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생활연구원의 30년 변천사
김성자(한국여성생활연구원 부원장)
1970년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우리나라는 가정을 그들의 일터로 생각하였던 여성들을 단순노동자로 사회참여가 시작되었다. 산업화로 생활양식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을 위한 일인일기(一人一技)교육이 필요해짐에 따라 한국부인회가 이에 앞장섰으며 그 사업에 동참한 한국부인회 경북지부사업부장을 역임한 정찬남원장이 1978년 8월 27일 서울 봉천동에서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을 개원하였다. 당시 봉천동은 달동네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여기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을 상대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은 ‘평생교육의 이념 하에 여성의 전 생활의 장에서 필요로 하는 교육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각종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연구· 개발· 실시함으로써 학습사회 건설에 기여하며, 경제적 빈곤이나 사회적 편견에 의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불우여성 및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충교육 및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응과 자기성장을 도모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각종 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공동체 구현에 일조하고자’ 하는 설립취지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설립 당시 여성단체에서 활약한 원장은 한국여성에 대한 연구 자료가 귀하고 여성에 대한 기본 자료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개원하였으나 많은 비문해자의 요구에 의해 문해교육을 30년간 하게 되었다.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은 직장여성 대상으로 국일야간중학교 과정을 시작으로 국일야간고등학교, 국일 주간 초등· 중학교, 국일일요중등학교, 국일 신부· 주부· 노인대학 과정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주간초등학교 과정은 중· 고등학교과정 운영 중에 한글을 모르는 비문해자들의 요구에 의해 개설되었는데, 방송에 소개가 한번 나가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비문해자들은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글로 홍보하는 것은 그들이 몰랐지만 귀로 듣고 알게 된 것이다. 국일 동문들의 미용봉사 활동으로 교육에 의한 변화의 하나로 사회봉사가 시작되었다.
80년대 10여 년 동안 2만여 명의 학습자를 배출하였다. 1990년 유네스코는 세계 성인 인구의 3분의1 (9억6천만 명의 성인들 중 3분의2가 여성)이 비문해자이므로 ‘만인을 위한 교육’을 선언하고, 세계 각국이 이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므로 서 우리나라에서도 국가 차원의 문해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연구원의 비문해학습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을 계기로 연구· 개발에 투자가 시작되어 비문해자를 위한 ‘성인을 위한 한글한글’이 1권에서 8권까지 연구· 개발되어 출판사 ‘평연사’도 설립하였다.
2000년에는 문해지도자과정을 개설하여 각지에서 비문해자 교육을 담당하고 있고, 하려고 하는 문해교사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동안 문해교육에서 얻은 많은 경험을 문해교사들과 나누었으며, 2001년 한국문해교육연구센터를 개원하여 문해교육의 연구에 동참하였다.
2004년 국가의 문해정보화교육을 위한 한국문해기초교육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초대 회장으로 정찬남회장이 추대되었다. 한국문해기초교육연합회가 결성됨으로써 전국의 많은 문해교육단체들의 네트웍이되었다.
1989년에 유네스코가 선언한 ‘세계만인을 위한 교육’을 위해 한국문해교육협회가 설립되었으나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다가 2007년에 다시 활동을 재기하였다. 그래서 문해교육의 대의를 생각하여 한국문해기초교육연합히장을 맡고 있던 정찬남회장은 한국문해기초교육연합회와 한국문해교육협회가 합하여 한국문해교육협회로 하나 되게 하여 지금 전국이 활발한 문해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8년 평생교육법이 개정되어 문해교육이 학력인정을 획득했다.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만들어 가난하고 소외된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었다.
지금 정찬남원장은 (사)한국평생교육사협회와 한국여성평생교육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여성생활연구원이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30년을 가난하고 소외된 많은 이들과 함께 하였으며, 앞으로도 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