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의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의 비극
아시아에서 호주에 이르는 호주 북동쪽의 서태평양에 전설적인 명성을 지닌 나우루(Nauru) 섬이 있다.
나우루 섬은 1798년 세상에 알려진 이후 호주, 독일, UN등 그 주인이 계속 바뀌다가 1968년 1월 31일 공화국으로 독립한 나라로서, 총면적 21km²에 14,000명(2005년 기준)에 불과한 국민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이며, 기후는 뜨겁고 극단적으로 다습한 기후가 연중 계속되는 나라다.
전체적으로 지형이 평탄하며 최고점이 70m를 넘지 않고, 1980년대 초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였지만, 현재는 섬에 메넹호텔과 아이워호텔로 두개의 호텔이 있어도 관광 수입도 적은 편이고 실업률은 90%에 달하며, 노동자 중 95%가 정부에 고용되어 있는 나라이다.
나우루섬이 전설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섬에 지천으로 널린 똥 덕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똥이 아니고 새똥으로, 호주 북동쪽 솔로몬 군도, 마샬 제도 근처에 위치한 나우루섬은 북반구, 남반구를 오가는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수 만년동안 이 섬에 들른 새들은 열심히 똥을 싸댔고 오랜 시간 산호층과 배합된 이 새똥들은 비료의 중요한 재료가 되는 인광석으로 쌓여갔다.
1899년 우연히 이 섬의 인광석이 발견되면서 나우루섬은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바다새똥이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인광석은 인산염 순도 20%만 되어도 함량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즉, 비료 원료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에도 이런 인광석이 있지만 인산함량이 낮아 상업적 가치가 없다. 하지만 나우루섬에서 발견된 인광석은 인산 함량이 무려 100% 에 달했다. 전 세계적으로 비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원자재의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 하에서 순도 100% 인광석이 5억 톤이나 매장된 나우루섬은 말 그대로 노다지였다.
이 사실을 알고 눈이 뒤집힌 독일, 뉴질랜드, 영국, 호주 등 열강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눈썹 휘날리게 이곳으로 달려들었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화해하는 동안 나우루섬의 인광석은 1907년부터 본격적으로 채굴이 시작되어 1960년대 초에는 채굴량이 년간 백만톤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땅주인인 원주민들에게 돌아간 이익은 톤당 40달러에 달하던 인광석 가격의 1.6%에 불과한 0.65달러였고, 이권의 대부분은 싸우는 대신 사이좋게 나눠먹기로 합의한 열강들에게 돌아갔다. 나우루인들이 보기에 죽 쒀서 개주고 있었던 셈이다.
1968년 1월 31일, 굴욕의 세월을 보낸 나우루는 드디어 오랜 신탁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했다. 원주민 유학생 1호 해머 드로버트(Hammer Deroburt)를 대통령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나우루는 UN으로부터 정부수립을 인정받고, 인광석 채굴사업을 제일 먼저 국유화했다. 바야흐로 인광석 채굴의 모든 수입이 고스란히 나우루 공화국의 국고와 국민들의 통장으로 꽂히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1970년 초 터진 석유파동은 원자재 가격과 인광석 가격을 미친듯이 올려놓았다.
나우루는 자고 일어나면 불어나는 금덩이를 만드는 도깨비 맷돌을 깔고 앉은 셈이었다.
연평균 9,000만 ~ 1억2,000만 달러의 채굴 수익이 들어왔고, 당시 인구 4,000명에 불과했던 나우루 공화국 주민들은 1인당 2만 달러 이상의 배당금을 매년 지급받았다. 당시 2만 달러는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최소 1억 5천 만원이 넘는 큰돈으로, 나우루 국민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른이든 아이든 매년 이 금액을 지급받았다.
4인 가족이면 놀고먹어도 매년 6억이 입금되는 나라, 독립과 더불어 나우루 사람들은 새똥 더미 대신 돈 더미 속에 파묻혔다.
화끈한 나우루 정부는 이 배당금외에도 전기, 병원, 교육, 유학비용등 거의 모든 공공비용을 무상으로 국민들에게 제공했고 심지어 가정부까지 국비로 파견했다.
세금은 거둘 필요조차 없었다. 국민이나 정부나 남는 게 돈이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전대미문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섬 일주 도로가 18km에 불과했지만 집집마다 여러 대의 자가용을 구입했고, 울릉도 3분의 1크기에 불과한 나우루엔 스포츠카에서 SUV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급차가 넘쳐났다. 타이어가 터지면 타이어를 가는 대신 새 차를 주문하는 사람도 있었고 달러를 화장지대신 쓰는 사람도 있었다. 세계 여행은 봄꽃놀이처럼 보편적인 일상사가 되었고 술 한잔 하러 호주까지 비행기타고 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생산 활동을 일체 중단한 나우루섬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수입에 의존했고 나우루 국민들은 시간과 돈을 가장 재밌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에만 몰두했다.
- 4시간이면 걸어서 한바퀴 돌 수 있는 나우루 섬 -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체하기 힘들만큼 국고가 가득차자 터무니없는 곳에 터무니 없는 금액의 돈을 투자하곤 했다.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폼나게 써대느냐가 이슈였다. 4,000명의 국민을 위해 보잉 737기를 포함, 총 다섯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나우루 항공(Air Nauru)을 설립했고 꼴랑 두세명의 승객을 위해서 일본까지 직항노선을 개설했다. 국영 나우루 은행이 설립되었고, 국민들이 수입하는 모든 화물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여러 대의 화물선을 가진 해운회사 나우루 퍼시픽 라인(Nauru Pacific Line)이 세워졌다. 해외 부동산과 호텔, 회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매입해댔고 가능성 없는 해외 뮤지컬에도 수백만 달러를 물 쓰듯이 투자했다. 1977년 1월, 호주에 183미터 높이의 나우루 하우스 빌딩을 건립했고, 멜버른 퀸 빅토리아 병원을 5,000만 달러에 매입했으며 5,200만 달러에 서던 크로스 호텔을 사들이고 양조장을 사는 데 2억 5천만 달러를 썼다. 시드니 머큐어 호텔도 매입했고, 1980년엔 호주 브리즈번에 125만 달러를 투자해 미식축구 불독팀을 창단하기도 했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어마 어마한 나우루의 돈들이 뿌려졌고 나우루 인들은 어딜 가나 큰 손으로 대접받았다. 투자를 위한 경제적 타당성 조사나 가치평가는 없었다. 국민들과 대부분 친인척 관계로 얽혀있던 정부 각료들은 국고를 맘대로 사용했고, 국민들도 돈이 떨어지면 정부기구에 가서 현금을 요구할 정도로 돈이 똥처럼 흔했다. 그 상태로 30년이 지나자 나우루 사람들은 집안 청소하는 방법도, 요리하는 법도 모두 다 잊어버렸다. 섬나라 나우루엔 어선이 사라졌고, 비디오에 밀려 전통 문화가 없어졌으며 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종되어 버렸다. 그저 먹고 놀고 싸고 여행하는 습관만 남게 되었다. 3보 이상 승차에, 모든 것을 사먹었던 나우루인들의 80%가 비만에 시달렸고 그 대부분이 당뇨병을 얻게 되었다. 나우루 공화국은 국민소득 1위 국가이자 비만율, 당뇨병 사망율 1위 국가로 자리 잡았다.
- 세계 비만도 순위에서 부동의 1위인 나우루 주민의 일반적인 몸매를 가진 어부의 모습 -
세월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새들이 똥을 싸는 속도보다 그 똥을 파내는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새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한번 시작된 사람들의 탐욕과 나태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1990년대 전 국토의 80%를 파헤쳐 인광석을 채취한 나우루 공화국의 수입은 연간 생산량이 50만톤 이하로 감소하면서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정부는 불안해하는 국민들에게 나눠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팔기 시작했다. 좌석 점유율이 20%도 안 되던 항공사 항공기들과 해운회사 선박들을 팔고 해외 부동산들을 헐값에 매각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항공사, 해운회사, 은행 모두가 파산했고 여기 저기 외국에서 자금을 차입한 나우루 공화국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97년 광산활동은 최소한의 규모로 축소되었고 조세천국, 여권 판매, 호주 난민 수용소 유치 등으로 새로운 수입을 만들어내려던 나우루 정부는 설상가상 국제적인 신임도마저 잃었다. 이젠 나우루 정부에 돈을 빌려주려는 곳도 없었다. 파티는 끝났지만 남은 쓰레기를 치울 사람도, 어떻게 치우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나우루 섬 주변엔 풍부한 어류 자원이 있었지만 나우루에선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어선도 없었다. 전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간 로또 덕에 전 국민이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전히 정부가 국민들의 생활비를 지원했지만 그 금액은 보름마다 140달러로 급감했다. 과거 30여년간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군림했던 나우루가 빈곤국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가난해진 나우루인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청소하는 법, 요리하는 법, 아기를 양육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했고,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했다. 식사는 사먹지 말고 직접 해먹자는 운동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남아있는 인광석을 탈탈 긁어서 다시금 채굴활동을 개시해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 인광석을 채취하는 광경 -
무엇이든 생산 활동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지금의 나우루 사람들은 1968년의 나우루 인들과 너무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하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국민들에게 일하려는 의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나우루 인들은 자신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선사한 새똥 덕에 나태함과 무기력마저 얻게 된 것이다. 일하려는 의지가 사라진 나우루에서 가난과 비만은 쉽게 걷어낼 수 없는 과거의 상처로 남아있다.
2006년 기준 나우루 공화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년간 3,700달러로 세계적 빈곤국 수준이다.
30년 넘도록 편하게 사는 데 익숙해져있던 나우루 인들은 이젠 지나치게 비대해져 버린 몸을 뒤뚱거리며 다른 나라에선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을 배워보려 애쓰고 있다. 그들의 시도가 결국 도로위의 새똥처럼 말라 비틀어져 버릴 지 아니면 순도 100%의 인광석으로 재탄생 할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