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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깨어남 – 뒤따라오는 혼란 31.
‘깨달음’은 깨어남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어떤 통찰(realization)을 의미하는 경우와, ‘머무는 깨어남’ 곧, 영구적으로 깨어 있게 되는 궁극적 상태(enlightenment)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실재에서 실재로 이어져 들려오는 진실한 목소리,
깨어남으로 손짓하는 진실된 그 목소리는
우리 안의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온다.
그 소리는 기분 좋은 기분보다는
진리를 더 염원하는 바로 그곳에서 나온다.
깨어남 혹은 깨달음에 대한 커다란 오해는,
그것을 뭔가 신비적인 경험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천지자연과 하나가 된다거나 바다 속으로 녹아든다든가,
또는 신과 합일된다든가 하는 경험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또한 깨어남이라는 것이 무슨 엄청난 통찰,
예를 들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았다든가,
또는 실재의 메카니즘을 통찰했다든가 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깨어남의 징표는 구함(seeking)이 끝나는 것 36.
진정한 깨어남의 징표는 구하는 행위가 종식되는 것이다.
‘구하는 자’는 가상현실로서 기능하였을 뿐,
또 그렇게 사라져간다.
의식, 혹은 ‘영’으로 하여금 꿈속 상태와의 동일시로부터
빠져나오는 데 힘을 주었고,
본래의 존재상태로 돌아가도록 도와준 셈이다.
별안간에 깨어남이 일어난다.
구하는 자와 구함과, 영적 갈구에서 생겨나 쌓아올려진 에고의
구조물들이 갑자기 사라져 없어진다.
우리의 자아상은 그저 있는 그대로 - 별 의미 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 바라보이게 되면서 떨어져 나간다.
깨어남의 밀월여행 37.
의식이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순간에, 크나큰 안도감이 생겨난다.
마침내 꿈꾸는 상태 밖으로 빠져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다.
깨어남은 어쩌면 최초의 영적 입마춤, ‘실상reality’을 처음으로
대면하여 경험하는 진짜 입마춤, 혹은 자신 누구이며 무엇인지,
드디어 그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진실의 피로연과도 같은 것이다.
밀월여행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완전한‘흐름’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존재, 여러분의 경험 안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다.
모든 것이 그저 흐르고 있다.
삶은 하나의 흐름이며,
모든 것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생겨나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절로 ‘되어가고’있고, 분리된 존재로서의 ‘나’가 ‘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이 밀월 여행은 완전한, 절대무저항의 경험이다.
이 무저항 안에서 삶은 놀랍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거의 마술에 홀린 듯이 흘러간다.
어떤 일이 일어날 필요가 있을 때, 정말 그 일이 일어난다.
실제로 무엇을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제때에 결정이 내려진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명료하다는 느낌으로 있다.
그것은, 망상이나 삶의 조건이나 자기모순 따위에 전혀 물들지 않은 ‘영靈’의 경험이다.
깨어남 이후에 겪는 혼란 39.
삶에서 우리에게 기준이 되어주던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가 붙들고 살던 신념, 우리 스스로를 정의해오던 신념이 이제는 텅 비어 있는 것임이,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임이 드러난다.
우리가 아무리 깊숙히 ‘보았고’ 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개성이라는 구조물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한 모금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분리의 너머를 한 번 보고 나면 자신을 특정한 개성을 지닌 인격과 ‘동일시’하는 그것이 녹아 내리기 시작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개성, 즉 낡은 기준과 원칙, 자기본위의 충동들을 먹여 살리던 것들이 사라져 버렸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스물다섯 살 때 나는 처음으로 흘깃 그 베일 너머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깨어남이었고, 영구적인 깨어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깨달음의 어떤 조각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면의 어딘가에서 나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나는 영원하며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누구의 창조물도 아님을 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고의 차원에서 에고에서 비롯된 근본적 에너지의 차원에서 엄청난 양의 녹아내림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일들이 이젠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내가 그 일을 저항했거나 역겨워했다는 게 아니라, 이전까지 이런저런 추구로 나를 끌고 다니던 자기중심적 에너지가 그만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영적인 수행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희망사항은 에고가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에고 상태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깨어남이 에고의 용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깨어남의 최후의 결과는 에고의 급격한 용해이지만
에고가 이 과정에 순순히 협조할 거라는 아니고,
에고는 온갖 수단을 다하여 이 용해의 과정에 저항할 것이다.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새로운 흐름 속에서 방향을 잡으려고 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며, 방향을 잡으려는 노력을 그만 두면서 오히려 방향을 찾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온전히 ‘내려놓음(letting)‘으로써 방향을 찾게 된다.
내려놓음에는 거쳐야 할 단계가 있어서, 삶을 움직여줄 새로운
에너지가 곧바로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에너지는 분명히 존재하며, 또 끊임없이 우리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란 바로 ’나뉨 없음‘의 에너지다. 이것은 일체의 왜곡이 없이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곧바로 솟아나오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에고의 동력이 용해된 후에 우리의 의식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오기까지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용해과정이 몇 년이나 계속된다.
나의 경우에는 6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더욱 깊은 깨달음(realization) 내지 깨어남이 일어났다. 이전의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중의 경험이 처음 것보다 명료하고, 심오하며, 더 완전했다는 것이다. 더 깊은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 6년이라는 기간의 에고의 용해가 필요했고,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걸 알 수 있었다.
“찾았어, 그런데 잊어버렸어” 47.
하나의 비유로서, 우리는 에고라는 구조물 혹은 여기서 ‘꿈속 상태’라고 부르는 지구의 중력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의식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
깨어남이란 중력을 깨고 벗어나는 것이다.
로켓이 마치 대기 속으로 수 마일을 솟구치다가,
그만 연료가 바닥이 나서 다시 지구로 끌려 내려오는 것을 에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유로 받아들여도 좋다. 로켓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서 궤도에 들어서면 에고를 벗어나는 것으로 본다.
깨어남의 순간, 즉 꿈속 상태로부터 ‘실재’로 옮겨가는 순간은
어떤 일정한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절로 일어난다.
하지만 에고의 용해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깨어남의 순간은 찰나이지만 그 이후에는 전개되어가는 과정이 있다.- 꿈속 상태의 중력 너머로 건너뛰는 과정 말이다.
49.”난 깨어났어, 그런데.....” 49.
깨어남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그리고 바로 지금이다.
어제 일어난 일은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문제는 ‘내가 깨어나는 경험을 했는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깨어남이 바로 여기, 바로 지금 깨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진정한 깨어남이라면
우리는 그 깨어난 주체는 ‘내가’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깨어있음awakedness이 ‘나로부터’잠 깨어 일어난 것이다.
‘영’이 에고와의 동일시로부터 잠깨어 일어난 것이다.
에고는 깨어나지 않는다. ‘나’는 깨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애고가 아니다.
우리는 에고와 개인적인 ‘나’로부터 깨어나 있는 존재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깨어 있는 존재이다.
또한 진정한 관점에서 볼 때는,
우리가 바로 온 세상이다.
깨어남에 대하여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첫째로 누군가가 에고의 입장에서 깨어남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한다.
깨닫는 것은 깨달음이다.
깨닫는 쪽은 ‘내’가 아니다.
깨닫는 쪽은 이 ‘사람’이 아니다.
깨닫는 쪽은 ‘깨달음’이다.
“찾았어, 그런데 잊어버렸어”하는 이 현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과 상상 속의 나 사이의 싸움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아직 에고의 꿈속 상태의 중력장을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본성과 상상 속의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다.
비록 존재의 진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에고를 믿고 있을 수 있다.
생각이란 게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절대적으로 거짓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내적인 힘에 사로잡혀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아는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처지와도 같다.
깨어날수록 위험은 커진다 52.
깨어남이 흔들리는 이유는 깨어남이 마치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눌러보는 조명스위치처럼 켜졌다 꺼졌다 하는데,
당신은 이것을 통제할 힘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과 이런 일은
그저 자신의 다음 행로의 다음 여정일 뿐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꿈속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우리는 뿌리 깊이 프로그램된 바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깨달으면,
‘영’이 우리 안에서 눈을 뜨게 되면,
우리는 문득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적마다
우리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경향이 줄어들게 된다.
위로 올라 갈수록
진실이 아닌 행동, 진실이 아닌 말을 점점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의식이 밝아질수록 행위의 결과가
눈에 점점 더 밝게 들어오게 된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따른다. 자신이 아는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할수록 그 결과는
더 심각해진다. 사실 이것은 참으로 멋진 원리이다.
나는 이것을 ‘맹렬한 은총’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부드러운 은총이 안다. 나를 고양시키는 아름답기만 한 은총이 아니다.
진실이 아닌 행동을 할 때는 스스로에게 고통을 초래할 뿐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 맒이 곧 은총인 것이다.
삶의 조건이 부리는 힘 55.
그렇다면 깨어남은 왜 흔들리는가?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얽매여 있는 삶의 조건과 관련이 있다.
우리 안에는 너무나 단단하게 조건화된 영역이 존재하고 있어
적어도 처음에는 깨어남마저도 그곳을 뚫고 나갈 수가 없다.
우리는 온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은 것이다.
이 삶의 조건은 다른 말로 하면 카르마, 즉 因果이다.
그것은 삶의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받아들인 조건,
그리고 우리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 좋아함과 싫어함이 이미 정해진 것들을 말한다.
삶의 조건은 전생의 업이나 우리가 살아온 생이나, 부모의 유전자 등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이 삶의 조건에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자아관념을 삶의 조건으로부터
구해다 쓰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그야말로
조건화되고, 귀로 듣고, 또 배운다.
내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사랑스런 사람인지
그렇지 않는 사람인지 등등, 이모든 것이 바로 조건화이며,
이것들이 거짓된 자아관념을 만들어낸다.
세상(인생)과 나를 다르게 보는 이원성은 삶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인가?
모두가 심신에 각인된 삶의 조건에 의한 것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는 성질이 있다.
진정한 깨어남의 순간에 ‘영’ 또는 ‘의식’은
이 삶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의 의식은, 마치 꿈에서 깨어 일어나는 것처럼
자신의 조건화된 상태로부터 갑자기 깨어난다.
지금까지 조건화되어 있던 가짜 자아로부터 깨어나는 그 순간에야, 우리는 삶의 조건이 짓누르고 있던 엄청난 무게를 실감하게된다.
올바른 물음 59.
의식을 꿈속 상태의 중력장으로 유인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러니 어떻게 하면 계속 깨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 대신 다음과 같이 묻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미혹되게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정확히 어떻게 하여 스스로를 환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걸까?'
외부세계의 어떤 것도 깨어난 상태의 느낌을 빼앗아갈 수 없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어느 누구도, 우리가 싸우고 있는 어떤 상황도 우리를 깨어남 밖으로 밀어낼 수 없다.
깨어나기 전의 우리는 꿈속의 상태라는 그물에 갇힌 신세였다.
꿈속 상태가 우리를 한정 짓고 있었다.
그러나 깨어남이 일어난 뒤에는, 만약 그것이 진짜이고 진정한 것이라면, 비록 그 이후까지도 온갖 망상이 끈질기게 이어지더라도 그 망상은 나만의 개인적인 일이 될 수도 없고
그것이 나를 한정 지울 수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헛된 환영일 뿐임을,
우리가 잘못 이해한 결과일 뿐임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누군지 또 무엇인지와 아무 상관없이” 깨어남은 이 사실을 드러내준다. 깨어남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분리’라는 허깨비에게
먹이를 던져주지 않는 지혜를 준다.
영적 타이어로 길을 달릴 수 있게 해준다.
삶을 회피하는 수단으로서 절대성에 집착함 64.
깨달았다고 숭고해지거나 성자처럼 변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숭고한 것이란 아무런 분리도 없는 ‘전체성’의 관점으로부터 인식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그것이
바로 치유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 치유의 약은 철저한 정직성이다.
아울러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미혹에 빠뜨리고 있는지,
자신을 어떻게 꿈속 상태의 중력장으로 다시 끌고 들어가는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분리시키는지를 기꺼이 직시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우리의 에고는 내면의 분리 상태를 숨기기 위해
깨달음을 핑계로 삼으려는 강한 습성이 있다.
깨어남에 종종 수반하는 위험 중 하나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에 집착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깨어남의 절대적 관점을 붙들고 늘어져서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절대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결국 에고이다.
이 에고가 우리의 미혹된 행동이나 사고방식이나 이중감정 등을
감추기 위한 핑계로서 절대의 차원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관점에만 고집하면 곧바로 다른 모든 것에 장님이 되어버린다.
깨어있는 것은 언제나 깨어 있지 않은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깨어난 존재는 망상이나 꿈속 상태까지도 자신과 분리되었다거나 자신과는 다르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깨어난 존재는 모든 것을
자신으로 보고, 자기와 동등한 존재로 본다.
우리 존재 속에 거하는 진리는 자기 내부의 오해나 집착이나 망상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때까지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내면의 깨어난 존재의 천성은 나뉨 없는 무조건적이 사랑이다.
내면의 깨어난 존재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속의 모순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고착상태나 고통으로부터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깨달은 존재들이 고통받는 이들과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를 돕는 까닭이다.
그들은 ‘실재’ 그 자체가 품고 있는 사랑에 눈이 열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성은 진리와 실재의 힘에 의지하여 승화되기를 희구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자신의 모든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실재의 내재적인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실재는 자신의 모든 부분을
자신에게로 깨워 일으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우리 인간적 구조 속에 들어 있던 모든 부분들은
이 과정 속에서 껍질을 벗고 드러나게 된다.
직면하기 시작하라. 꿰뚫어 보라.
기꺼이 여러분 자신을 직시하려는 순수한 태도와
순수한 진실성 안에서,
진실은 스스로를 자신에게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진리를 경험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진리 그 자체를 원하여야 한다.
사물의 본성을 보는 ‘깨어남의 순간을 경험했지만 인간적 차원의 여러 영역에서는 여전히 온갖 갈등과 미망 속을 헤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부끄러워할 것은 아니다.
자기 안에서 분리를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똑바로 직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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