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靑松) 가는 길
조 향 래(趙珦來)
매일신문 경북북부지역 본부장
삶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삶이 그러하듯 길에도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이어주는 둔덕이나 산등성이가 바로 고개이다. 삶의 길에서 만나는 고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그리움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만남과 이별 그리고 출향出鄕과 귀향歸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아리랑 고개 또한 그렇다. 실재 있었다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아리랑 고개는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이 우리 겨레가 수도 없이 넘어야했던 삶의 고개였다.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더러는 그믐달 처연한 밤길을 좌절의 아픔을 되새기며 넘거나, 별빛 영롱한 신새벽 새로운 희망을 머금고 넘어가는 고개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삶의 길이 있는 곳에 고개가 있었고, 고개는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이자 연결고리로 우리 삶의 보금자리를 껴안아주거나 그 지평을 넓혀주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유난히도 고갯길이 많았고 게다가 그 대부분이 꼬부랑길이었다. 이 꼬부랑 고갯길이야 말로 산등성이로 가로막힌 두 지역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사람과 물자가 넘나드는 통로였다.
이같은 고개의 다른 이름이 바로 재다. 재는 그 의미상 고개보다는 좀 더 큰 산을 넘어가는 길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청송에는 유명한 재가 두 곳이나 있다. 그 하나가 노귀재요 또 하나가 삼자현재이다.
내 고향 안덕安德을 기점으로 보면 대처인 대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노귀재를 넘어야 했고, 군청 소재지인 청송읍으로 가기 위해서는 삼자현재를 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노귀재와 삼자현재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호랑이와 산적이 출몰하고 버스가 굴러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던 재는 분명 범접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청소년기가 되면서 그 재는 삶의 영역을 더 넓히기 위해 넘어야 하는 고난과 희망의 고갯길이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진학 예비고사를 치른 후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밤새워 넘던 노귀재는 멀고도 험한 자갈길이었지만 극복할만한 고갯길이었다. 청송읍에서 체육대회 행사를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다가 막차를 놓치는 바람에 캄캄한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넘던 삼자현재 또한 두려움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승용차를 타고 편안하게 넘나드는 정겨운 드라이브 코스가 된 노귀재와 삼자현재. 그러나 큰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청송 가는 길이 외지인들에게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모양이다.
청송 출신 작가인 김주영 선생이 언젠가 ‘문학기차여행-청송 가는 길’ 출발에 앞서 서울역 기차 안에서 여행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했다는 이 말 또한 꼬부랑 고갯길이 많은 청송의 지역적 특성을 상징하고도 남는다.
“여러분은 지금 대한민국 육지 안에서 가장 산골로 가고 있습니다. 청송靑松으로 가는 길은 거의 독도獨島로 가는 길에 비유할 수도 있지요. 그만큼 한 번 찾아가기가 힘든 곳입니다...”
‘청송 가는 길’에 나선 도회지 사람들은 그야말로 기차를 타고 먼길을 와서는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구불구불한 오르막 내리막길에 온몸이 흔들리며 졸다가 깨다가를 거듭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청송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김주영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객주客主’의 배경인 청송,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무대인 주산지가 있는 청송, 청송 가는 길이 아직도 그렇게 멀고 험하기만 한지 청송에서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생경한 기분마저 든다.
하긴 얼마전까지만 해도 ‘청송’하면 ‘골짜기’라는 뒷말이 따라붙었고,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청송이 고향이라고 하면 ‘출세했다’는 농담이 뒤따랐으니, 청송가는 길에서 느끼는 심리적인 거리감은 여전한 듯하다.
대구에서 청송읍까지 가는데 6~7시간씩이나 걸렸던 20여년전 비포장길 시절과 비교 한다면 요즘이야 상전벽해桑田碧海나 다름없는 변화가 있었지만, 청송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험준한 재를 두개씩이나(노귀재는 터널이 개통되었다.) 넘어야 하기 때문에 ‘청송 가는 길’은 지금도 심리적·육체적 부담감이 적잖을 것이다. 청송은 기찻길과 고속도로가 없는 전국의 몇 안되는 군郡지역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도로가 비록 비포장은 면했지만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의 신작로 그대로인 것도 청송이 오지奧地라는 형용사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물며 도로가 포장되기 전인 근년에만 해도 대구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청송지역 학교로 첫 부임해 가던 여교사들이 높고 험한 재를 넘으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토록 첩첩산중에 어떻게 머물 것이며, 과연 돌아올 수나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다는 것이다. 노귀재에는 열악한 교통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20여년 전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 ‘맨발의 행군’을 결행한 유명한 일화도 남아있다.
청송읍에서 부남·현동·안덕·현서를 거쳐 영천·대구로 이어지는 유일한 교통로의 포장공사를 이끌어내기 위해 국회의원이 맨발의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북진을 하다가 큰 재를 만나자 되돌아갔다는데서 유래한 노귀재.
‘왜군이 돌아간 재’를 ‘노비가 돌아간 재’로 애써 격하해 ‘노귀奴歸재’라 불렀다고 하지만, 실은 험준한 산세를 대변했던 이곳에 지금은 도로 직선화를 위한 터널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노귀재를 넘어 청송읍을 60리쯤 앞두고 넘어야 하는 높은 고갯길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삼자현재이다. 이름 그대로 적어도 세사람은 만나三者峴 동행을 해야 넘을 수 있었다는 이 고갯길 또한 머잖아 터널이 뚫리면서 기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청송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모두 2차선으로 너무 꼬불꼬불해 모처럼 청송을 찾는 관광객들이 차멀미에 온몸이 파김치가 되기 일쑤입니다. 도로여건 개선 없이는 지역 발전을 위한 그 어떤 사업도 무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어요...”
고향 선배이기도 한 청송 군수님의 하소연에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험한 산길에 터널이 뚫리고 굽은 도로가 곧고 넓게 펴져서 청송이 ‘교통오지’란 오랜 오명을 떨치고 그 아름다운 자연과 순후한 인심을 두루 나눌 수 있음은 분명 반길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노귀재와 삼자현재의 그 꼬부랑 고갯길이 사라지는게 웬지 서운하다. 환경론자들의 입장처럼 순박한 고향사람들과 무공해 청정지역이 개발로 오염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백년 묵은 왕버들나무가 손짓하는 주산지의 새벽 안개와 수달래가 처연하게 피어나는 주왕산의 기암괴석과 폭포, 속병을 치유한다는 달기·신촌 약수물과 닭백숙, 선비의 자취가 어린 방호정과 백석탄白石灘을 경유해 길안천으로 이어지는 해맑은 신성계곡, 늦여름 햇살에 꿀사과가 무르익어가는 산자수명한 청송의 산하를 찾는 길에 꼬부랑고갯길이 없다면 뭔가 허전할 것 같다.
내 생애의 청송 가는 길은 그리움의 여정일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할머니를 따라 영천에 있는 고모집에 가면서 처음 넘던 고갯길, 6학년 때 난생 첫 서울 구경을 하기 위해 벅찬 가슴을 안고 넘어서던 길, 중학교 시절 남해의 한려수도 수학여행 길에 처음 바다를 본다는 설레임을 안고 굽이돌던 길, 대구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청운의 꿈을 싣고 넘나들던 길, 강릉 경포대의 갯내음이 밴 군복을 입고 오가던 휴가길, 처음 마련한 승용차에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를 태우고 느꺼운 마음으로 넘어가던 귀향길, 오랜 암투병 끝에 스러져간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눈물로 돌아가던 고갯길 ....
청송 가는 길은 그렇게 좌절과 아픔으로 점철된 회한의 길이기도 했지만, 꿈과 희망을 보듬고 넘나들던 그리움의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 또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영면永眠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머잖은 앞날, 오랜 타향살이를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중나온 아내처럼 정겹게 다가서던 노귀재 등성이길이 없다면, 구절양장 숱한 사연을 간직한 고갯길이 자취를 감추고 없다면 참으로 서운할 것 같다.
많은 청송인들의 애환이 서린 노귀재에 터널이 뚫리고 삼자현재 고갯길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이랴. 울면서 넘어왔다가 웃으며 돌아가건, 웃으며 넘어왔다가 울면서 돌아가건, 마을 어귀에 앞서 나타나는 고갯길은 오랜 정인情人의 눈길이요 옛 친구의 손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이 인적이 끊긴 산길과 하늘과 맞닿은 고개와 바닥모를 깊은 계곡을 따라 수백리 길을 하염없이 걸어서 이르던 청송. 이제는 그 길이 모두 넓게 포장이 되고 곧게 다리를 펴면서 고갯길에 스민 그리움조차 사라질까 두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