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저항시인이요 소설가로서 계몽문학의 선구자였던 심훈(1901~1936) 선생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거쳐 영화 시나리오 집필과 영화 <장한몽>에 주연으로 직접 출연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던 그시대의 선각자 였습니다 , 1932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친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와 우리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직녀성> <영원의 미소> <상록수>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1934년 집안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직녀성> 소설공모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 바로 필경사 입니다 농부가 밭을 가는 심정으로 글을 쓰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에서 심훈선생의 비장함이 묻어있습니다 . 심훈 선생은 1935년 부터 이 집에서 대표적 농촌 계몽소설인 상록수를 집필 하였습니다 심훈 선생 사후에 필경사는 한 때 그의 장조카이며 소설 상록수 의 실제 모델이었던 고 심재영 옹이 관리하다 당진군에 기부한 이후 지금은 군에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마당에 있는 시비는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선생의 높은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현대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것입니다. 심훈선생이 상록수를 집필했던 책상의 모습입니다 선생의 고귀한 풍채가 그대로 전해지는듯합니다 .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항일 저항 소설과 시, 그리고 영화등 각분야에서 민족의식고취와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던 항일운동가요 사상가 입니다 .심훈선생은 1901에 태여났으며 본관은 청송. 본명은 대섭(大燮), 아명은 삼준·삼보. 호는 해풍(海風). 백랑(白浪)이라는 별호도 사용했습니다.아버지 상정(相珽)과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 우섭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작은형 명섭은 교회 목사였다고 합니다 1936년 책 발간을 위하여 서울에서 집필활동을 하던중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 하였으며 경기도 용인의 수지에 묻혔다가 택지개발로 경기도 안성에 이장하였다가 탄생 100주젼 행사를 마치고 필경사로 이장하여 모시게 되었습니다.
심훈 선생의 상징인 대형 상록수 나무가 필경사 뜰에 세워저 있습니다 심훈 선생은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7년 왕족인 이해영과 결혼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항일 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습니다,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망명기간중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에서 활동하다 항저우[杭州]의 즈장[之江]대학에 입학했습니다. 1923년 귀국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焰群社)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를 번안했고, 부인 이해영과 이혼했습니다.
심훈선생께서 지으신 필경사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집이었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신건축물이었다고 합니다 창문앞에 달려 있는 테라스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집들이 화장실을 바깥에 두었을때 화장실과 목욕탕을 집안에 배치 하였을 정도로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필경사 건물은 남남동향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앞에는 상록수문화관 건물이 들어 서 있습니다. 문화관 뜰에 서면 아산만의 물결과 서해대교가 한눈에 보입니다
심훈 선생께서 사용하셨던 필경사의 가구입니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으며, 박헌영·임원근·허정숙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사건'(鐵筆俱樂部事件)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했습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하였습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등의 평론으로 프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1930년 신여성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습니다.
필경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집이기에 그때 당시 일본식 건축법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로 나무를 사용하여 내부를 장식하였으며 밑바닦은 다다미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필경사 내부에 만들어저 있는 화장실의 모습이며 화장실 앞에는 목욕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심훈 선생의 문학적 자료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상록수 문화관의 모습입니다 상록수문화관에는 심훈 선생의 일대기가 간략히 정리되어 전시하고 있으며, 심훈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영화한 동영상과 함께 문화해설사의 안내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필경사 오른쪽에는 심훈선생이 이 직접 심으셨다는 향나무가 있고,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운치를 돋우고 있습니다 심훙 선생께서 이곳에 필경사를 건립 할 당시에는 이곳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그 운치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심훈 고택과 문화관을 둘러보며 상록수의 스토리를 자연스레 연상합니다.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중략)... /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상록수문학회관 앞에 자리잡고 있는 심훈선생의 시비 입니다 이 시비에는 심훈선생의 우리나라의 해방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그날이 오면 이라는 시가 새겨저 있습니다
상록수 문화회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심훈선생의 활동을 담은 사진과 신문기사입니다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오지중의 오지였던 이곳에서 그시대의 선각자였던 심훈선생의 농촌 계몽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 이곳에는 유난히도 상록수 라는 이름을 띤곳이 많습니다 상록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상록교회, 상록수회관 등 한시대를 풍미하며 투철한 삶을 살았던, 그리고 젊은 나이에 그 한많은 삶을 마감해야 했던 심훈선생의 그 숭고한 뜻은 지금도 근근히 흘러 이곳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듯 합니다
상록수의 모태가 되었던 마을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이 이 마을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폈었나? 그러나 채영신의 모델이 되었던 최영신은 경기도 반월 샘골마을에서 농촌운동을 하던 여인이고, 박동혁은 심훈의 조카로 역시 농촌운동을 하던 이곳 출신의 심재영의 소설 속 인물로 두 사람은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최영신의 고향에는 수도권전철 상록수역이 세워져 있고, 이곳 심재영의 고향에는 상록초등학교와 상록수교회가 서 있어 두 사람의 소설속 행로가 완전히 허구의 산물만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합니다.당진에서 태여나서 당진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경사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솔직히 창피한 이야기지만 필경사가 사찰인지 알았습니다 너무나도 몰랐던 고향!!!!그래서인지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2010년 10월2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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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그네 의 세계여행 정보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