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인빈김씨 5남 정원군(원종)과 인헌왕후 구씨 장남 (1595-1649) 재위(1623,3~1649,5 26년 2개월) 부인3명 자녀6남1녀
(1)인렬왕후 한씨 (4남)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로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능양군과 결혼 하여 청성현부인에 봉해지고 1623 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슬하에 소현, 봉림, 인평, 용성 등 네 아들을 낳고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 와 함께 경기 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조 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 로 옮겨졌다.
(2)장렬왕후 조씨
(3)귀인 조씨- 2남1녀 숭선군,악선군,효명옹주
소현세자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 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이 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 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소용과 세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 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철저한 친청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 후 2달 뒤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 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온 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 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인평대군
인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요, 자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7년 심양 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 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 가의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산수도', '노승하관도', '고백도' 등이 있 다. 이러한 미술품 이외에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의 저서가 남아 있다. 사후에는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