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의 달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엮어낸 또 하나의 역작
이탈리아 신예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영화 '시네마 천국'은 89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90년 아카데미 영화상의 최우수 외국어 작품상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런 수상때문에 이 영화의 가치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90년 여름철, 수많은 오락영화의 범람 속에서도 연일 극장을 메운 관객들과 매스컴의 격찬을 받은 것은 이 영화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탈리아 영화 하면 우리는 '무방비 도시'의 로베르토 롯셀리니, '자전거 도둑'의 빅토리오 데시카, '길'의 페데리코 펠리니 등 거장들의 작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로 50년대에서 60년대에 본격적인 활동을 한 이들은 전쟁으로 황폐된 당시의 어두웠던 사회를 그리면서도 폐허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처럼 따스한 인간애와 희망을 화면에 담아 세계 영화팬들의 가슴을 흐뭇하게 적셔 주었다.
전후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6.25후의 그 암울했던 시대를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우리도, 영화관의 어둠속에서 이탈리아 영화의 슬프고 애잔한 사랑과 인생의 흑백화면에 달콤하게 도취했었다. 어쩌면 그 도취야말로 현실의 리얼리티와는 무관한 우리들의 향수가 아닐까.
'시네마 천국'은 우리의 지나간 젊음을 생각케 해주는 영화다.
2차대전 직후의 시실리의 어느 조그만 마을을 무대로 한 이 작품은 영화를 지독하게 좋아하는 한 소년과 마을 영화관의 늙은 영사기사와의 진한 우저을 통해 당시의 영화 풍속도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영화는 소년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극장의 영사기사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지금은 성인이 된 주인공(자크 페랭)이 고향으로 돌아가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소년 토토(살바토레 카시오)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영화를 보는 재미로 곧장 마을의 유일한 극장인 '시네마 파라디소'로 달려가는 광적인 영화팬이다.
키스신과 포옹장면은 모조리 가위질하는 마을의 검열관 신부, 그렇게해서 잘려나간 필름 조각들을 쓰레기통속에서 주워 모으는 소년 토토, 만원사례로 미처 입장을 못한 관객들을 위해 광장의 벽을 스크린 삼아 비추는 야외 영상 장면들은 영화가 갖는 환희와 꿈을 실로 감동적으로 표현해 준다.
영사기사 알프레도(필립 느와레)는 어린 토토가 영사실에서 어깨 너머로 영사 기술을 배우는 것을 싫어한다. 영사기술을 애 안가르쳐 주느냐고 졸라대는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이렇게 말한다.
"가르치고 싶지 않다. 좋은 직업이 아니야. 항상 혼자 있고, 노예같은 생활이야. 같은 영화를 백번도 넘게 보게 되고 배우한테나 미친놈처럼 중얼대고, 휴일도, 부활절도 쉴 수 없지. 금요일 하루만 쉬고,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해"
그러나 토토는 하도 영사실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어느덧 알프레도의 어깨 너머로 영사기술을 터득하여 알프레도가 화재로 입원, 실명하자 그를 대신하여 영사기사가 된다. 토토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엔 소형 카메라를 들고, 새로 전학온 미녀 학생의 모습을 몰래 촬영하며 열렬한 첫사랑에 애태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는 토토를 친자식처럼 사랑하기에 그를 영원히 떠나보내는 알프레도의 말 속에 있다. "우린 둘 다 꿈속에 살고 있다. 여길 떠나라. 네게 희망이 없는 곳이야. 여기서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이곳이 세상 전부인 양 착각하게 돼. 한두해 지나서 돌아오면 모든게 변해 있을 거야. 이곳과 인연을 끊어. 네가 해야 할 일은 여기 없어."
청년으로 성장한 토토는 보다 큰 세상에 나가 일을 하라는 알프레도의 권유에 따라 로마로 가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된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압권은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남긴 필름의 한 릴을 되돌려보는 마지막 장면이다. 초현대식 극장의 스크린 속에 투영된 것은 토토가 어린 시절 영사실 창 너머로 몰래 훔쳐보던 수많은 영화의 커트된 키스 장면들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장내가 밝아지면서 극자을 나서는 관객들은 한결같이 밝고 즐거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친구나 애인과 함께 온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흐뭇한 미소를 주고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 오랜만에 실로 좋은 영화를 보고 난 뒤의 흐뭇한 감동의 표정들이다. '시네마 천국'은 바로 그런 영화였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가장 빛나는 공헌중의 하나는 엔니오 모리코네와 그의 아들 안드레아 부자가 작곡하고 연주한 오리지날 음악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플룻, 기타를 중심으로 한 실내악풍의 아름다운 선율은 유쾌한 그리고 때로는 슬픈 장면에서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키며 영화에 극적인 연속성을 부여해 준다.
아시다시피 영화 '시네마 천국'은 대부분 향수, 사랑, 이별,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음악은 감상과 로맨틱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특징적인 선율로 일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피아노의 전주에 이어서 바이올린과 앨토 색소폰이 차례로 테마를 회상하면서 마치 엘레지풍으로 현악기와 함께 노래해 나가는 메인 테마 'Cinema paradiso'가 전해주는 간결한 아름다움과 애틋한 향수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원숙하고 탁월한 창조적 미학의 정화이리라.
고향으로 돌아온 토토가 불타 폐허가 된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 느릿하게 흐르는 'First youth'도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 않게 이 곡의 동요풍의 선율이 토토의 똘망똘망하고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는 듯, 듣는이의 마음을 즐거운 회상으로 이끌어 주는 뛰어난 곡이다.
그러나 영화 '시네마 천국'의 음악적 중심은 뭐니뭐니해도 '사랑의 테마'다. 몇소절의 서주가 있은 후 바이올린의 고요함을 뚫고 클라리넷이 애상적인 주제를 노래하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토토와 엘레나의 순결하지만 너무나 애달픈 사랑을 떠올리며, 감미로운 도취감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피아노와 함께 현악기가 읊어나가는 이 선율은 실로 매혹적이다. 사랑의 동경과 뛰는 가슴, 희열, 이런 것들의 무언가라고나 할까. 이것은 세계적인 멜로디 메이커인 아버지 엔니오 밑에서 좋은 음악적 공기를 마시며 자란 안드레아를 촉망받는 작곡가로 성장시킨 하나의 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려니와 '시네마 천국'이 세상에 소개한 영화 음악의 명곡이 아닐 수 없다.
한편의 영화가 개봉되고 시간이 꽤 흘러간 후에 영화의 구성, 줄거리, 묘사, 영화에 대한 비평이 관객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질때 쯤이면 주로 영화의 인상과 그 주제가 무엇이었나 하는 기억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영화음악은 한 영화의 형태와 분위기, 맛을 간직하면서 그 기억을 오래오래 지속케 해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레코드는 '시네마 천국'의 소중한 추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게 해 주는 앨범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