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손상익
속절없이
당하는 모습을 그린 옛 그림. 왜군 뎃포는 조선군의 칼과 활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조 임금님이 조선부대 병법개혁을 주창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임진년 왜란 때 조선에 상륙한 왜군 30만 가운데 화승총 사격수는 5만-7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나머지는 단병기 살수(殺手)로 화승총 부대를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조선의 궁시병 위주 장병전술은 뎃포 사격수가 칼 쓰는 병사와 짝을 이룬 왜군의 소부대 화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지리멸렬하는 동안 홍이포와 불랑기 같은 대포와 개인화기 삼안총통(三眼銃桶: 총구가 셋인 지화식 총통) 등을 앞세운 명나라 원군이 등장하면서 일시적이나마 왜군을 열세에 몰아넣었다.
거기에 명나라 절강성에서 파병된 남병(南兵)들이 구사하는 절강병법(浙江兵法)이 왜군을 격파하는데 한몫했다. 척법(戚法)이라고도 불린 절강병법은 애초에 기병(騎兵)을 배제하고 부대원 전부 방패와 솜옷 방탄복을 착용했으며 부대원 가운데 일부가 화승총 류 화약무기로 무장했다.
절강병법은 중국 내륙지방 북병(北兵)이 구사했던 장병기 전술과 정반대 개념이었다. 남병들은 일찍이 중국 남쪽 해안에 출몰했던 왜구와 싸우면서 근접전 전술을 터득했고 이런 개념은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에도 언급돼있었다.
선조 임금은 눈보라 속에 한양을 떠나 압록강 의주까지 피난 갔던 1593년 2월에 화승총 부대의 결성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화포장(火砲匠: 화포제작 장인)에게 화승총 시범발사를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명나라 장수 주모(周某)가 “화승총 제작과 염초제조법을 지도해주겠다”고 제의해 비밀리에 조선군을 접촉시켜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 임금은 즉각 척계광의 절강병법을 벤치마킹하여 조선군 실정에 맞는 화승총부대를 꾸리는 전술체계를 구체화했다.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절강병법을 구사했던 장수 낙상지(駱尙志)에게 1593년 7월부터 조선군 군사훈련을 맡겼다. 진(陣)을 짜고 화포 포군(砲軍)을 양성시켰으며 절강성에서 파견된 남병으로부터는 창·검·낭선(筤筅) 기술을 전수받게했다. 낭선은 가지를 남긴 대나무 끝에 창날을 부착한 길이 4.5m, 무게 3kg내외의 독특한 장창이었다.
선조 임금은 1593년 음력 8월, 승정원(承政院)에 일러 “화승총 사격수 양성을 위한 도감(都監)을 특별히 설치할 것을 명령한다”며 비망기(備忘記)에 기록했다. 조선의 재래무기 부대가 화승총 사격수를 중심으로 일대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곧이어 훈련도감사목(訓鍊都監事目)을 중앙과 지방 감영, 군영에 반포하여 구체화시켜나갔다. 왕명에 의한 훈련도감 설치는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앞장서서 맡았다.
중앙 훈련도감의 최고위 지휘관인 영(營) 아래에 사(司), 그 밑에 100여명 단위부대 초(哨), 그 아래에 수십 명 단위부대 대(隊)로 구성됐다. 핵심 전력인 포수와 살수는 사(司)에 속했으며 사수는 수문장(守門將)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지방조직도 화승총 포수를 중심으로한 삼수병 편제 속오군(束伍軍)이 설치됐다.
삼수병은 화승총 포수(砲手)와 활 쏘는 사수(射手) 그리고 창과 칼로 무장한 살수(殺手)가 1개조로 편성되는 소규모 정예부대로, 주력은 화승총이 담당하고 사수와 살수는 포수의 화약장전 등 공백시간을 지원하도록 편제된 것이다.
삼수병 체계는 차근차근 완성돼갔다. 우선은 화승총수 정병 양성을 위해 도감낭청(都監郎廳)인 이자해(李自海)에게 ‘기효신서’ 내용을 해독케 하여 화승총수 중심의 부대편성 골격을 갖추게 하고 김문성(金文盛) 등 무장에게 화승총수 모집과 훈련을 위임시켰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포수를 양성하는데 공이 컸던 이일(李鎰)을 중심으로 행재소의 무신 및 금군(禁軍: 임금 친위병)·화포장 등을 선발하고 포수 200명을 우선 선발, 부대규모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포수 중심으로 설치된 훈련도감은 차츰 의용대(義勇隊: 지원부대)를 살수로 편입하고, 다시 수문장(守門將) 등의 궁사(弓射)를 연마한 자에게 사수자격을 부여하여 의용대가 곧 초창기 훈련도감을 구성하는 장졸이 됐다.
삼수병을 양성하는 한편 화승총을 만들고 염초를 생산하는 일에도 박차를 가했다. 선조 임금은 임진년 왜란 첫해부터 왜병 포로가운데 화승총부대 출신은 성격이 난폭하고 교활한 자를 빼고 모두 조총과 화약제조에 투입하라고 지시하고, 노획한 뎃포와 항복한 뎃포부대원은 행재소(行在所: 선조 임금이 의주에 설치한 원조정)에서 심사하여 조총을 시험 제작케 하고 조선군에게 사격요령을 지도하게 했다.
1953년 12월부터는 중앙뿐 아니라 지방감영과 군영의 대장간에서도 조총을 만들고 염초를 구웠다. 그러나 정교한 성능의 화승총을 제작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선조 임금은 즉각 중앙의 숙달된 대장장이 5-6명씩을 한 조로 황해도와 충청도 등 탄과 철이 풍부한 곳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조총과 염초 생산을 담당케 했다. 그러나 흑색화약만 과잉 생산했을 뿐 화승총 제작은 실패를 거듭했다. 당시 조선사회의 열악한 제철과 단조기술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
화승총 성능에 필적하는 총기를 제작한 사례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7월말에 아끼던 수하 장수인 녹도 만호 정운이 왜병 화승총탄에 전사하자 전라좌수영 정사준에게 뎃포에 대항할 화기를 제작하라 명했다. 정사준은 낙안과 순천, 김해와 거제의 이름난 대장장이를 불러모아 무쇠를 두들겨 질좋은 시우쇠(正鐵)를 만들고 그걸로 총신을 만들고 총목을 붙여 사거리가 월등해진 총통을 만들어 냈다. 방아쇠틀을 부착하지는 못했지만 뎃포에 버금가는 성능을 구현한 총통이었다.
진주 목사 김시민도 왜군과 벌일 전투를 대비해 “170정의 화승총을 제조하고 화약까지 생산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김시민의 화승총 역시 총신을 늘인 총통에 불과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일본 통신사로 떠나 “왜국은 조선침략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임금께 보고해 임진년 왜란이 벌어지자 곧바로 파직됐던 김성일(金誠一)도 화승총 제작에 뛰어들었다. 왜란이 터지자 초유사(招諭使: 난리때 민간 백성을 이끄는 임시벼슬)로 임명돼 경상도지역 의병을 조직했던 김성일은 호남지방의 대장장이를 끌어 모아 화승총 제작에 나섰다.
김성일은 이후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돼 자신이 만든 화승총으로 무장한 의병부대 활동을 주도했지만 왜군 뎃포부대를 이길만한 전력은 구비하지 못했다. 짐작하건데 김성일의 화승총 역시 총목을 부착한 총통에 불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만나 어쨌건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 화승총수 양성은 자리를 잡아갔다. 삼수병 편제는 1594년 이후 체계가 잡혔고 훈련도감 설치 8개월 만인 1594년 4월, 첫 삼수병 실전연습이 공개됐다. 삼수연기지법(三手鍊技之法)에 따라 삼수병이 완전히 조직된 것은 그해 6월 이후였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화승총부대 주력의 삼수병 편제 조선병법은 그 이후로 쭉 조선 국방전술의 뼈대로 자리 잡아 1882년 서구에서 도입한 신식무기로 무장한 소총부대가 편성될 때까지 조선군부의 핵심전력 노릇을 했다.
훈련도감 병력충원은 당시 조선 군부 인력충원 방식에 비하면 가히 개혁적이라 할 만 했다. 화승총 포수 선발에 있어서 선비계층인 유생(儒生)과 한량(閑良)·양반집 서얼(庶孼)에서부터 아래로 공·사천(賤) 노비 및 미성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계층에게 문호를 개방했고 일단 화승총수로 선발되면 동등한 대우를 했다. 전쟁에 나설 군사충원이 시급한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긴 했지만, 향후 조선군대 내부의 신분차별 타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임진왜란 발발 첫해에 선조 임금이 화승총수 양성을 위해
왕명으로 설치한 훈련도감. 훈련도감은 조선사직이 명운을
다하는 그날까지, 화승총 부대를 육성한 사령탑이었다.
훈련도감 청사가 자리했던 곳은 지금의 동대문 서울운동장,
그 가운데서도 야구장이 위치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