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 폭설이 쏟아지면 아이들과 강아지는 좋아할지 몰라도 어른들은 가슴이 철렁한다. 빙판길 운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엊그제 새벽 출근길에도 낭패감이 들었다. 눈 쌓인 아파트 입구 언덕길을 필자 자동차가 못 올라간다는 건 이미 3년 전에 판명 났다.
가까스로 출근한 뒤엔 엉뚱한 희열로 가슴이 설렜다. 이번 주말산행에서 푹신한 새 눈을 밟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시애틀 일원의 겨울 산은 봄, 여름, 가을에 본 산과 전혀 딴 모습이다. 여름에 야생화가 만발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베이커 산의 ‘화가들의 장소’(아티스트 포인트)는 겨울엔 광대무변의 백설동산으로 변모해 눈신 등반객들이 줄을 잇는다.
지난 10여년간 타이거 산에서 레이니어 산까지 눈길산행을 여러 번 즐겼다.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속으로 들어가는 듯 정겹다. 언젠가 올림픽 국립공원의 허리케인 리지에선 눈 위를 달리는 토끼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었다. 먼 옛날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반세기도 전에 필자가 다닌 고등학교는 지척에 아름다운 보문산을 끼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폭설이 쏟아진 어느 겨울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전교생은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교내방송이 귀청을 때렸다. 웅성거리며 의아해하는 학생들에게 체육선생님이 “지금부터 보문 산으로 토끼사냥을 간다”고 선포했다. 학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린 건 물론이다.
교실에서 해방된 학생들이 함박눈 속에 희희낙락하며 길게 줄지어 보문산을 향해 행군했다. 등산화라는 건 개념조차 몰랐던 시절이다. 대부분 운동화에 교복차림이었지만 춥다고 엄살떠는 녀석은 없었다. 그 어설픈 산행이 평생 뇌리에 남을 줄을 필자는 당시엔 몰랐다.
보문산에 도착한 우리는 나지막한 봉우리 하나를 기슭에서부터 둥그렇게 둘러서서 오르기 시작했다. 토끼는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길어서 위험을 느끼면 위를 향해 뛴다고 했다. 길도 아닌 곳을 오르다가 눈 속에 허리까지 빠지는 녀석이 나올 때마다 폭소가 터졌다.
학생들의 간격은 산을 오를수록 좁아졌다. 이윽고 중턱쯤 다다랐을 때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와 위쪽으로 뛰었다. 힘을 얻은 학생들이 일제히 뒤쫓아 올라갔고, 그 경황에 나뭇가지로 작대기를 만든 한 녀석이 정상의 포위망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토끼를 때려잡아 그날의 영웅이 됐다. 녀석이 치켜 올린 죽은 토끼를 본 학생들의 함성이 길게, 길게 메아리쳤다.
얼마 후 또 폭설이 내린 날 필자는 몇몇 급우들과 방과 후에 보문산의 다른 봉우리를 올랐다. 겨울 해가 짧아 금방 어두워졌다. 캄캄해진 산에서 내려오다가 길을 잃고 몇 시간을 헤맨 끝에 가까스로 도착한 곳은 전혀 모르는 딴 동네였다. 지나가는 시외버스를 손들어 세우고 탔지만 일행이 모두 주머닛돈을 털어도 차비가 모자라 여차장에게 통사정했었다.
시애틀 일원에선 거의 사시사철 눈 덮인 산을 오를 수 있다. 물론 겨울철엔 눈이 너무 쌓여 폐쇄되는 곳이 많다. Mt. 사이, 월레스 폴스, 래틀스네이크, 타이거 등 일년열두달 개방되는 근교 산에선 겨울에도 한인들을 많이 만난다. 자녀들과 함께 오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한번쯤은 눈길산행을 함께 해보는 게 좋다. 아이들이 지금은 칭얼대도 장성한 뒤엔 그날의 추억을 되새기며 부모님께 고마워한다. 필자의 경우도 지난 10여년간의 눈길산행은 이미 잊혀져가는 ‘기억’이지만 반세기 전의 토끼사냥 산행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추억’이다.
토끼해에 토끼 때려잡은 얘기는 얼토당토아니하다. 오늘 정기산행(래틀스네이크)에서도 눈은 밟지만 토끼는 못 볼 것 같다. “모자에서 토끼 꺼내듯 한다”는 미국속담이 있다. 불가능한 일을 쉽게 해내는 마술사를 빗댄 말이다. 새해엔 오래 동안 우리들 머리를 덮어씌워온 경기침체의 모자에서 풍요와 번성의 상징인 토끼를 꺼내게 되기를 기대한다.
01-15-11
첫댓글 사장님 좋은 추억 갖고계십니다. 그런데 시애틀 산토끼나 야생토끼는 자그만하지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맞아요! 미국에선 사람이건 동물이건 한국 것보다 다 큰데 산토끼는 '피그미'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