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산다는 것
알다시피 일어나 걷는 것은 인간의 외적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열 달쯤 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발로 일어서서 첫걸음을 떼려고 합니다.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져도 걷기의 모험을 포기하지 않고
최초의 보행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람임을 증명해 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걷는 것이 곧 인간을 짐승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침팬지나 고릴라와 같은 동물들도 두 발로 걷지만 잠시일 뿐,
곧 네 발로 대부분 다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동물도, 중력과 맞서 사람처럼 등뼈를 똑바로 세우고
대지위에 곳곳이 서서 걷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외적 모습인데,
이 외적 모습은 인간의 내적 본질을 알려주는 중요한 아이콘이 됩니다.
일어나 걷게 되면 인간은 눈을 들어 멀리 보고
또 높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일어나 걷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하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됨의 첫째 특징입니다.
또 일어나 걷게 되면 두 손이 자유로워 도구를 만들고
그 많은 도구들이 두 손의 연장이 됩니다.
그 두 손으로 서로 손을 잡고, 두 손의 연장인 다양한 도구 직업들이
함께 손을 잡으면서 사회와 공동체를 이룹니다.
또 일어나 걷게 되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고 걷고,
그러다가 길이 생기고, 그 길을 함께 걸으면서 문화가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원석을 보석으로 가공하듯,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이처럼 일어나 걷는 인간의 외적 모습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사인입니다.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위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일어나 걷는 것이고,
이것이 일어나 걷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이 이런 모습으로 일어나 걷도록 회복시킵니다.
그러나 점차 우리는 걸으면서 위를 잘 보지 않습니다.
하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점차 우리는 자유로운 두 손으로 서로 손을 잡지 않고 주먹을 쥐고 싸웁니다.
두 손의 연장인 도구를 만들되 무시무시한 전쟁도구들을 만듭니다.
점차 우리는 두 발로 하나님의 길을 걷지 않고 죄와 탐욕의 그릇된 길을 걷고,
그 길을 따른 타락한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죄가 구조화되고 극심해집니다.
그래서 분명히 신체적으로는 일어나 걷는데, 영적으로 앉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비틀거립니다. 관계적으로 계속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걸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즘은 더욱 실감 나는 말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좀 더 시적 언어로 다 와닿게 말해줍니다.
그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2019년부터 22년까지 죽음과 독대하면서
죽음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관찰하고 문학가로서 글로 남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수많은 글을 썼는데, 결국 전할 마지막 단어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디지로그’란 말, ‘생명자본’이란 말도 있는데,
그가 썼던 모든 글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써서 마지막 한 마디를 쓴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김지수 작가와 대담 속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 눈물 한 방울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라네.”
“아….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이란 말씀이지요?"(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땀방울을 흘리면서 사회를 세웠고,
피를 흘리면서 민주화 혁명도 이루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눈물 한 방울이라고 합니다. 그의 글입니다.
“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피와 땀이 하나가 되어야 하루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처럼 힘을 낼 수 있는데,
현실은 반대로 대립과 분열의 피눈물로 바뀌고 있다.”(이어령, <눈물 한 방울>)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이들은 지금도 수없이 많고,
또 피를 흘리면서 싸우는 이들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를 위해서 땀을 흘리고 자기와 관련된 것을 위해 피를 흘립니다.
아무리 땀과 피를 흘려도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없으면,
남을 생각하고 남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으면, 땀은 독점이 되고 피는 폭력이 됩니다.
그 땀은 그 피는 도리어 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땀과 피만으로는 아직 사람이 아니고,
그것만으로는 이 세상이 따뜻하게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땀과 피는 흘리지만 눈물이 없어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없어서 비정한 전쟁터와 같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인 것을 증명해준다.
이제 인간은 박쥐가 걸리던 코로나도, 닭이 걸리던 조류인플루엔자도 걸린다.
그럼 무엇으로 짐승과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눈물이다.”
“ 나사로의 죽음과 멸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흘렸던 예수의 눈물,
그 사랑과 참회의 눈물이 메마른 사막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이어령, <눈물 한 방울>)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눈물 한 방울”인데,
그 눈물은 먼저 참회의 눈물입니다.
참회의 눈물 한 방울,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면서 애통해서 우는 회개의 눈물 한 방울입니다.
또 기후위기를 만드는 문명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 기후위기를 만드는 삶을 살아갔음에 대한 참회의 눈물 한 방울입니다.
그런 눈물을 가지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고서
어떻게 이 위기가 해결이 됩니까?
이런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없다면,
그 는 겉으로 교양 있어 보여도 마음으로 매우 교만하고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참회의 눈물이 메마르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사랑의 눈물 한 방울’입니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흘리는 감상적 눈물 한 방울이 아닙니다.
남을 위한 작은 헌신이고 섬김입니다.
이 땅의 소자를 위해 물 한 그릇을 주고 지갑을 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엄청난 땀과 눈물을 흘리고 남다른 성과를 이룹니다,
그리고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없다면,
아니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했다면, 어찌 그것이 성공입니까?
어찌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없다는 말은 위로 하늘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을 위한 눈물 한 방울이 없다는 것은
옆으로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고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눈물 한 방울이 메말랐다는 말은
일어나 걷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과 성령님은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십니다.
다시 위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도록,
다시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도록,
다시 아래로 내가 선 땅을 조금이라도 좋게 변화시며 살도록 합니다.
다시 우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맺히게 하십니다.
우리 주위에 이웃도 있지만, 저 먼 나라의 그들을 향하여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막12:29 -31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나만 일어나 걷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함께 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 우리 모두 이전보다 더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령 교수의 말처럼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맺힌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코로나로 전쟁으로 기후위기로 우리도 각자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있지만,
나를 주저앉아만 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걷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인해
일어나 걷고 일어나 걷게 만드는 사람들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