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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선시집 해설
그리운 아날로그의 미학
-고 명수(시인, 동원대 교수)
1. 시인을 위하여
시란 승화된 감정의 세계를 ‘최상의 완전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가히 언어예술의 꽃이요, 문화의 정수(精髓)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시에서는 일상 언어에서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리듬이나 이미지, 어조와 낱말의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세부적 요소를 섬세하게 고려하여 말해야 한다. 여기에 예술가로서 시인의 계산과 도박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인의 인식과 감정이라는 씨줄이 이미지, 리듬과 어조 등의 날줄과 만나 유기체처럼 긴밀하게 어우러져 짜인 천과도 같은 것이 시이므로 한편의 시에는 다양한 삶의 무늬와 매듭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시인은 순결한 사랑으로 매개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시인이 산고(産苦)의 끝에 낳은 작품을 세상에 내 보내면, 그 작품은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시인들은 금지옥엽처럼 키운 자식을 시집, 장가보내는 심정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보낸다.
또한 시는 세상에 ‘새싹’을 나누어주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삶에 지친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주거나, 언어의 아름다움과 상상의 기쁨과 안식을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시인들은 얼마나 많은 밤을 불면으로 지새워야 하던가? 그러므로 한 편의 시에서 표현되는 정서나 사상의 세계는 인간의 운명을 포괄하면서도 일상성을 한 차원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일상의 때 묻은 언어가 아니라, 청신하고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일상어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어가 시작된다.”는 말은 시작원칙의 제1조가 된다. 같은 기호체계를 사용하지만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진달래’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일상어의 차원을 벗어난 시인의 정서와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과학적 사용과는 판이한 언어의 정서적 사용인 것이다. 거기에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고, 사랑과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의 끝에서 도달한 깨달음이 있다. 독자들은 그러한 시를 읽으며 절절한 사랑의 모습을 느껴 보기도 하고, 고난과 시련의 끝에 도달한 중년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만나기도 한다.
2. 시의 하늘을 날고 싶은 이카로스의 꿈
지하선의 첫 시집을 읽어보았다.
그의 시적 감성은 대체로 디지털적이라기보다는 아날로그적인 것 같다. 가볍고 휘발성이 강한 것이 아니라 끈끈하고도 뜨거운 그 무엇이 느껴진다. 그것은 ‘뜨거운 땡볕을 뚫고 울어대는 매미’로 표상되기도 하는데, 시에 대한 열정과 치열한 도전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소리를 키우는 건 순전히 침묵이다
길고 지리한 기다림의 끝
찰나의 생生 경계에서
방황하는 고통을
묵묵히 품어주는 초록 잎새
제 몸 틈새에 그의 일생을
녹음해 두었다가 재생시켜주는
넉넉한 나무둥치가 있기에
명함名銜이 된 소리의 칼 하나,
어둠의 등판에서 벼리고 갈았다
-「매미가 뜨겁게 우는 이유」부분
위의 시에서 매미로 표상된 시의 화자는 ‘어둠의 등판’에서 ‘소리의 칼’을 ‘벼리고 갈’며 침묵 속에서 소리를 키우고 있다. 모든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기까지는 언제나 기나긴 인고와 침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화자도 그것은 ‘길고 지리한 기다림’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는 천둥이 치고, 가을엔 무서리가 내리듯이, 한 존재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상징하는 ‘소리’를 내기까지는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을 이겨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은 혼란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다행히도 그러한 고통의 길 주위에는 언제나 우리를 ‘묵묵히 품어주는 초록 잎새’나 곤고한 화자의 기다림의 시간을 증언해주는 ‘넉넉한 나무둥치’와 같은 귀인(貴人)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요단강 어귀 가로수들
세찬 바람에 떠밀려
등은 휘고
내리 꽂히는 폭염의 무게에
일제히 몸통 기울어 졌다
가나안을 향한 아득한 여정
모세의 꿈을 안고
고꾸라질 듯, 기우뚱
허공의 비탈을 오른다
늑골 사이
머물지 못하는 시간들이
숨가쁜 광야를 건너간다
무릎 굳게 세우고
하늘을 달리고 싶은
열망의 그림자
무성히 늘어뜨리며...
-「비스듬히 산다」 전문
이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 치고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는 법이니, 우리는 바라는 바의 열망에 대하여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니 저마다의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모든 꿈을 가진 자들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요단강 어귀 가로수들’처럼 ‘비스듬히’ 살 수밖에 없는 법이다. 시시포스가 신들의 벌을 받고 힘겹게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듯이 ‘세찬 바람’과 ‘내리 꽂히는 폭염’을 견디며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희망의 땅 ‘가나안을 향한 아득한 여정’을 가야 하는 ‘모세의 꿈’처럼, 모든 꿈을 가진 자들의 숙명이다. 때론 ‘고꾸라질 듯 기우뚱’하며 ‘허공의 비탈’을 오르노라면 그만 두고 싶은 유혹에 심하게 흔들리기도 할 테지만, ‘하늘을 달리고 싶은 열망’이 있기에 잠시도 ‘머물지 못하는 시간들’을 안고 숨 가쁘게 ‘광야’를 건너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의 삶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화자가 꿈꾸는 ‘소리’의 세계는 어떠한 것이고 시인이 꿈꾸는 소리의 하늘은 어떤 모습일까?
이카로스*날개에 기생하던
울음이
태양의 얼굴을 비비며 녹아내린다
몇 광년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지구 한 귀퉁이에
빛의 씨앗으로 심어진다
스핑크스의 비밀처럼
쓸쓸히 묻혀있던
갈등의 단절음이
어둠의 갈피를 헤집는다
지루한 기다림을 웅얼거리다가
좁은 문을 통과한 성자처럼
붉은 입술위에서
꿈의 빛깔로 떠돌다
허공의 향기를 흔드는
고원금*현의 울림으로
보일듯
들릴듯
천상의 모습인듯
다가온다
-「미소 1」전문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고단하다. 그래서 꿈의 ‘이카로스날개’ 옆에는 언제나 고통과 슬픔의 ‘울음’이 따른다. 그 울음은 ‘태양의 얼굴’조차도 비비며 녹아내릴 정도로 강렬하지만, 절망과 슬픔은 언제나 그렇듯이 ‘빛의 씨앗’으로 나아가는 토양이 되기도 한다. 갈등과 어둠의 고통을 뚫고 그것은 ‘좁은 문’을 통과한 성자의 ‘붉은 입술’위에서 ‘꿈의 빛깔’로 떠돌다가 마침내 신묘한 힘을 가진 ‘고원금’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화자가 꿈꾸는 소리의 하늘은 모든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잠 재우는 신비와 평화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낭만주의적인 꿈을 가진 시인이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은 어떠할까?
3. 위태로운 곡예로서의 삶
삶이란 언제나 예기치 못한 기쁨과 아픔을 수반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불화가 빚어내는 숱한 이야기들이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은 거기에 인간의 근원적인 고뇌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누군가 시인을 ‘아픈 동물(sick animal)’ 라 했다. 시인은 일상인들이 잊고 지내는 이 본질적인 질문들을 가슴에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이니, 삶이란 언제나 고뇌의 연속이고, 니체의 말처럼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미완성의 존재이자 가소성(可塑性)의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고통과 고뇌를 더욱 진하게 느끼며, 아이헨도르프의 말처럼 시인은 ‘세계의 마음’이니 세간의 아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닌가 한다.
수우박이 왔으요
달고 맛좋은 수우박을 아아주 싸게 드리요
아파트 벽 속에 갇혀있는 귀들을
밖으로 끌어내려고 안간힘이다
어스름 땅거미가 덮쳐오는데도
허공에서 허공으로 겹겹이 이어지던
소리, 소리들
하루치 생계가 소리의 줄을 타고
위태롭게 곡예를 한다
병든 노모의 밭은기침이 걸리고
수박씨 같은 아이들의 눈망울이
그렁그렁 걸려있는
외 줄 타 기
어둠이 짙어질수록 뒷걸음질 친다
아침이면 닿아야 하는 밥상머리
세끼의 허기진 혀끝에서 팔리지 않는
오늘이 이울어 진다
-「하루살이」 전문
수렵과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된 오늘의 삶 속에서 우리는 늘상 무언가를 팔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의 조건을 필연적인 숙명으로 안게 되었다. 모든 것은 상품이 되어서 화폐를 매개로 교환되고, 화폐가 있어야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에 가장들은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해 오거나 열매를 따서 오면 그것으로 생계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돈을 벌어와야 한다. 그래야 쌀을 사고 의복을 살 수가 있다. 위의 시에서도 화자는 애절하고도 절박하게 ‘수박’을 사라고 외치는 한 과일장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우리 삶의 조건을 제시한다.
공동체적인 대가족제도가 무너진 뒤로는 가족들이 직장을 따라 뿔뿔히 흩어져서 살게 되었고, 도시에서의 삶은 아파트로 상징되는 단절된 ‘벽’속에 갇히게 되어 이웃 간의 의사소통이나 공동체적인 삶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그러니 타인과의 소통의 매개가 되는 ‘귀’들은 아파트 안에 꽁꽁 숨어 있는 것이고, 단절과 고독의 소리들은 ‘허공에서 허공으로’ 퍼져 나간다. 그러나 하루치의 생계를 위해서는 이 단절의 벽을 뚫고 상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니, ‘병든 노모’와 ‘수박씨 같은 아이들의 눈망울’을 책임져야 하는 과일장수의 목소리는 생사의 기로에서 위태로운 ‘외줄타기’의 ‘곡예’를 해야만 하는 가장의 모습을 현시한다. 자본주의 아래의 삶은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관절은 삐걱거리며, ‘겹겹이 찌든 삶의 냄새’를 밖으로 내보내려 할 때 ‘생의 문’은 ‘덜컹 덜컹’ 흔들리는 것이다. 문이 이렇게 덜컹거리는 것은 알고 보니 ‘오랫동안 묶여 있던 것들’을 ‘미처 잠그지 못한’ 때문이다(부엌 문」). 그러니까 화자의 삶의 고통은 조상 대대로 유전되어 온 것이다.
조등처럼 흔들리는 오솔길
내 유년을 키웠던 할머니의 눈물 밥이
하얗게 끓고 있어요
할머니 가슴에 통증으로
박혀있던 바늘같은 나
할머니의 장죽長竹에서 올라오는
아리고 쓰린 한숨이
굽은 등위로 어룽지다가
맵싸한 그믐달의 뒤꿈치를
휘감곤 했지요
수만 개의 바늘이 타고 도는 내 핏줄 속으로
꽃 진자리의 아픔 같은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이
겹겹의 물결로 굽이치고 있어요
-「냉이꽃」전문
위의 시에서 보듯이 화자는 자신을 ‘할머니의 가슴에 통증으로 박혀있던 바늘’과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아마도 화자는 가난한 유년의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보낸 듯한데, 할머니는 왜 그리도 ‘아리고 쓰린 한숨’을 ‘장죽(長竹)’에서 토해냈을까? 화자의 핏줄 속에는 ‘꽃 진자리의 아픔’같은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이 물결로 굽이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 ‘한숨’이 ‘굽은 등위로 어룽지다가’ ‘그믐달’에까지 이른다는 미학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가난과 이별 같은 사람의 숙명적인 아픔들이 우주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죄와 벌에서 지적 오만으로 인하여 살인을 저지른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양심의 가책으로 고뇌하다가 몸은 비록 삶의 누추함에 더럽혀졌지만 영혼은 순결한 ‘성스러운 창녀’소냐에게 자신이 살인범을 고백했을 때, 소냐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더럽힌 땅에다 키스하세요. 그리고 거리로 나가 나는 죄인이라고 외치세요”라고 . 그 말에 따라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를 하고 시베리아 유형길을 떠난다. 그리고 소냐는 그를 따라가 끝까지 사랑을 실천한다. 기독교적인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이 소설을 문득 거론한 것은 바로 다음의 시 때문이다.
롤러스케이트 타는 아이들
무릎을 꿇고 단단한 바닥에 복종하는 것이
튼튼하게 일어서는 힘이라는 걸 배우고 있다
잘 넘어지는 방법을 몰랐던 나
종종 걸음으로 우회하기도 했고
바닥에 반항하며 버팅기기도 했다
엄동설한嚴冬雪寒, 바닥은
서려고 만 했던 내 삶을 공격해 왔다
(중략)
하루치의 목숨, 그 누런 고집이
단단한 바닥을 치며
시간의 내리막으로 굴러 가고 있었다
-「넘어지는 연습」 부분
위의 시는 ‘무릎을 꿇고 단단한 바닥에 복종하는 것’이 오히려 ‘튼튼하게 일어서는 힘’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우리는 언제나 갑자기 닥쳐오는 위험에 대비를 하지 못해서 후회를 하곤 한다. 그것은 ‘잘 넘어지는 방법’을 몰라서이다. 위태로운 삶의 외줄타기에서 우리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그 ‘누런 고집’ 때문에 삶의 내리막으로 추락하곤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에서 리어왕이 바로 그 ‘누런 고집’ 때문에 파멸한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우매함을 나타낸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삶의 밑바닥의 진실에 복종한다면 평안할 것을 우리는 왜 그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종종 걸음으로 우회’하고, ‘바닥에 반항하며 버팅기가’만 하는가? 그것은 많은 현대인이 습관처럼 지니고 있는 허위의식 때문일 것이다. 대개는 결핍된 자아를 위장하려는 방어기제 때문이거나 체면과 같은 사회적 가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히면 밑바닥의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넘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한 넘어짐의 아픔과 고통을 먹고 삶과 예술의 성숙은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네 삶에서의 실패와 좌절을 때로는 고귀한 자산이 되는 것이다.
4.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시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신비로운 의미를 지니는 한 순간을 건져내어 시간을 초월한 형식에 가둠으로써 그 순간을 기록하여 영구히 보존하려는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실인 동시에 새로운 언어 질서를 통해서 기억에 남을 만한 그 특별한 경험을 타인들에게도 재현해 보여줌으로써 그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시인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인으로서의 기쁨도 결국은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어떤 것, 우리가 알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제 새롭게 발견하여 처음으로 그 의미가 완전히 밝혀진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의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시인은 사라져가는 우리문화의 아름다운 흔적을 따라가는 아날로그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곡선에서 곡선으로 흐르며
솟구치다가 이우러지는
백색의 침묵이다
고쟁이 속 깊이
여자를 참아내며
종부從夫로 아낙으로
고초당초 시집살이
섶, 섶에 서린 시앗의 한恨도
적막 가슴 서리서리
말기끈으로 꽉꽉 조여 맸지
휘이휘이 열두 폭 치마 들썩이던
풍요로운 가을날들이
얼어붙은 노을에 기대선 허수아비처럼
허허로워질 때에야, 서럽게 낡은
버선목 탁탁 털어 뉘어 놓고
맨발 가지런히 앙상한 쉼을 얻었지
-「여백 2-한복예술 개인전에서」 전문
위의 시는 한복의 아름다움과 그 한 복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네 전통적인 여성들의 삶과 한(恨)을 승화시켜 가던 지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 한국적인 미(美)를 얘기할 때, 버선코의 아름다운 선이나 기와지붕 추녀의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한복의 아름다운 곡선의 미를 거론한다. 시의 앞부분은 한복이 지니고 있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그러다가 3연에 가면 한복 속에 깃든 한국여성의 내면의 아픔을 그려낸다.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안으로 절제하며 인고(忍苦)의 삶을 살았다. 그것은 ‘고초당초’처럼 맵고 아픈 것이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적막 가슴 서리서리’말기끈으로 조여매고 추수가 끝날 때까지 인고로 기다려야 했다.
이제는 여성들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어 가정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고 나아가 여성들은 욕망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어 이러한 아날로그적인 정서는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말초적으로 디지털화한 세계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세계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러한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은 창조적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난파한 선박’처럼 도시 속에 외로운 한 채의 고가(古家)로 자리하고 있다.
종로 한 복판
홀로 엎드려 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
많은 섬들이 침식당한 뒤
냉랭한 파도가 후려칠 때마다
시름시름 낡아가는 통증
해안에 좌초 된 선박처럼
침묵으로 덮고 있다
어둠이 저녁으로 내려앉는
이끼 낀 시간의 절벽에는
실종된 옛 기억이
따개비처럼 굳어있고
짜디짠 섬 한 쪽
한 뼘 남은 그림자만
허기진 냉기로 남아있다
-「고가古家」 전문
위의 시에서 ‘고가’는 ‘낡아가는 통증’을 지닌 채 ‘절해고도’처럼 침묵 속에 고립되어 있다. ‘이끼 낀 시간의 절벽’에는 ‘실종된 옛 기억’이 ‘따개비처럼’ 굳어있다. 처연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전 세계에서 우리만큼 전통문화를 경시하는 나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무조건 개발과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건설만이 횡행한다. 아파트를 짓느라 땅을 파헤치면 고대의 유적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것을 보존하기에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힘이 너무 크다. 그러다보니 전통문화의 보존은 언제나 찬밥 신세가 되어 자본의 이해관계에 밀려난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 눈물을 머금은 채 ‘짜디짠 섬 한 쪽’에 씁쓸하게 잊혀져서‘한 뼘 남은 그림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후손들이 홀대하니 우리의 전통문화란 언제나 ‘허기진 냉기’로 변두리 한 구석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흘러간 옛 노래가 흐르는 ‘황학동’의 거리를 서성거리며 잃어버린 추억의 시간을 찾아 방황하기도 한다.
필요 없을 것 같은 필요들이
오밀조밀 달라붙어
잊혀져가는 시간을 근근이 잡고 있다
못 가져도 만족스럽던
골동품 같은 세월을 팔던
옛 추억이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폐선엔
오래전 내걸었던 백기가
잿빛소음을 감고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남루한 존재감으로
밭은 숨을 몰아쉬며
밤의 밀집을 채워 넣고있다
가혹한 표류의 속박에
정겨운 목소리들이 부러져 나뒹굴고
‘희미한 옛사랑’을 울고 있는
‘황혼의 엘레지’
길 잃은 뽕짝만 신음처럼
방황하고 있다
-「황학동」 전문
‘황학동’은 ‘잊혀져가는 시간을 근근히 잡고 있는’ 공간이다. 거기에는 ‘못 가져도 만족스럽던’ 세월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다. 탐욕스런 자본주의 세상이 오기 전의 아름다운 아날로그적인 세상 얘기다. 그러나 지금 ‘황학동’은 앞의 시 ‘고가’처럼 버려진 폐선처럼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남루한 존재감으로/ 밭은 숨을 몰아쉬며” 어두운 시간의 ‘밤’에 회상과 미련의 ‘밀집’을 채워 넣고 있을 뿐이다. ‘희미한 옛사랑’을 울고 있는 ‘황혼의 엘레지’가 흐르는 황학동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화자는 자본주의의 이면을 고발하고 있다. 남루하기는 하지만 그때는 ‘못 가져도 만족스럽던’ ‘골동품 같은 세월’이었고 ‘정겨운 목소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철저히 고립되고 파편화된 디지털의 공간 속을 사람들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 핏기를 잃은 채 마네킹처럼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이러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통하여 오늘의 현실을 되짚어보고 있다.
5. 감각적인 이미지의 구사에 능한 시인
전통서정시의 맥을 이은 박재삼 시인은 좋은 시가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을 말하면서 단순한 여기(餘技)가 아니라 전 인생을 걸고 하겠다는 남다른 오기(傲氣)를 가지고 시에 임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시 쓰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시의 요체를 지적한 것으로 보여서 다음에 옮겨본다.
첫째, 자기만이 처음 느낀 것을 써야 한다. 즉 創意의 세계를 캤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 좋은 시를 결정하는 첫째 요인이다. 둘째, 그런 것을 자기만이 가진 文法으로 잘 앉혀야 한다. 즉 개성을 확보하는 문제다. 그러기 위해선 構成의 妙를 터득해야 한다. 셋째, 읽는 사람의 共感을 얻어야 한다. 그저 흐리멍텅한 작품을 빚었다가는 그것은 영락없이 묻혀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위의 세 가지는 시를 쓰는 사람이면 늘 명심하고 대들어야 한다.
그저 시는 짧은 형식이니까 누구라도 손쉽게는 대들 수 있지만, 그것을 완성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의 사업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표현 못하면 내 목숨이 없어진다는 각오로 시에 모든 것을 걸고 대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한정된 시간 안에 좋은 시를 써야 한다. 죽고 나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돈과는 인연이 먼 시를 한다는 것은 오기가 없으면 안 된다. 죽으나 사나 이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전 인생을 걸고 달려들 일이다. 그러므로 웬만하면 시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나는 권유한다.
창의와 구성의 묘미와 공감을 시의 요건으로 들면서 박재삼 시인은 필사의 각오로 임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근자에 시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 양적으로는 매우 풍요로운 것 같으나 오래도록 두고두고 반복해서 다시금 읽고 싶은 시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시인 조지훈의 말처럼 귀에 쟁쟁 울리는 듯한 음악성을 가진 시, 눈에 선하게 그 장면이 떠오르는 투명한 그림이 있는 시,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아 감동을 주는 시, 그러면서도 언어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시, 언어예술로서의 시의 기품을 갖춘 시, 정신의 기율을 느낄 수 있는 시가, 그래서 즉각 암송하고 싶은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선배시인의 충고처럼, 덜 익은 과일을 함부로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하지 말고 무르익어 터져 나오는 그런 충만한 언어의 열매들을 기다려보고 싶다. 무성의하게 내뱉는 경망스러운 시보다는 진실한 삶의 체험이 묻어나는 시,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영혼의 양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 푹 익어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는 한 잔의 술과도 같은 그런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한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지하선 시인은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많이 지니고 있는 듯하다. 우선 시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더불어 감각적인 이미지를 구사할 줄 안다는 점이다. 사물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시의 습작과정에서 맨 먼저 익혀야 할 자질이 아닌가 한다. 다음의 시는 근육 감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가 잘 어우러져 에로틱한 느낌마저 상상케 한다.
조심조심
옷을 벗긴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전율
머뭇거리다가
차츰 대담하게
몸을 제압해 가는 입술 속에서
파르르
떨리는 그
부드러운 감촉이 미끄러지듯
혀끝에 감긴다
좀 더
깊고
은밀하게
터질 듯
농익은 몸짓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안 깊숙이
황홀한 속살을 쏟아낸다
온통 붉다!
-「홍시」전문
그런가 하면 다음의 시에서는 청각적 이미지를 잘 구사하고 있다. 의성어를 유머러스하게 사용하면서 소리의 이미지를 우주적 이미저리로까지 확장시키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갈 까브르 갈 까브르
계절을 키질하는
풀벌레 소리
안으로 모아들인
통통
알 밴 가을만
은하에 헹구어서
달빛 마당에 널어놓네
-「처서處暑 지나니 1」부분
‘갈 까브르 갈 까브르’ 라는 소멸의 의미를 내포하는 의성어를 통하여 가을에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감각적으로 묘사하면서 가을이 지니고 있는 소멸의 이미지를 유머러스하게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절을 키질’한다고 해석함으로써 비약적 상상력의 증폭을 느끼게 한다. 2연에서는 소리의 이미지를 시각화하여 “통통 알 밴 가을만/ 은하에 헹구어서/ 달빛마당에 널어놓”는다고 해석함으로써 상상력의 확장을 통한 인식의 확대를 보여준다. 한낱 풀벌레의 소리가 우주적 의미로 확대된다. 이러한 시적 처리능력은 이 시인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아무쪼록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이 시인이 어깨에 힘을 조금 빼어 좀 더 유연한 자세로 시에 임한다면, 일상성을 벗어나는 모국어의 시적 가능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는다. 더욱 정진하여 주옥같은 명품을 만들어 삶 일상에 지친 독자들에게 감각의 청신함을 통하여 인식의 새로움과 시적 상상의 기쁨을 제공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