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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력과 사연을 알면 재미있는 그림 2
8. 인상파 : 모네, 르누아르, 마네, 드가, 시슬레
9. 후기 인상주의 : 고흐, 세잔, 고갱
8. 인상파 모네, 르누아르, 마네, 드가, 시슬레
클로드 모네 (1840~1926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 프랑스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 (1832~1883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르 드가 (1834~1917 프랑스의 화가).
시슬레등 당시에는 천대받고 무시 받은 화가들로서 객관적인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순간 포착된 움직임의 주관적 느낌을 색을 혼합하지 않고 그렸다.
- 인상파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튜브 물감
인상파는 흔히 빛의 화파(畵派)로 불린다. 이전에 그려진 서양화들과 달리 태양빛이 살아있는 그대로 담겨서 밝고 화사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기법 상으로도 명도가 높은 색상과 원색을 많이 쓰고, 검정색보다는 보색으로 어둠을 처리한다. 인상파 화가들이 밝고 화사한 색을 쓰게 된 원인은 이전의 화가들과 달리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야외에 나가면서 화폭 앞에 쏟아지는 빛의 잔치를 벌이게 된 것이다. 이전 화가들은 드로잉 도구를 이용해 야외 스케치를 하기도 했었지만, 풍경화도 실내의 아틀리에에서 그렸다. 따라서 작품의 채색 등 완성에 따르는 대부분의 과정은 실내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화가들(후에 인상파로 불려진 부류)이 이전과 달리 야외에 나가게 된 동기는 사회적, 문화적 이유도 있지만, 미디어 측면에서 보면 튜브 물감의 발명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튜브 물감은 1841년 영국에 살던 미국인 화가 존 란드가 발명해 1850년대부터 상용화 되었다.
튜브 물감의 발명 이전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땐 돼지 방광에 물감을 넣어 사용했는데, 돼지 방광은 부피도가 크고 번거로운 데다 물감을 짜려고 송곳으로 찌르면 터지는 경우가 있어 매우 불편했다. 이런 제약에서 해방되어 간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것이 튜브물감이다.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모네도, 세잔도, 피사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 르누아르의 언급에서 튜브 물감이 인상파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이 처럼 인상파의 탄생은 미술 형식의 개념적 변화 이전에 물질적 변화의 산물이다.
- 인상파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사진기
인상파에 끼친 미디어의 영향에서 사진기의 발명도 빼 놓을 수 없는데, 1839년 파리에서 최초의 카메라인 ‘다게레오타이프’가 시판되었다. 당시 어두운 실내에서 야외로 나와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은 외광의 강렬함을 체험했지만, 이를 실제적인 근거로 확인해 준 사진을 보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사진기가 이미지를 포착하는 과정이 빛을 포착하는 과학적인 사실을 알게 되면서 화가들은 사물보다도 빛을 표현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형태적인 면이 해체되고 빛의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붓질이 거칠어지면서 사물을 관찰한 당시의 느낌, 인상, 감각을 표현하였다.
모네가 ‘루앙 대성당’ 연작을 제작했을 때 비평가인 그의 친구 클레망소는 감격에 차서 “모네는 이 성당을 50점, 100점, 1000점이라도 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려야 한다.”고 했다. 같은 성당이지만 오전과 오후, 사시사철의 빛이 달라서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처럼 모네의 진정한 소재는 성당이 아니라 빛이었다. 그런데 루앙 대성당의 연작에서 보여주는 천변만화하는 빛의 형태는 사진을 경험하며 얻은 결과물이었다.
드가 역시 스냅 사진에서 얻은 아이디어로서 작품을 만들었다. 드가의 작품 ‘르피크 자작과 딸들’을 보면, 주인공인 자작이 화면 중심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고, 왼쪽의 키 다리 신사는 화면 가장자리에 몸이 세로로 잘려 있으며, 자작의 두 딸은 화면 하단에 허리가 끊겨 있다. 이는 고전 회화에는 전혀 볼 수 없는 불안정한 구도로서 움직이는 순간을 순간 포착하여 촬영된 스냅 사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드가는 자신이 사진 촬영을 즐기면서 사진의 스냅성을 그림에 이용 하였다.
르피크 자작과 딸들 - 드가 1875년 작
- 인상파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기차 여행
1825년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세계 최초의 철도가 놓이면서 열차여행 시대를 연 이래, 1870년 프랑스의 철도망은 19,200km에 달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 기차를 타고 먼 교외까지 나갔으며, 화가들도 쉽게 밖으로 다닐 수 있게 되면서 좋은 풍경을 찾아 자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기차를 타고 야외로 나온 화가들에게 비친 자연은 이제 신의 손길이 스민 정연한 질서나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 농부의 애환보다도, 그저 소풍의 즐거움에 물든 휴양지와 행락객에게 눈길이 닿게 되었다. 따라서 기차의 운행과 더불어 화가들의 화폭에 담긴 것은 야외 행락객과 휴양지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뱃놀이’에는 당시에 여전히 실재하던 농촌의 고통과 어려움은 보이지 않고, 풍경을 행락의 대상으로만 보는 도시인의 시선이 뚜렷이 담겨 있다. 풍경에 비친 자연의 신비와 농촌의 삶이 서린 의미가 변해 버린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한 매클루언의 말처럼 튜브물감과 기차의 운행으로 미술에서도 발명에 의한 물질이 인간의 정서를 바꾸고 표현하는 방법도 바꾼 것이다. 이걸 보면 현대의 미디어인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이 낳을 정서와 메시지가 염려스럽다.
- 인상파의 출현에 관련된 에피소드
1800년대에 프랑스는 미술가들의 천국이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까지만 해도 ‘미술’하면 이탈리아를 꼽았지만,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미술과 관련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가봐야 하는 나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여든 화가들은 종래의 화가들이 일률적이고 고정된 시각으로만 사물이나 자연을 보고 표현한데서,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쳐지고 나타내어졌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도 대기의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와 같이 빛의 문제로 인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자기들의 직관(直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인상주의가 미술적 사상에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이며, 사실주의 미술의 최종단계이자 극치로서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 되었다.
1800년대 중반 프랑스에는 기존 화법과 다른 그림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뒤에 인상파로 규정되는 미술 사조를 이루는데 까지 발전하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샬롱’이라는 미술전시회가 있었는데 프랑스의 정식 미술학교든, 혼자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나 조각가든 이 살롱에 작품을 제출하여 심사위원들의 평가에서 선정되어야 전시회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신문에 난 기사를 통해 살롱 소식을 접했고, 이 정보를 통해서 지식인뿐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관심을 갖고 전시회를 관람했다. 따라서 미술가들은 살롱에 입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당시 살롱의 심사위원들은 전통적인 화법을 준수한 그림을 좋아했다. 데생을 열심히 공부해 모양을 완벽하게 그리고, 색채를 칠하는데도 규칙을 세웠고, 붓질도 꼼꼼하게 하고, 그림 표면엔 붓 자국이 거의 나지 않게 반들거리는 걸 좋아했다.
거기에다 그림의 주제도 종교화나 영웅들의 활약상을 위주로 하는 역사화를 선호했고, 인체를 그릴 때도 그리스 로마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처럼 완벽한 비율에 가깝도록 그려야만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림엔 교훈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연 그대로의 풍경화를 우습게 여겼다. 이에 새로운 것을 꿈꾸는 젊은 화가들과 살롱 심사에서 작품성이 떨어진다며 탈락한 화가들이 반발하자, 살롱 관계자들은 그림을 “못 그리니까 그런 거야”하고 일축했다. 이에 젊은 화가들이 자유롭고, 개성 있고, 창의력 있는 그림도 인정해 달라는 원성이 높아지자, 당시 나폴레옹 3세가 살롱 심사에 떨어진 그림들을 별도로 전시하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살롱 심사에서 떨어진 그림을 전시한 것이 이름 하여 ‘낙선전’ 이었다.
신문을 통해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그들의 그림이 왜 떨어졌는지 궁금해서 보러 갔지만, ‘낙선전’의 그림을 보면서 하나 같이 “저러니 떨어졌지, 저게 그림이야?”하며 조롱했다. 이런 전통의 도전에 대한 천시와 조롱 가운데 어떤 신문 기자가 조롱거리로 쓴 기사에서 '거기엔 그림은 없고 인상만 있었다'는 비평이 인상파로 불려 지면서 나타난 것이 인상파였다.
인상파, 인상주의 미술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색채의 미묘한 차이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서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쳐졌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양상을 달리하고 그 속에 포함된 대기와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와 같이 관찰된 빛의 다른 느낌으로 출발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표현 기법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 화가 개인의 직관(直觀)을 중시하여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을 벗어버리고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상주의가 미술적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아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 미술의 최종단계이자 극치이며,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미술사조 인상파 성립의 역사적 과정
인상파의 탄생은 기존 화법에서 선구적인 인상파적 기법을 보였던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고야, 프랑스의 들라크르와에게 영향을 받아 종래의 아카데믹한 작풍에 불만을 느낀 몇몇의 개성적인 청년작가들이 모여 그룹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1857년 프랑스 파리에 피사로, 세잔, 기요맹의 ‘아카데미 스위스’와, 바질,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의 ‘글레르의 아틀리에’의 카페 모임이 생겨 자유로운 분위기의 작품 활동에 대한 교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860년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와 ‘아카데미 스위스’에 함께 출입하던 모네의 주선으로 한 7명의 화가들이 매주 목요일에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새로운 회화에 관해 토론하는 정기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그들 외에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인 문학가 졸라와 그 밖에 시인, 평론가들도 모였는데 여기서 새로운 회화에 관해 열성적인 토론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그들 외에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인 문학가 졸라와 그 밖에 시인, 평론가들도 모였다.
이 모임은 1863년 낙선화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 으로 혹평을 사고, 1865년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 로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화가 ‘마네’가 리더 격이 되어 밝고 대담한 새로운 그림을 지속적으로 출품하였다.
그러다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모네, 피사로, 시슬레’등의 ‘게르부아’ 카페 구성원들이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가서 뜻하지 않게 ‘터너와 컨스터블’ 등 영국 근대 풍경화파의 ‘외광표현(外光表現)법’을 접하면서 이들이 추구하던 작풍에 더 큰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전후(戰後)에 각각 파리로 돌아와, 1874년 봄 나달의 사진관에서 이 첫 전시회인 ‘화가, 조각가, 판화가의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열었다.
1873년작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 이 그림은 어떤 대상을 봤을 때의 한 순간이 마음 속에 느껴진 것을 표현한 것으로, 순간적인 느낌만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배가 떠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배가 아니라 대충 두터운 선 몇개만 화면에 그려 놓은듯하다.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 일출(日出)’이라는 풍경화의 제명(題名)을 따서 르루아라는 미술기자가 ‘그림은 없고 인상만 있는 인상파들의 전람회’라고 하는 조롱 섞인 기사를 샤리바리라는 신문에 실은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이 후에도 그 때까지 갖고 있는 전통 그림에 대한 관념의 편견과 싸우면서 1886년까지 8회에 걸쳐 전시회를 열렸는데, 1877년의 제3회전부터는 자신들도 ‘인상파’라는 명칭을 사용할 만큼 이 명칭은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이 인상파 그룹과 8회에 걸친 전람회의 경과는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리더 격인 마네는 처음부터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룹의 유력한 작가들의 전람회 참가 횟수도 8회 동안 빠지지 않고 출품한 사람은 피사로 한 사람뿐이며 그 밖의 드가와 모리조는 7회, 기요맹이 6회, 모네와 고갱이 5회, 시슬레와 르누아르가 4회, 세잔은 2회에 불과했다.
쇠라, 시냐크, 르동 등은 마지막 전람회에만 출품했다. 이걸 보면 소수 화가들의 12년에 걸친 인상파운동이 통일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0년대 들어서면서 세평(世評)이 호전된 시점에서는 이렇게 이전부터 다소 난맥상을 보여 왔던 그들의 공통적 사고와 그룹의 결속이 무너져 제8회전의 성공 후엔 각자 자기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인상파 화가들은 재능과 기질 면이 서로 다르듯이 화풍에 있어서도 한결 같지는 않았다.
모네, 피사로, 시슬레 등이 인상파의 작풍을 가장 잘 나타낸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시기에 따라 화풍이 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유형적인 아카데미즘에 반항하고 어떤 관례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는 데는 공통적이다.
그들은 앞선 화가들인 부댕이나 용킨트 등의 작품에서 빛의 효과를 교묘하게 나타내는 특색 있는 기법상의 방법도 얻었고, 선명한 색채감이나 유동적인 구도를 보여 주는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 에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었다.
- 인상파 그림의 제작 기법
화풍을 이루는 인상파의 제작기법은 이른바 ‘외광파(外光派)’로서 언제나 옥외(屋外)에서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자연계의 모든 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 고유의 색(고유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 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色)에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 부분에도 명도(明度)가 낮은 색채, 파랑이나 보라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색조(色調)의 분할이라든가 색채의 병치(竝置)라고 하는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고안하였다.
빛의 광휘(光輝)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수색(純粹色)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視神經)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수색(특히 補色관계에 있는 색끼리)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 인상파 그림의 감상법
빛의 광휘를 강조하기 위하여 순수 색과 반대되는 다른 순수 색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작고 짧게 칠하여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한 인상파의 작품은,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 위에서 융합되고(시각혼합작용),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의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현대 그림에서도 이런 인상파 유형의 두꺼운 필치의 그림은, 가까이서 보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볼 때 색감과 느낌이 제대로 와 닿는다.
이걸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라 싶다. 제대로 된 인상을 파악하려면 가까이서만 볼게 아니라 멀찍이서도 지켜봐야 제대로 볼 것 같다.
- 르누아르(1841~1919년) 행복한 삶을 그린 화가
“즐겁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다” 르누아르는 인생 중 풍년의 때를 자신의 화면에 가득 채워 넣었다.
르누아르는 19세기 프랑스 출신의 인상파 화가로서 당대의 평범한 생활과 상황을 아름다운 화면으로 연출해 내었으며,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선(線)을 찾아 화면에 담고 싶어 했다.
인위적인 기하(幾何)형의 직선과 곡선의 세계에서 싫증을 느낀 그는, 자연속의 아름다운 선을 찾아 모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아름다운 선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열정의 열매라고 할 만한 아름다운 선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경마장의 말들 가운데 젊고 튼튼해 보이는 말의 허리에서부터 엉덩이로 흐르는 선!, 그는 단숨에 몇 장의 크로키를 해 내면서 더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 날부터 그는 매일 경마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화가가 원하는 모션을 좀처럼 얻기 어려운, 말(言)을 듣지 않는 말(馬) 문제가 가장 컸다. 그는 다시 구했고 그리 어렵지 않게 다시 찾았다. 그것은 자신의 침실에서 본 자기 아내의 자태에서 얻은 새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선이었다.
이처럼 르누아르의 조형 세계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르누아르는 1841년 프랑스 중부 리모즈에서 출생하였다.
4살이 되던 해에 가족이 파리로 이사를 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얻은 작은 거처였지만, 어린 르누아르는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에서 친구들과 놀 수 있었고, 일찍부터 대가들의 작품에 그의 눈은 단련되었다.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의 견습생으로 취직한 르누아르는 소질이 인정되어 도자기에 그림을 넣는 일을 맡게 되었고, 거기에서 색과 소묘에 대한 감각을 익혀 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제 훈련은 그에게 근면함과 신중함, 그리고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1861년 르누아르는 파리국립미술학교의 교사인 클레르의 아틀리에에 입소하면서, 모네, 시슬레, 바질등과 만나 인상파의 세계를 열어 나갔다.
외광파라고도 불리는 인상파의 대표주자인 모네가 순수 시각의 문제들에 몰두한 반면 르누아르는 눈에 비쳐진 사람들과 그 일상에 관심을 가졌다.
르누아르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한 단편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지명이기도 한 ‘물랭 드 라 갈레트’는 당시 파리지앵(Parisien) 들로부터 사랑 받던 파리 몽마르뜨에 있는 야외 무도회장이다.
어느 휴일 오후, 파리의 젊은 연인들이 모여들어 햇빛을 받으며 춤과 한담을 즐기고 있다.
나뭇잎 사이로 빠져나온 햇살이 실제 상황을 중계 하듯이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화면 전체에 흐르는 기운은 대부분의 르누아르 작품이 그렇듯이 ‘즐거움과 행복’이다. “즐겁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르누아르는 인생 중 풍년에 속한 즐거움의 때를 자신의 화면에 가득 채워 넣었다.
그러나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프랑스인에게 또 다른 의미를 가지는 장소다. 이 작품이 완성되기 그리 멀지 않은 1870년 프랑스는 프러시아의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었고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 이어진 1871년 ‘파리코뮌’ 이라는 일종의 재앙은 3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었고, 르누아르 자신도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 하였을 뿐 아니라 ‘파리코뮌’ 때는 첩자로 오인 당해 국민 방위군에게 총살당할 뻔한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물랭 드 라 갈레트’는 바로 당시 파리코뮌의 지도부가 있었던 자리다.
‘파리코뮌’의 진동이 다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없는 어느 날, 르누아르는 120호(131~175cm)나 되는 큰 캔버스를 들고 몽마르트 언덕을 올랐다. 화사한 햇살과 함께하는 선남선녀의 무도회, 평온과 아기자기한 즐거움과 여유로운 일상이 화면에 옮겨졌다.
재앙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어쩌면 이 평화로움은 그 고통의 사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 고통을 덮어버리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왼쪽의 시골 무도회의 여성은 후에 르누아르의 아내가 된 알린느 사리고다.
르누아르는 결혼한 뒤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았는데,
이뉴는 를 바라보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라고 했다
“나는 캔버스에 물감을 칠함으로써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르누아르는 예술가가 아니라 화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쿠르베도 르누아르도 눈에 보이는 평범한 사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인상파 동지 모네도 르누아르도 눈에 비친 외광의 세계를 그리지만, 모네는 자연의 내부 구조를 표현하려 했고, 르누아르는 색채에 대한 시각적, 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표현 대상의 생기를 화면에 옮기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좌)피아노 치는 소녀들, 우)피아노 치는 이본느 >>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73년 작
르누아르의 조형세계는 그리는 즐거움, 일상에 대한 애착과 대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일에 비중을 둔다. 때로 이런 사실이 신변잡기를 그리는 화가라는 악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는 루누아르가 어떤 화가인가를 잘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그를 쉽게 저속하다고 할 수 없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작고 평범한 정원이지만 울타리와 꽃들은 한데 어울려 여전히 아름답다. 멀리 집들과 함께 또 한 가지 어울리는 것이 바로 작업 중인 화가 모네의 모습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 그리고 동료 화가인 모네에 대한 존경을 화면에서 느낄 수 있다.
거의 매일 붓을 들고 살면서 평생 6,000점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 낸 화가가 “나는 열심히 했으므로 그다지 못 그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자신을 소개 했다면 우리는 이 짤막한 한마디 속에서 그의 화가다운 화가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의 그림은 유희적인 시각으로 전개된다. ‘표현성’ 보다는 놀이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이 여인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르누아르의 말을 근거로 그의 미술을 소개한다면, 그의 작업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표현하고 만족 해 하는 유희적 범주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어려서부터 배운 도자기 제작은 색채와 선의 세계의 깊이를 맛볼 수 있게 하였고, 특히 구운 도자기의 표면에서 발산하는 신비한 색채를 경험한 그의 시각은 모델의 피부에 어려 있는 미묘한 빛깔을 화면위에 연출해내게 하였다.
르누아르의 표현 대상은 일상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화면에서 늙은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어린아이, 꽃, 아름다운 여인들.....그는 인생의 결과를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바로 여유 있고 풍요로운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그의 표현 대상의 전부였다. 그의 화면에서는 여인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생기 있는 여인의 피부는 36.5도 보다는 좀 높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르누아르의 표현은 지극히 세속적이면서 그 아름다움이 천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끄는 힘을 지니고 있다.
19세기를 살았던 화가 중에 르누아르 만큼 당대의 생활과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한 화가는 없다.
평범한 일상을 이처럼 아름다운 화면으로 연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르누아르 미술에서 얻을 수 있는 비전이다. 무엇보다도 일상속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르누아르 미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 준다.
인생의 어둡고 고통스러운 부분은 르누아르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78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20년간 류마티스로 모진 고통을 당하던 그 때에도 그는 붓을 잡을 수 없어 손목에 고무줄을 묶고 붓을 끼워서 작업을 해야만 하는 소멸의 현장에서도, 생기에 찬 여인상만 그렸다.
화가다운 화가?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작품이 문학이나 철학, 미학, 종교, 사상 쪽으로 치우쳐 가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예술가가 아니라 화가 르누아르로 인정되기를 원했다.
자기 삶의 일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인생의 한 단면, 그 곳을 자신의 조형 의욕의 주소로 삼고 르누아르는 자기의 조형 세계를 구축해 놓았다. 그리고 피조물의 형상에 담아 놓은 일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인체 표현은 형상만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생기를 느끼게 하는 온도가 있다. 그리고 그 생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화가의 숨소리.....오늘도 그의 화면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9. 후기(後期) 인상파(印象派) 고흐, 세잔, 고갱
후기(後期)인상파(印象派)는 인상파 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색채 원리를 더욱 철저화한 데서 출발하여 진화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후기인상파는 인상파에 속하거나 또는 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차츰 인상파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내부에서 인상주의를 수정하려고 한 사람들의 경향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훗날 영국의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에 의해 아주 막연한 의미에서 명명(命名)된 것일 뿐이다.
아무튼 일반적인 후기인상파로 세잔, 고흐, 고갱 등을 지칭하며, 동시대인인 로트레크, 드가, 르누아르 등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물체의 실재감과 공간구성을 추구한 세잔이건, 강렬한 색과 붓끝으로 내적 생명을 표출한 고흐이건, 또는 원시성과 신비감의 원색(原色)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상징적 색채로 나타내려 한 고갱이건, 이 화가들의 작풍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집단으로서의 공통성은 없으며, 오히려 인상파 이후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다채로운 한 단계로 봐야 할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네덜란드 화가)
고흐의 그림엔 그의 처절한 삶과 고독, 영적인 쉼을 얻지 못해 방황하며 고뇌하는 영혼이 서려있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일지라도 그의 그림을 만나면 강한 영적 광기에 보는 이의 영혼도 따라서 휩쓸리는 충동을 느낀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하였으며, 후기 인상파로서 20세기 초의 포비즘(Fauvisme)에 큰 영향을 끼쳤다. 평생 800여점의 유화와 700여점의 데생을 그려 총 1,5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런 그의 그림은 현재 1,000억 원이 넘는 초고가의 작품이 무수히 많지만, 정작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엔 딱 한 점의 그림만 싼 값에 팔렸을 뿐이다.
작은 시골 마을의 목회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부를 졸업 후 숙부가 경영하는 파리에 있는 화상(畵商)의 점원이 되었으나 상업적 재능이 없어 해고되었다. 어학교사 5년, 서점의 점원, 신학 연구생 등을 전전한 후, 1878년 복음 전도를 위해 탄광지역인 보리나즈에 부임하여 티푸스 환자의 간호에 전력하다가 건강을 해치면서 부득이하게 귀향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시엔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는 사람으로서 잘하는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야말로 내 보일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도사 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온 후엔 회화에 정진할 것을 결의하였고, 1880년 12월 헤이그를 방문하여 화상에서 일하는 동생 테오 돌의 보조를 받으며 제작 활동을 했는데, 당시 고흐는 물감을 살 돈조차 벌지 못해서 생활비와 그림 그리는데 드는 모든 비용은 동생인 테오가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태오 역시 부자는 아니었고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으로 장사가 안되어 간신히 먹고 살 정도였다.
1881~1883년 다섯 자녀의 어머니로 때때로 모델이 되어온 접대부 출신의 여인과 동거하면서 이를 알게된 부모와도 절연케 되었다. 등 뒤에 모발을 길게 드리우고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빼빼 마른 여나상(女裸像)의 작품 ‘비애(1882)’는 이 여인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그러다가 1883년 9월 동생 테오 돌의 권고를 따라 여인과 이별하고,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난한 농민들을 그렸다.
비애(悲哀) 1882년 작
1886년 3월 파리를 방문하여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츰 독자적인 화풍을 전개하면서 이때 동생이 소개하여 친구가 된 고갱, 베르나르 등을 사귀면서, 1888~1890년엔 남프랑스의 자연을 동경하여 프랑스의 아를 지역에 이주하여 고갱과 같이 살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여기서 많은 작품을 그렸으나 과로로 오래된 신경병이 발작하여 고갱과 싸우고 자기 귀를 잘라 버렸다. 그 후 생레미의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중에도 그림을 그리다가 1890년 5월 생레미의 요양원을 떠나 파리 근처의 오베르 쉬르우아즈로 향했다. 이곳에서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 박사의 보호를 받았는데, 가셰 박사는 치료의 일환으로 고흐에게 그림에 몰입할 것을 권했다.
고흐는 아를에 머물 때부터 밀밭을 그려왔고,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는 창밖으로 보이는 밀밭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연작을 그렸는데, 모두 가로로 긴 캔버스에 그려서 밀밭의 광활함과 밀밭의 황금색 빛에 매료되어 강렬한 필치로 그의 영혼의 외침을 그려내었다.
오베르 쉬르와즈에서도 강렬한 필치로 최종기의 작품 ‘의사 가셰의 초상’을 그렸고, 여기선 언제 발작이 도질까 걱정하면서도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인 1890년 7월에 그려졌고,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성난 하늘 아래의 거대한 밀밭을 묘사한 것이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썼다. 하지만 이 편지 구절이 정확히 이 그림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몇몇 학자는 같은 시기에 그려진 ‘나무뿌리’가 마지막 작품이라 주장하지만 이 또한 분명치 않다.
당시 그의 심리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1890년 7월 27일 37세에 그가 그림을 그렸던 들로 나가 자기의 가슴에 리볼버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즉사하지 않고 라부 부부의 여인숙으로 돌아와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가운데서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살아생전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림만 그렸던 고흐의 생이 마감되면서, 희망 없는 형 고흐를 뒷바라지하던 테오도 고흐가 죽은 후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어 6개월 뒤 위트레흐트에서 사망하여, 현재 두 형제는 오베르 쉬르우아즈의 묘지에 나란히 묻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작 : 단순한 구도와 강렬한 색상으로 표면에서 요동치는 빠른 필치로 거칠게 그려진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 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경의 세 갈래의 갈림길로 자살 직전의 절망감을 강하게 상징하는 그림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단순히 까마귀가 나는 넓은 들판의 풍경을 그렸다기보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그림 그릴 화구도 사기 어려워진 세속에 속한 자신의 삶을 정죄하며, 극단적인 절망감으로 죽음 앞에 다다른 고흐의 마음을 추측 할 수 있다. 강렬한 황금 색상은 풍요로운 삶과 영적인 만족에 대한 갈구를, 저 멀리 떼 지어 날아가는 까마귀 떼는, 자기가 가는 길이 어디로 인지도 모르면서 일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보리밭 앞의 세 갈래 길은 자기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얼마 후 고흐는 가세 박사가 치료해 주던 정신병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 그림의 모델인 밀밭 언저리에서 권총 자살을 했다. 이를 두고 추측하면 자신의 심정을 화폭에 옮겨 놓은 게 분명하리라 본다.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 파멸만 있는 듯해서 넌더리가 난다.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신이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어쩌면 내 영혼 안에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불을 쬐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굴뚝에서 나오는 가녀린 연기뿐이거든,
그러니 그냥 가버릴 수밖에...... - 1880년 7월 고흐의 편지 -
별이 빛나는 밤에 1889년 작 : 이 작품에는 하늘의 별들이 꿈틀거리면서 강한 빛과 에너지를 내 뿜는다. 밤하늘은 허공이 아니라 별들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세계다.
거무튀튀하면서도 꿈틀거리는 기운을 가진 사이프러스 나무(시체를 넣는 관의 재료로 쓰임)가 거대한 몸통으로 화면을 수직으로 가르고 있다. 무덤이나 애도(哀悼)를 주로 의미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죽음이 별들에 도달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마을과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예배당의 첨탑은, 나름대로 하늘에 도달하고자 노력하지만 죽음이라는 길에서 별로 승화하는 영원한 승리 앞에, 턱 없이 낮은 거짓된 인간의 종교 행위를 나타낸다. 빛은 낮에 가득하지만 밤은 어두움이라는 장막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밤에 생명의 기운이 더욱 더 충만하다. 낮에 보이지 않던 별빛이 밤에 너무나 밝게 빛나는 것이다. 빛나는 낮의 위선에 가려졌던 별들이, 어둠이 내리자 자기의 본 모습을 하늘에 뚜렷이 가득히 펼친 세계가 바로 밤이다.
고흐는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진실을 그리려 했고 진리를 화폭에 담아보고자 했으며, 너무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기에 상하거나 깨어지기 쉬운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순수함과 진실함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숨김없이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거짓되고 무능한 육체로 인해 자주 좌절과 정죄에 시달렸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은 그가 얼마나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아를에서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함께 살며 그림을 그린 고흐와 고갱은 둘 다 개성과 주관이 너무 달라서 두 천재의 만남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광기로 표출될 만큼 악화 되었다. 이는 견고한 자아(自我)를 가진 상태에선 결코 둘이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사건인 것이다.
별들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꿈을 준다.
그런데 왜 하늘의 빛나는 점들에는 프랑스 지도에 나오는 검은 점들처럼 도달할 수 없을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에 가려면 우리는 죽어야 한다.
- 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편지 -
고흐의 이 말에서 죽는다는 것은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自我)가 죽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강한 사랑을 뿌리로 한 별처럼 위대한 행동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자존심을 꺾고 자기를 비울 때다. 때때로 부모가 자식을 위한 모욕과 희생, 댓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인내를 생각해보면 자아를 버린데서 나온 사랑임을 알게 한다.
오늘도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서 천재 화가의 슬프고 불행했던 삶과, 한 때 전도사 생활을 한 목회자로서의 영적 고뇌를 더듬어 본다.
. 좌 - 책과 양초가 놓인 고갱의 의자 1888년 고흐 작
고갱이 애용하던 팔걸이 의자에 그가 좋아하던 소설책과 불 켜진 양초를 그린 그림으로, 고흐는 이 그림에서 어두운 색조의 양초로 고갱의 빈자리를 표현 했다.
. 우 - 고흐의 의자 1888년 고갱 작
말 없는 의자에서 가난한 고흐의 영혼이 소리치는 외로움이 들리는 것 같다.
탕기영감의 초상 1888년 작 : 이
그림 속 배경엔 여러 개의 우키요에(일본 민속 목판화)가 있는데, 고흐는 우키요에의 매력에 끌려 살아생전 수백 점의 우키요에를 수집했다고 한다. 또한 우키요에는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력을 미쳐서 단순하고 굵은 필법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탕기영감의 초상 모델인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는 몽마르트 클로제 거리의 그림 물감 상점의 주인이었다.
한국인이 소장한 고흐의 수채화 : 이 그림은 고흐가 말년을 보낸 파리 근처의 오베르 쉬르우아즈에서 그가 자살하기 한 달 전 비 온 뒤에 그린 작품으로, 수채화라 그런지 광기로 굳어진 이미지는 느껴지지 않고, 조용한 아침의 일상 풍경을 사실 보다 더 현실감 있는 평온함으로 표현 했다.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 1890년 작 : 이 작품은 고흐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도 언급했던 것으로 고흐가 남긴 수채화(템페라) 5점 중에 하나로 실존하는 고흐의 수채화(템페라) 가운데 유일하게 실재가 확인된 희귀 작품이다.
그 동안 러시아 푸시킨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20세기 후반에 리프러덕션(복제품)이라는 설이 제기된 뒤 진위성 여부가 논란에 휩싸였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흐 사후 22년 뒤인 1912년 재정 러시아 정부의 공인 아래 복제된 것이라는 게 유력한 설로 자리 잡았었다. 즉, 1900년대 중반까지 푸시킨 박물관이 소장하였으나 전쟁 중 분실하여 행방이 묘연해졌고, 푸시킨 박물관은 미리 복제해 놓은 복제품을 진열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국제적으로 많은 유명 문화재들이 도둑들이 훔친 것이거나 전쟁의 승리자가 강탈해 간 것으로, 이 작품도 한 때 소유자가 일본에 실물을 가져가 검증 받으면서 거의 강탈당할 뻔한 위기가 있었다 한다.
아뭏든 이런 사연을 뒤로하고 2007년 7월 한국의 서병수씨가 "진정한 그림은 한국에 있다"라고 밝히며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을 공개 했는데, 고미술품을 좋아하던 서씨의 아버지는 이 그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고 다른 소장품과 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1998년 서씨가 아버지의 사망 후 각종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림 뒤편에 푸쉬킨 박물관의 표식을 발견하고는, 일본으로 가서 감정한 후에 세계적인 명화임을 알게 되었다.
그림 소유자인 서씨의 아버지는 경호원으로 1950년대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8군 위문공연에 마릴린 먼로가 왔을 때 잘해준 보답으로 받았다 한다. 당시 할리우드 스타들은 그림을 모으는 게 취미여서 마릴린 먼로도 그 중 하나였지만, 그림에 대한 가치는 몰랐던 것 같다. 하기야 고흐의 영혼이 부르짖는 소리는 애초부터 인간의 감각으로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서병수씨가 소장한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은 수채화다. 러시아의 푸시킨박물관 소장품이 유화인 점과 대비되는데, 붓 터치와 원근법은 말할 것 없고 그림 속의 소재로 등장하는 집의 크기, 창문의 개수 등이 수채화 쪽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 같지만, 이 때 까지 고흐의 작품 전집 도록에는 이 그림이 유화로 소개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화가이자 고흐 연구가인 미유 유타카는 이 그림을 감정 한 후 "99.99% 고흐가 그린 수채화다. 네덜란드 고흐미술관의 시리얼 넘버에는 유화로 돼 있지만 사실이 분명하면 역사도 바뀌어야 한다"라고 했다.
“고흐의 유작이 한국에 있을 리가 없다.”며 믿지 않으려 했던 세계 미술계도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까지 동원한 러시아연방 내각위원회의의 조사에 ‘진품이 확실하다.’는 결론으로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이 그림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곳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몇 번씩 e메일을 보내오며 제시한 금액은 3억 달러 선으로, 이들은 고흐 작품에 있어 세계 최정상급 감정사인 헤르 트로이스키를 초청하여 서씨의 소장품을 스캔한 필름을 갖고 확인 작업을 벌였으며 진품이라고 결론지었다. 한편 미국의 미카도 펀딩그룹은 1000만 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하며 1억 6000만 달러에 구입의사를 밝혔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 그림은 현재 까지 2012년 2억 5000만 달러(약 2,900억원)에 거래된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고흐의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이 3억 달러에 거래 되면 역사상 최고의 거래 가를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림 소유주의 거래 의사가 없어서 그렇지 가격으로 따질 때 세계 최고의 미술품은 단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로 꼽힌다. 현재 모나리자의 어림잡는 시세는 약 500억 달러라 하는데 이 조차도 프랑스 인들은 못 마땅히 여기고 있다 한다. 하긴 명화는 도판에 물감이 칠해진 재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거기엔 작가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며, 영원 불멸인 영혼을 값으로 매기는 자체가 잘못이다.
친구들아, 이로써 영적인 진리를 더듬는다면 고흐의 진품이 아니라도 한번 쯤 고흐의 그림을 대해 보자, 혹시 그의 영혼이 스쳐가며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어찌 알겠노?
-. 폴 세잔(1839~1906 프랑스)
사물을 보는 느낌은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며, 모든 것은 주위의 영향을 받는다.
폴 세잔은 세상 모든 것에는 색깔이 있으며, 심지어 냄새에도 색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색을 입힌다고 상상해보면 사과 향기는 붉은색, 방귀 냄새엔 노란색을 그릴 수가 있다. 그리고 청순한 아가씨의 머리카락엔 연초록 냄새가 나고, 그 아가씨를 사모하는 청년의 마음도 물들여져 풀빛 향기가 난다.
성질머리 고약한 뚱뚱한 아저씨가 방귀를 뀌자 누런 똥색깔이 버스 안에 쫙 퍼졌다. 이 처럼 세잔은 모든 것에 색이 있고 또한 모든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그 영향력을 색으로 표현하려 했다.
목욕하는 사람 - 폴 세잔 1890년 작(목욕하는 사람은 이 작품 외에도 1870년 이후 유화, 수체화, 드로잉 등 200여 점을 연속해서 그렸는데 이를 보면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의 살색 피부에는 하늘색이 스며들어 있다. 딛고 선 발과 땅과 풀빛은 서로의 색깔이 번져있기도 하고 묻어 있는 듯도 하다. 하늘엔 사람의 살색이 군데군데 물들어 있고, 앞에서 뒤로 멀어질수록 자신이 가진 색을 포기하고 서로 뒤섞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도 이 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세잔은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린 것이 아니라 보이진 않지만 존재하는 관계들을 표현했다.
사물과 사물이 만나면서 서로 간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색깔로 뿜어내고 있는지를 보이면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서로의 어울림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부엌의 정물 or 부엌의 탁자 - 폴 세잔 1890년 작
‘부엌의 정물’을 언뜻 보면 뭔가 뒤죽박죽 엉망이다. 바구니는 정면에서 본 모습인데, 가운데 위치한 항아리의 입구는 위에서 내려다 본 것으로 속이 들여다 보인다. 뭔가 잘못 그려진 듯하다. 왜 모든 부분은 정면에서 그려놓고 중앙에 위치한 항아리의 아가리 부분만 평면(위에서 아래로)으로 그려서 전체적으로 흐트러진 느낌의 그림을 그렸을까? 실수인가, 의도적인 것인가?
세잔은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생각했다.
어디서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의 모습과 앉아서 바라봤을 때의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대상이며, 같은 대상이지만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때로는 위에서 내려다봐야만 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낮은 자세에서 올려다봐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미운 사람 고운데 없고 고운사람 미운데 없다’는 속담처럼, 선입감을 가지면 항상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보게 되어져 상대를 객관적으로나 정확히 볼 수 없다. 고정된 시선으로 상대를 관찰하지 말고, 자기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 세잔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이 피카소의 입체파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스페인)의 ‘우는 여인’은 여러 각도에서 본 우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 한 것이라 하는데, 피카소의 선배인 세잔의 사상으로 ‘우는 여인’을 본다면, 우는 건 맞는데 이 눈물이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여인의 마음속을 짚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처럼 사물의 가장 명확한 본질은 속에 있는 성질과 성품이다.
겉으로 웃어도 속은 웃지 않을 수 있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대부분이 아픔과 슬픈 마음의 표현이지만, 때로는 너무 기뻐서 흘리는 때도 있다. 그래서 세잔은 ‘부엌의 정물’ 이란 그림의 중앙부에 항아리(인간의 됨됨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릇에 비유함으로)를 두고, 그것도 속이 들여다보이게 하지 않았나하는 추측해 본다.
우는 여인 - 피카소 1937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