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의 계백(階伯)
최 중 호
부여 군청 로터리엔 계백(階伯)장군의 동상이 있다. 오른손을 번쩍 들고, 군사를 지휘하는 계백을 태운 준마가, 단숨에라도 적진으로 내달을 기세다. “나를 따르라.” 외치던 그 목소리, 함성이 지금도 들릴 것만 같다. 장군이 손짓하는 곳으로 가 본다. 그 곳은 황산벌이요, 장군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뒤편, 수락산(首落山)에 묘소가 있다. 장군이 그곳에서 전사했다 하여 수락산이라 부르는가. 분향한 후 장군께 술잔을 올렸다.
5천 결사대의 선봉에 선 그는 용장이었다. 전장에 사사로운 정과 후환을 없애고자 처자의 목을 베고 집에 불을 질렀다. 비장한 각오였다. 사직을 위해 죽음을 맹세한 그는 두려움이 없었다.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5만 대군과 싸워 네차례나 이겼다. 그는 또한 덕장이었다. 잡혀 온 어린 관창의 용기를 칭찬하고 살려 보내는 아량이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어린 적을 풀어 주는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과부적으로 수락산 기슭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의 시신은 백제 유민들에 의해 이곳에 은밀히 매장되었다고 전한다. 그 묘가 한 때는 훼손과 방치 상태로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부적면민들이 그의 뜻을 기려 1976년에 봉분과 묘역을 정비했다고 한다. 묘앞엔 상석(床石)이나 망주석(望柱石)도 없다. 가첨석없는 비신(碑身)에, 붉게 음각된 「百濟階伯將軍之墓」란 글씨가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보통 사람의 묘도 잘 치장하는데 충의 용장(忠義勇將)의 묘가 너무 초라하다. 김유신의 묘가 왕릉이라면 계백의 묘는 서민의 묘나 다를 바 없다.
남북 전쟁에선 패장인 리(Lee)가 승장 그란트(Grant)보다 더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와 다른 가치관 때문인가. 역사란 승자의 것도 패자의 것도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승장도 패장도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이다. 그들의 용맹과 충절이 후세를 사는 우리에겐 귀감이 되고 교훈이 된다. 황산벌의 저녁 노을이 곱다. 누렇게 익은 벼도 장군께 조의를 표하고자 고개를 숙인 것만 같다.
*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장군의 묘는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봉분도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 후 논산시에서 1997년 계백 장군유적관리사무소를 착공하고, 2005년 백제군사박물관과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충장사를 준공하면서 장군의 유적지가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다.
(1992. 중도일보. 중도춘추)
첫댓글 군사박물관에서 계백장군이 처자의 목을 베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당시의 비장한 상황을 엿보는 듯 했습니다. 평화로운 박물관 주변과 박범신 소설가의 집필실이 있는 탑정호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광이 좋아 자주 갔는데..그곳에도 가을이 깊겠습니다.
전에는 허술하게 관리되었지만 지금은 박물관과 영정을 모신 충장사 등을 조성하여 장군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중도일보 칼럼에 썼던 글입니다.
제가 연재하는 잡지에 11월호에는 성삼문 선생의 묘소와 쌍계사를 썼습니다만, 12월호에는 관촉사와 탑정호를 쓰고 있습니다.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계백 장군 묘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커다란 봉분 위에는 전설만 남아있었더랬죠. 그 묘가 백제군사 박물관 건립에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만...신라와는 달리 백제는 유적이나 유물이 별로 없어서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는 백제의 충신도 빛을 보게 되어 마음이 가볍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계백 장군이시여, 환생하시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소서!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대전수필문학회에 열심히 참여하시는 강 선생님의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