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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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8-9(JDTS 강의) 강의 : 김광일목사(예수전도단 제주 지부장)
정리 : 김상수 목사(서울제일성결교회)
1. 생각은 결과는 낳는다.
이 강의를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첫째는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최근 예수전도단에서 나온 책 중에서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들의 생각은 결과(열매, 행동)을 낳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바뀌면 다른 사람(국가, 사회 , 민족, 가정, 교회 등)이 바뀐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의 밑바닥에 있는 사고 즉 생각인 것이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왕따, 원조교제 등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서 기인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상황을 대면 한다해도, 각 사람이 가진 사고체계에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은혜스럽다'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뭐 항상 듣던 소리 아닙니까?'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불평하기도 한다. 무슨 말인가하면, 말씀을 들으면서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사고체계의 기준(基準)에 비추어서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강의의 결론은 미리 말한다면 이런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는 성경이 기반이 아니라, 이 땅의 많은 철학과 경험등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사고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의 사고가 극히 불완전하고, 죄악(罪惡) 된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새부대'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새롭게 거듭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생각'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적인 사고체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의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2.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사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생각에 대한 인간의 상태)
첫째로 성경은 사람의 생각이 완고하다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서 난다고 말한다. 잠언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은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예에서 남이라"라고 한다. 여기서 '마음'은 mind인데, 이는 사고(思考) 즉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후3:14을 보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
사람의 생각은 완고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 자기사고를 붙잡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잡지 않는다.
둘째로 성경은 사람의 사고는 '혼미(昏迷)하다'고 말한다(고후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여기서 '혼미하다'는 말은 '뿌옇게 된 상태'를 말한다. 즉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은 '혼미해진 사고'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이 혼미해진 상태에서는 선악(善惡)에 대해서 정확하게 분별할 수가 없다. 예컨데 '죄(罪)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전쟁 중에 남편이 죽고 아이만 남은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몸을 팔았다고 하자. 이때 이 여인은 죄를 범한 것인가, 아닌가? 그것은 분명히 죄(罪)이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상황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누가 그러한 상황에서 몸을 팔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죄(罪)는 다른 것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죄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규정은 변화하는 인간의 생각과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지 않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상황에 기준을 두고, 죄가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규정해 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각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서 죄의 기준은 변해 왔다. 예컨데 조선시대에는 죄인 것이 지금은 죄가 아닌 것으로 느껴질 수 있도 있다. 어떤 것은 우리나라의 가치관에서는 죄인데, 미국에서는 죄가 안되는 것들도 있다. 예컨데 낙태같은 것은 그 실례이다. 미국의 한 과학자가 임신 3개월까지는 낙태를 해도 된다고 발표한 이후에 사람들은 그것을 정당화 시켰다. 이러한 발표가 있은 후에 사람들은 '혼미해진 사고의 상태'에서 죄에 대한 분별력이 방향을 잃게 되었다.
셋째로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과 적대적(敵對的)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골1:21)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1:21)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을 싫어한다. 하나님을 싫어할 뿐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TV에서 타종교(심지어는 무당)에 대한 말이 나오면 가만히 있다가도, 어쩌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특정종교'라고 비난한다.
얼마전 TV에서 '성전환 수술'을 했던 사람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때 토론을 위해서 방송국에서 대담자를 결정할 때, 성전환 수술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사람들을 함께 초청했다. 그런데 이 방송이 나간 후에 성전환 수술을 반대했던 목사님의 사이트에 수 많은 욕설들이 올라왔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까지도 '나도 그리스도인입니다만, 어찌 그렇게 고리타분한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넷째는 성경은 인간은 육체적(肉體的)인 사고를 좋아한다고 말한다(골2:18)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골2:18)
인간의 마음 속에 남을 미워하는 마음, 잘못된 생각들은 자동(自動)으로 나온다.
다섯째 성경은 인간은 사고가 부패했다고 말한다(딤전6:5)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
여섯 번째, 성경은 인간의 사고가 미련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금방 잘못된 결과가 드러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많은 사람들이 뻔한 결과를 보면서도, 성경말씀에 반대로 행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본다.
3.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다운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새롭게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고대로 살아야 행복하다. 엡 4:22-24을 보라.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여기에서 두 사람을 말한다. 옛사람과 새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 여기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말은 마인드 즉 사고(思考)가 변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거듭났어도, 계속적(繼續的)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자는 왕자의 사고를 가질 때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고, 거지는 거지의 사고를 가질 때 편히 살수 있다. 무슨 말인가? 이 시대의 많은 사고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고대로 살아야 행복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조교제에 대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사고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독수리 인생이다. 독수리는 독수리 답게 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를 독수리에 비유한다. 어떤 신자는 독수리로 부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먹고사는 사람이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신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한다해도,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변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는 것들은 갖으면 안된다. 예컨데 긍휼에 반대되는 미움, 질투, 시기, 용서하지 않는 마음 등의 사고를 갖으면 안된다. 빌4:8을 보라.
여기서 말하는 "이것들을 생각하라"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라'라는 의미이다. 롬12:1-2을 보라.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는 것은 곳 사고 즉 마인드의 변화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생각하는 말이다. 골3:1-10을 보라.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10)
5절에 보면 우리가 버려야할 구체적인 옛사람의 사고를 지적한다.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말한다. 여기서 말한는 음란(淫亂)은 이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범위 이외(以外)의 영역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법률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맟추어서 음란의 기준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가 젊었을 때 바람 피울수 있지요"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성관계만 맺지 않았다면, 음란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플라토닉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간음(姦淫)이다. 성경은 그러한 생각를 갖고, 품는 것부터가 죄악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고하는 것은 곧 행동을 낳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령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해도 그 생각속에서 그것을 '품고'있었기 때문이다. '품고'있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인격(人格)과 의지(意志)가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음이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5절에 보면 '사욕과 탐심'을 금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건구입등에 관한 욕심에 관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구매한다. 문제는 자기의 마음을 욕심 가운데 두고, 욕심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는 것이다. 더 맛있는 것, 더 좋은 것에 대한 탐심의 추구이다. 자족(自足)하는 마음을 우리는 갖아야 한다.
직분(職分)에 대한 욕심도 있다. 이것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런가하면 사랑에 대한 욕심도 있다.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심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하는가?
4. 우리에게 '사고(생각)'이라는 주제가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중요성, 필요성)
첫째, 생각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의 책임의 영역이 있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긍정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 반대의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도 있다. 생각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에 따라서 반응한다. [실락원]의 저자인 존 밀턴이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자신만의 공간이 있는데, 그것은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만들 수 있고, 천국 속에서도 지옥을 만들 수 있다"
밀턴은 장애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긍정적인 기독교 사고관으로 이러한 글을 쓴 것이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으며, 습관은 인격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잠23:7을 보라.
"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잠23:7)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행동을 보기 이전에, 생각을 보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생각의 영역은 영적인 전쟁터이다. 사단은 우리의 생각 속에 침투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새가 우리 머리 위에 날아 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새가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둘째로 생각은 사고체계(思考體系)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즉 신념체계를 만들어간다는 말이다. 생각은 마음 속의 사고체계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사람의 사고체계는 매우 부정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사람이 어떤 문제나 상황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그 사람의 사고체계가 부정적인 사고체계로 변하게 된다. 무슨 말인가하면, 그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사고체계에 의해서 어떤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반복되는 생각들로 인해서 사고체계가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생각과 신념체계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예컨데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미 그 사람이 가진 신념체계가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이미 가진 신념체계는 부정적인 생각을 부추킨다해도, 그것에 눌리지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간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신앙적인 생각들이 반복되어질 때, 그의 내면적인 가치체계도 점차 변하게 된다.
권위자가 하는 한 마디는 어떤 사람에게 굉장히 긍정적으로 겸손하게 반응되는가하면, 부정적으로 반응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컨데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어떤 신자는 이렇게 말한다. "왜 여자가 아침부터 시끄럽게해 재수없게". 심지어 어떤 형제는 버스 안에서 앞차의 번호판 숫자를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재수가 어떻다고 따진다. 보통 한국사람은 숫자 중에서도 1.3.5.7.9 등의 홀수는 행운의 숫자로, 2.4.6.8 등의 짝수는 그저그런 숫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것들은 사단에게 생각이 묶이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사고체계를 바꿔야하는 것이다. 행동만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고체계를 말할 때, 그것이 과연 진실인가?라는 것이다. 흔히 신념을 '세계관(世界觀)'이라고 한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빨간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인다. 이러한 세계관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사고체계'이다. 대체로 어른일수록 사고체계가 견고하다. 그래서 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잘못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는 어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튕겨져 나간다. 이것을 성경은 '완악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전도사가 교회를 사임하고 떠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젠 무엇을 먹고 살지?" 무슨 말인가? 평상시에 말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신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는 '내가 벌어서 먹고산다'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저녁에 '앞 산을 옮겨 주소서, 믿습니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자 산이 그대로 있었다. 이때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에시~ 그럴줄 알았어!". 무슨 말인가? 이 사람의 사고체계에는 그럴줄 알았다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5. 올바른 사고를 방해하는 것들(방해물)
첫째는 우리들이 올바른 사고를 하는 방해물 중의 하나는 우리 스스로의 인식(認識)이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객관(客觀)과 주관(主觀)이다.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을 말한다. 예컨데 1+1=2라는 식의 생각이다. 문제는 주관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 왜 자신의 주관적인 사고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 시키는 경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예컨데 어떤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은 못생겼다고 규정해 버린다. 즉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화(客觀化) 내지는 절대화 시켜 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화 시켜서 그것을 그대로 믿어 버린다. 요즈음 많은 여자들이 뚱뚱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려고 한다. 왜 그런가? 이 여자들의 마음 속에는 '마른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 객관화 시킨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진리가 아닌 것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마음 속에서 믿고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 보신다'.
둘째는 "반드시, 꼭, 이랬더라면" 등의 말들이다. 이런 말들은 과거지향(過去指向)적인 사고방식이다. 많은 경우에 이미 지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묶여서 올바른 사고를 못한다. 예컨데 어떤 여자는 "내가 과거에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않았을텐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올바른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장매물일 뿐이다.
6. 올바른 사고를 만들어 가는 5가지 원칙들
첫째, 점검하라. 올바른 사고를 위해서 우리는 '이 생각이 객관적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은 '돈에 대한 복이 없는 사람(돈복)'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나는 남자 복이 없어.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어(인복, 남편복)'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는 '나는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징크스)'라는 식으로 미리 짐작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것이다.
둘째, '이 생각이 과연 나의 삶을 복(福)되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은 '나는 존귀하지 않기 때문에 뭐든지 못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나같은 00가 뭘할 수 있겠어?). 이런 사람들은 내면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열등감에 사로 잡힌 생각들에 잡혀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지 않는 것들은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딤후1:7을 보라.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셋째, '이 생각이 나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생각인가?'를 생각하라. 여기서 목표라는 것은 '인격적인 성장, 관계, 비전'등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現實)'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돈이 없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넷째, '이 생각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부적절한 갈등을 피하게 해주는가?'를 생각하라. 즉 이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가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서로의 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다섯째, '이 생각이 내 자신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의 갈등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가?'를 생각하라. 예컨데 '어후~ 나는 왜 남자로 태어지 않았을까?'라는 등의 생각 같은 것들이다. 이런 생각들은 자기 자신과의 갈등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롬12:2을 보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renewing the mind를 말하는 것이다.
7. 우리 삶의 여러 영역들 중에서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사고체계의 실례들
1) 신분의 영역에서의 사고체계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자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존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본다. 예컨데 외모(外貌)를 보자. 그러나 사람의 귀함은 외모에 있지 않다. 왜 사람들이 여성의 '36-24-36'의 몸매를 가진 여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외모가 그 사람의 신분의 존귀함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귀함을 외모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길들어진 사고체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은연중에 우리의 사고체계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것이다. 이런 사고 분위기에서 계속 살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외모를 사람의 존귀함을 결정하는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사고를 갖기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미(美)의 기준을 생각하고,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세상적인 기준에서 판단한다.
교회에서도 '세상에서 능력 많은 사람'이 우선시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능력의 유무(有無)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마음, 하나님과 함께 있을 마음이 있는가?라는 등의 생각들이다.
모세를 보라. 그도 이러한 잘못된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부를 때, '하나님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왜 이렇게 말했는가? 그는 '세상적으로 능력있는 사람이 쓰임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흔히 많은 신자들이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못한다'고 한다. 또는 '나는 나이나 학력,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무엇을 못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잘못된 사고체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26-29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삿 6:2-6을 보라.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 떼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삿6:2-6)
사사기 6장에 기드온이 나온다. 그 당시 미디안 등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었다. 그때 하나님이 찾은 사람이 기드온이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큰 용사(勇士)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한다'라는 말이었다. 이때 기드온은 당황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삿6:15).
"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삿6:16)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6)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사람을 찾으신다. 겸손(謙遜)이 무엇인가? 겸손은 '하나님이 있다 할 때나, 없다고 할 때나 어느 때든지 아멘(Amen)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들이 '작은 용사'라는 세상적인 사고구조의 틀 안에서 머무르도록 주입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의 원리를 깨닫게 될 때, 폭팔하는 결과를 사단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깨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2) 교회에 대한 사고체계 영역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취하는가, 아니면 성경적인 사고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교회는 '존재(언약) 공동체'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모임들은 '행위 공동체'이다. 이는 곧 행동하는 만큼 대우받는 공동체를 말한다. 세상에서는 행동하는 만큼만 대우받는다. 예컨데 어떤 회사의 과장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존귀하게 대우받는 것은 과장다운 행동을 했을 때 라는 것이다.
언약(言約) 공동체의 대표적인 것은 가족(家族)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존재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행위 공동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쉽게말하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귀하게 여김받는 이유가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귀하게 여김받는 경우'를 너무 많이 목도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어떤 사람의 생명자체가 귀하기 때문에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귀한 사람이고 생각한다든지, 돈을 많이 헌금하고, 교회에서 큰(?) 직분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12:20-22을 보라. 하나님은 행동 중심의 세상적인 사고체계를 뛰어넘는 말씀을 하신다.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20-22)
하나님은 약한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보신다. 하나님은 행동(Doing) 이전에 우리의 존재(Being) 자체를 존귀하게 보신다는 말이다. 행동과 직분에 맞게만 대우하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서로 존귀하게 된다는 말은 곧 '언약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한 몸'된 언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외적인 사람들의 행위가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즉시 교회를 옮겨 버린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회사를 옮겨버리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언약은 뒤로하고, 자기가 편한 곳은 옮겨버린다. 그러나 기억하라. 완전한 그리스도 몸된 공동체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 연약함 가운데서도 서로의 언약과 사랑으로 세워가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들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공동체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언약한 대로 사랑 가운데서 세워가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 앞에서 '약속(約束)'했기 때문이다.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한 가족 공동체로 묶으셨다. 교회에 대해서 언약 공동체로서 자기 자신을 먼저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우리 몸은 행위 공동체가 아니라, 존재(보혈, 언약) 공동체이다.
3) 섬김에 대한 사고체계의 영역
사람들은 보통 자기(自己) 중심적인 사고를 갖기 원한다. 즉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남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같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계속적인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이익'만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큰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남을 섬기는 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직분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제자양육을 받으면서도 그 내면에 '남들 보다 영적(靈的)으로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평가(評價)를 듣기 위해서 받는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사역한다는 말이다("저 사람은 성경에 대해서 참 많이 아는군", "역시 저 사람은 교회에 꼭 필요한 일군이야" 등).
그러나 에수님의 삶은 자신이 죽으심으로 다른 사람을 부유케하신 삶이었다(낮아지심, 자신을 완전히 버리심). 우리는 교회에서 '사랑을 받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성(Sant) 프란시스코'를 생각해 보자. 보통 우리가 신자들을 부를 때, 성도님이라고 한다. 이때 성도(聖徒)가 무슨 말인가? 바로 Saint이다. 프란시스코는 '평화의 기도'에 보면 남을 섬기는 삶에 대한 깊은 고백이 있다.
4) 예배(禮拜)에 대한 사고체계의 영역
예배에 대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정직한 반응을 올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한 정직은 '감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예배에 대한 반응의 기준은 감정(感情)에 있지 않고, 의지(意志)에 있다. 교회에 오기 전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해서, 예배를 기쁨으로 못드릴 이유가 없다. 우리는 내 기분과 환경과 관계없이 내 의지로서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기로 선택(選擇)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대한 사고관이다. 예배에 나오기 전에 열받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 감정을 그대로 예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는 충실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기도가 안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안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에는 기도를 하기로 의지적(意志的)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겠다고 결정하고 드려야 한다. 믿음은 감정을 초월한다. 우리는 의지적인 선택으로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예배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이다.
5) 여성(女性)에 대한 사고체계의 영역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유교적인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과거 우리나라에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말이 있다. 즉 결혼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노후에는 아들을 따른다는 말이다. 여성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 실례로서 "돕는 배필"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의 성경적인 의미는 서로 돕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또 다른 한쪽을 위한 보조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여성들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동일하게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이다. 함께 보완하고, 서도 돕는 관계이다. 폴 투루니에는 [여성 그대의 사명은]에서 '남성은 기계적이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여성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이고 감정적'이라고 말했다.
많이 기독교 사역자 중에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이 도우슨같은 여성이 되기 원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조이 도우슨처럼 되기를 원하면서도, 그렇게 자신을 준비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6) 노동(勞動)에 대한 사고체계의 영역
우리나라의 유교적 사고방식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해서, 노동을 하찮은 것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다. 우리나라에 '3D 기피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일하지 않고, 노는 것이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신성한 것이다.
7) 죄(罪)에 대한 사고체계의 영역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이것은 기계적(機械的)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해결하는 것도 자신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과응보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관계적(關契的)인 것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이 고백하고 회개한 죄에 대해서는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마치 용서되지 않은 것처럼 죄책감 속에 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죄책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
8. 수직적 사고체계와 수평적인 사고체계
세상적인 사고체계의 기반은 크게 2가지이다. 그것은 서양적인 사고체계와 동양적인 사고체계이다. 서양적인 사고체계는 어떤 것인가? 17-18세기에 서양에서는 큰 사회적인 변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의 것들이 많았다. 르네상스와 휴마니즘의 저변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상이 흐르고 있다. 계몽주의가 무엇인가? 계몽주의란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사상이다. 이러한 이성주의의 영역에는 합리주의, 과학주의, 진보주의등이 있다. 이것인 근세의 서양사상을 주도했다. 이들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도 인간은 동물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사고가 '불완전하다'는 의식이 생기게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1차대전이었다. 그래서 실존주의나 허무주의등이 등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양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 동양사상이다. 왜냐하면 동양사상은 이성에 의해서 사물을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힌두교, 요가, 뉴에이지 등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요즈음 사람들의 사상을 대변하는 말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더니즘은 '현대주의, 계몽주의, 이성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쉽게말하면,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사고이다. 예컨데 산은 하나이지만,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에 의하면 '절대적인 선(善)'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오직 예수만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도전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변화가 가장 먼저 반영되는 것이 문화(文化)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속한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가졌던 미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무너뜨리고, 기발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절대적인 미(美)에 도전한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500년동안 영역을 끼친 것이 유교이다. 그리고 무속이 그 저변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무당적인 의식이 사람들의 세계관 속에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속에서도 말이다. 예컨데 이사를 갈때도 점(占)을 친다. 제주도에는 신구간(新舊間)에 이사를 한다. 그들은 1월말에서 2월 초에 귀신들이 회의를 하기 위해서 한라산에 모인 사이에 이사를 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얼마나 많이 유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모른다. 유교에서는 힘이 수직적(垂直的)으로 나뉜다. 예컨데 남과 여, 주(主)와 종(從)등이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관계는 아래 사람이 지킬 도리가 많다. 그리고 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킬 도리는 별로 많지 않다. 이러한 의식구조 속에서 살아온 한국사람들은 '힘과 자리(출세지향, 감투지상주의)'를 사모하게 되었다. 우리의 언어에도 보면 높은 자리를 동경하는 언어가 많다. 예컨데 '시'자(字)나 '님'자(字)의 남발이다. "선생님 옷이 크네요"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선생님 옷이 크시네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힘은 있는데, 그 힘을 사용할 줄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수평적인 사고체계를 가지셨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다. 우리나라는 권위를 수평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고체계가 부족하다. 즉 그 권위를 섬김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사고체계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삶에서 수직적인 권위체계와 수평적인 권위체계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가?
9.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바꾸라.
마28:19-20에 보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했다. 이 말을 자세히 보면 "모든 족속 즉 나라"를 바꾸라고 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전에 '모든 나라'를 지칭한다. 이것이 원래 의미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한국 기독교인들이 헬라적인 이분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성과 속을 구분하려 한다. 많은 경우에 '자신이 바뀌는 것'에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남 또는 나라'를 변화시키는 것에는 무관심하다. 즉 별개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속(俗)의 영역을 한 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영광받으시기 원하신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대표적인 세상의 5가지 영역(정치, 경제, 교육, 가정, 예술)에 대해서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이것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크리스챤 PD들도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방송이 변한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초원의 집"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통해서 기독교 가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우리는 볼 수 있다.
10. 마치는 말(아브라함과 롯의 차이)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실례를 들어보자. 그들은 아브라함과 롯이다. 아브라함은 "거함"에 특징이 있고, 롯은 "옮기는"이라는 말에 그의 사고의 특징이 있다. 창세기 13장이 그 내용이다.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10)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에덴동산처럼 보았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이 멸하시기로 작정한 땅이다. 아브라함은 어떤가? 아브라함은 끝까지 옮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에게 그곳에 있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居)하는 삶을 살았다. 소돔과 고모라가 아무리 에덴처럼 보였다해도 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반면에 롯은 이익(利益)에 따라 옮겨 다니는 사람이였다. 롯은 천사들에게 자신의 딸들을 손님들 대신에 내어 주겠다고 말한다. 이 말은 롯이 지혜를 낸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롯은 이미 세상적인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대응한 것이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사위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었고, 롯은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서 옮겨다는 삶이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하고, 그것으로 그들에게 영향(影響)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사고와 행동의 방향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세상 사고를 가지고 말한다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