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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동화) 홍시
신동일
우석이네 집 안은 온통 누렁이 냄새가 가득 배어있습니다. 대문에 들어서면 왼편에 외양간이 있고 마주보는 바른 쪽에는 조그만 아궁이와 큼직한 여물솥과 연기에 그을린 사랑채문이 보입니다. 할아버지가 틈틈이 청소하고 폭신한 볏짚을 깔아주지만 외양간은 시도 때도 없이 내놓는 누렁이의 쇠똥과 오줌냄새가 대문 밖까지 풍깁니다.
“딸랑, 딸랑!”
희끄무레 밝아오는 창밖에서 맑은 방울소리가 울립니다.
누렁이 목에 달린 워낭소리입니다.
우석이는 늘 누렁이 워낭소리에 잠이 깨곤 했습니다.
“크음!”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두어 차례 들릴 쯤 이면 구수한 여물냄새가 문틈으로 새어듭니다. 숭숭 썰은 볏짚에 검정콩과 쌀겨를 드문드문 섞어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도록 푹푹 삶은 거무죽죽한 구수한 여물냄새. 그 구수한 냄새가 아직도 어둑한 집안 구석구석을 채우고 바깥마당까지 새어나갈 때 쯤 뒷산에 사는 멧비둘기 서너 마리도 외양간으로 날아듭니다.
여물통 속에서 떨어진 구수한 콩 맛이 새벽부터 손짓 하는가 봅니다.
이 때쯤이면 할아버지 손길이 바빠집니다. 온몸 가득 밴 여물냄새를 풍풍 풍기며 쟁기와, 써레, 심토리 등을 손질하여 지게에 얹습니다.
지게 채비를 마친 할아버지가 마당가에서 담뱃불을 끄고 일어설 때쯤 어김없이 여물 먹기를 끝낸 누렁이가 긴 혀로 입 주위를 훔치며 꼬리를 흔듭니다.
“잘 먹었니?”
누렁이의 어깨에 박힌 멍에자국을 슬슬 다독여준 할아버지가 쇠털이 드문드문 붙은 멍에를 누렁이 어께에 얹은 다음 쟁기를 얹은 지게를 지고 소와 함께 일터로 출발합니다.
여물냄새를 담은 수채화처럼 그렇게 편안히 흐르던 우석이의 일상이 무너진 것은 지나가 이사 온 후부터였습니다. 근처 면사무소로 전근 온 아빠를 따라 왔다는 얼굴이 박꽃처럼 흰 지나는 전학 온 첫날부터 반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였습니다. 우석이네 건너편에 사는 반장 정태까지 단짝이던 부반장 순영이와 거리를 둔 채 지나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었습니다. 지나가 아이들과 어울려 정태네 집에 놀러 간다고 우석이네 집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지나가 갑자기 코를 막으며 우석이네 마당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뭐야? 코피야?”
깜짝 놀란 정태가 손수건을 꺼냈습니다.
“지린내, 이 집에서 지린내가 나. 아니 화장실 냄샌가?”
“여긴 우석이네 집인데. 그리고 이 냄샌 화장실 냄새가 아니고 외양간 냄새야.”
옆에 서 있던 우석이는 갑자기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습니다.
“하하하, 외양간 냄새를 화장실냄새라니!”
아이들은 깔깔 웃었지만 우석이는 울고 싶을 만큼 창피 했습니다.
그날 지나보다 더 우석이를 섭섭하게 한 애는 반장인 정태였습니다.
다른 때는 거리낌 없이 우석이네 집안을 들락이던 정태까지
“윽, 어서 코를 막고 막 뛰어가자!”
하더니 앞장서서 코를 막고 자기 집 쪽으로 뛰었습니다.
“하하하, 읍내에서 새로 이사 온 지나가 우석이네 집 앞에서 코를 막고 뛰었다고?”
아이들이 우석이네 집앞에서 코를 막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여러 날 동안 아이들의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겠지, 지나가 살던 도시에서야 어디 외양간을 구경이나 했겠니?”
처음에는 지나 행동을 우습게 생각했던 아이들도 차츰 우석이네 집을 지린내 나는 집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쁜 놈들!’
우석이는 아이들이 길낄 대고 웃을 때마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라 마렵지도 않은 화장실을 자주 들락 거렸습니다.
"할아버지, 저 누렁이 팔지요.”
"뭐, 소를 팔아?”
갑작스런 우석이 말에 할아버지는 무척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집에서 화장실 냄새가 난 대요!”
“뭐 화장실 냄새? 어떤 놈이 어떤 놈이 그딴 소릴!”
“우리 집 앞을 지나던 아이들이 코를 막고 달아났단 말이어요. 이잉!”
말하던 우석이가 갑자기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갑작스런 우석이의 눈물을 본 할아버지는 또 한 번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뭘 모르는 녀석들! 소가 얼마나 고마운 짐승이라고!”
잠시 동안 담배만 빨던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우리 집이 한참 어려울 때 새끼를 다섯 배나 낳아 목돈을 마련해준 게 바로 저 누렁이다. 저 누렁이가 다랑이 논 다섯 배미를 사게 해줬단 말이다. 지금 밥술이나 먹게 된 것도 모두 말없이 멍에를 메어준 오직 하나 누렁이 공이란 말이다.”
할아버지 말 속에는 오년 전 집을 나간 아들에 대한 원망도 묻어있는 듯 했습니다. 도시로 나가 트럭운전을 한다는 우석 아버지는 명절 때나 되어야 한두 번 집에 얼굴을 내놓을 뿐 평소에는 전화한 통 없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받는 월급마다 술집과 놀음판에 쏟아 붓는다는 소문만 있을 뿐입니다.
'후두두둑!'
매봉재에 검은 구름이 걸치는 듯하더니 굵은 소나기가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석아, 누렁이 끌고 와라!”
앞밭에서 담배잎을 따던 어머니가 소리쳤습니다.
“에이. 또 그놈의 누렁이!”
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우석이가 투덜대며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움머-”
배가 불룩한 누렁이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우석이 쪽을 보며 반갑다는 듯 소리쳤습니다.
“이놈이 눈치도 없이 반가와 하기는! 어이구 귀찮아!”
우석이가 투덜대며 말뚝을 뽑자 누렁이가 코를 벌렁이며 집 쪽으로 잽싸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임마, 뭘 그렇게 바빠!”
심술이 난 우석이는 일부러 고삐를 당기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움메!”
그럴수록 누렁이는 조바심이 나는 듯 기를 쓰고 빨리 가려고 버둥거렸습니다.
“자식, 되게도 보채네! 빨리 가려면 나를 끌고 가보렴 용용 약 오르지?”
우석이는 재미있다는 듯 몸을 잔뜩 뒤로 젖히고 마지못해 한 발자국씩 떼어 놓았습니다.
우석이와 물에 홈뻑 젖은 누렁이를 외양간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마침 대문 안에 서있던 할아버지가 흐린 눈을 껌벅이며 외양간으로 달려왔습니다.
“으, 이놈이 이상하네!”
그러자 밭에서 돌아와 빗물을 털던 어머니가 허둥지둥 달려왔습니다.
“새끼인가요?”
“그런 것 같다. 새끼를 낳을 것 같아. 에미야, 어서 이 바닥에 마른 집 좀 깔아라!”
집안이 갑자기 부산해졌습니다.
“얼룩이가 새끼를! 그럼 어서 집에 와서 새끼를 낳으려고 보챈 거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
우석이는 갑자기 누렁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렁이가 외양간 안을 빙빙 돌며 괴로운 몸짓으로 이리 저리 서성였습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듯하던 누렁이가
“움메!”
하고 짧은 소리를 내며 엉덩이 쪽을 움추렸습니다.
폭신한 짚더미위로 송아지가 풀썩 떨어졌습니다.
“송아지다! 얼룩배기 숫 송아지다. 어이 구! 이놈 벌써 어깨가 떡 버러진 것 봐!”
“왜 송아지가 얼룩배기죠?”
우석이가 누렁이 엄마와 달리 얼룩덜룩 무늬를 달고나온 송아지를 보며 물었습니다.
“얼룩배기 씨를 심었으니 얼룩배기가 나왔지.”
“얼룩배기 씨요?”
우석이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엄마가 짧게 말했습니다.
“얼룩배기 아빠가 얼룩배기 황소란다.”
어미 소가 된 누렁이가 안심이 된다는 듯 ‘움머!’하고 소리치자
갓 태어난 송아지가 대답이라도 하듯 ‘매!’하고 소리쳤습니다.
“야, 우리 누렁이가 얼룩배기 새끼 낳았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우석이 앞으로 아이들이 우루루 모여들었습니다.
“언제?”
“어제 밤에 낳았는데 얼룩배기야, 아주 귀여워!”
“그럼 소가 두 마리 됐네 너희네집 부자 됐네!”
우석이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려는 순간 지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가 두 마리면 냄새도 두 배로 지독히 나겠네. 어쩐지….”
지나가 우석에게서 냄새라도 난다는 듯 코를 벌름 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서자 정태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도 주춤주춤 우석에게서 물러섰습니다.
화가 나서 볼이 잔뜩 부은 우석이가 우걱우걱 저녁을 먹을 때입니다.
“이제부터 얼룩배기는 우석이 몫이다. 잘 키워 봐라! 숫 송아지라 좀 날뛸게다. 그렇지만 네 중학교 갈 밑천이니 어쩌겠니?”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라더니 할아버지 말대로 얼룩배기는 시도 때도 없이 길길이 날 뛰었습니다. 밤톨만한 앙증맞은 뿔이 버섯처럼 살포시 솟아오르자 얼룩배기는 사슴뿔처럼 크고 멋진 뿔이라도 단 듯 사방으로 머리를 흔들어도 보고 걸핏하면 나무나 돌멩이를 쿡쿡 받았습니다.
“흐흐흐, 잘났다. 고 밤톨만한 뿔이 무슨 힘을 쓴다고! 길길이 날뛰냐!”
그런 날이면 우석이는 힘주어 얼룩배기 머리통을 쥐어박았습니다.
그렇지만 얼룩배기가 점점 자랄수록 우석이는 점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송아지와 씨름하다보니 옷은 물론 몸에서도 얼룩배기 냄새가 풀풀 나는듯하여 스스로 아이들과 어울리지않아 외톨이가 된 것입니다.
가을이 되자 작년 이맘때처럼 멧돼지 피해가 늘어난다고 온 동리가 난리였습니다. 외딴 호정이네 가을 옥수수 밭은 멧돼지의 습격을 받아 헛농사가 되었고 그 며칠 후에는 집 너머 순태 네 고구마 밭이 쑥밭으로 변했습니다.
“올해는 유독 멧돼지 출몰이 잦습니다. 곧 사냥꾼이 온다고 했으니 마을 주민께서는 고구마 밭과 콩밭 근처는 삼가 해서 가시고….”
마을 이장이 방송 한 것 말고도 옆 동리에서는 힘이 약한 노인과 어린이가 멧돼지의 공격을 받았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우리 집 넘어 새터 고구마 밭도 온전키는 힘들겠지요?”
“글쎄, 요즈음 멧돼지들 수가 갑자기 불었다니까. 온전 할지…..”
할아버지와 어머니 말을 들으며 우석이는 문득 새터에 고구마 밭둑에 서 있는 감나무 생각이 났습니다. 서리가 내리기 전 고구마를 캘 때 이맘 때 쯤이면 단풍 든 잎을 떨어버린 감나무에 빨간 감만 조롱조롱 달려있던 것입니다.
“그래, 오늘은 거기로 가서 홍시 맛 좀 보는 거야!”
멀리서 봐도 우석이네 감나무는 촛불을 켜 놓은 듯 환하게 보였습니다.
감나무 밑에서 반들반들 윤기 나는 홍시를 두 개째 입에 넣던 우석이가 눈을 크게 떴습니다.
“응, 저애는?”
얼굴이 유난히 까만 정태와 나란히 걸어오는 애. 코스모스처럼 가느다란 몸에 찔레처럼 하얀 옷을 입고 감나무 쪽으로 걸어오는 애는 분명 지나였습니다. 어깨에는 스케치 북까지 걸치고.
우석이는 집 앞에서 코를 막던 지나 모습이 떠올라 허둥지둥 얼룩배기 고삐를 놓고 밭둑넘어 풀밭으로 밀어내며 손을 내저었습니다.
“쉬이, 저쪽 풀밭넘어로 사라져 어서어서!”
다급한 우석이의 마음 을 알기라도 하듯 얼룩배기가 엉덩이를 보이며 돌아섰을 때입니다.
“우석아, 지나가 멀리서보고도 한 눈에 너 네 감나무에 반했나봐. 어제 선생님이 ‘가을그림’을 그려 오라셨지? 그 그림, 너 네 감나무를 그리겠대.”
공주를 모시고 오는 시종장처럼 정태는 멀리서부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저쪽 밭둑에 들어서면서 그림 제목도 정했대. ‘감나무와 정다운 친구들’ 하하하! 감나무는 이 감나무가 확실한데 정다운 친구는 누구일지….”
“과연 정다운 친구가 누구일까요?”
지나가 정태말을 흉내내듯 이어받으며 감송이 처럼 환히 웃었습니다.
우석이는 지나가 생각하는 그 애가 당연히 정태일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공연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어요. 정태도 자기일거라고 확신하는 여유있게 웃었습니다.
지나는 어떤 방향에서 그리는게 좋을지 감나무를 두어 바퀴 돌아본뒤 구절초가 어우러진 풀밭에 자리잡았어요. 요모조모 감나무 모양으로 서서히 도화지를 채워가던 지나가 붉은감을 조롱조롱 달고있는 감나무 스케치를 마치고 누군가를 그릴 공간을 채우려는 순간이었습니다.
“탕, 타앙!”
“타앙, 탕탕!”
건너편 고래실에서 총소리가 두어 번 들리더니 언덕너머 마을 쪽 확성기에서 다급한 이장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마을 주민 여러분,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사냥꾼이 쏜 총알을 빗맞은 멧돼지가 뒷산으로 달아났답니다. 부상당한 멧돼지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데, 화난 멧돼지가 길길이 날뛰다가 어떤 해코지를 할 지 모르니….”
“뭐? 화난 멧돼지?”
지나가 겁먹은 표정을 지었지만 정태가 태연한 척 말했습니다.
“아니, 여긴 괜찮을 거야. 또 그까짓 멧돼지야, 뭐!”
이 때 우석이 시야에 갑자기 돌멩이처럼 뛰어드는 검은 물체가 있었습니다.
“저, 저거! 멧돼지 맞지?”
우석이가 눈을 크게 뜨며 검은 바위덩이처럼 내달려오는 붉으죽죽한 동물들 쪽을 가리켰습니다.
“앗, 저건 멧, 멧돼지야! 그것도 세 마리나! 이걸 어쩌지? 그래도 이리는 안 오겠지?”
정태가 빙글거리던 얼굴을 정색으로 바꾸며 중얼거렸습니다.
아이들을 발견한 멧돼지가도 잠시 주춤했습니다.
“꽥, 꽤객!”
잠시 주춤하던 멧돼지들이 서서히 세 아이들을 향하여 발을 내딛습니다. 지능이 꽤 높다는 멧돼지가 아이들 셋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공격 자세를 취한하는게 분명해보였습니다.
“으아, 이쪽으로 오네!”
상황 판단이 빠른 정태가 제일 먼저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 했습니다.
정태가 토끼처럼 날래게 달아나자 달리기에는 자신이 없다는듯 지나가 스케치북을 땅에 떨어뜨리며 우석이 손을 덥썩 잡았습니다.
“우석아, 어떡해!”
우석이는 하얗고 가느다란 지나 손을 차마 뿌리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우리도 달아나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석이는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얼룩배기는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룩배기야, 얼룩배기야!"
지나 손을 꽉 잡은 우석이가 얼룩배기가 풀을 뜯고 있을 쪽을 향해 넓은 고구마 밭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멧돼지와 아이들과의 달리기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금세 식식거리는 멧돼지 소리가 등 뒤까지 따라 붙을 듯 했습니다.
거추장스런 구두까지 벗어던진 채 허둥대던 지나가 고구마 덩굴에 발이 걸려 풀썩 넘어졌습니다.
“지나야. 힘을내!”
지나를 일으키며 소리쳤을 때여요.
“꽥 크르르!”
멧돼지가 두 마리가 드디어 우석이네 밭둑으로 올라섰습니다.
“이놈들아 어딜!”
한손으로 지나를 뒷쪽으로 숨기며 우석이가 돌멩이라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볼 때였습니다.
“메!”
다급한 우석이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는듯 밭둑 건너에서 불쑥 고개를 쳐든 얼룩배기가 허연 거품을 문채 왕방울 눈을 굴리며 우석이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갑작스런 얼룩배기의 출현에 눈치빠른 멧돼지들이 멈칫발을 멈췄습니다.
“얼룩배기야, 어서 이리로!”
우석이쪽을 살피던 얼룩배기도 마침내 멧돼지 냄새를 맡은 모양입니다.
“메에!”
하고 소리치더니 꼬리를 수평으로 세우며 우석이 옆을 지나 멧돼지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멧돼지 들이 주춤하자 얼룩배기는 더욱 자신감을 얻은듯 귀여운 뿔이 달린 머리를 멧돼지 쪽으로 겨누며 거세게 빌을 옮겼습니다.
얼룩배기가 기세를 올리자 멈칫하던 멧돼지들은 재빨리 뒷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꽥, 푸르르!”
뒤따라오던 멧돼지들부터 뿔뿔이 몸을돌려 숲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메!~.”
멧돼지들이 숲속으로사라지자 얼룩배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하얀 구절초꽃이 지천으로 핀 가을 풀밭으로 향했습니다.
우석이와 지나는 여전히 손을 잡은 채 구절초 언덕으로 사라지는 얼룩이 뒷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벌렁대던 심장이 가라앉자 지나가 갑자기 생각 난 듯 아무렇게나 고구마밭골에 떨어져 있던 스케치북을 찾아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림에 붙일 그림모양이 선명하게 떠올랐어! 감나무와 정다운 친구들! , 화가이신 엄마가 내 그림을 보시고 ‘가을 동화’라는 이름이 딱 어울린다고 고개를 끄덕이실….”
지나가 시를 읊듯 중얼거리며 빠르게 그림을 채워나갔습니다.
“감나무가 조롱조롱 달린 감나무 아래 가운데에는 구절초 속으로 걸어가는 얼룩이를 그리는 거야. 그리고 그 옆에 하얀 옷을 입은 예쁜 소녀, 그리고 그 옆엔….”
지나가 햇볕에 그을러 까만 우석이의 팔뚝을 꼬옥 눌렀습니다.
‘날?’
겨우 가라 앉았던 우석이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며 얼굴을 붉혔습니다.
“투둑!”
우석이 심장소리를 엿들었는지 겨우겨우 붙이 있던 홍시 한 개가 반짝 빛을 내며 가을 햇볕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