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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 건국신화~수나라
* 중국의 창조 신화
알에서부터 나온 반고가 혼돈된 세계를 가르고 해와 달과 자연을 창조하였다는 이야기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서정역기에 처음 나왔다.
* 중국의 건국 신화
3황 -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여와씨(女媧氏:여신으로 수인씨燧人氏 or 축융씨祝融氏) 또는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 또는 泰皇)이라고도 한다.
5제 -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
* 하(夏)나라(수도는 미상이며, 우禹씨 왕조) 2070 ~ BC 1600년 ; 472년간 존속
왕조 500년간을 10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하나 위치는 미상이며, 마지막 왕 걸이 마지막에 살았던 곳은 지금의 산서성 하곡부의 하현 부근으로 여겨진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이양하다가 우임금 때에 그의 아들 계(啓)에게 계승하여 마지막 걸왕(사이계)까지 17왕 472년간 하(夏)왕조 존속하였다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최근에서야 몇몇 유물들이 발굴되며 아직 정확히 증명 되진 않았다.
걸왕은 애첩 말희와 장야궁(長夜宮)을 짓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주지육림으로 방탕을 일삼다가 상족의 탕왕에게 멸망하였다.
* 상(商)나라(or 은殷나라 : 수도는 여러 번의 변천이 있다가 마지막엔 은허殷墟였으며, 실제 왕조의 시조는 탕왕(湯王)이나 전설상의 시조는 설(契)로서, 그가 순 임금에게 하사 받은 子씨의 성을 하사 받았다지만 상왕조의 왕들은 이름들만 있다.)
1600 ~ BC 1046년 ; 554년간 존속
은은 상왕조의 수도를 주(周)나라에서 상을 낮추어 호칭한 것으로 원래는 상나라이다.
은허에서 귀갑, 우골, 갑골문자 등을 다량 발굴하여 고고학적으로 실제의 왕조로 판명되었다.
시조인 탕왕에서 마지막 주왕까지 554년간 존속하였으나, 주왕이 달기를 사랑해 하나라의 걸왕처럼 주지육림으로 남녀가 벌거벗고 밤낮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충신들은 포락지형으로 죽였다.
서백의 아들 발(무왕)과 여상 태공망(강태공 ; 육도삼략 저술)에게 토벌되어 호화궁전인 녹대에 불을 질러 타 죽었다.
* 주(周)나라(서주시대의 수도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인 호경(鎬京)이며, 동주시대는 낙양으로. 희(姬)씨 왕조다.) 1046 ~ BC 221년 ; 825년간 존속
무왕이 상나라 멸한 후 건국하여, 825년간을 존속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왕조로서 각 지방의 호족들이 왕으로서 다스리는 춘추전국시대가 있어서 실제로 나라를 통치하기보다 대부분이 상징적인 황제의 권위만 가지고 있었다.
주나라를 시대별로 통치의 주류별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은 서쪽의 호경에 수도를 정한 서주시대(1046~BC 770년 ; 276년간)이며, 그 후 유왕(궁열)이 포나라에서 바친 웃지 않는 미녀인(천금매소) 포사에 빠져 장인에게 토벌되어 그의 아들 평왕이 수도를 동쪽의 낙양으로 옮겨 동주시대(770~BC 221년 ; 550년간)가 되었다. 동주시대는 지방의 제후들이 왕으로서 권력이 강해졌고 수많은 지방 국가들이 난립하여 왕조의 년대기는 상징적인 주황제 아래에 있었지만 이전과 다른 정치형태를 보여서 동주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는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춘추시대(770~BC 403년 ; 376년간)와 전쟁이 지속된 전국시대(403~BC 221년 ; 182년간)로 나누기도 한다.
- 동주(東周)의 춘추(春秋)시대 국가 : 아래의 국가는 역사 문헌에 활약이 있었던 나라들로서 이외에도 지방의 작은 봉건국가가 많이 존재 했었다.
동주(東周) : 낙읍(雒邑 : 하남성 낙양洛陽),
진(秦) : 옹(雍 : 섬서성 봉상현(鳳翔縣)),
초(楚) : 영(郢 : 호북성 강릉시(江陵市)),
월(越) : 회계(會稽 : 절강성 소흥시(紹興市)),
오(吳) : 고소(姑蘇 : 강소성 소주시(蘇州市)),
제(齊) : 임치(臨淄 :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노(魯) : 곡부(曲阜 : 산동성 곡부시),
연(燕) : 계(薊 : 북경(北京)),
진(晉) : 강(絳 : 산서성 후마시(侯馬市)),
진(陳) : 하남성 진현(陳縣)),
채(蔡) : 하남성 상채시(上蔡市)),
위(衛) : 복양(濮陽 : 하남성 복양시)
정(鄭) : 신정(新鄭 : 하남성 신정시)
- 전국칠웅(戰國七雄)
. 제(齊)나라 (수도는 임치臨淄) 1046~BC 221년 ; 826년간 존속
현재의 산둥지방으로 주의 무왕이 강태공에게 봉토로 지급한 나라이지만, 실제는 당시 이 지역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다스리게 한 것이다.
15대의 환공 때에 주나라의 혜왕으로부터 패자로 인정받았다. 25대의 장공이 재상인 최저의 아내와 사통하여 최저가 장공을 죽이고 그의 동생인 경공을 세웠지만 그도 후에 경공에게 죽었다.
경공은 안영을 재상으로 사마양저를 장군으로 등용했다. 여러 힘 있는 대부들이 있었으며 후대에는 진(秦)라에서 유민으로 들어온 전씨가 대부로 있다가 왕의 자리까지 뺏어서 마지막까지 대물림 하였다. 전씨 왕조 6대 민왕의 팽창정책으로 이에 반발한 연나라를 주축으로 한 연합국이 악의를 사령관으로 대항하여 민왕이 죽고 거와 즉묵을 제외한 제나라 전국이 함락되었으나, 양왕이 즉위하여 계속 항전하여 제 나라의 백성들이 추대한 장군 전단이 악의와 연나라를 이간하고 새로운 장수 기겁에게 승리하여 회복하였다. 그러나 양왕의 뒤를 이은 건왕은 진(秦)나라가 주변국을 점령해 가는데도 수수방관하다가 성읍국가에 불과한 위나라와 함께 BC 221년 진의 시황제에게 항복했다.
. 조(趙)나라 (수도는 한단(邯鄲 : 하북성 한단시) 1046~BC 487년 ; 560년간 존속
원래는 진(晉)나라의 유력한 귀족이었으나 BC 400년대 초에 한, 위, 조의 3대부가 갈라져 3분 되면서, 403년 주나라 왕(황제)으로부터 제후(왕)로 공인 받았다. 조의 전성기는 무령왕(326~BC 299년) 때이며, 혜문왕 때에 진(秦)의 침입이 격심해져 도읍을 진양에서 한단으로 옮겼으나, BC 228년 진나라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망명 갔던 왕자 가도 붙잡혀서 멸망했다.
. 진(秦)나라? or 221~BC 206년 ; ?년간 or 15년간 존속 : 아래의 * 진(秦)나라 참조.
. 연(燕)나라 (수도는 계(薊) 1046 ~ BC 222년 ; 824 년간 존속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외에도 오호 십육국 시대의 전연, 후연, 남연, 서연, 북연이 있다.
주나라의 시조 무왕 희발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의 동생 석(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다.
그러나 하남성(河南省) 지역에 동명의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 하였으며, 또한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 郾)으로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은 산동성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데, 그들은 대부분 한씨(韓氏)였다. 그리고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었다가 곧 멸망했으며, 연나라의 사대부 층엔 한씨와 기씨가 많았다.
BC 664년 북방의 산융에게 연나라가 공격 받았을 때, 연나라의 장공(莊公)이 이웃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여 산융을 격퇴했다. 산융과 전쟁 후 연의 장공은 제의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표로써 자국의 군사를 주어 통솔하게 허락 하였다. 당시에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 왕(周王) 만이 가질 수 있었으므로,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제의 환공에게 건의하여 제나라의 영토를 일부를 연나라에 할양해 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제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명성을 크게 얻었다.
전국 시대인 BC 334년 당시 연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이천여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 기병 6천기를 낼 수 있었으며, BC 323년엔 왕으로 자칭했다.
BC 315년 연나라의 왕 쾌는 재상인 자지(子之)를 총애하여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 하였던 예로 삼아 자지에게 선양을 하였고, 이로 인해 태자 평이 거병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제나라가 태자의 원군을 자칭해 침공하였고, BC 313년 태자 평과 자지가 살해되고, 연왕 쾌는 자살하였다.
BC 312년에 한나라로 달아났던 연왕 쾌의 서자인 공자 직이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연왕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연 소왕(昭王)이다. 소왕 때에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여 랴오닝성 만번한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BC 285년에는 연나라의 총사령관인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해 수도와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켰다.
BC 222년 연왕 희의 아들 태자 단은 위나라 장수 형가(荊軻)와 진개(秦開)의 손자 진무양을 진(秦)나라에 보내 진 시황제(秦始皇帝)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연왕 희는 요서,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자, 시황제의 암살 주모자인 그의 아들 태자 단을 죽여 그 목을 진시황제에게 바치며 선처를 구했지만 진시황제는 듣지 않고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가 중국 통일 후 내분으로 잠시 후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건국 되어 한나라도 주나라와 같은 방식으로 공신 혹은 황족을 지방의 제후로 삼았는데, 한고조 유방은 같이 자란 고향 친구 노관을 장안후(長安侯)로 했다가 다시 연왕(燕王)에 봉했다.
그러나 노관은 한나라를 배반하고 동호족에 투항하여, 동호(東胡)의 노왕으로 살다가 죽었다.
이 무렵 연나라 장수 위만도 1,000여명을 이끌고 요동, 랴오닝성으로 도망치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위만 조선이 멸망 할 때 우거왕의 아들 장이 한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어 연나라 지역을 다스렸다.
. 위(魏)나라 (수도는 안읍(安邑)→대량(大梁 : 하남성 개봉(開封) 403~ BC 225년 ; 178년간 존속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 일컬어지고. 영토는 사방 일천리에 달했으며, 한 때는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다. 갑병 20만과 노예병 20만, 말 오천 필을 낼 수 있었다.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이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로서 변법(變法 법체제를 바꾸는 개혁) 운동의 선구자였다.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덕의 이념이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 등장하였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 이 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에 의해 서문표(西門豹)의 관개사업 추진 등으로 다른 6국을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BC 225년 결국 진(秦)나라가 수공으로 공격하여 수도인 대량성이 침수당하여 위나라는 멸망했다.
초(楚)나라 (수도는 영(郢) →진(陳)→거양(巨陽)→수춘(壽春) ? ∼ BC 223년 ; ? or 19년간 존속
후베이성[湖北省]을 중심으로 활약한 나라로, 시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자손 계련(季連). 웅역(熊繹) 때에 주나라의 성왕(成王)으로부터 초의 제후로 봉해져, 단양(丹陽)에 정착한 뒤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초나라 백성은 중원제국(中原諸國)의 백성과는 종족을 달리하는 남방의 만이(蠻夷:荊蠻)로 불려 멸시를 받았다. BC 704년 웅통(熊通)은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하였는데, 아들 문왕(文王)이 영(郢)으로 천도한 뒤, 더욱 국세가 신장하였다.
특히 장왕(莊王)은 BC 597년 진(晉)나라 군대를 필(邲:河南省 鄭縣)에서 격파하여 결국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이로부터 초는 진나라와 남북으로 대립하여 약 1세기에 걸쳐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그 사이에 양쯔강 하류에서 오(吳) ·월(越)이 일어나자 한때 초나라의 소왕(昭王)은 오나라에 밀려 도읍을 약(鄀)으로 옮겼다.
그 후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하고, 또 월나라가 쇠퇴해지자 초는 다시 세력을 회복, 양쯔강 중 ·하류를 모두 차지하는 강국으로서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위왕(威王)은 BC 334년 월나라를 멸하고 저장성[浙江省] 서쪽의 땅을 차지하였는데, 다시 제(齊)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세력을 중원으로 뻗치는 동시에, 영토를 사방으로 확대하였다.
이 무렵에 초는 7웅 가운데서 영토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가장 많았다. 그러나 점차 진(秦)의 압박을 받아 BC 278년 수도 영이 함락되자 진(陳)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BC 241년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으나 BC 223년 결국 진에게 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유래한 부복납간(剖腹納肝)은 “배를 가르고 간을 넣어 관을 삼는다.”는 말로서 죽어서 까지 동행하는 충성심을 뜻하며 지극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고사성어다.
. 한(韓)나라 (수도는 신정(新鄭) 403~BC 230년 ; 173년간 존속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에서 분리된 나라로 위, 조와 더불어 삼진이라 일컬어진다.
영토는 허난성과 후베이성 지역으로 BC 239년 진나라의 장군 몽오에게 13개의 성이 함락되고 BC 230년 다시 진나라의 대공세로 한왕 안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했다.
한비자를 저술한 한비는 한의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법가 이론의 집대성자이며 공자의 문인인 자궁의 문도였던 순자의 문인이며 순자의 성악설에 심취하여 순자로부터 사서육경을 배웠다.
한의 군주인 안에게 法, 術, 勢를 핵심으로 하는 그의 이론을 끝없이 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왕 정이 활용하였다,
* 진(秦)나라 (수도는 함양(咸陽), 영嬴씨 왕조) ? 년 or 221~BC 206년 ; ? 년간 or 15년간 존속
BC 16~11세기에 감숙성 동부의 천수 감곡에서 일어나, 서주초기에 서견구(西犬口) 일대에서 성을 쌓고 주 왕조에 속하여 주나라 변방 수비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서주말기인 BC 8세기에 지금의 감숙성 천수현 일대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삼았다. 이후로 견수 근방의 미아원으로 이주했다가, 견수와 위수가 합류되는 곳에 있다가, 평양으로 옮겼다. BC 677년엔 진목공의 아버지 덕공이 옹을 도읍으로 삼아 294년간 지내다, BC 350년 상앙의 건의로 효공이 함양(咸陽)으로 천도하여 BC 206년 항우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144년간 있었다.
함양은 관중지방의 중심지로 비옥한 토지에 풍부한 산물과 함께 삼면이 높은 산악으로, 북쪽으로는 400km에 달하는 황토구원이 있는 천혜의 요새다. 함양의 궁궐은 사방 200리에 달하는 회랑을 모두 연결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웅장한 도성이었다.
진나라의 선조 조보와 비자는 산시성 지역의 진(秦)땅에서 주왕을 위해 말을 기른 공을 인정받아, 주나라의 8대 왕인 효왕의 재위기간에 이곳의 진정에 봉해졌다 하지만 진은 말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돈을 받는 속국이었다. 이후 주선왕은 진장공을 서수(西垂)의 대부로 봉했다.
BC 700년대 서융의 방위를 맡으며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을 도왔고, BC 771년 주나라가 낙읍으로 천도할 때, 평왕을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 서부지역의 제후로 승격되었다.
전국시대인 BC 4세기 중반 진효공은 상앙이 제시한 법가 사상에 따른 변법의 시행으로 행정개혁, 토지 지주제 폐지에 의한 중앙정부의 지방을 직접 통치방식으로의 전환 등으로 많은 개혁을 하여 군사적으로도 전술이나 무기, 운송체계 등이 발전하였다.
BC 247년 즉위한 영정은 이사(李斯)를 승상에 임명하고 국력을 증강시켰다.
BC 223년 최대의 적인 초나라를 멸망시켜, BC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여 스스로 전설상의 성왕인 삼황오제로부터 따온 이름인 황제(첫 황제이므로 시황제라 함)를 자칭했다.
시황제는 도량형과 문자의 통일, 군현제의 실시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 흉노 등의 북방족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각 나라가 독자적으로 만들던 장성을 정비해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만리장성은 강제노동으로 진행하여, 가혹한 노동과 극도의 법치주의로 불만이 높아져 반란의 싹을 길렀다. 흉노의 침략에 대항하여 북쪽을 공격하여 백성에게 입혀지는 피해를 최소화시켰고, 남쪽에도 원정대를 보내 현재의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는데, 이것은 중국 왕조가 행한 남방 지배의 시작이 되었다.
진시황은 6국을 정복하여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후, 36군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주변정복에 따라 군을 추가하여 46개군(郡)의 행정구역을 이뤘다.(42군 설과 48군 설도 있음) 또한 복속된 예전 나라에 대한 흔적을 지우려고 분서갱유도 일으켰다.
BC 210년 시황제가 사망하자, 환관 조고가 태자 부소, 승상 이사, 시황제의 혈족자 등, 권력자를 차례로 암살해, 어린 2세 황제를 세워 폭정을 하였다. 이로써 혼란해진 진나라는 진승, 오광의 반란이 발발하여 전국으로 퍼지면서 소란 상태가 되었다.
이에 2세 황제와 조고는 장한을 장군으로 토벌군을 보내자, 장한은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진승과 초나라의 항량군을 격파했으나, 항량의 조카 항우와의 결전에 져서 포로가 되어, 함양으로 향하는 도중 반역의 기색을 보인다하여 항우는 진나라 병사 20만을 죽여 버렸다.
장한이 패하자 조고는 2세 황제에게 폭정의 오명을 씌워 암살하고, 자영을 세워 안정을 도모했지만 오히려 자영에게 주살 당했다. 그 후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면서 자영이 항복하여 진은 멸망했다.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함양에 온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함양의 미녀와 재보를 약탈하고 불을 질러 함양은 폐허가 되었다.
전한(前漢) (수도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장안(長安), 유劉씨 왕조)
BC 206년~ AD 8년 ; 214년간 존속
고조 유방이 항우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 진(秦)에 이어 중국을 두번째로 통일한 왕조다. 수도인 장안이 뒤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한다.
유방은 원래 정장(亭長)으로 의병을 일으켜 패공(沛公)의 자리에 올라, 초(楚)의 의제(義帝)를 섬기다가 세력이 커지면소 또 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처음에는 거듭 패배하였으나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를 위시해 많은 인재를 기용하여 역전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고 수도를 장안으로 삼고, 한(漢)을 건국했다.
* 신(新) AD 9 ~ 25년 ; 16년간 존속
전한 원제(元帝)의 황후 왕정군(王政君, 또는 효원황후)의 조카 왕망은 계속되는 어린 황제들의 즉위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왕망은 BC 8년 대사마가 되어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한 후 안한공이 되었으나, 평왕을 죽인 다음 2세의 어린 영을 세워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다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주례(周禮) 등 유교 경전을 근거로 하는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고전에 입각한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井田法)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으로 토지를 국유화하고, 노비매매를 금지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물가의 균형책과 전매제도(專賣制度)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했다.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 ; 새롭게 만듦)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개혁은 실정에 맞지 않아 큰 혼란에 빠지면서, 흉노를 비롯한 대외 정책도 실패하여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또한 재위 기간에 3차례의 황하 범람 등 잦은 재해와 호족세력의 반발로 각지에서 봉기하여, 적미(赤眉), 녹림(綠林) 등의 농민 반란이 발생하고, 지방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왕조 개창 15년 만에 적미군(赤眉軍)의 침공으로 왕망이 죽고 신(新)왕조는 멸망했다.
* 후한(or 동한東漢) (수도는 지금의 하남성 낙양洛陽, 유劉씨 왕조)
AD 25 ~ 220년 ; 195년간 존속
후한의 초대 황제 광무제 유수는 전한 초대 황제의 9세손이며 형주 남양군 채양현 출신으로, 왕망의 찬탈 후 신(新) 말기의 혼란을 통일하고 왕조를 재흥하였다.
유수는 어렸을 때부터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執金吾 수도경비 무관의 직책),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陰麗華 남양의 소문난 미인으로 황제가 된 후 본처를 쫒아내고 아내로 삼았다.)”라는 정도의 소망을 말하던 왕가종실의 사람으로는 지극히 평범했다.
왕망이 찬탈 후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정책으로 민심을 잃자,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 산동의 낭야군에서 여모라는 노파가 현령에게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사재를 털어 수천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여모는 현령을 죽인 뒤 죽었지만, 일단 모여든 세력은 가혹한 법과 무거운 조세를 이유로 해산치 않고 동향 사람인 번종의 거병에 합류해 더 큰 세력을 이뤘다.
이들 군은 피아(被我)의 식별을 위해 눈썹을 붉게 칠하여 적미군(赤眉軍)이라 불렸다.
왕망의 군사인 태사군과 경시군은 무리한 식량 징발로 민심을 잃어 ‘차라리 적미군을 만날 망정 태사군과는 만나지 말고, 태사를 만나지 않더라도 경시군이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야유했다.
같은 시기에 왕광이 빈민을 모아 녹림산을 거점으로 반역을 일으켜 녹림군을 형성했다. 또한 유수의 형 유인이 거병을 했는데, 처음엔 병사가 잘 모이지 않았지만 평판이 좋던 동생 유수가 합류하자 유수를 믿고 참가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 반란군은 용릉군이라 칭했는데, 유수는 타고 다닐 말도 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여 소를 타니다가, 녹림군에 합류한 뒤에야 말을 탔다. 녹림군은 군내에 역병이 만연하자 남양을 거점으로 하는 신시군과, 남군을 거점으로 하는 하강군으로 나뉘었다.
신시군은 남양의 호족이며 유수의 본가 혈통인 유현이 가세한 평림군과, 유인의 용릉군과도 연합하고, 다시 하강군도 흡수하여 유인은 육양에서 관군을 격파했다.
연합군이 남양의 완성을 포위한 뒤,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자 신시군과 평림군의 부장들이 협의하여 유인을 옹립하려 했으나, 유능한 인물을 옹립하면 각자의 세력이 약화될 걸 염려하여 평범한 인물로 여겨지던 유현을 경시제(更始帝)로 옹립했다. 이에 왕망이 경시제의 토벌을 위해 낙양에서 백만(전투병 42만, 기타병56만) 대군을 출진시켰으나, 왕망은 군사 경험이 없어 63파나 되는 병법가(兵法家)를 동행하고 맹수를 거느리는 등의 어긋난 편재로 유수의 거점인 곤양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유수는 밤에 13기 만을 이끌고 곤양성을 탈출하여 가까운 현에서 3천의 원군을 모아 곤양을 포위한 군사와 맞섰다.
왕망군은 총대장 왕심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요격했지만 유수군의 분투로 곤양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 승리를 할 때에 유수의 형 유인도 완성을 함락시키자, 유인과 유수 형제는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경시제는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유인의 부하가 자기가 내리는 벼슬을 사양하자 반역으로 몰아 죽이려 했고, 유인이 이에 부하를 옹호하고 나서자 유인을 죽였다. 이 때 유수는 완성에 도착하여 경시제에게 형의 결례를 사과하고, 형을 위해 상복도 입지 않고 조문하러 온 사람에게도 사건에 대해 일절 언급지 않는 등, 자신을 지키는데 애썼다.
곤양과 완성에서의 전승이 알려지자 관망하던 호족이 경시제의 군에 합류해, 단기간에 세력이 성장한 경시제는 낙양과 장안(長安)을 함락하고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낙양이 도성으로 정해질 때까지 유수는 경시제와 측근들로부터 위험인물로 여겨 중앙정계에 나서지 못했으나, 당시 허베이(河北)로 파견할 마땅한 무장도 없었을 뿐더러 대사도(大司徒) 유사가 ‘여러 집안의 자제로서 문숙(유수)이 쓸 만하다.’고 추천하여 유수는 허베이에 부임하여 감시가 풀렸다. 이후 경시제의 정치가 문란하여 민심을 잃자 유수에게 자립의 기회가 주어졌다.
경시 원년 겨울 허베이로 향하던 유수가 한단을 떠나 북상할 무렵, 한단에서 왕랑이라는 자가 성제(成帝)의 숨겨진 자손이라 칭하는 유림이나 이육 등과 함께 거병하여, 유수의 목에 10만 호의 상금을 걸고 수배에 나서자, 유수는 등우, 왕패, 풍이 등의 부하를 거느리고 허베이를 떠돌게 되었다. 그것은 고난의 행군으로 추위까지 겹쳐 풍이가 가까스로 땔감을 모으고 등우가 불을 지펴 콩죽과 보리밥으로 겨우 견뎠다. 이 사실을 안 신도태수 임광과 휘하의 이충과 만수, 화성군의 태수 비동 등이 유수를 비호하고, 지방 호족인 유식, 경순도 가담했다. 이로써 임광, 이충, 만수, 비동, 유식, 경순은 후대에 운대 28장(雲臺二十八將)으로 불렸다.
유수는 왕랑의 10만 병사를 거느린 진정왕 유양에게 공작을 펼쳐, 유양의 여동생이 호족 곽창에게 낳은 딸인 유양의 조카 곽성통(황후 곽씨)에게 장가들어 유양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왕랑과 대치하는 와중에 오환의 정예 돌격기병을 거느린 어양군과 상곡군이 유수 측에 대해, 후세의 운대 28장의 한 사람으로 불릴 오한, 갑연, 왕량, 경단, 구순, 경감 등을 보내어 합류했다. 이렇게 세를 더한 유수군은 왕랑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한단을 함락하자, 왕랑은 도주하다 잡혀 죽었다.
유수의 세력을 두려워한 경시제는 유수를 숙왕으로 봉하여 군사를 해산시키고 장안으로 불렀지만, 유수는 허베이의 평정이 완료되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고 자립한 뒤, 동마군이라는 지방 세력을 끌어들여 수십만이 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허베이의 실력자가 된 유수는 유주에서 개선하던 중에 부하로부터 황제로 즉위하라는 상주를 두 번이나 사양하다 세 번째 요청에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적복부라는 참문(讖文)을 부기한 네 번째 요청에 수락하여 연호를 건무(AD 24년)라 했다. 이 해에 경시제는 서쪽으로 침입한 적미군에 살해되고, 적미군은 장안과 주변을 약탈하다 산둥으로 귀환을 꾀했는데, 건무 3년 광무제가 파견한 대사조 등우와 정서대장군 풍이가 공격했다. 처음엔 패배했던 풍이가 군사를 정비해 격파하고, 서쪽으로의 퇴로를 끊고 동쪽 의양에서 기다리던 광무제의 군은 군량이 다한 적미군을 전투 없이 항복시켰다.
광무제 유수는 계속해서 산둥을 평정하고, 농서를 공략하자 현지의 지배자 외효가 병으로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외순이 항복했다. 이후 촉 땅의 공손술을 멸하여 통일을 이뤘다.(AD 36년)
광무제는 낙양을 도읍으로 정했지만, 낙양의 낙(洛)에 들어간 수(水)자 변을 싫어해 낙양의 이름을 낙양(雒陽)으로 바꾸었다.
전한의 전성기에는 약 6천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전한 말 이래의 혼란으로 광무제 때는 2천만 명으로 감소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노비 해방 및 대사면령을 여러 차례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쓰고, 징병제를 폐지하여 평소엔 농업에 종사하다 유사시 군사로 동원하는 둔전병을 운용해 기근이나 변경으로 보내는 식량 문제를 완화했다.
백성의 신분에 대한 정책으로 노비 해방령 외에도 ‘하늘과 땅의 존재 중에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之存、人爲貴.’는 구호로 조서를 내려,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을 선언했다. 또한 매인법(売人法)과 약인법(略人法)을 공포하여 인신매매도 규제했다.
조세도 군사 재정을 이유로 수확량의 1/10을 거두던 것을, 전한의 제도와 같은 1/30로 완화했는데, 이런 감세가 가능한 것은 둔전으로 군량미를 자가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징병된 병사들을 귀농시킨 뒤, 경지 면적과 호적조사를 하여 통치의 기초를 다지고 재정을 확립했으나, 이때의 경지 및 호적 조사에는 수도가 있던 하남군이나 황제의 고향인 남양군에서 부정신고가 행해졌는데, 이는 해당 군의 호족이 가졌던 권세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한 조사에 불만을 품은 호족이 농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왕망이 화폐제도를 혼란시켜 후한 초까지 조악한 화폐가 유통되었으나, 전한 무제 때의 오수전을 다시 주조하여 화폐제도도 정비했다. 이러한 제도 정비를 통해 후한은 제국의 실체를 갖추었다.
후한은 전한의 통치기구를 답습해 군국제(郡國制)를 채용하면서도 제후왕(諸侯王) · 열후(列侯)의 봉읍은 전한에 비해 줄이고, 제후왕의 봉읍은 1개 군을 넘지 못했고, 공신을 후(侯)로 봉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것도 몇 개 현(縣)뿐이었다. 왕망이 없앴던 전한의 제후왕은 광무제 즉위 후 지위를 회복한 자도 다시 열후로 격하하고, 이후 제후 왕으로 봉해진 자는 황제의 동족인 남양의 용릉 유씨 일족과 황자뿐이었다.
중앙정부는 대사도, 대사공, 대사마의 삼공을 정치의 최고 책임자로 두고, 실무에는 황제의 비서인 상서가 중용되었다. 관제나 군제는 역소(役所)를 통합하고 불필요한 관직은 삭감하고, 지방 상비군이던 재관, 기사 등을 없애고 민간 전환을 실현하였다.
혼란기에 임명된 장군도 대부분 해임하고 소규모 상비군으로 재정의 경감을 도모하였다. 또한 재정기관의 재편성으로 과거 전한에서 황실재정을 맡던 소부의 업무를 국가기관인 대사농으로 이관 황실재정을 국가재정에 포함시키거나, 대사농 직속인 국가재정의 중요기관인 염관, 철관을 지방 군현에 속하게도 하였다.
광무제는 유교를 진흥시키고, 학제, 예제(禮制)를 정비하여, 낙양에 태학을 설치하고 유학을 강론하여 14명의 오경박사를 두고, 각지에는 사학(私学)으로 현지 학자가 문하생에게 경서를 강의했다.
관리등용제인 향거리선(鄕擧里選)에서 효행, 청렴, 결백을 취지로 하면서 효렴(孝廉)이 중시되어, 삼공 등이 매년 일정한 수의 효렴을 천거하였다.
낙양에는 교화와 제사시설로 명당(明堂), 영대(靈台), 피옹(辟雍)을 설치했다.
통치의 근거인 유교는 전한후기에 성행한 참위설(讖緯説)과 결합하여 예언 등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었고, 왕망도 이것을 이용했다. 광무제는 즉위하면서 ‘적복부’의 예언에 따른 것 외에도 삼공의 인사와 봉선, 시행의 근거로서 참문을 쓴 사례도 있으며, 참위설을 비판한 유학자는 등용되지 못했으며, 만년에는 도참(圖讖)을 선포 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한반도의 낙랑국을 평정하고, 군현제로 직접지배 했다. 한편 한반도 동쪽의 수장들을 현후(縣侯)로 봉하고 반도 남부로부터 조공 온 사신을 받아 낙랑국에 속하게 했다.
왕망이 후(侯)로 격하했던 고구려가 후한에 조공하자, 왕호(王號)를 부활시키고, 왜의 노국에서 온 사신에겐 금인(金印)을 하사 했는데, 에도시대 시가 섬에서 한위노국왕인이 발견되었다.
서쪽에는 마원을 시켜 강족을 물리치고, 항복한 자는 천수, 농우, 우부풍 내의 군으로 이주시켜 군현 관할로 두었다. 남쪽도 마원을 보내어 교지에서 일어난 쯩(徴)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마원은 무력행사와 함께 성곽복원, 관개수로 정비를 통해 농업을 진흥하고 현지의 관습법을 존중하는 등, 후한의 군현제 정비에 현지의 습속을 존중했다.
북쪽은 왕망의 강경한 외교정책에 반발한 흉노가 세력을 더하여서 화친 사자를 보냈지만, 흉노의 침략이 그치지 않던 중에 흉노가 내부항쟁으로 남북으로 분열되어, 남흉노가 후한에 귀순했다(이 분열로 오환과 선비족도 흉노에서 이탈했다). 이에 오환의 추장을 후왕에 봉하고 선비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북흉노는 남흉노를 약화시키고자 후한에 사자를 보냈지만, 광무제는 화친을 않고 북흉노의 토벌도 않은 채 비단 등을 주어 회유에 그쳤다.
후한시대 채륜은 세계 최초의 종이 채후지를 만들고, 장형은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번창하였고, 반초는 서역과의 교역 길을 열어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했다. 그러나 4대 황제인 화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 후 모후인 황태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하여 권력을 장악한 외척 세력과, 성인이 된 황제(皇帝)가 친정을 도모하면서 황제의 측근인 환관 세력과의 권력 쟁탈로, 타락되어 사회 전반이 침체되어갔다.
안제 때는 서쪽 강족이 변경을 침입하고, 환제와 영제 때는 두 번에 걸쳐 당고의 화가 일어나 유능한 선비들이 축출·제거되어 조정의 자정력이 저하되고, 매관매직과 수탈이 빈번해져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다.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는데, 조정을 지지하는 군벌에 의해 제압되긴 했지만, 그 과정에 각지에 할거하던 군벌의 힘이 강화되어 조정의 권위가 약해졌다. 결국 군벌의 힘이 왕조를 능가하면서 삼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양주의 군벌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추대하여 본격적인 군웅할거시대가 되었다. 조조는 헌제를 보위하면서 숙적 원소에게 승리하여 화북과 화중의 일부를 차지했다. 이후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제위를 넘겨, 조비가 위의 문제(文帝)가 되고 후한 왕조는 멸망했다.
왕망이 전한의 정권을 약탈하는 데 이용한 예언설이나, 광무제가 한실(漢室)을 부흥하기 위해 활용한 도참은 각기 준거할 곳을 유가 경전에서 구하여 권위를 세우려 했다. 이미 전한 말에는 음양5행설(陰陽五行說) 원리로 천인감응 사상에 의해 유가의 경서를 해석했지만, 그런 시류는 권력에 영합키 위해 공자의 저작으로 가탁한 위서(緯書)를 만들어 경학을 신비주의로 감쌌다.
광무제가 도참을 공포하고, 장제가 자를 백호관으로 모으고 5경(五經)의 국정해석(國定解釋)을 토의시켜, 전한 이래로 금문학(今文學)의 우위를 보증하였으나, 왕망의 신(新)정권에 활용되던 고문(古文)경학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에 접근했다.
금문(今文; 당대의 문자로 기록한 경서)과 고문(古文; 예전의 문자로 기록한 경서)의 차이는 금문이 춘추공양전을 근거로 한 왕조의 정책운용에 적응한 이론을 제공하여 학관(學官)을 독점해 오고 있는데 반해, 고문은 복고주의를 주창하며 성현의 이상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5경을 종합하는 텍스트의 언어해석을 기초한 해석학을 확립했다.
유흠, 가규, 반고 등의 학자는 고문의 경전이 도참의 불비를 보강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춘추좌씨전, 모시(毛詩) 등을 국가에 공인시키려 했으나, 이 학문의 근본은 민간사학에서 발휘되었다.
후한 때는 ‘녹리(祿吏)의 도(道)’가 개방되어 유생들이 다투어 경학을 배워 금고문에 능통하여, 신분질서를 중하게 보는 계급사상과 그 실천인 예를 존귀하게 여기는 명절(名節)의 기풍이 넘쳤고, 예교국가(禮敎國家)체제가 정비되어 지식인의 언행은 점차 관료 후보의 예비공작으로 변했다.
금고문의 두 학파의 논쟁이 체제교학 강화의 역할을 하는 중에, 학술의 기운이 사법(師法)을 준수한 전한의 일경전문(一經專門)으로부터 5경 겸학(兼學)으로 진보하고, 가규와 허신 등은 다시 금문· 고문의 양 경학을 절충 총합하려 했다.
후한 말 하휴는 훈고의 형식으로 춘추학을 완성하고, 정현은 참위설도 살리며 금고문의 예학을 통합하여 위진(魏晋) 이후 경학의 종주가 되었다.
국교인 유학이 신비화하고 있는 중에 지배 권력의 의사를 거슬려 천인감응의 참위설을 부인하는가 하면, 음양오행설을 신봉하는 모든 학설을 비판하는 지식인도 출현하여, 그들은 경험주의와 예리한 이성으로 그런 것에 공격을 가했다.
왕충을 필두로 왕부는 그의 잠부론(潛夫論)에서 빈부를 사회적 근원부터 추구하여 유법(儒法) 양면에서 비판하였고, 중장통은 창언(昌言)에서 신권적 왕조 순환사관을 비판하며 지배자의 철학에 타격을 주었다.
대외 관계는 66년 로마의 사신이 처음으로 후한을 방문하였다.
* 삼국시대 AD 220 ~ 280년 ; 60년간 존속
. 위(魏)나라 (창건자 조조, 수도는 허창(許昌)→낙양(洛陽) 220~265년 45년간 존속
. 오(吳)나라 (창건자 손견>손책>손권. 수도는 건업(建業 : 남경) 219~263년 44년간 존속
. 촉(蜀)나라 (창건자 유비. 수도는 성도(成都) 220~280년 60년간 존속
삼국시대는 후한이 몰락하던 2세기 말부터 위, 촉, 오가 다투다가 서진이 중국을 통일한 3세기 후반까지로, 엄격하게는 위가 세워진 AD 220년부터 오가 진에게 망한 280년까지로 보지만, 황건적의 난을 삼국시대의 시작점으로 보는 사람이 많으며, 중국역사에서 다른 시대 동명의 국가명과 구별키 위해 위를 조위, 촉을 촉한, 오를 동오라 부르기도 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동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가장 잘 알려진 명나라의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실제의 역사 보다는 소설책으로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지만, 사람들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아는 오해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실제사실에 바탕을 둔 기록은 진수가 쓰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삼국지’이다.
삼국시대는 중국 역사에 가장 잔혹한 시기로, 후한 말의 인구조사는 당시 약 5천만 명이었는데, 삼국 통일을 한 서진 초는 천 6백만 명 정도로 인구가 줄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인구 조사는 한나라의 조사보다 덜 정확했기에 실제 수치는 의문이지만, 삼국시대(184년~280년)의 중국 인구는 대략 3,000만~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 삼국시대의 역사 개략
후한은 화제 이후 점차 경제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많은 황제가 어려서 재위에 올라 친척이 많은 권력을 지니면서, 황제가 성년이 되어도 외척은 권력을 내주길 꺼려서 황제가 권력을 찾으려고 관리와 환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때문에 환관들과 외척간의 다툼이 일어나,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에 환관에 대한 관리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여 많은 관리가 저항하였으나, 두 번의 저항이 실패하자 환관들이 저항에 참여한 관리들을 처형하라고 황제를 설득했다. 몇몇 지방 통치자는 이런 분위기를 기회로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 했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에 어두운 정치적 분위기뿐 아니라 많은 자연 재해도 일어나, 여러 곳에 반란이 있었다.
184년 2월 도교 교단인 태평도의 수장 장각이 형제 장보, 장량과 황건의 난을 일으키자 급속히 퍼져서 수십만에 이르고 곳곳에서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36개의 요새를 갖고, 큰 요새는 만명 이상, 작은 요새는 6~7천명의 군사로 한나라의 군대와 비슷한 규모가 되었고,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라는 구호를 내새웠다.
영제는 황보숭과 노식, 주준으로 황건적을 물리치게 했고, 지방의 관리에게 군사를 보내어 돕도록 명했는데, 소설 ‘삼국지연의’는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황건적은 결국 패배하고 흩어졌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산지에서 도적으로 살면서 혼란이 더욱 커졌으나 도적떼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188년 유언은 지방관이 직접 지방을 통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영제에게 건의하자, 영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지방의 주가 도적들을 처리할 수 있게 했지만, 오히려 혼란은 더 커졌다.
영제가 죽고 다시 외척과 환관이 싸우면서 환관 건석은 외척 하진을 죽이고 왕세자 자리에 올랐던 유변을 대신해 유협을 세자로 바꾸려 했으나 실패하고 유변이 황제가 되자, 하진은 원소와 함께 당시 정권을 잡은 장양을 수장으로 한 환관무리 십상시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하진은 또한 양주의 동탁과 병주의 정원에게 병력을 보낼 것을 명했으나, 십상시는 이를 알고, 동탁이 낙양에 오기 전에 하진을 암살했다. 그러자 원소는 궁을 급습해 십상시와 2천 여명의 환관을 살해하여 외척과 환관의 긴 싸움은 끝났지만, 군주들 간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혼란시대를 열었다. 이 일로 북서쪽 국경에 있던 동탁이 수도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북서쪽 국경은 창족과 전쟁 중이었으므로 동탁은 잘 훈련된 군대를 가져, 그가 낙양에 오자 쉽게 수도를 점령 했다.
동탁은 더 능력 있는 사람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유변 대신 유협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낙양으로 가는 도중 동탁은 전쟁에서 도망 나온 유변과 유협을 지키던 군대를 만났는데, 동탁이 거만하게 행동하자 유변은 겁을 먹었으나, 유협은 침착하고 권위 있게 동탁에게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했다.
동탁은 처음엔 한(漢)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의 정치적 능력은 군사적 능력에 못 미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을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냈고,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점차 없어졌다. 그는 왕실의 예절을 무시하고 궁궐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자, 190년 반 동탁 연합군이 조직되어 191년 5월, 계속된 패배에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때 동탁은 낙양에 살던 수백만의 거주자들을 장안으로 강제이주 시키고, 당시에 가장 큰 도시인 낙양을 불태웠다. 게다가 군사들에게 마을의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하고, 주민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가져오서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전리품으로 사용했다. 1년 후 동탁은 왕윤과 여포의 쿠데타에 의해 죽었다.
191년 연합군에서 황실의 친척인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으나 연합군은 점점 와해되었다. 몇몇 군주를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주들은 한나라의 재건보다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면서, 한나라는 군주들에 의해 나뉘었다.
원소는 업의 북쪽 지역을 그의 상관 한복으로부터 빼앗고, 국경지대의 공손찬과 대립했으며, 그 바로 밑에는 조조와 원술, 화이허와 창 강 근처는 유표가 지배했다.
손견의 뒤를 이은 남쪽의 손책은 원술에 종속되었지만 힘을 키웠다.
서쪽은 유장이 익주를 다스렸고 그 북쪽에는 마등 등과 같은 군주들이 있었다.
동탁은 살해된 후, 동탁의 부하들인 이각, 곽사, 장제, 번조는 차례로 여포를 공격하고, 왕윤과 그의 가족은 전부 처형했다. 이에 여포는 장양에게 몸을 위탁하다 원소 밑으로 들어갔다.
195년 8월 헌제는 이각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장안을 나와 동쪽으로 위험한 방랑을 하면서 자신을 지지해 줄 사람을 찾았다.
196년 조조는 황제를 모시면 다른 군주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는 순욱의 제안에 황제를 모셨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몇 번의 전투에서 황건적의 무리를 격퇴하여 장막과 진궁 등을 합류시키고, 계속 황건적과 싸워 약 삼십만의 군대를 흡수했으며, 허창으로 수도를 옮기고 근처에 둔전제를 시행했다. 농산물의 50%를 내는 높은 세금을 부과했지만, 농부들은 안정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에 기뻐했으며, 성공적인 정책이었다.
194년 도겸의 부하인 장개가 조조의 아버지를 살해하여 조조는 서주의 도겸과 전쟁하였는데, 도겸은 유비와 공손찬의 도움을 받았으나 막강한 조조의 군사력에 서주가 거의 함락되려다, 마침 자신이 없는 동안 여포가 연주에 침략하여 후퇴했다. 그해 도겸이 죽으면서 서주를 유비에게 물려줬으며, 이듬해 여포는 조조에게 쫓겨나서 연주에서 서주로 도망가 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
197년 원술은 스스로 후한의 황제가 되었으나, 이는 다른 군주들을 분노케 하고 그의 부하인 손책과도 대립하여, 남쪽의 손책은 원술에게서 독립하고 양주의 군주들인 유요, 왕랑, 엄백호 등도 물리쳤다.
조조는 황제의 명으로 손책에게 원술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리자 손책은 이를 따랐고, 또한 원술에 대항해 유비, 여포 등과 연합케 하여, 결국 원술은 연합군에게 패하여 도망쳤다. 후에 여포는 원술의 잔여병력과 합쳐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점령하여, 유비는 그의 의형제인 관우, 장비와 조조에게 도망치자, 조조는 유비와 서주를 공격했다. 그러자 여포의 부하들이 여포를 배신하고 원술의 지원군도 오지 않으면서 부하인 송헌과 위속에게 포박당해 조조에게 끌려가 처형되었다.
헌제의 외척인 동승은 헌제로부터 조조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유비 등과 거사를 준비했으나 발각되어 공모자가 처형되고, 유비는 북쪽의 원소에게 도망쳤다.
황건 잔당들의 반란과 궁내부의 위협을 처리한 조조는 공손찬에 승리한 원소에게 눈을 돌렸다. 원래 조조보다 신분이 높았던 원소는 거대한 군대를 모으고 황하 북쪽에 야영지를 세웠다.
유표에게 승리하고 허공의 반란을 진압한 손책은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어 임종하면서 동생인 손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조조는 수적 열세에도 관도에서 원소와 충돌하여 원소의 군량창고에 불을 질러 승리하자 원소의 군대는 궤멸되고, 유비는 다시 형주의 유표에게 도망쳤다. 조조는 원소가 죽은 후 원소 아들들의 내분을 기회로 황하 북쪽으로 진격하여, 업을 함락시키고, 기주, 병주, 청주, 유주를 점령했다. 그리고 오환을 상대로 북벌에 승리한 후, 화베이 평원에 확실한 지배권을 잡았다.
조조가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하자, 유표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고 형주를 넘겨 조조는 거대한 함대를 손에 넣었으나, 장강 남쪽을 지배하던 손책의 후계자 손권은 계속 저항했다. 손권의 모사 노숙이 도망쳐 온 유비와 동맹을 맺고, 주유는 노장 정보와 함께 손권의 해군 제독에 임명되었다.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 명은 적벽에서 조조의 함대 및 2십만 군대를 맞아 함대에 불을 질러서 조조는 대패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승리 후 유비와 손권은 촉과 오나라를 세웠다. 북쪽에 돌아 온 조조는 북서쪽 지역을 병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점점 힘을 기르고, 결국 217년 그가 조종하던 헌제에 의해 위왕에 올랐다.
유비는 형주의 태수인 한현, 금선, 조범, 유탁을 물리치고,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점령하고 형주에는 관우를 두었다. 손권이 합비전투를 끝내고 형주로 눈을 돌리자, 유비와의 사이에 연합이 깨지면서 219년 유비가 조조에게 한중을 빼앗으면서, 조조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형주를 치면서 손권의 장수 여몽이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220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에게 황제 자리를 내놓게 하여 한나라는 멸망했다. 황제가 된 조비는 나라 이름을 위라고 했다.
221년 유비도 멸망한 한을 재건한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황제를 선언하자, 같은 해에 위는 손권에게 오왕의 자리를 수여했다.
촉은 관우를 죽인 보복으로 오와 전쟁했으나, 유비는 손권의 지휘관 육손에 의해 대패하고, 촉으로 후퇴한 뒤 사망했다.
유비가 죽은 후 오와 촉은 위를 상대하기 위해 다시 관계를 맺으면서, 222년 손권은 조비가 내려준 직책을 거부하고 229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북쪽은 위가 점령했고, 남서는 촉이, 남동은 오가 지배했다.
국경 외부는 제한된 곳으로, 촉의 정치적 지배권은 남쪽의 남만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223년 유비가 사망하고 유선이 황제에 올랐다.
유비 때에 촉과의 이릉대전에서 승리한 손권은 이제 촉이 형주를 노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남동쪽의 원주민인 백월에 시선을 돌려, 제갈각으로 약 십만명의 백월인에게 항복을 받아 3년의 전쟁을 끝내고, 그들 중 4만명은 오의 군에 편입했다.
촉 역시 남쪽 원주민들에 의해 골치를 썩였는데, 남만이 반란을 일으켜 익주의 도시를 점령하자, 제갈량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남만 대장 맹획과 몇 번의 전투를 벌여 맹획이 항복했다. 남만인들은 촉의 수도인 성도에 사는 것이 허락되고, 또한 군대에도 남만부대가 생겼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 끝나자 촉은 주력 군대를 북쪽인 한중으로 이동시켜, 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제갈량은 조운과 함께 기산을 공격했으나, 선봉인 마속이 가정전투에서 전략에 의해 패배를 했다. 그 후 6년간 제갈량은 몇번의 공격을 더했으나, 물자 공급문제로 성공하지 못하다가, 마지막 북벌 전쟁인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량의 죽음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제갈량의 북벌 동안에 오나라는 위나라가 침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었다. 특히, 합비 근처는 적벽대전 이후 계속해서 오와 위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던 지역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합비의 거주자들은 장강 남쪽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죽은 뒤 위의 공격이 더 거세어졌지만, 위는 오의 수비를 뚫을 수 없었다.
손권의 긴 재위기로 오나라는 전성기를 누려, 북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백월족 이주민들로 인해 농사를 지을 인력이 풍부해지고, 바다를 통한 운송업도 발전해 만주나 타이완으로 바다 여행도 하였다. 오의 상인은 현재의 베트남 북쪽이나 캄보디아 등과 교역하고, 경제가 번영한 것 같이 문화예술도 발전하였으며, 낙양 남쪽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오기도 했다.
위나라는 조씨 가문과 사마씨 가문에 긴장이 시작되어 조진이 죽은 후, 조상과 사마의 간에 파벌싸움이 시작되었다. 조상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마의를 배척했다.
위나라에서 땅을 가장 많이 가진 가문이던 사마씨는 사마의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어 그 세력이 커진데다 사마의는 능력 있는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공손연의 반란을 진압하고, 랴오둥 반도를 직접통치하였다. 결국 조상과의 싸움에서 이긴 셈이다.
조상과 그의 가족이 고평릉으로 간 틈을 탄 사마의는 낙양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때 많은 사람이 사마씨 가문에 대항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죽림칠현이었다. 죽림칠현 중 혜강은 조상의 몰락 이후 사마의에 의해 처형당했다.
제갈량이 죽고 그가 차지하던 승상자리는 장완과 비위, 동윤이 차지했으나, 이후 촉의 정치는 환관에게 조종당해 부패하기 시작했으며, 제갈량의 후임인 강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은 점점 무너졌다.
263년에 위는 세 갈래로 공격을 진행하여 촉군은 한중에서 후퇴하여, 강유는 급히 검각에 수비진을 폈으나, 사람이 다니기 어려운 험준한 음평을 통해 진군한 위의 등애에 의해 측면을 공격당하면서 수도인 성도가 함락되고, 황제 유선은 항복하여 촉나라는 43년 만에 멸망하고, 유선은 낙양에서 위나라로 부터 ‘안락공’에 봉해졌다.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죽이려다 오히려 살해당한 후, 뒤를 이어 조환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곧이어 사마소가 죽고 그의 ‘진왕’직을 아들 사마염이 물려받아 황제가 되려하자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신하들의 간언에 조환은 조모와 달리 황제의 자리를 내어 주었다.
264년 사마염은 조환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고 진을 세웠는데, 40년 전 조비가 한을 멸망시킨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하겠다.
손권이 죽은 후 어린 손량이 252년 황제의 자리에 올라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촉의 멸망으로 위나라는 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진이 생긴 후 오의 황제인 손휴가 죽고, 신하에 의해 손호가 황제에 올랐는데, 손호는 촉망받던 영재였으나 황제가 된 후 포악해져 간언하는 신하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었다.
진의 남쪽을 지휘하던 양호는 왕준과 지금의 쓰촨성 지역에서 오를 정벌할 준비를 하고, 4년 후 오의 육항이 유능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279년 겨울 사마염의 명으로 진이 공격 했다.
쓰촨 지역의 함대는 강을 따라 형주로 향하며, 건업에서 강릉까지 다섯 군데를 동시에 공격하여 건업은 280년 3월 함락하고, 손호는 항복하여 봉토를 받아 생을 마감했으며, 이로써 삼국 시대가 끝났지만 300여년의 혼란시대가 다시 시작 되었다.
삼국시대의 생활상을 보면 황건의 난 이후 중원에 심각한 기근이 왔다. ‘170년 봄에 하내의 몇몇 부인들이 남편을 잡아먹었고, 하남의 몇몇 남편들이 부인을 잡아먹었다.’는 식인의 기록이 있다.
동탁이 권력을 잡은 후 군대를 동원해 많은 여자를 납치하고 강간하여 반 동탁연합이 결성되자, 동탁은 낙양 시민에게 낙양의 궁궐과 절, 관공서와 모든 민가를 불태우고, 장안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당시 생활상을 고려할 때 시민들이 장안까지 살아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결국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조조가 서주를 참략했을 때도 수십만의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고, 강이 막혀 마을이 회복되지 못했다.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이 관중을 침략 할 때는 이각의 명령으로 군대가 주민을 약탈하여 수십만의 주민이 서로를 잡아먹는 식인현상까지 나타났다. 따라서 삼국시대는 인구감소가 심각하여, 후한 말기에서 서진의 통일까지 125년 기간에 약 35%의 인구가 줄었다. 이후 수나라 시대까지 인구가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인구 중에 군인의 비율이 매우 높아, 촉의 인구 90만 명 중에 군인이 10만명으로 전 국민의 10%이상을 차지했다. 많은 중국의 역사 기록이 그렇듯이 인구수 역시 실제 인구보다 적은 수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인구조사가 정확하지 못했고, 또한 세금 회피자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시대(184~280년)의 인구는 대략 3,000만~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진(晉)이 중국을 재통일했을 당시가 이 시대에서 인구가 제일 많았다.
후한 말 자연재해와 사회적 불안 때문에 경제 상황이 급속히 나빠져 많은 농지가 버려지면서, 몇몇 지방 관리들과 귀족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세우고, 농사를 지어 점차 자급자족 체제를 마련했다. 이런 체계는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친 데다 왕실의 몰락으로, 헌 동전을 녹여 주조하는 게 아니라 새로 돈을 주조했기 때문에, 국가가 아닌 개인이 주조한 동전들이 등장하였다. 이로써 새로 주조한 동전은 화폐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하여 비단과 곡식으로 물물교환을 했다.
삼국시대의 지역적 분열은 그 후의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 700년이 지난 북송시대에도 중국의 지역 경제권은 크게 3지역으로 나뉘어졌다.
*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
- 진(晉)or 서진 (수도는 낙양, 사마司馬씨 왕조)A D 280 ~ 316년 ; 36년간 존속
진(晉)은 사마염이 세운 통일 왕조인 서진(西晉 280~316년)과 남북조 시대의 왕조인 동진(東晉 317년 ~ 419년)으로 이루어진 왕조다.
(서)진이 동진으로 된 이유는 북방민족에게 화북지방을 빼앗겨 강남으로 내려오면서다.
서진(西晉)은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건국했으며, 무제 사마염은 안정적인 정치로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다져나갔으나, 말년에 향락의 도가니에 빠졌고, 문란이 더해진 혜제 때는 군사력을 장악한 황제의 아들이었던 지역의 왕들이 팔왕의 난을 일으켜 국운이 기울었다.
16년간 팔왕의 난이 중국을 휩쓸며 변방의 유목민을 지역의 왕들이 휘하의 군사로 끌어들이면서, 중국 내륙에 정착했던 많은 유목 민족이 중국을 침략하여 영가의 난을 초래하였고, 서진은 흉노의 유연이 세운 한나라에 52년 만에 멸망했다.
- 동진(東晉) (수도는 건업(지금의 남경), 사마司馬씨 왕조)AD 317 ~ 420년 ; 103년간 존속
306년 서진 말기에 영가의 난(永嘉의 亂)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고, 서진 회제가 포로가 되어 멸망했다. 이에 진의 낭야왕(琅邪王)인 황실의 일족인 사마예는 건업(建康)으로 피하여, 낭야의 호족 힘을 빌려 동진을 건국하여 100년간 11대에 걸쳐 화북으로 부터 피해 온 북쪽 세력과 강남 토착의 호족 세력과 협력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유지했다.
당시 화남지역은 중국 대륙에서 인구가 희박하고 낙후된 지역이나, 화북 지방으로부터 온 피난민은 초기에 세금을 감면하는 등 세제상 혜택을 주어 적극적으로 유랑민을 받아들이고 미개지 개간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수자원이 풍부하기도 한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 발전하여 화북지방과 겨룰 정도로 번영하였다.
9대 효무황제 때 전진의 남하정복 전투로 위기를 맞았으나, 비수대전에서 승리하여 위기를 넘기지만, 이후 농민 반란이 잦아져 무장 환현이 반란을 탄압한다는 명분하에 거병하여 집권하였다. 그러나 유유가 이를 진압하고 이에 대한 명분과 북벌 성공으로 새로이 집권에 성공한 뒤, 아예 새 왕조를 세워 왕위에 오르면서 동진은 멸망하고, 유유가 새로 세운 송나라가 남북조 시대 강남의 왕조가 되었다.
- 5호16국(五胡十六國) 316 ~ 420 ; 104년간 존속
전량(前涼), 전조(前趙), 성한(成漢),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진(前秦), 후연(後燕), 후진(後秦), 서진(西秦), 후량(後涼), 남량(南涼), 북량(北涼), 남연(南燕), 서량(西涼), 하(夏), 북연(北燕)
. 후한(後漢) : 평양(平陽 선서성 임분시(臨汾市) ⇒ 전조(前趙) : 장안(長安)
. 후조(後趙) : 양국(襄國 하북성 형태시(邢台市) ⇒ 전연(前燕), 전진(前秦) : 장안(長安),
. 동진(東晋) : 건강(建康 남경)
304년 유연(劉淵)의 건국과 439년 북위(北魏)의 통일까지 100 수십년간 화북(華北)에서 흥망한 흉노(匈奴)· 갈(羯 흉노의 별종)· 선비(鮮卑 터키계)· 저(氐 티베트계)· 강(羌 티베트계)의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고, 중원엔 한인 등이 세운 나라까지 총 16개국의 왕조가 들어서 이것을 5호 16국이라 한다. 이는 이민족에 의한 중국지배의 최초 형태지만, 이보다 앞서 한제국(漢帝國)이 주변의 이민족을 정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침투시켜, 이민족의 중국 내륙 거주자가 늘면서 민족의 자주성을 잃은 그들은 한민족으로부터 갖가지 압박을 받고 노예· 농노 등으로 전락하였다. 이 같은 경향은 위·진시대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 크고 작은 반항을 거듭하다 304년 흉노 추장 유연이 팔왕의 난에 편승 거병하여 산시지방에 흉노국가를 재건했다(漢 뒤에 전조前趙로 바꿈). 같은 해 저족 이웅이 쓰촨에 대성황제를 자칭하며 나라를 일으키고, 이어 서진(西晉) 왕조는 흉노 국가인 한군(漢軍)에 수도 뤄양을 뺏기고 멸망, 강남에 망명정권인 동진이 탄생했다.
한(漢 : 前趙전조)은 갈족인 석륵(石勒 : 後趙후조)에게 멸망되고, 후조도 동북방면에서 남하한 선비족 전연(前燕)과 서쪽의 저족 전진(前秦)으로 2분 되었다.
전연을 평정한 전진(前秦) 부견(符堅)의 치세는 5호 시대 중 가장 안정된 시기로, 화북 전토는 물론 쓰촨과 서역까지 미쳤으며, 다시 동진(東晉) 정복을 꾀했으나 폐수에서 대패하여 멸망하고, 화북은 다시 후연(後燕 : 鮮卑)과 후진(後秦 : 羌)으로 분열하고 간쑤 방면에도 여러 민족의 소국가가 분립하여 항쟁하였다. 그러다가 선비탁발부 북위(北魏)가 여러 나라를 평정하고 북량(北凉)의 멸망을 끝으로 이 시대가 끝났다. 같은 무렵 강남에도 진(晉)에서 송(宋)으로 교체되어 이후를 남북조라 부른다.
오호의 국가들은 호족 중심으로 유목사회 특유의 부락제도로 호족을 묶어놓았으나, 한족에게는 중국 전통의 군현제(郡縣制)를 적용하여 이른바 호한(胡漢) 2중 체제가 되었다. 또한 군주 중에는 폭군도 있었으나 한문화를 존중하여 한족 사대부를 예우하고 중국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경향도 강하여, 야만과 무질서만의 시대는 아니었다. 불교에 관심도 많아 불도징, 구마라습등 서역승과 도안 등의 한승(漢僧)이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다만 정권의 바탕을 이루는 부락제도의 존재가 국가의 통일성을 저해하여 각 왕조는 모두 단명하여 복잡한 정국을 펼쳤다.
- 남북조(南北朝)시대 439 ~ 539년 ; 100년간 존속
. 북조(北朝) : 439년 북위가 북량을 멸하면서 시작되어 581년 수나라의 양견이 북주에게서 선양 받아 종결되었다.
북위(北魏) : 386~534년, 수도는 성락, 평성, 낙양, 탁발규가 건국
동위(東魏) : 534~555년, 수도는 업, 원선견이 건국
서위(西魏) : 535~557년, 수도는 장안, 원보거가 건국
북제(北齊) : 550~577년, 수도는 업, 고양이 건국
북주(北周) : 557~581년, 수도는 장안, 우문각이 건국
. 남조(南朝) : 420년 유유가 동진에게서 선위 받으면서 시작하여 589년 수나라가 진을 멸하면서 종료 되었다.
송(劉宋) : 420~479년, 수도는 건강, 유유가 건국
제(南齊) : 479~502년, 수도는 건강, 강릉, 소도성이 건국
양(蕭梁) : 502~557년, 수도는 건강, 소연이 건국
진(南陳) : 557~589년, 수도는 건강, 진패선이 건국
. 괴뢰국가 후량(後梁)
남북조시대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때 강남에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하여 이것을 남조(南朝)라고 하며, 같은 건강(建康 건업의 새 이름)을 수도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동진 까지를 합쳐 육조(六朝)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주로 문화사를 다룰 때 쓰는 시대 구분이다.
이 시대에 중국 남방의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 당나라 시대는 강남이 중국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남조는 정치적 혼란과 대조적으로 문화와 불교 등이 융성하여 육조문화라 불리는 도연명, 왕희지 등이 활약한 귀족문화가 번영했다.
화북에는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북위(北魏)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방 유목민의 부족제를 해체하고 귀족제에 의한 중국적인 국가를 수립했다.
북위는 육진의 난(六鎭之亂)을 거치며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여, 동위는 550년 북제(北齊)로 정권이 바뀌고, 서위는 556년에 북주(北周)가 대신했다.
577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581년 양견이 북주의 왕에게서 왕위를 선양 받아 수나라를 세웠다.
589년 수나라는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화북의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의 5개 왕조를 가리켜 북조(北朝)라 불렀고, 여기에 수나라도 합쳐야 한다는 설도 있다.
. 화북(華北) 지역의 국가 계승
북위는 선비족의 풍습을 지키려는 세력과 선비족의 풍습을 버리고 한족화를 진행하려는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한족화를 시키려는 세력은 주로 한족 사람들로서, 한족화가 되면 자신들의 입장이 유리해지며 문화로 이민족을 이기는 결과를 가져와,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굴욕을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족파의 대표인 최호는 외래 종교인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의 교조 구겸지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폐불(廢佛)을 주장하여 실행시키고 한인 관료를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선비족의 반감을 사서 450년 주살되었다. 그 후 태무제가 암살당해 북위는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문명황후는 4대 문성제의 황후이자 5대 헌문제의 적모(嫡母 생모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본처)로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후에 헌문제에게 장남 굉(宏 후에 효문제)이 태어나자 잠시 물러났으나, 효문제의 생모를 죽인 일로 헌문제와 대립해 헌문제를 폐립하고 효문제를 옹립했는데, 당시 북위에서는 외척의 횡포를 배제하기 위해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그 생모를 죽이는 것이 통례였다. 이제 문명태황태후가 된 그녀는 수렴청정을 계속하면서 봉록제(封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중앙집권화와 한족화를 추진했다.
490년 문명태황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정책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493년 효문제는 수도를 평성(平城)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 한 후 대대적인 한족화를 추진했다. 황실의 성씨를 원씨(元氏)로 고치고,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었다. 하지만 효문제의 사후에 반발이 거세져서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북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진은 예전 수도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주둔지로, 이곳은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었다. 그 때문에 중요시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반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조정에는 8대 효명제와 생모 영태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528년 영태후가 효명제를 살해하여 혼란은 극에 달했는데, 이주영이 진압하였다.
이주영은 6진을 진압하고 효장제를 옹립한 뒤 권력을 휘둘렀으나 효장제에 의해 살해되고, 효장제 또한 이주영 일족에게 살해당했다.
그러자 이주영의 부하였던 고환이 이주영 일족을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고환에 의해 옹립된 북위 최후의 황제 효무제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서 관중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군벌의 우두머리였던 우문태에게로 도망쳤다. 그러자 고환은 534년 효정제를 옹립하였고, 우문태는 자기에게 도망 온 효무제를 살해하고, 535년 문제를 옹립했는데, 사실상은 534년을 기점으로 북위는 멸망을 하고,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실력자가 제위를 받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
. 북제(北齊)
동위는 고환이 전권을 장악한 후 서위을 여러 번 공격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고환은 547년 사망하고, 고환의 권력은 그의 아들 고징(高澄)이 대승상이 되어 계승했다. 이때 하남 13주의 태수였던 후경(後景)은 자신이 군사력 때문에 고징의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동위를 이탈해 하남의 영지를 양나라에 바치려 했다. 이에 양나라 무제가 그곳을 접수하려고 대군을 보내어 출동한 동위군에게 패하면서 하남은 동위에 속한 그대로 있게 되었다.
그 후 동위 고징의 사후에 일어난 혼란을 수습한 고징의 동생 고양(高洋 문선제)은 550년 동위의 왕으로 부터 선양을 받아서 제나라를 건국하여, 이를 남조의 제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제(北齊)라 불렀다.
고양은 초기엔 여러 개혁을 추진하고, 북쪽의 돌궐과 거란을 격파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으나 후기에는 북위의 황족이었던 원씨를 살해하는 등의 폭거를 저질렀다. 그 후 고양의 동생 고연(高演 효소제)이 태자를 살해하고 즉위했고, 고연 사후엔 고연의 태자를 살해한 고담 무성제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북제의 군주는 주벽과 기행이 많아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북주에 대한 군사 행동에는 늘 북주를 패퇴시켰다.
무성제는 즉위 후 아들 고위(高緯 후주)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정무을 살폈으나, 그 시대에는 개인적 친분을 가진 총신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특히 후주는 주위의 참언(讒言)을 믿고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하던 곡율광과 난릉왕 두 사람을 살해하여 군사력의 약세를 불렀다. 북주는 이 사건을 호기로 삼아 북제를 침공해서 후주를 사로잡고 그에게 자살케 했다. 이로써 북제는 577년에 멸망했다.
로마의 네로 황제 보다 더한 싸이코패스 북제 문선제(文宣帝 이름은 고양)의 일화
고양이 효정제에게 선양을 받은 뒤 자신의 매형이자 동위의 황족인 원소에게 여장을 시켜서 사람들에게 후궁이라고 망신을 준 후, 감옥에 가둬 굶기자 너무도 배가 고팠던 원소는 소매를 뜯어먹으며 굶어 죽었다. 거기에다 황족(원씨)을 몰살시키려고 아기들은 위로 던져 창에 꿰어 꼬치로 만들고, 나머지는 연에 매달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게 해서 추락사시켰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평소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이성적으로 판단을 잘하고, 전쟁도 잘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술이 취하면 홀딱 벗고 산발에다 나체로 길거리에 나가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제 맘대로 돌아다니는데 칼은 꼭 소지하고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피곤하면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자고, 혹 들어간 방에 여자가 있으면 겁탈을하고 다시 잠을 잤다.
한번은 보다 못한 고양의 어머니인 태후가 술이 취해 귀가한 고양에게 정신차리라고 훈계를 하자, 태후의 앉은 의자를 밀치고는 “내가 너를 선비족 노비에게 시집보내 버릴테다.”라고 하여 태후가 놀라 쓰러졌다. 그런데 술이 깨고 제정신으로 돌아 온 고양은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울면서 싹싹 빌다가 스스로 채찍으로 자기 몸을 50대나 때리고 잠시 동안 술을 끊기도 했다 한다.
또 한번은 술에 잔뜩 취해서 장모의 집을 방문하여, 장모의 얼굴에 화살을 쏘아서 얼굴에 피가 쏟구치자 장모를 채찍으로 100대나 내려쳤다. 그리고 왕권에 위협이 되는 동생 고준과 고환을 감옥에 가뒀는데, 감옥에 있는 동생들을 면회 왔다가 뜬금없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더니 동생들을 보면서 “야이 자식들아, 네들은 왜 노래를 안 부르냐?”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 부르는데 동생들이 겁이 나서 우물거리자, 고양이 노래를 멈추고는 서럽게 흐느끼면서 “불쌍한 내 동생들...”하고 울면서, 동생들을 창으로 마구 찔렀는데 얼굴은 울며 눈물을 흘리지만, 손은 창으로 마구 찌르면서, 또 뒤에 있는 호위병을 보고는 호통을 쳐서 “네들은 안 찌르고 뭐 하냐? 이놈들아”, 그러고는 같이 동생들을 창으로 무참하게 찔러 동생들이 죽어서 조용해지자, 감옥에 불을 질렀다 한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술 취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럴 때마다 살인의 욕구가 점점 강해졌는데, 그 때에 양암이라는 신하가 의견을 제시하여, “사형수를 데려다가 죽여 보심이 어떻겠습니까?”하여,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이후로 술에 취할 때 마다 사형수들을 데려와 잔인하게 또는 기발한 방법(?)으로 죽였다. 그런데 사형수들을 너무 빨리 죽여 대는 바람에 공급이 부족해지자, 일반죄수도 끌어다 죽이다가, 나중에는 그 마저도 모자라서 혐의만 있고 재판도 받지 않은 사람까지 데려와 죽였다 한다. 그리고는 관가에서 혐의자나 죄수들에게 ‘감옥에서 세 달만 산채로 있으면 무조건 무죄로 풀어준다.’는 제안을 해서, 죄수의 몸을 자르고, 썰고, 고문을 하였는데, 특히 불에 관련된 고문을 좋아해서, 불에 달군 쟁기위에 서 있기, 불에 달군 수레바퀴에 팔 끼워 넣기 등을 시켰다.
한번은 절에 가서 불교의 계율을 받고는, 바로 데리고 온 죄수들을 큰 연에 매달아 띄우고는, 높이 올랐을 때 연줄을 끊어서 땅에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보며, 자기가 방생을 했다고 자랑을 했다고 하며, 이 때 고양의 살인이 얼마나 심했던지 나라 안의 감옥엔 죄수들이 아예 남아 있질 않았다고 한다.
신하 중에 이지라는 대신이 죽었을 때는 문상을 갔다가 이지의 부인에게 남편생각이 나냐고 묻자, 부인은 당연히 생각이 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따라 죽어라.”하고는 목을 잘라서 담장 밖에 던져버리고는 유유히 귀가했다.
또 설귀빈이라는 후궁은 고양이 자기에게 데려 오기 전에 고양의 숙부가 설씨 자매를 돌봤었는데, 고양의 후궁이 된 후 숙부와 귀빈의 사이를 의심하여, 결국 기둥에 매달아 톱으로 목을 썰어버렸다. 그리고는 숙부를 불러 죽은 설귀빈의 시체를 보이며 “숙부님 이 고깃덩이랑 관계를 가지시오”라고 하여, 숙부가 기겁하며 거부하자 바로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그 자리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가졌는데, 고양은 설귀빈의 목을 계속 품에 갖고 있다가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설귀빈의 목을 술상에다 투척하였다. 이로써 삽시간에 충격과 공포의 분위기가 되어 연회가 끝나자, 설귀빈의 시체를 찢어 그 허벅지 뼈로 비파를 만들게 하여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죽은 이가 그래도 귀빈이라며 장례식을 성대히 치루었는데, 이 때 고양은 머리를 풀어헤쳐 산발을 하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장례행렬을 따라갔다 한다.
. 북주(北周)
서위의 정권을 장악한 우문태는 무천진 출신으로 북위 말에 협서 일대를 지배한 대군벌이었다.
북주, 수, 당의 중추부는 전부 이 무천진 출신자가 차지하였고, 이때부터 중국은 오랫동안 이 집단이 지배하였다.
우문태는 새롭게 24군제를 창시했는데, 이 제도는 군의 조직을 위로부터 주국→대장군→개부(開府)라는 계열로 정점에 우문태가 있었으며, 후에 부병제(府兵制)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한족화 정책을 폐하고, 선비족 복고정책으로 전환하는 한편 주례(周禮)를 근간으로 하는 중국적 복고정책도 추진하여, 후에 주나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553년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을 빼앗고, 다시 후경의 난에 개입해 형주 북부(호북성)에 괴뢰국가 후량을 탄생시켜 남조에 타격을 주었다.
556년 우문태 사후에 조카 우문호가 실권을 잡은 후 우문태의 셋째 아들 우문각을 옹립해 북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주를 건국했다.
우문호는 초대 우문각(효민제), 2대 명제(명제), 3대 무제를 옹립하면서 권세가 극에 달했으나, 돌궐과 동맹을 맺고 북제 정복을 시도하다 실패한 뒤 무제의 책략에 의해 주살 당했다.
572년 친정을 시작한 무제는 거대한 권력과 재산및 토지를 소유한 도교와 불교를 탄압해 재산을 몰수하고, 사도승이나 위장승 등을 포함해 일반 승려와 도사를 병사로 징병했다.
한편 관위의 유교, 불교, 도교을 모아 3교의 연구기관으로 통도관을 설치해 우수한 승려나 도사를 학사로 수용하였으며, 이를 종교에서는 '삼무일종의 폐불' 제2 번째라고 한다.
무제는 강력해진 국력을 가지고 575년 북제를 공격했는데, 북제는 후주로 인해 반격하지 못하고, 577년 멸망했다.
이 후 무제는 남조의 진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578년 친정 도중에 병사했다.
뒤를 계승한 선제는 무제의 엄한 교육을 원망해서 아버지의 관을 향해 “너무 늦게 죽었어”라는 말을 뱉었다.
선제는 즉위 다음해 장남 우문연(정제)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으나, 선제는 기준도 없는 무의미한 토목공사를 하고, 주색에 빠졌기 때문에 인망을 잃었다.
그 때 그를 대신해 기대를 받은 사람이 12대장군 중 한 명인 양견(양견; 후에 수나라의 문제)이었는데, 양견의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었기에 양견은 외척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정제가 즉위하고 580년 선제가 죽자 섭정을 한다는 이유로 전권을 장악한 후, 다음해 581년 정제를 압박해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고 북주를 멸망시켰다.
- 화남(華南) 지역의 국가 계승
. 송(宋)
420년 평범한 나무꾼에다 노름꾼인 유유가 군에 입대 후 성공하여, 동진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했다. 건국 직후 북쪽은 북위가 화북 통일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남쪽은 평화로워 3대 문제(文帝)의 30년에 가까운 치세는 원가의 치(元嘉의 治)라고 찬양받을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진시대부터 진행된 귀족세력의 강화는 황제도 귀족을 거스릴 수 없는 사태를 불러와서, 이 귀족제도로부터 소외된 한인(寒人)이라 불리는 계층은 황제와 황족의 편에 서서 권력을 얻으려고 준비했다.
문제는 453년 황태자에게 살해당했는데, 이 반역자들을 무찌르고 즉위한 이가 효무제로, 그는 귀족세력의 억제를 노려 세제의 개혁과 한인층의 등용을 추진했지만, 효무제 사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이 일어났다. 특히 6대 명제는 친족 28명을 살해하고, 신하도 의심하여 다수를 살해하는 폭정을 일삼아 송나라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제(齊)
이때 송나라의 창시자 유유와 함께 군사에서 공적을 세우며 등장한 이가 소도성으로, 소도성은 명제의 뒤를 이은 폐제 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한 후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소도성의 뒤를 계승한 2대 무제는 여러 번 북위를 공격했으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무제 사후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져 소도성의 조카 소(명제)가 즉위했으나, 그 사이 북위에게 산동을 포함한 회하 이북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소보권(동혼후)이 즉위했으나 극단적인 측근 정치를 실행하면서 명제 시대의 중신들을 살해하며 정치를 어지럽혀서, 이에 대항해 여러 번의 반란이 일어났고, 500년에 일어난 소연(양의 무제)의 반란은 동혼후의 동생 소보융(화제)을 옹립해 건강으로 진군하여 포위하였고, 다음해 동혼후는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 양(梁)
건강에 입성한 소연은 다음해인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하였다.
무제(소연)는 범운과 심약(송서의 편찬자) 등의 한인층을 등용해 귀족제도를 멀리하고, 새로운 인재를 구했으며, 구품관인법 등의 귀족층에게 유리한 제도를 개혁하고, 관위의 상하를 품으로 부르는 것을 고쳤다. 또한 조세의 낮추고 이때까지 사용한 서진 시대 이래의 태시율령(泰始律令)을 대신해 새로운 양률과 양령을 제정했다. 문화에도 깊은 조예를 보여 남조 역사에서 최전성기의 문화를 이뤘다. 특히 무제의 장자 소명태자에 의해 편찬된 문선(文選)은 현대까지 명저로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치세 후반에 불교에 극단적으로 심취하여 여러 번 사찰에 투신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은 거액의 돈을 사용하여 무제를 데려왔다. 거기에 사용된 금액은 무려 1억 전에 달했는데, 이 돈이 국고에서 지출되면서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이때 동위의 하남장관 후경이 귀순을 요청하여, 대신들 사이에 반대의견이 많았으나, 무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출병했으나, 동위에게 패배하여 하남은 동위에게 돌아갔다.
패배한 무제는 생각을 고쳐 동위와 화해에 나서게 되자, 목숨이 위태롭게 된 후경은 548년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하고, 무제를 붙잡아 굶겨 죽였다. 이것이 바로 후경의 난이었다.
무제 사후 3남 소강(간문제)이 뒤를 이었으나, 후경은 551년 황족 소동(蕭棟)을 옹립했고, 곧이어 그를 폐위하고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 불렀다.
이 반란에 각지의 여러 왕이 자립해 스스로 황제라 칭했는데, 그 중 형주에 있던 무제의 8남 소택(원제)은 부하 왕승변을 파견해 후경을 죽이고 강릉에서 즉위했다. 이윽고 촉에서 황제를 칭하고, 강릉으로 진군하던 동생 소기를 552년에 격파했다. 그러나 554년 옹주자사 소찬이 끌어들인 서위의 대군 앞에 소택은 패배해 죽고, 소찬은 강릉에 들어가 황제가 되었다.
이 소찬의 정권을 후량(後梁)이라 부르지만, 실제는 서위의 괴뢰정권에 불과했다. 또한 이때 촉도 서위에게 점령되었다.
원제의 사후 왕승변과 더불어 원제의 무장이었던 진패선(진의 무제)은 건강에서 원제의 9남 소방지를 옹립했으나, 동위를 대신해 들어선 북제가 이에 개입해 북제의 포로로 있던 소연명을 보냈다. 왕승변은 그를 받아들여 소연명을 옹립했으나, 진패선은 이에 반대해 소방지를 그대로 옹립하여, 왕승변과 진패선이 다투어 진패선이 승리하여 소방지가 옹립되어 경제(敬帝)가 되었다.
. 진(陳)
557년 진패선은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건국했지만, 이 시점에서 진나라는 촉 지역과 강릉을 중심으로 한 형주 북부를 빼앗겼고, 거기에 국내에는 반대 세력이 남아 있었다.
진패선은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생애를 보내다 559년에 사망하여, 그의 형이 그 뒤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문제(文帝)다.
문제는 무제의 방침을 고수하고 국내의 반대 세력을 제압했다.
566년 문제 사후에 문제의 동생이 문제의 아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선제(宣帝)가 되었다. 선제는 북주와 함께 북제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쳐 출격하여 회남을 획득했으나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에게 패배해 회남을 다시 상실했다.
이후 582년 진숙보(후주)가 즉위하면서 정치를 등한시하고 놀기만 하여 나라가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이 때 화북을 통일한 북주를 대신해 정권을 차지한 수나라의 문제는 통일을 향해 신중하게 움직여 북쪽의 돌궐에 대해 만리장성을 복구하고, 장강에 버려진 운하를 정비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뒤 괴뢰국가인 후량을 멸망시켜 직할령으로 했다.
준비가 끝난 문제는 588년 차남 양광(양제)을 총사령관으로 총병력 51만 8천 명의 대군을 보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함락해, 우물 속에 숨었던 후주를 사로잡아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서진이 멸망한 때부터 273년이란 긴 분열의 시대였고, 서진의 짧은 통일기간을 제외하면 400년에 가까운 분열을 겪었던 중국은 재통일에 이르렀지만, 수나라의 통일도 2대 양제의 시대에 빠르게 무너졌다. 그러나 그 뒤를 계승한 당나라는 다시 중국을 재통일 한 후 약 300년간 지속하였다. 이 기나긴 분열의 시대에 생겨난 유형무형의 통일에 대한 기운이 다시 분열을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 수(隋)나라 (수도는 서안(西安), 양(楊)씨 왕조) AD 581 ~ 618년 ; 37년간 존속
남조(南朝)의 진(陳)나라를 정복하여 4세기 이래 남북의 정치적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주변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에 힘썼으나 단명했다.
수나라의 국명은 창건자 양견(문제)이 수국공(隨國公)이었던 데서 유래한다. 수나라의 황실 양씨는 한대(漢代) 이래 명문으로 유명한 홍농군 양씨 출신이라지만 확실치 않다. 기록엔 북위시대 장성 북변의 무천진(武川鎭 지금의 내몽골)에서 국경을 방위하던 군인집안으로 비(非)한족의 피가 많이 섞였다. 양견의 아버지 충(忠)은 우문태 등과 서위정권(西魏)을 창건하고 부병제(府兵制)를 창설하여 24군의 대장군을 지냈다.
양견은 541년에 태어나 무인귀족의 자제답게 북주의 관계를 두루 거쳐 근위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딸이 북주 선제(우문찬)의 황후가 되자, 선제시대에 외척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선제가 죽자 측근 관료들이 유조(遺詔)를 날조하여 양견에게 어린 황제의 후견인이 되게 하여, 양견은 승상이 되어 반대파를 제거하고 수나라를 창건했다.
문제의 치세는 개황(開皇)과 인수(仁壽) 두 연호로 이루어지며, 개황시대는 고경, 소위 등의 명재상을 중용 했고, 문제도 정치에 힘썼으므로 개황의 치(治)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행정·군사 양면에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여러 획기적 정책을 실행했으며, 가장 큰 사업은 남조 진나라의 정복이다.
남조는 이미 양(梁)나라 말엽 양쯔강 중상류지역을 북주에 빼앗겨 수나라가 이를 계승하여, 진나라는 양쯔강 하류지역 일대를 근거로 삼는 데 그쳤다.
수나라는 진왕(晉王) 광(廣;뒤의 煬帝)을 행군원수로 하고 고경이 작전을 지도하여 진나라에 침입하여, 589년 수도 건강(建康;지금의 南京)을 점령 멸망시켰다. 이로써 중국은 3세기 만에 통일되었다.
수나라의 통일정책은 정치상의 통일지배에 그치지 않고, 문벌세력이 전통적으로 간직해 온 사회적·정치적 독립성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의 일원적 통치조직을 정비하는 데 힘을 모아 주·군·현의 지방행정제도를 주·현으로 정리하여 중앙집권정치를 강화했다. 동시에 지방문벌이 본적지에서 지방관에 임명되는 관행을 고쳐 지방의 간부관료는 중앙에서 파견하여, 문벌귀족과 지역사회의 결합을 단절시켰다. 또한 문벌본위에 빠졌던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폐지하고 획기적 과거제도를 창설했다.
진나라를 평정한 뒤 병적상 일반 주, 현민과 구별하던 부병을 일반 민적에 편입 병민일치방식으로 고쳐 중앙집권화 했다.
지방명망가에게 일종의 사회사업으로 위임하던 흉년대책도 고쳐 의창제도(義倉制度)를 창설했다.
균전제(均田制)·조용조(租庸調) 제도도 정비되어 당대(唐代)에 완성된 율령체제의 기초를 다졌다. 문제는 검약에 힘쓰고 국력에 충실을 기하여 그의 20년 치세 동안 국가는 부강해졌다.
진나라를 평정할 당시 400여 만에 불과했던 민호(民戶)가 급속히 증가하여, 양제 때인 609년엔 890만호에 이르렀다. 이 같은 견실한 정치방향이 개황말엽엔 흔들려, 오랫동안 문제를 받들던 고경 일파에 대해 비난이 높아져 그들은 하나하나 실각했다.
문제는 진왕 광과 그 측근의 책모에 빠져 태자 용(勇)을 폐하고 광을 태자로 봉했으며, 연호를 인수로 바꾸고 문제가 죽자 604년 광이 즉위했으나, 그는 호사를 좋아하고 자신의 뜻대로 일을 강행했다.
그러나 욕망에 의한 그의 사업이 후세에 공헌했던 것도 있는데, 문제는 장안이 있는 관서지방에 대흥성을 건설했으나, 양제는 뤄양(洛陽)에 도성을 쌓고 동경(東京)이라 이름하며 대운하사업을 일으켰다. 이미 문제 때 우문개에 명하여 위수강을 끌어 대흥성에서 퉁관에 이르는 광통거를 개통하고, 화이허강과 양쯔강을 연결하여 한거우를 개설했지만, 이에 더하여 위수강과 곡수를 황허강으로 끌어들여 황허강과 화이허강을 연결하고 수년 뒤 다시 황허강에서 탁군(북경지역)에 이르는 영제거와 양쯔강에서 남쪽 회계에 이르는 강남하를 개통시켰다.
한거우 남단에 있는 장두는 양제가 가장 애호했던 이궁(離宮)이며, 전국에 40여 이궁을 두었다. 동경에서 장두에 이르는 운하를 이용한 황제의 행차는 후궁· 문무백관· 승려· 외국사신· 군대 등이 함께 한 방대한 이동으로, 처음과 끝이 80㎞에 이르렀다.
문제의 강남정복과 양제의 대운하사업은 중국의 남과 북을 잇는 2대사업이었다.
진나라를 평정하자 영남의 추호세씨가 항복하고, 수나라는 이를 발판으로 광시의 소수민족을 제압하기 위해 출병했다. 북방에는 강성한 돌궐이 수나라 건국시 대군으로 쳐들어왔으나, 수나라는 내분을 이용하여 돌궐을 이간· 분열·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양제는 대외경략을 더욱 적극화하여 유구(지금의 대만)를 정복하였으며 적토국으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 그리고 고창·이오 등의 서역을 정복하고 토욕혼은 양제가 친정하여 항복시켰다. 이 무렵이 수나라의 최성기였으나, 동북방면 특히 고구려는 돌궐과 통교하며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했다.
절대권위를 떨치려는 양제는 그들의 완전제압을 기도하여, 611년 2월 고구려 정벌령을 내려 130만을 동원하여 양제가 친정에 나서 랴오허강을 건넜지만, 고구려가 철통같이 수비하여 접전했으나 대패했다.
613년 재차 친정을 시도했으나 요동성을 공략하지 못하면서 국내에 반란이 일어나 퇴각했다.
614년 세 번째 출병을 하려했으나 실행치 못했는데, 돌궐은 수나라의 내란을 틈타 다시 독립하고 강성해져서 615년 북방을 순방하던 양제를 옌먼에서 포위하는 등 공세에 나섰다.
결국 수나라는 내란으로 망했지만, 그 계기는 고구려 원정에 의한 군수물자 징발과 운반으로 고충을 겪은 민중의 반란과 양제의 독재에 항거한 귀족반란이 내란으로 번졌다.
태원을 자키던 이연은 이들을 진압하고 건성· 세민(世民) 등의 아들과 거병하여 장안을 점령한 뒤, 양제의 손자 유(侑)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양제가 장두에서 친위대의 손에 살해되자 유를 폐하고 618년 당조(唐朝)를 창건했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한 것은 문화를 크게 특징지었다.
유학은 남·북이 다 같이 훈고학(訓古學) 시대였지만, 북학은 후한(後漢)을 따라 소박했고 남학은 위·진을 이어받아 화려한 학풍으로, 수나라 통일 후 남학이 북방에 들어가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는 북주 말엽 무제의 폐불 정책이 철폐되었으나 수대가 되자, 문제는 불교보호정책을 취했고 양제도 독실한 불교신자로 불교계는 흥성하였다. 문제는 대흥성에 대흥선사를 두고 전국 불교의 본거지로 삼았으며 여러 곳에 사리탑을 세웠다.
도교의 경우 대흥선사에 비길 만한 현도관을 세웠다. 양제가 진나라를 평정하기 위해 강남에 갔을 때 양저우에 불사와 도관을 세우고 강남의 도·불 양교계에서 도사와 승려를 초빙했는데, 이를 계기로 강남불교가 북방으로 들어가 성황을 이루었다.
삼륜종의 길장, 천태종의 지의(天台大師) 등은 강남 출신이며 양제의 후원으로 교세를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