봉성면 외삼리에 2여호로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