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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12지파연구
<12지파명칭>
1.르우벤(Reuben) 2.시므온(Simeon) 3.레위(Levi) 4.유다(Judah) 5.납달리(Naphtal6.갓(Gad)
7.아셀(Asher) 8.잇사갈Issachar) 9. 스불론Zebulun) 10. 요셉(Joseph) 11. 베냐민(Benjamin) 12. 므낫세Manasseh)
상실된 두 지파: 에브라임 (Ephraim)과 단 (Dan)
<12지파>
1. 르우벤 (REUBEN)
주께서는 개인의 성격을 따라서 이름을 지으신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근원인 야곱의 12 아들의 이름을 144,000의 12 분파의 이름으로 선택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성격에는 무엇인가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주께서 어떤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주셨을 때, 그 이름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야곱의 이름은 길고도 고달픈 씨름 끝에, 곧 하나님과 사람으로 겨루어 그가 이긴 뒤에야 비로소 “이스라엘”로 바뀌었다(창 32:24-28). 신약의 요셉도 하나님의 사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을 바쳤을 때, 그는 “바나바” 즉 “권위자”(勸慰子)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행 4:36-37). 144,000의 무리는 구주께서 오실 때 사람들 중에서 구속받을 사람들로서,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어린양이 어디를 가든지 따르는 자”들이요, 12 무리로 구분되어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행진할 자들이며, 각 사람은 이스라엘의 12 지파들 중의 한 이름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계 14:1-4; 7:4-8).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야곱의 12 아들에게 주어진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의지가 없다.
고대 이스라엘의 각 가정에서 장남은 그의 장자권으로써 그의 아버지의 유산에서 두 몫을 상속받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제사장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모든 참된 후손에게 있어서 세상의 어떤 지위나 부귀나 영화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영적인 생득권을 얻어 약속된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장자인 르우벤은 그의 백부인 에서처럼(창 25:34; 히 12:16) 장자의 특권을 가볍게 여겼으므로, 부주의한 순간에 장자로서 누려야 할 영적 및 현세의 축복을 영원히 상실해 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더불어 간음했는데, 이는 바울이 말한 “이방인 중에도 없는”(고전 5:1; cf. 창 49:4) 죄인 것이다.
이러한 죄로 인하여 이 지상에서 누릴 야곱의 두 몫의 상속은 요셉에게로 넘어갔고(대상 5:1),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신 33:8-11), 그리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특권은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주어졌다(대상 5:1-2).
운명 직전에 야곱은 장자로서 르우벤이 소유할 수도 있었던 성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창 49:3). 그러나 우리는 이 연만한 족장[야곱]이 그[르우벤]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도 있었던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물의 끊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라”(창 49:4)고 묘사했을 때, 그의 목소리에 어려 있는 슬픈 목소리를 상상할 수가 있다.
르우벤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근본적으로 그에게 부여된 “탁월한 품위”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합환채를 가져다 준 친절(창 30:14)이라든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을 때,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시도한 노력(창 37:21-22, 29; 42:22), 등이 이에 속한다.
르우벤은 격동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끓는 물”과 같았다. 형제들이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려고 했을 때, 르우벤이 베냐민을 안전하게 아버지에게 다시 데려오겠다고 맹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을 받지 못했던 사실을 보면, 야곱은 그의 말을 별로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가 어린 동생의 보증인이 되겠다고 약속했을 때, 야곱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다(창 42:37-38; 43:8-9).
르우벤의 불안정한 성격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물려진 듯이 보여진다. 이와 같이 이기적인 성격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정복한 처음 땅을 르우벤 지파가 소유하고자 원했을 때에도 드러났던 것이다. 모세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나, 그들의 요구대로 “요단 맞은편”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런 결과로 인하여 그들은 B.C. 740년, 앗수르의 왕 디글랏-빌레셀(Tiglath-pileser)에 의해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갔던 것이다(민 32:1-33; 대상 5:26).
야곱의 예언 즉 “너는 탁월치 못하니”라는 말은 르우벤 지파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이 지파 가운데서는 사사도, 선지자도, 영웅도 출현한 예가 없으며, 단지 다윗의 군대 가운데 용감했던 삼십 명의 부하와 더불어 아디나가 있을 뿐이었다(대상 11:42).
이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기 위해 헤브론으로 갔던 갓, 므낫세, 르우벤 지파로서, 레위 지파의 고라와 더불어 이스라엘 진영에서 반란으로 소요를 일으켰고, 그들의 멸망은 동일한 계획을 꾀하는 사람들에게 실물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민 16:1; 신 11:6).
르우벤 족속이 원하여 자리잡은 곳은 모압과 인접한 곳이었다. 그들의 도성 헤스본, 엘르알레, 기랴다임, 느보, 바알므온, 그리고 십마(민 32:37-38), 등은 이스라엘의 도시가 아니라 모압에 속한 것들이다.이처럼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나 국가적 신앙의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들이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저버린 것은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전에서 진멸한 그 땅의 백성들의 신들을 좇았다.” 그 후에는 한때 수리아의 왕 하사엘이 그들의 영토를 소유했다는 정도의 소식밖에는 르우벤 지파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듣지 못한다(왕하 10:32-33).
지파로서 그들이 소유한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기를 바라셨던 과업을
성취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자, 여호와께서는 불(Pul)과 디글랏-빌레셀(Tiglath-pileser)로 하여금 그들을 메소포타미아의 북부로 옮겨가도록 허락하셨다. 그곳에서 그들은 70년간의 포로 기간 끝에 12 지파의 대표자들이 약속의 땅에 다시 모이게 될 때까지 체류하였다.
이 지파의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의 실패를 기록한 것이다. 장자 르우벤이 지도자로서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모압의 국경 지대에 있던 르우벤 족속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했어야 했고, 이방인들을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횃불이 되었어야 했으나, 그들의 조상처럼 그들은 “끓는 물”과 같았다.
비록 그 족장과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르우벤이란 이름은 영원히 불멸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새 예루살렘의 진주문들 중 한 문에서 바로 그 이름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4,000 중에서 12,000명이 이 족속에 속하여 르우벤의 이름 하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어떻게 그 생애가 실패 투성이인 사람이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은 경건의 크나 큰 비밀에 속한다. 자신의 생애를 완전히 파선시켜버린 도둑이 어떻게 낙원에서 구세주와 함께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죄를 사유하시는 구세주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될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그의 고별 축복을 선포했을 때, 르우벤 지파에 대하여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수가 적지 않기를 원하노라”(신 33:6)로 선포하였다. 우리는 “물처럼 끓는” 성격의 사람이 어떻게 죽지 않고 살 수 있을른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르우벤이 추구한 진로는 어떻게 이러한 자가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해 준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의 표상이라고 일컫는 므깃도 전쟁 당시에 “르우벤의 지파 가운데서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삿 5:16)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르우벤과 같은 성격을 가진 남녀들이 무수히 많다. 그들은 “끓는 물”과 같아서 스스로 선을 행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러나 진지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살피기 시작한다면 그들의 자신들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그분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옛날의 르우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죽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실 것이다.
요 약
♤ 장자[권을 가진 자]는:
재산의 두 몫을 상속받고,
가정의 제사장이 되며,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다.
♤ 르우벤은 네 아들을 가졌는데, 그들이 르우벤 족속을 형성했다(대 상 5:3).
♤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지파의 인구는 43,730명이었 다(민 26:7).
♤ 르우벤 족속은 앗수르로 포로되어 갔다(대상 5:26).
?예언의 신?에 묘사된 르우벤
♤ 요셉의 생명을 구함
“르우벤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그들의 의도를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르우벤은 아우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것을 꺼려서 마음 속으로 그를 구원하여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요셉을 산 채로 구덩이에 던져서 거기서 죽게 버려 두자고 제의하였다. 그러고는 모두가 이 계획에 동의하도록 설득시킨 후에 르우벤은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까, 그리고 그의 진정한 의도가 발각될까 두려워 그 무리를 떠났다”(PP, 211).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왔으나 요셉은 거기에 없었다. 놀라움과 자책으로 그는 옷을 찢고 그의 형제들을 찾아가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하고 외쳤다. 요셉이 당할 운명과 그를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르우벤은 남은 사람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죄를 감추기로 하였다”(PP, 212).
♤ 르우벤의 죄와 장자권의 상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들었더라”(창 35:22).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에 다른 음침한 범죄가 야곱의 가족을 더럽혔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장자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의 특권과 명예를 상실하게 되었다”(PP, 206).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창 49:3).
“이와 같이 아버지는 장자로서의 르우벤의 지위가 어떠했어야 할 것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에델에서 범한 그의 무서운 죄가 그로 하여금 장자 상속권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게 만들었다. 야곱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라’(창 49:4).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 나라와 메시야의 허락은 유다에게, 기업의 두 몫은 요셉에게 배당되었다. 르우벤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서 결코 뛰어나지 못했다. 르우벤 지파는 유다, 요셉, 단처럼 수효가 많지 못하였고,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갔다”(PP, 235).
“고정된 원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이 유혹을 거절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유혹이 어떤 방면에서 어떤 형태로 오든지 간에 그들의 도덕적 능력을 강화시킬 만한 감화로써 그들을 감싸도록 모든 방도를 강구하여야 한다. 그들이 이같은 유익한 감화를 떠나서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 속에 놓여지게 되면 이내 곧 위에서부터 받은 참된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한다. 그들은 그들의 발이 허물어져 가는 모래 위에 놓여 있을 때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아온 것이다. 그들은 르우벤과 같이 결코 탁월하지 못할 것이다”(Lt 48, 1887).
♤ 르우벤 족속
“이스라엘의 두 지파 갓과 르우벤은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그들의 기업을 받았다. …
“열 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 ‘사만 명의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수 4:12-13). …
“여호수아와 다른 지도자들의 마음이 아직도 불길한 마음에 눌려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이상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강을 건넌 곳에서 가까운 요단 강변에 두 지파와 반 지파는 실로의 번제단과 비슷한 큰 제단을 세웠다. …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그들의 제단에 그것을 세운 목적을 지적하는 이름을 붙여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고 하였다. …
“르우벤인들과 그 동료들이 나타낸 지혜는 본받을 가치가 있다. 참 종교의 사업을 추진시키고자 정직하게 노력하였으나 그들은 잘못 판단을 받고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울분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기 전에 그들의 형제의 비난을 예의와 인내로 들은 다음 자신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나타냈다. 이리하여 그처럼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어려움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PP, 517-520).
“고라는 자기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는 회막 봉사에 관여하고 있었으나 제사장직에 오르기를 탐하였다. … 그의 목적을 더욱 확실하게 성취하기 위하여 그는 르우벤 지파 중 다단과 아비람을 그의 반역에 끌어들였다. 이 사람들의 이론대로 하면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기 때문에 모세가 찬탈하여 차지하고 있는 우두머리의 권한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이요, 따라서 그들은 고라와 함께 제사장직을 차지하려고 결심하였다”(3T, 344).
2. 시므온(SIMEON)
야곱의 둘째 아들인 시므온은 야곱이 별로 사랑하지 않던 부인 레아의 소생이다. 그는 격렬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므온의 생애와 그의 이름을 계승한 지파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오점들을 지니고 있다.
시므온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범죄는 세겜의 주민들을 살해한 것이었다(창 34). 레위도 이 악한 행위에 시므온과 함께 가담했으나 주동적 역할을 한 것은 시므온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죄악을 묘사할 때마다 성경은 시므온의 이름을 먼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전모를 살펴보면 슬픈 사연도 곁들어 있다. 세겜의 왕자가 야곱의 유일한 딸 디나를 능욕한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그 누이 동생이 그녀의 오라버니들, 특히 디나의 어머니인 레아의 소생들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의 죄를 꾸짖었을 때, 그들의 유일한 대답은 “그가 우리의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나이까?”(창 34:31)였다.
그들의 누이에 대한 애정이 그런 보복의 행위를 하게 한 것이다. 그들은 디나를 구하기를 원했는데, 왜냐하면 디나는 꾀임에 빠져 세겜 왕자의 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므온과 레위는 살육(殺戮)을 한 후, 디나를 집으로 데려왔던 것이다(창 34:26).
야곱이 시므온에게 전한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라도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기들의 유일한 누이 동생이 능욕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무서운 보복적 행위에 대한 그 어떠한 구실도 되지는 못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이 그의 마지막 축복을 받기 위해 임종하는 아버지 곁에 모였을 때, 죽어 가는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보고 약 40년 전에 있었던 그들의 살육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니라”(창 49:5-6a). 야곱은 마치 그의 이름이 이런 악행에 의해 계속해서 더럽혀질 것을 생각하며 떠는 듯 이렇게 말을 잇는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6b- 7).
이 두 지파는 “나누어졌으며 흩어졌다.” 그러나 얼마나 서로 다른 입장에 섰는가! 레위 족속은 종교적 교사로, 제사장으로 온 나라에 흩어져 영광스러운 위치를 차지했다. 시므온 지파가 분산되어 버린 것은 그 지파 자체 내에 부패시키는 요소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그것은 그들의 수를 감소시키고 마침내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유산마저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각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을 때, 시므온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다 지파의 몫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유산의 일부를 시므온 지파가 차지하도록 허용되었다. 그 후에 시므온 족속 중의 얼마가 새로운 영토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대상 4:27, 39, 42).
고대의 유대 학자들의 문서에 의하면, 시므온 족속은 그들의 땅에서 너무나 곤궁한 나머지, 그들 중의 대다수가 다른 지파의 땅으로 옮겨가 그들의 자녀를 가르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그들은 야곱 시대에 나뉘어 이스라엘에 흩어진 자들이었다.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했을 때, 시므온 지파는 59,300명의 장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두 지파만 이들보다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싯딤에서 다시 한번 계수했을 때는 겨우 22,000명으로 모든 지파 중에서 가장 연약한 지파가 되었던 것이다. 왜 이런 큰 변화가 일어났을까? 시므온 족속의 장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전장에서 생명을 희생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마음이 방자함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민수기 25장은 시므온 족속의 멸망에 관한 슬픈 역사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이 반역의 주동자는 시므온 지파의 족장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미디안 창녀들의 밥이 되었다. 참으로 “대저 그〔그 여자]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한 것이다(잠 7:26). 세 번이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부르심을 입은 솔로몬도 똑 같은 매혹적인 마력에 이끌리어 자신의 고결성을 희생시키고 말았다(느 13:26).
지금도 시간이 흘러간 해변에는 육욕적인 방종의 바위 위에 떨어져 깨어져 버린 인물들의 잔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우상 숭배로 이끌리기 전에 먼저 방탕한 자들의 먹이가 되었다. 음탕한 욕망이 마음을 다스리면 다른 죄악들이 쉽게 들어오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8).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정복한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잠 16:32).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축복할 때, 시므온의 이름을 빼버린 것은 싯딤에 거하는 주민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그가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을 때 이 지파가 차지한 위치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다만 두 개의 성경절에 그들이 아직도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의 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대하 15:9; 34:6).
시므온이 저지른 돌발적인 죄악들 가운데 나타난 그 동일한 기질, 곧 두려워할 줄 모르며 호전적인 기질이 유딧(Judith)의 생애 가운데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담고 있는 그 경외서(經外書)가 하나의 실제적 역사인지, 아니면 가공된 역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기록에 의하여 유딧은 그의 국가를 구출해낸 자들 가운데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항상 남아 있을 것이다. 야엘처럼 유딧은 적군의 지휘관을 살해했다(삿 4:21; 유딧 13:6-9). 그는 “나의 조상 시므온의 주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엄청난 업적을 얻을 용기를 얻었고, 또한 그의 기도 가운데서 세겜에서의 살육을 넌지시 언급하기도 하였다(유딧 9:2).
에스더처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유딧의 역사는 그녀의 조상인 시므온과 그의 후손들이 걸어간 악한 길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가짜-요나단?(Pseudo-Jonathan)이라는 타르굼(Targum)에 의하면, 어린 요셉을 죽이도록 계획한 사람은 시므온과 레위였으며, 요셉이 도단에 있는 웅덩이 속으로 빠뜨려지기 전에 그를 결박한 사람은 시므온이라고 한다. 이런 사건은 그들이 세겜 사람들의 살해를 계획하고 실행한 지 불과 2년 후에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요셉은 그들의 목전에서 자신을 묶어 살해하고자 시도했던 시므온을 볼모로 묶어 두도록 명령했다(창 42:19-24).
아마도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이런 살육과 죄악으로 유명한 자의 이름이 하늘 도성으로 들어가는 문들 중의 하나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며, 144,000명 가운데 12분의 1이 그의 이름을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가 천국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인에게서 난 자로서 죄가 없는 사람은 오직 예수뿐이다. 아담의 모든 가족 가운데 오직 그분만이 영원토록 죄의 흔적이 없는 생애의 기록을 가질 것이다. 그분의 생애의 기록 중 어떤 부분도 가리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상처 투성이인 우리의 생애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의(義)로 가리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가장 깊이 물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인자라도 하늘에 갈 수 있는데, 살인자로서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사 1:18)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에 사는 사람들 중에 죄악 중에서 나온 12,000명의 구속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시므온 지파에 접목될 것이며, 그들은 영원토록 새롭게 된 그 땅에서 그 지파를 대표하게 될 것이다.
요 약
♤ 시므온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의 자손들이 시므온 지파를 형 성하였다(창 46:10).
♤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지파의 수는 22,000명이었다 (민 26:12-14).
♤ 유딧은 시므온 족속에서 나온 유일한 영웅이었는데, 적군의 지휘관 을 살해하였다(유딧 13:6-14).
?예언의 신?에 묘사된 시므온
♤ 누이 디나의 사건에서
“시므온과 레위의 무모한 잔학 행위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세겜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은 중대한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의도를 교묘하게 야곱에게 숨겼고, 그들이 복수하였다는 소식은 그를 두려움으로 채웠다. 자기 아들들의 기만과 난폭한 행위로 인해 마음이 상한 야곱은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 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피비린내 나는 행위에 대한 슬픔과 염오는 거의 50년이 지난 후에 그가 애굽에서 임종의 침상에 누웠을 때 한 말 가운데 나타나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창 49:5-7)”(PP, 204-205).
♤ 시므온이 요셉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움
“그[요셉]는 다시 돌아와 시므온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하여 다시 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의 아우를 잔인하게 취급한 일에 있어서 시므온은 선동자(煽動者)요 주동자(主動者)였다. 그가 선택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PP, 226).
“그들은 기쁨으로 귀로에 올랐다. 시므온과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었고, 나귀들에는 곡식이 가득 실려 있었다”(PP, 229).
♤ 시므온 족속
“나이에 있어서 르우벤 다음은 시므온과 레위였다. 그들은 연합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였고, 또한 요셉을 파는 일에도 가장 죄가 많은 자들이었다. 그들에 관하여 이같이 선언되었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을 계수할 때에 시므온은 가장 적은 지파였다. 모세는 그의 마지막 축복에서 시므온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이 지파는 유다의 몫의 작은 부분밖에 가지지 못하였으나, 후에 세력을 얻은 그 가족들은 다른
주지를 만들어서 성지(Holy Land)의 변경 외곽에 있는 지역에 거하였다”(PP, 235- 236).
3. 레위 (LEVI)
레아가 셋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녀는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창 29:34)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레위” 즉 “연합함”(창 29:34 난외주)이라고 하였다. 레아는 자기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을 때, 그 어린 아기가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로 그 이름의 뜻을 성취할 것과 이스라엘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의 위대한 남편이신 만물의 창조주와 연합하도록 도와주리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사 54:5).
레위 지파의 필생의 사업이 레위의 이름에 예언된 듯하다. 사단이 이기심과 질투심을 통하여 레아를 그의 남편의 관심으로부터 떨어지게 했던 것처럼 그는 레위로 하여금 그들의 유일한 누이 동생인 디나에게 행해진 나쁜 짓에 대하여 보복하는 일에 시므온과 연합하도록 충동함으로써 그를 파멸하고자 했던 것이다(창 34).
야곱의 임종의 침상에서 그가 한 유언은 그 죄악의 엄청남과 하나님께서 그 죄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일을 회상했을 때, 나이 많은 그 아버지의 마음은 충격을 받았으며, 그래서 부르짖기를,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창 49:6-7a)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들이 하나의 강한 지파로 성장함으로써 그러한 죄악들을 영구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더 참을 수 없었다는 듯이,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b)라고 부르짖었다. 그것은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하여 그 행위를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저주까지도 축복으로 바꾸어[轉禍爲福] 주신다. 이것이 레위의 경우에 잘 나타나 있다(느 13: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 속에 있는 동안에는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파들보다도 뛰어난 어떤 특별한 탁월함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자가 한 가정의 제사장직을 갖도록 하는 원래의 계획이 시내 산 근처에 장막을 칠 때까지 계속된 것은 매우 명백하다. 그때에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제물을 드렸다(출 24:5). ?가짜-요나단?(Pseudo-Jonathan)이라는 타르굼(Targum)에 보면, 다음과 같은 뚜렷한 진술이 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장자를 보냈다.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도 아직 성막이 세워지지 않았고, 아론에게 제사장 직분이 주어지지도 않았으므로, 그 당시 예배는 장자들에 의하여 드려졌기 때문이다.”
성품이란 개인들이 일상 생활의 평범한 사건들을 대하는 방법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러나 그것이 시험되는 것은 그들이 생애의 위기들을 맞이하는 방법에 의해서이다.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위기들 중의 하나에 직면했는데, 바로 그때 이스라엘의 회중들은 금 송아지를 경배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멸하시려고 하셨을 때, 레위 지파가 앞서서 그들의 충성심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구하고자 조력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모세가 하산(下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송아지에게 경배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진영 문 어귀에 서서 외치기를,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나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출 32:26-28)고 하였다.
이러한 위기에 레위인들은 하나님과 그의 사업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욱 귀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형제, 친척, 친구들까지도 버려두고 그들은 하나님의 편을 택하였다. 이러한 충성의 보상으로 장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아들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불충실함으로 잃었던 것을 레위가 전 이스라엘 앞에서 보인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통하여 얻은 것이다.
야곱은 임종의 침상에서 레위의 죄를 꼬집었으나, 모세는 그의 고별 축복에서 다른 모든 지파보다 더욱 그를 높였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 부모에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신 33:8-11).
인류의 타락 이래로 각 가정은 예배를 위하여 그들 스스로의 제사장직분을 가졌었다. 그러나 예배의 방법을 변경시킬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주셨다. 곧 한 지파를 선택하여 세우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직분이 그들에게 주어지고 그들은 그 일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계수했을 때, 그들의 수효는 22,000명이었다. 그리고 레위 족속을 계수해 보니 22,273명이었다. 레위인들이 273명이 더 많은 셈이었다. 이들을 속(贖)하기 위하여 매인당 5세겔씩을 취하였다(민 3:46-49). 그런 후에 모든 레위인들은 그들의 필생의 직무를 위하여 따로 구별되었다.
민수기 3장에 보면, 레위 지파의 세 족속들을 모두 합했을 때, 22,300명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는 이 여분의 300명은 레위 지파 내에 있는 장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미 드려진 사람들로 다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성막은 보이지 않는 왕의 상징이었고, 레위인들은 왕을 수종 드는 궁정 수비대와 같았다. 백성들이 진을 쳤을 때, 레위인들은 신성한 천막의 수호자들이었다. 그들이 이동할 때에 성소에 딸린 모든 기물들은 레위인만이 운반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땅에 도착했을 때, 레위인들에게는 아무런 기업(基業)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거나 가축을 치는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안녕(安寧)과 복지(福祉)가 그들의 어깨에 놓여 있었다. 또 그들의 업무를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48개의 도성이 주어졌는데, 이 도성들은 12 지파의 전역에 산재해 있었고, 그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십일조가 사용되었다(민 18:20-21). 이렇게 함으로써 야곱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니, 곧 그들은 “야곱 중에서 나누[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졌다(창 49:7).
성전과 그 봉사의 역사는 레위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백성 중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는 레위인들에게 지정된 직무가 주어졌지만, 백성이 배교에 탐닉(眈溺)할 때는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레위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했다(느 13:10-11).
레위 지파도 다른 지파들처럼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항상 하나님 편에서 진실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당시까지 레위 지파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기 사도들 가운데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였다(행 4:36).
레위인들이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위기의 순간에서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은 신속한 결심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순간에 실패하는 것은 독립적인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신뢰하는 어떤 사람의 지도를 무턱대고 따르게 되었는데, 이는 자신들 속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 생애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항상 진리의 편에 굳게 서려는 사람은 하늘의 하나님과 분명한 연결을 가져야 하며, 인간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레위 지파 가운데서 가장 탁월했던 사람들 중의 두 사람은 모세와 아론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두드러진 대조점이 있었다. 모세는 계속적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저항하여 바위처럼 굳게 섰다. 그러나 아론은 보다 양순한 편이어서, 어떤 때는 거의 요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론이 비록 그의 동생과는 달랐지만,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아론이 당한 가장 큰 시련은 그의 두 아들이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였을 때였는데, 그들은 독주를 마시고 다른 불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이때 아론은 어떠한 슬픔의 표시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비록 자기의 친자식이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정한 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작은 시련이 아니었으며, 우리는 레위기 10:1-11을 연구한 후에야, 레위가 그의 생애의 초기에 살인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하나님이 아론을 “여호와의 성도”(시 106:16)라고 불렀는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144,000명 중에서 12분의 1이 레위의 이름 아래 모일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으나 그 묵은 죄악을 떠난 사람들로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선 사람들로 자비스러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풍성한 축복을 받을 사람들이다.
요 약
♤ 레위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의 후손이 그의 이름을 지닌 족속 을 형성했다(창 46:11).
♤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들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 모세와 아론은 구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레위인들이다.
♤ 바나바와 마가는 신약에서 가장 탁월한 레위인들이다.
?예언의 신?에 묘사된 레위
♤ 그의 품성
“시므온과 레위의 무모한 잔학 행위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세겜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은 중대한 죄를 범하였다. …
“나이에 있어서 르우벤 다음은 시므온과 레위였다. 그들은 연합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잔한 행동을 하였고, 또한 요셉을 파는 일에도 가장 죄가 많은 자들이었다. 그들에 관하여 이같이 선언되었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PP, 235).
“레위도 역시 그 땅 여기 저기에 널려 있던 48 성밖에는 유업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지파의 경우에 있어서는, 다른 지파들이 배도하였을 때에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성소의 거룩한 봉사에 대한 직분을 맡아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었다”(PP, 236).
“야곱의 아들 중에 레위는 가장 잔인하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으로 저 세겜 사람을 속여서 죽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죄 많은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 레위의 특성은 그 자손들에게 반영되어 저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회개하는 개혁을 일으켰고 다른 지파들이 배신을 자행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충성을 지켰으므로 그 저주는 변하여 최고의 영광을 받을 증거가 되었다”(Ed, 148).
♤ 그들의 찬미
“또한 느헤미야가 기록한 레위인들의 찬양의 노래에도 비록 이 거절과 추방의 세월 동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생생한 묘사가 있다: [느 9:19-21 인용]”(PP, 406-407).
“성막 제사 제도가 세워진 후에 여호와께서는 레위 지파를 온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성전 봉사를 행하게 하셨다”(DA, 51).
♤ 모세를 반역함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로 하여금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여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하였기 때문이었다. … 하나님께서 이렇게 레위 자손들을 영화롭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더 높은 직위를 탐하게 되었다. ‘그들이 함께 모여 모세와 아론
4. 유다 (JUDAH)
하늘의 기록에 있어서 이름이나 족보를 성품과 분리하여 생각할 땐 별 의미가 없다. 장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성품을 르우벤이 계발하지 못했을 때, 현세의 축복은 물론 영적인 축복도 그에게서 빼앗겼으며 그것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품을 계발하는 자들에게 넘어갔다. 애굽의 총리로서 탁월함을 보였던 요셉에게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두 배의 몫이, 즉 현세적인 장자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영적인 장자권을 얻는다는 것과 메시야의 조상이 된다는 것은 많은 재물을 관리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였다.
넷째 아들 유다에 대하여는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다고(대상 5:2) 말하고 있다. 야곱은 그의 임종의 침상에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마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창 49:10)라고 예언했다.
어떻게 유다가 모든 형제 중에 뛰어났으며 어떻게 영적 장자의 명분을 얻었는가? 이 문제는 위대한 영적 장자권을 얻어 영원한 유산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라는 모든 자들이 연구하여야 할 주제이다. 우리는 유다가 힘으로 그 형제를 제압했다는 기록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야곱의 열두 아들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가 그들 중에 선봉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베냐민에 대한 보증인이 되겠다고 제안했을 때, 야곱은 르우벤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지만,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도록 했던 것이다(창 42:37-38; 43:8-13).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애굽에 도착했을 때, 그는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창 46:28) 했다.
애굽의 총리가 볼모로 베냐민을 요구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심한 곤경에 빠졌을 때, 간곡히 호소하여 마침내 요셉이 더 이상 자기의 정체를 감출 수 없도록 한 사람도 유다였다(창 44:14-34; 45:1-3).
유다는 원칙에 성실함으로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나이 많아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유다에게 선언한 축복 속에 그 모든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
그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절했다. 그러나 서로의 상황은 달랐다. 요셉의 부와 지위는 타국에서 얻어진 것으로 그의 탁월성 때문에 얻은 것이지만 유다는 매일마다 접촉하는 가정 생활에서 날마다 그의 성실함을 통하여 그 형제들의 존경을 얻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환경의 강요에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찬양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도사린 이기적인 경향에 대하여 투쟁하고 승리하는 생애가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는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다.
르우벤은 실패한 그 동일한 상황 아래서 유다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르우벤이 장자권을 상실케 된 것은 어떤 대중에게 범한 죄가 아니라 가정 생활에 신실치 못했음에 기인한다(대상 5:1). 그는 자기 가족으로부터의 존경받는 일에 대해서는 중시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의 사생활에 대해 신뢰할 수 없었다. 동일한 유혹들과 환경으로 둘러싸인 동일한 가정에서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날 것”이었다(대상 5:2).
144,000 가운데 12,000의 사람들이 유다의 이름에 속하여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갈 것이다(계 7:5). 이들은 곤경 가운데서 신뢰받는 지도자로 인정된 사람들이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창 49:9). 이 말씀 속에서 야곱은, 유다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사자를 정복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완전함을 굳게 지키는 사람과 겨루는 것은 늙은 사자를 성나게 하는 것만큼이나 불안전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유다의 성품은 우리가 탐낼 만한 성품이다. 그 성품이란 우리의 신앙적 정절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사단과 그의 모든 군대들의 공격을 받을 때에,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실히 아는 확고 부동함이다(마 7:24-25).
유다는 요셉을 제외하고는 12 아들들 가운데 가장 자주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유다는 다섯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둘은 자녀가 없이 죽었다. 그러나 나머지 세 아들로부터 태어난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강성한 지파를 이루었다. 시내 광야에서 유다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는 74,600명이었다. 분명히 유다 지파는 싯딤에서 반역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설령 참여했다 할지라도 매우 소수만이 그 일에 직접 가담하였다. 그때 그곳에서 시므온 지파의 수는 크게 감소되었다. 이것은 유다 지파가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싯딤을 떠났을 때, 그들의 수는 76,500명이었음을 봐서 알 수 있다.
유다 지파는 그들의 선조가 그의 아버지의 가족 가운데서 그랬던 것 처럼, 다른 지파들 가운데서 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돌보는 책임을 위탁받았다. 제사장들인 아론의 가족들이 정주한 아홉 도성이 모두 유다와 시므온의 영토 내에 있었다(수 21:9-16). 레위인들이 점유한 마흔 여덟 개의 성읍들 중에서 나머지 성읍들은 그 외 다른 지파들의 영토에 널리 산재해 있었다.
유다는 독립된 족속이었다. 사울이 죽은 후, 그들은 다른 족속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를 유다의 왕으로 삼았으므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전에 칠 년 반 동안 그들을 다스렸다(삼하 2:4, 11).
솔로몬이 죽은 후에도 유다와 베냐민 족속은 다윗의 후손에게 충성스럽게 남아서 유다 왕국을 이루었다. 이 왕국은 북방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후 142년이나 더 지속되었다(왕하 17:6; 대하 36:17-20).
거룩한 도성이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주어졌었지만(렘 38:17, 20), 결국 그는 실패하여 유다의 왕족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왕권이 완전히 유다로부터 떠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을 다스렸던 마지막 왕 헤롯(Herod)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지 수년 후에 죽었다. 처음에 헤롯은 그의 후계자로 안티파스(Antipas)를 지명했으나, 나중에는 아켈라오(Archelaus)를 자기 자리에 오르게 했다. 백성들은 아켈라오를 왕으로 받들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 후에 가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때, 아켈라오와 안티파스는 로마로 가서 각각 캐사르(Caesar, 가이사) 앞에 그들의 주장들을 제시했으나, 그는 아무도 지명하지 않고 다만 아켈라오를 유대의 영주로 임명하고(마 2:19-22), 그의 역량에 따라 왕권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는 후에도 왕위를 얻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어린 시절에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었다(사 7:14-16).
성경 역사 가운데는 기라성 같은 훌륭한 유다 지파의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어떤 지파도 그들처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 명단의 첫 부분에는 비교할 수 없는 한 이름, 즉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 나사렛 예수가 기록되어 있다.
갈렙의 위대한 믿음과 대담한 용기는 각 시대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담력을 준다. 그는 생애의 가장 중대한 순간에 강한 믿음을 행사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목에서 거대한 난관들만을 보았을 때, 갈렙은 “우리가 능히 저들을 이길 수 있노라”(민 13:30)고 말했다. 그는 85 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강성한 헤브론 도성으로부터 원수들을 몰아냈다(수 14:6-15; 15:13-15).
다윗은 지상의 모든 군왕들 위에 뛰어난 영광을 받은 자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영감의 글은 구세주를 “다윗의 자손”(마 21:9)이라고 불렀다. 유다 지파 가운데 다수의 왕들이 궁중 생활의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들이 있다.
포로 후에, 얼마 동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상에서 그 모습을 숨기신 것처럼 보였을 때, 유다의 네 젊은 청년들이 마치 그들의 지파가 상징하는 사자와 같은 강한 믿음으로 바벨론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기보다는(잠 23:1-3) 자기들의 생명을 돌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였다(단 1:8).
수년 후에 이 세 청년은 바벨론의 왕 앞에 담대히 서서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단 3:18)고 말했다. 100여 년 전에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사 43:2)로 이 유다의 아들들이 불타는 풀무 속에서 주님과 함께 걸을 수 있었으며, 아무런 상함도 없이 나올 수 있었다(단 3:24-27). 다니엘은 자기 족속에 충성을 다한 진실된 사람으로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일에 어떠한 방해를 받기보다는 차라리 굶주린 사자들이 우글대는 곳을 택하였다(단 6:7-10; 16:22).
요 약
♤ 유다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대상 5:2; 창 49:10).
♤ 유다 지파는 마지막 세 아들의 후손들이다.
♤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지파의 총 수는 76,500명이었다 (민 26:19-22).
♤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했다(사 7:14, 16).
♤ 훌과 그의 손자 브사렐도 유다 지파였다(출 31:2).
♤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민 13:6).
♤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로 40년간 이스라엘의 사사였다(삿 3:9-11).
♤ 베들레헴의 입산은 7년간 이스라엘의 사사였다(삿 12:8-10).
♤ 유다가 배출한 왕들, 특히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히스기야 그리 고 요시야, 등이 모두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 무엇보다도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유다 지 파이시다(계 5:5).
?예언의 신?에 묘사된 유다
♤ 유다는 요셉을 팔 것을 제의함
“그 때에 유다는 그들의 아우를 죽게 내버려두지 말고 이방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의하였다. 그가 효과적으로 그들 주변에서 제거되는 동시에 그들은 그의 피를 흘리는 죄에서 결백하게 될 것이었다. 유다는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창 37:27)고 탄원하였다. 이 제의에는 모두 찬성하여 요셉을 급히 구덩이에서 끌어올리었다”(PP, 211).
♤ 베냐민을 위한 탄원
“유다는 이제 깊은 근심 중에 통치자에게 가까이 나아가 ‘내 주여, 청컨대,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창 44:18, 32). … 요셉은 만족하였다.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서 참 회개의 열매를 보았다. 유다의 고상한 제의를 듣고 요셉은 이 사람들 외에 모든 사람들을 명하여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큰 소리로 울면서 그는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창 45:3)라고 외쳤다”(PP, 230).
♤ 메시야 언약이 유다에게 옮겨짐
“나라와 메시야의 허락은 유다에게 … 장자 명분의 무쌍의 축복이 유다에게 옮겨졌다. 찬미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의미심장함이 이 지파의 예언적 역사 가운데 전개되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PP, 235-236).
5. 납달리 (NAPHTALI)
납달리는 야곱의 여섯번째 아들로서 라헬의 하녀였던 빌하의 차남이다. 성경은 납달리의 생애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며, 다만 그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후손이 납달리 지파를 이루었다는 진술뿐이다. 그러나 유대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뜀박질을 잘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요셉이 바로에게 소개한 5명의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곱이 임종시에 베푼 축복 가운데 유다를 사자로, 단을 뱀으로, 잇사갈을 나귀로, 베냐민을 늑대로 묘사하고 있으나,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창 49:21)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암사슴은 겁이 많은 동물로, 위험이 닥칠 때 항상 먼저 도망할 준비를 한다. 아무도 사슴의 등에 짐을 실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납달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웅크린 잇사갈과는 아주 다르며, 또 군왕의 힘을 가진 유다와도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임을 암시해 준다. 그는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다른 형제들처럼 무거운 짐을 지거나 책임에 눌릴 필요가 없다. 그는 버림당한 사람이나 낙망한 사람을 찾아 “아름다운 소리”로 용기를 주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납달리는 “지옥 불에서 나온,” 길들이지 않은 혀(약 3:5-8)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것으로, 불같은 혀와는 거리가 멀다.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잠 16:24)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항상 좋은 말만 하는 가볍고 정함이 없는 성격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저 표상적인 므깃도의 대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삿 5:18)인 것이다. 원문의 문자적 번역은 매우 강조적이다: “그들은 죽기까지 생명을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결심하고 치열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생명보다 귀한 사실을 안 백성으로 “들의 높은 곳”에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의 승리가 그것을 요구할진대 적의 불같은 공격에 반격을 시도하였다.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12,000명의 납달리 지파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환란이 많은 이 땅에 살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말해 왔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그들의 책무에 견고하게 서서 언제라도 하나님을 위하여는 타협을 모르는, 항상 희생할 각오가 된 사람들이다.
모세가 납달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축복할 때, 그는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신 33:23)라고 축복했다. 참으로 “은혜가 족한” 상태야말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심으로 바라야 할 상태가 아닌가! 주께서는 죄의 사유하심을 받은 사람을 크게 기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불만족하며 조급해 하면서 생애의 길을 걸어가는지!
우리는 “은혜가 족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여호와의 복이 가득 찰” 수 없다. 죄의 씻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 가리움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가 족한” 줄을 깨닫게 될 것이며, 매일같이 주께서 주신 축복을 헤아려 감사할 때, 마침내 그는 그의 생애가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생애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더불어 헤브론에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그때 다른 북쪽의 지파들과 함께 상당량의 공급물을 헤브론으로 가지고 왔다(대상 12:40).
납달리-게데스에 살던 바락이 성경에 언급된 이 지파의 유일한 위인이었다. 여선지자 드보라 때에 바락의 지휘를 받은 므깃도 전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싸웠던 가장 큰 전투였으며, 또한 아마겟돈 대전쟁의 모형이요 실물 교훈이었다(삿 4:6-24).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을 경계하여 북으로 뻗어 있는 그 영토는 납달리에게 주어졌다. 그 땅은 비옥하였고 솔로몬의 치세 하에서는 그의 사위 아히마하스가 책임을 진 병참부가 있었다(왕상 4:7, 15).
납달리 지방은 시리아와 앗수르의 침공을 받기 쉬운 지역이었다. 벤하닷이나 디글랏-빌레셀이 이스라엘의 모든 땅 중에서 가장 침을 삼키던 곳이 이 지역의 비옥한 평야였다. B.C. 730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이 이스라엘의 북부 지방을 공략했을 때, 납달리 지파는 앗수르로 포로로 잡혀갔다.
예수의 당시에는 납달리가 더 이상 갈릴리 해변 지역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 지역을 소유할 때보다 훨씬 더 유명해졌다. 주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스불론과 납달리가 큰 빛을 볼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했다(사 9:1-2; 마 4:15-16). 그 예언의 성취로 “세상의 빛” 되시는 예수께서 갈릴리에 그의 가정을 가지셨다. 거기야말로 기독교의 요람이 되었으며, 갈릴리 바다의 해변으로부터 주님의 수제자들은 그들의 필생의 사업에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오 갈릴리
C.L클로크(Mrs.C. L.Schacklock)
오 갈릴리, 사랑스런 갈릴리.
그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뭇 추억!
우리가 흠모하는 구세주께서
죽을 몸을 입으시고 거니시던 그 해변.
한때 그의 배 나르던 파도는
영원토록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리.
사랑하는 바다여, 그대의 깊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초청, “와서 나를 따르라.”
오는 세대에 언제나 그대 이름은
영원토록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리.
그곳은 거룩한 땅, 한때 그분 곧
평강의 왕, 하나님의 아들께서 밟으신 땅.
오 갈릴리, 사랑스런 갈릴리,
그대의 복된 이름 영원히 거룩하리,
어느 고을에서도, 어느 해변에서도,
해가 져서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요 약
♤ 납달리 지파는 그의 네 아들로부터 퍼져 나간 족속이다(창 46:24).
♤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이 지파의 인구는 45,400명이었 다(민 26:50).
♤ 납달리-게데스 출신의 바락이 이 지파의 유일한 위인이었다.
♤ 한때 납달리 지방이었던 곳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지가 될 것 이라고 예언되었다(사 9:1-2).
6. 갓 (GAD)
갓은 야곱의 일곱번째 아들로서 그의 어린 시절이나 개인 생애에 관해서는 확실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는 레아의 하녀 실바의 장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빌하와 실바가 야곱에게 낳아 준 갓과 다른 아들들은 그들의 초기 생애에 있어서 어떤 모본이 될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창 37:2).야곱이 죽기 전에 갓의 생애와 성격에 대하여 예언한 성경 구절을 보면,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창 49: 19)라고 되어 있다. 갓은 아마도 유혹하는 세력에 패하여 물러간 낙심자의 표상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험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 새 예루살렘의 진주문으로 들어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갓 족속이 그들이 싸운 큰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저희가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대상 5:20)고 하는 대전투 기록에서 볼 수 있다.베드로가 자신이 걸어가던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다(마 14:30, 31).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날에 승리해 왔던 시험에 자신이 굴복 당하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갓과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만 한다면 그는 즉시 구원함을 받을 것이다.
모든 낙심한 자들에게 주님은 이런 기별을 보내신다. “오, 돌아오라. 배역한 자녀들아, …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데려 오겠고”(렘 3:12-14). 주께서는 자신과 그의 백성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예증하시기 위하여 결혼의 상징을 사용하신다. 그들이 배역하여 주를 떠날지라도 주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가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 나는 너의 남편이라”고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사상이며, 얼마나 감동적인 사랑인가!
주께서는 거듭 물으시기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고 하시며, 스스로 대답하시기를, “보라, 너희는 너희 죄악을 인하여 팔렸”다고 하신다(사 50:1).
주께서는 낙심자에게 다음과 같이 단 한 가지만 요구하신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렘 3:13).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주께서는 낙심하여 물러간 모든 자들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고 말씀하신다.주께서 낙심하여 물러간 자들에게 호소하시는 음성을 들어 보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 3:22). 그것은 반가운 초청이요 놀라운 허락이다. 그러나 다시금 그의 음성을 들어 보라: “내가 저희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희에게서 떠났음이라”(호 14:4). 한때 교회를 떠났던 낙심자들이 받는 대우는 마지못해 하는 대우가 아니다. 주께서 그들을 고치시고 즐거이 사랑하실 것이다.과거에 죄의 용서가 주는 화평과 기쁨을 맛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용서와 사랑의 제의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문 하나에 갓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그는 “군대의 박격”을 받아 한때 정복당했으나, 마침내 승리를 거둔 자였다. 144,000명 가운데 12,000명이 역시 갓의 이름 아래로 행진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낙심과 패배에서 일어나, 자신들의 실수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자랑하면서, 어린양의 피에 그들의 두루마기를 빨고 승리한 자로서, 임마누엘의 깃발 아래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사람들이다(계 7:14).
인간의 마음이 신의를 배반했거나 사랑과 우정을 버린 자를 본래대로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배역을 치유하실 뿐 아니라, 즐거이 사랑하신다. 그분은 또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사 43:25)고 하신다.
갓 지파의 사람들은 목자들이었기 때문에, 첫 번째 정복에서 얻은 “요단 맞은편”의 땅에서 그들의 몫을 그들에게 주도록 요구하였다. 그들이 차지한 땅은 요단의 동쪽이었는데, 그들은 여호수아가 실로에 있던 성막의 문 앞에서 영광스러운 명령을 내릴 때까지 그들의 가족들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했다(수 22:1-4). 모세는 그의 고별사에서 갓 족속이 선택한 땅과 그들의 충성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신 33:20-21). 그들이 받은 지역은 남쪽의 르우벤과 북쪽의 므낫세 반 지파 사이에 있는 땅이었다. 처음에 갓은 길르앗의 절반 부분을 차지했으나, 나중에 전부를 소유하였다(대상 5:11, 16). 그들의 이름은 길르앗과 어찌나 밀접했던지 어떤 때는 길르앗(Gilead)이란 이름은 갓(Gad)이란 이름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파의 성격은 시종 격정적이고 호전적이었다.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대상 12:8). 갓 지파의 열 한 용사들에 관하여 주어진 생생한 묘사는 이와 같은데, 그들 가운데 가장 나약한 자가 100명의 병졸과 겨눌 수 있고, 큰 자는 1,000명과 싸울 수 있는 용사들이었다(14- 15절 참고). 그들은 요단 물이 넘쳤어도 겁내지 않고, 가장 큰 치욕과 곤욕의 시기에 다윗의 군대에 가담한 자들이었다(대상 12:12-13).
갓 지파의 사람들은 요단 서편에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한 다음의 말을 보면, 갓이 북방 왕국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왕상 22:3).디글랏-빌레셀은 갓 지파의 사람들을 앗수르로 포로로 데려갔고, 예레미야 당시에는 암몬 족들이 그들의 도시에 거주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상태를 슬퍼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무자하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에 거함은 어찜이뇨?”(렘 49: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가운데 갓과 르우벤 지파만 자기들의 직업을 변경시키지 않고 그들의 조상이 500년 전에 떠났던 땅으로 돌아왔다. 애굽의 문명과 박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지파들의 직업은 변경되었다. 거부(巨富) 바르실래는 다윗의 친구로 길르앗 사람이었고(삼하 19:31-39), 용감한 사람 입다도 역시 그러했다.
엘리야는, 일찍이 또 다른 유일한 한 사람[에녹]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았던 것처럼(히 11:5),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은 자였으며, 그의 승천할 시간이 가까웠을 때, 그는 요단을 건너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찾아갔는데, 그곳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합과 그의 아내인 이세벨을 두려움없이 책망할 수 있는 강인한 품격을 닦았던 곳이었다. 하나님의 병거가 승리에 넘친 그를
태워 하늘로 옮기운 곳은 바로 그의 고향 땅 길르앗이었다(왕하 2:7-14). 그가 이 땅에 돌아왔을 때, 그가 모세와 함께 변형산(變形山) 위에서 “영광 중에 나타”났을 때, 잠시 후에 예루살렘에서
드려질 그 위대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눅 9:28-31).
요 약
♤ 갓 지파는 갓의 일곱 아들의 후손들이다(창 46:16).
♤ 그들이 언약의 땅에 들어갈 때의 총 인구는 40,500명이었다(민 26:18).
♤ 디글랏-빌레셀이 그들을 앗수르로 포로해 갔다(대상 5:26).
♤ 갓 지파의 출신 바르실래는 다윗의 친구였다(삼하 19:32-39).
♤ 이 지파의 입다는 “큰 용사”였다(삿 11:1).
♤ 디셉 사람 엘리야는 길르앗에 우거하는 갓 지파의 출신이었다(왕상 17:1).
7. 아셀(ASHER)
다른 몇 족장들처럼 레아의 하녀 실바가 낳은 야곱의 여덟번째 아들 아셀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다. 레아가 그를 낳고 너무 기뻐서 아셀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 “기쁨”이란 뜻이다(창 30:13 난외주).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 생애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는 다만 그의 형제들과 함께 자라서 남은 가족과 같이 애굽으로 갔다는 사실뿐이다. 아셀은 네 아들과 사라라는 한 딸을 낳았는데, 이들로부터 그의 이름을 계승한 지파가 생겨났다(대상 7:30).
역대기가 기록됐을 때, 아셀 지파의 사람들은 “뽑힌 큰 용사”로 언급되었으며, 그들 중에서 전쟁에 “출전할 만한 자가 이만 육천”이었다(대상 7:40).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집결했을 때, 아셀 지파는 “전쟁에 능한 자들” 40,000명을 집결시켰다(대상 12:36).
아셀(Asher)이란 이름은 144,000 중의 한 분파에게 부여되기 때문에(계 7:6), 아셀의 인격이야말로 우리가 숙고해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혹은 전혀 없으므로, 우리는 야곱이나 모세의 예언적인 말씀을 그를 연구하는 데 대한 한 지침으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야곱이 임종시 아셀에 대한 축복은,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食物)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창 49:20)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들의 번영을 암시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그의 마지막 축복을 선포했을 때, “아셀은 다자(多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 있으리로다”(신 33:24-25)라고 말했다.
아셀은 사랑스러운 기질을 소유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형제들에게 붙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난관에 처했을 때에도 기름을 친 것처럼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쓰러질 곳에서도 무난히 난관을 뛰어넘는다. 그들은 발을 기름에 담근 후 생애의 거친 광야를 부드럽게 지나간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라는 귀한 약속이 아셀에게 주어졌으며, 야곱은 그에게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라(창 49: 20)고 말했으며, 모세는 그에 대하여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신 33:24)라고 예언했다. 일반적으로 발을 기름에 잠근 사람은 생애의 길을 어려움 없이 걸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별로 동정을 받지 않는다. 동정은 그 발이 상처 투성이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개를 쳐들고 기쁘게 생애하는 사람, “왕의 진수”와 같은 친절한 말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을 알고 계신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좌절하여 낙담 가운데 한숨짓고 있는 사람들보다 실제적인 면에 더 큰 시험을 겪고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라고 말씀하신다.
발을 기름에 잠그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그 발이 성령으로 씻은 바 된 사람의 생애는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생애의 거친 곳들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한 발을 가진 사람은 그 바닥을 철과 주석의 기초 위에 선 사람과 같다. 그들은 생애의 길목에 패인 웅덩이에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발을 기름에 잠근 사람은 마치 철과 주석으로 입혀진 발을 가진 사람과 같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하늘 성소에서 구주께서 봉사하시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계 1:15)고 했다. 주석은 풀무에서만 제조된다. 요한이 구주의 발이 마치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다”고 말한 것은 구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타는 풀무를 연상하고 말했을 것이다.
인간 가족 가운데는 하나님의 성령에 푹 잠겨 물둘여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피묻은 그리스도의 발자국을 너무 가까이 따르기 때문에 그들의 발이 마치 그 주인(Master)의 발처럼 주석으로 입혀진 것 같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발을 철로 덮고 있는데, 그들도 역시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형제처럼 그의 주인과 가까운 관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144,000인 가운데 12,000명이 아셀의 지파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발이 기름에 잠긴 사람들로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주께서 그의 영으로 험한 길을 평탄케 하시도록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스룹바벨처럼 이런 사람들 앞에서는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다(슥 4:6-7). 그들은 또 “왕의 진수”를 공궤할 것이며, 용기와 위로의 말로써 타인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발을 어떻게 기름 가운데 잠기게 하는지 배워서 아셀의 성품으로 계발해 나가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성경은 아셀 개인에 대하여보다 아셀 지파의 내력에 대하여 더 많이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 지파는 대개 다른 지파들과 연관해서 언급되었고, 그 지파의 독자적인 행동은 성경 속에 기록되지 않았다.
아셀은, 시므온 지파를 제외하고는, 요단 강의 서쪽에 위치한 지파들 중에서 국가에 공헌한 사사 또는 영웅을 배출하지 못한 유일한 지파이다. 어둠에 가리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두드러진 사람이 이 지파에 있다면, 여선지자 안나이다. 그녀는 성전에서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던 진실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영광을 누렸다(눅 2:36-38).
아셀의 영토는 대해(지중해)까지 이르렀고, 엘리야에게 위대한 승리를 안겨준 갈멜 산을 끼고 북으로 이어졌다. 아셀의 후손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용맹스럽거나 호전적 경향이 없었다. 그래서 정복한 땅의 원주민을 내쫓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다”(삿 1:31-32). 이렇게 이방인과 같이 섞여 살았으므로 그들은 마침내 약한 족속이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서 인구 조사를 했을 때, 아셀은 강한 지파였다(민 1:40-41). 그러나 다윗 시대에 와서는 너무나 약화되었기 때문에, 각 지파의 두령들을 뽑을 때 그들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대상 27:16-22). 비록 그들이 지파로서는 하나님을 떠났으나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진실된 사람들이 있었다.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에서 큰 유월절 잔치를 베풀고 온 이스라엘을 초청했을 때, 몇몇의 지파들은 전체가 그 기별을 전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었으나, “아셀의 … 몇 사람이 스스로 겸비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렀다”(대하 30:10-11).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저항하는 거센 물결이 사방에서 일어날 때, 하나님 편에 참되게 서있는 데는 도덕적 정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충성의 정신이 이들을 떠나지 아니했다. 구주께서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그의 성전으로 들어가셨을 때, “세상의 구주이신 아기”를 알아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아셀 지파의 안나”라고 하는 여선지자였다(눅 2:36).
요 약
♤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에 들어갔을 때, 아셀 지파의 인구는 53,400 명이었다(민 26:47).
♤ 아셀은 네 아들과 한 딸을 가졌으며, 그들의 자손이 아셀 지파를 이루었다(대상 7:30).
♤ 아셀 지파는 국가를 위한 사사나 위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 여선지자 안나는 성경에 명시된 사람들 가운데 아셀 지파에서 배 출된 유일한 위인이다(눅 2:36-38).
8. 잇사갈 (ISSACHAR)
잇사갈은 야곱의 아홉번째 아들로, 첫째 아내 레아가 낳은 다섯째 아들이다. 잇사갈 개인에 관해서,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을 제외하고는, 성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의 형제와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도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가 임종시에 한 축복은 자아 희생과 책임감, 온유하고 침착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그의 생애의 내력을 보여준다.
야곱은 그를 두 개의 큰 짐을 지고 그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인내심이 강한 나귀와 같다고 비유했다. 이 나귀는 보통 동물이 아니라 건장한 동물이라는 점에서 잇사갈의 성격의 강인함을 암시해주고 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리고 이 족장은 두 배의 짐을 지고서 자아 희생의 생애를 걸어갈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창 49:14-15).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갑절의 짐을 짊어지도록 요청될 때, 불평하고 원망함으로써 축복을 상실한다. 그러나 잇사갈은 그들을 위하여 간직된 아름다운 땅에 대한 동경으로 계속 인내하였다. 이와 동일한 생각이 오늘날도 갑절의 짐을 지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계속 지탱시켜 줄 것이다.
므깃도(Megiddo) 전쟁에서 보인 그들의 처신은 야곱의 임종시에 남긴 축복에서 묘사한 그의 성격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삿 5:15). 여기 드보라의 기록을 보면, 잇사갈은 바락보다도 더 큰 짐을 맡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지파들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윗을 추대할 때도 잇사갈은 같은 특징을 나타내었다. 잇사갈은 명확한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 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대상 12:32)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거운 책임과 중요한 위치에 있던 사람을 대표한다.
그들은 스불론 사람들처럼 전쟁에 능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을 위하여 작전을 세우고 맡은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품을 나타내는 데는 그리스도인 성품의 각기 다른 모든 국면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짐을 지는 사람들도 왕가(王家)인 유다나 레위 계통의 교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144,000 가운데는 이런 훌륭한 사람들이 12,000명이나 있을 것이다.
잇사갈의 자녀들은 힘써 일하며, 고생을 참고 용감무쌍하게 부지런히 업무에 종사하며 전쟁엔 패배를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 큰 용사”(대상 7:1-5)였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가장 비옥한 지역들 중의 하나를 유업으로 받았다. 그 땅은 동으로는 요단강과 연해 있었고, 북으로는 스불론, 남으로는 므낫세의 반 지파와 인접해 있었다.
성경에서 주목되는 여러 장소들이 잇사갈의 영토 내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바락과 드보라가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곳도 잇사갈의 땅에서였다(삿 5:19).
집이 협소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엘리사를 영접할 수 없어서 마침내 집을 이어 지어서 그를 모실 수 있었던 특권을 누린 수넴의 경건한 여인의 집이 있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왕하 4:8-10).
그의 생애에 임한 풍성한 축복을 통하여(왕하 4:12-37) 그녀는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란 말씀의 진실됨을 깨닫게 되었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고,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은(눅 7:11-17) 곳도 잇사갈의 경계에 있는 나인 성문에서였다.
그곳은 구세주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발자취로 거룩하여지기도 했고, 마귀가 그 힘을 과시하기도 했던 장소이다. 사울이 무당을 찾아가 그 생애의 결정적 실수를 범하여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린 곳인 엔돌도 잇사갈의 땅이었다(삼상 28:7-25). 사울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므로 죽임을 당하였다(대상 10:13-14). 오늘날에도 이와 동일한 전철(前轍)을 밟는 사람은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마침내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사 8:19-20).
에스드랠론(Esdraelon)의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은 이스르엘(Jezreel)은 나봇을 살해한 악한 왕 아합의 고장이었다(왕상 21:1-19). 그리고 그 도시의 한 거리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시체를 먹었다(왕하 9:30-37).
23년간 이스라엘에게 평온을 주었던 사사 돌라도 잇사갈 지파였으며(삿 10:1-2), 24년간 북방 왕국을 다스린 바아사도 잇사갈 족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엘라는 그의 아들이었는데, 그도 그 아버지의 악행을 좇다가 장관 시므리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왕권이 잇사갈을 떠나버렸다(왕상 15:27-34; 16:1-14).
잇사갈 지방은 이세벨 세력의 중심지로, 그녀에 의해 도입된 바알 숭배는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살만에셀(Shalmaneser)에게 포로로 잡혀가기(왕하 17:3-6) 약 5년 전에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유월절 행사를 가졌다. 이때 잇사갈 지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스불론과 더불어 참된 경배로부터 너무 멀리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얼마가 그 초청에 응하여 행사에 참석은 하였으나 그 의식에 참예하기에는 부적당한 상태였다. 히스기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는 것이 어떤 의식이나 형식보다 더 중요함을 충분히 알 정도로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유월절 음식을 먹도록 허락하고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이 때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쳐(대하 30:20) 주셨다.
요 약
♤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언약의 땅에 들어갔을 때, 잇사갈 지파의 수 는 64,000명이었다(민 26:23-25).
♤ 잇사갈은 가장 비옥한 지역들 중의 하나를 차지했다.
♤ 므깃도 골짜기와 에스드랠론 평야는 잇사갈의 경계 안에 있었다.
♤ 23 년간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돌라는 잇사갈 지파였다(삿 10:1, 2).
♤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도 잇사갈 지파의 출신이었다(왕상 15:27).
♤ 잇사갈은 네 아들을 가졌으며, 그들이 지파를 이루었다(대상 7:1).
9.스불론 (ZEBULUN)
12 족장들 가운데 여섯 명이 레아의 소생이었다. 비록 야곱이 당시의 습관에 따라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관습을 받아들였으나, 첫 아내인 레아를 그의 법적인 아내로 인정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레아는 가족 묘지에 장사되었다. 야곱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그는 막벨라 굴 속에 장사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창 49:29).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31). 이것은 야곱의 유언으로, 그는 후손들에게서 “거기 야곱과 그 아내 레아가 장사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 것 같다.
야곱은 생전에 그 당시의 상황과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을 인정하였다(창 2:24).
스불론은 레아의 막내 아들이었다. 그는 요셉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야곱이 라반을 섬길 때 출생하였다. 야곱은 축복의 유언을 할 때, 스불론이 자리잡을 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로다”(창 49:13).
약속의 땅에서 스불론의 위치는 납달리와 잇사갈 영토 사이에 있었다. 그곳은 갈릴리 바다 서해안의 남쪽 부분에 경계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그들은 대해(지중해)의 연안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모세는 그의 임종시의 축복에서 스불론을 바다와 관계 있는 족속으로 묘사하였다(신 33:18- 19).
성경은 스불론 개인에 대하여 그의 출생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스불론 지파를 이루었다고 한다(민 26:26-27). 그들이 광야에서 방황한 일에 관한 것이나 팔레스타인의 정복에 관한 사건의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드보라가 므깃도 전쟁을 끝마친 후, 그가 부른 승리의 노래에서 스불론 지파는 “저술가의 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삿 5:14, KJV)이라고 노래를 부른 것은 아마도 그들이 문학이나 예술에 뛰어난 족속임을 지적해 주는 것 같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라고 번역되어 있음-역자 주]
아마겟돈의 대전투를 표상하는 바로 그 전투에서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삿 5:18)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영광이 자신의 생명과 명성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144,000 가운데 12,000명이 스불론의 이름 아래 하늘의 도성으로 들어갈 것이다. 주님의 원수들이 수가 많고 세상의 인기를 끄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들 12,000명은 “들의 높은 곳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않은” 자들이다. 옛날의 스불론처럼 들의 높은 곳에서 “저술가의 펜”을 다루며 크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업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않음”으로 큰 승리를 거둘 것이다.
옛날의 이 전쟁에서 스불론으로 하여금 분연(憤然)히 일어나도록 자극을 준 것은 바로 순수한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취하지 아니하였”(삿 5:19, KJV)다고 드보라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자급 전사(自給戰士)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을 만큼 다른 지파들보다 재산이 더 많았는지, 또는 더 유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스라엘이 포로로부터 돌아온 후, 하나님의 사업이 다시금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느헤미야는 앞으로 나아가 자급 교역자로서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구세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수치스럽게 느꼈으나, 상당한 지위를 가진 두 부자, 곧 공회 의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담대히 앞으로 나와 평소에 진실히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수행하였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사람들은 다른 지파의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덜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드보라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생명을 무릅쓰고 전쟁의 승패의 흐름을 돌려놓았으며,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봉사의 대가(對價)로 “아무런 돈을 취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스불론은 지성적인 지파요 세상적으로도 많은 축복을 받은 지파였으나, 주의 사업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으로 보인다.
200여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사업이 또 한번 위기에 처했다. 사울이 죽자 이스라엘의 진실된 사람들이 헤브론으로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대상 12:23) 하였다. 이때,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이 모였다. 그러나 어떤 지파도 그 장비와 인력 면에서 스불론을 능가하지 못하였다. 오만 명의 정예 군사들이 저들의 무기를 들고 왔다. 그들은 “모든 군기를 가지고” “항오를 정제히” 하며 “싸움에 능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 기술과 숫자의 가치보다는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로서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신뢰하실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대상 12:33).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와 같은 품성을 완성하도록 준비를 갖추고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가질 것인가? 그 누가 그토록 간절하게 이러한 스불론의 품격을 열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까지 무릅쓰고 기꺼이 나설 것인가?
스불론 땅은 예수의 어린 시절의 가정이 있던 장소가 됨으로써 크나큰 영광을 누렸다. 나사렛은 스불론의 경계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다른 지방의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많이 듣고 볼 기회를 가졌다.
이사야는 스불론 땅이 큰 빛을 볼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9:1-2). 참으로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이 일찍이 보지 못한 밝은 빛을 자신들의 지역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첫 이적은 스불론의 가나에서였다. 한 귀인이 예수께 나아와 그의 아들의 생명을 위해 간구했던 곳도 바로 가나였다. 그 요구는 모든 믿음의 기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위대한 의원에 의해 응답되었다.
요 약
♤ 스불론은 세 아들을 두었으며, 그 아들들이 스불론 지파를 이루었 다(창 46:14).
♤ 언약의 땅에 들어갔을 때, 스불론 지파의 인구는 60,500명이었다 (민 26:26-27).
♤ 그 표상적인 므깃도 전쟁에서 그들은 자급 전사로 참전하였다(삿 5:19).
♤ 그리스도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은 스불론 지방이었다.
♤ 이사야는 스불론이 큰 빛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9:1-2).
10. 요셉(JOSEPH)
성경의 역사를 통하여 아무런 실수를 범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
요셉은 장자가 누리는 세 가지의 특권 중의 한 몫을 받았다. 장자가 누리는 각 부문의 특권이 끝까지 고정되어 온 사실을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유다는 가정 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부여받을 수 있는 성품을 형성하였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거룩한 존재들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계 5:5)라고 하였다.
레위는 하나님의 사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믿음에 굳게 섬으로 인하여 제사장 직분을 얻었다. 그들이 가진 직분은 하늘 대제사장의 그림자였다(히 8:1-5).
요셉은 형제들과 분리되어 낯선 땅에서 우상 숭배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자기를 지켜 승리함으로 인하여 갑절의 유업을 누렸다. 약속의 땅에서 요셉의 자손들은 갑절의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 영원토록 이 독특한 무리들은 둘로 구분되어 한 쪽은 요셉의 이름 아래, 다른 한 쪽은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이름 아래 모일 것인데(계 7:6, 8), 그들은 요셉의 충성됨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에 의하여 예언된 축복의 말씀이다. “네 아비의 축복이 네 부여조(父與祖)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
요셉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첫 소생으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창 30:22-24). 그는 초기 17년간의 생애를 그의 아버지와 함께 보냈다(창 37:2).
요셉의 초기 생애에 대하여 기록된 주요한 점들은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채색 옷, 꿈, 애굽으로 팔려감, 등이었다.
확실히 채색 옷에는 뚜렷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요셉이 그 채색 옷을 받았을 때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모범적인 성품을 가진 17세의 젊은이였다. 늙은 아버지는 르우벤이 가정에서 제사장의 권리를 상실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셉의 경건한 생애를 관찰한 후, 그 거룩한 직무를 대신할 사람으로 그를 선택한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계시 가운데서 하늘의 크신 제사장을 보도록 허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그는 요셉의 후손들이 입을 제사장들의 예복을 희미하게나마 나타낸 채색 옷을 만들어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보는 것과는 다른 안목을 가지고 계신다. 시기와 질투심이 가득한 아들들, 마음에 살의를 품은 자들로부터 요셉을 취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이 거룩한 제사장직에 적합하게 될 때까지 요셉을 정화시키시고 단련시키셨다.
온 가족이 그의 앞에 절을 했다는 요셉의 꿈은 그의 열 형들에게 있어 시기에 찬 마음들이 견뎌낼 수 있는 이상의 것이었다. 열두 번째 아들인 베냐민은 이때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떨어져서 들판에 있던 형들에게 왔을 때, 르우벤을 제외한 모든 형들이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그 형제들은 요셉이 웅덩이 속에서 죽기를 바라면서 그 안에 쳐 넣기에 앞서 시므온이 그를 결박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웅덩이에서 기어 나와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이 어린 시절의 자기의 꿈이 이루어져 그의 형들이 땅에 머리가 닿도록 굽혀 절을 할 때, 그는 그의 꿈을 상기하게 되었다(창 42:6-9). 요셉이 관리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온을 잡아서 형들의 목전에서 결박하도록 했을 때, 그 옛날 그가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부르짖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이 그에게 대한 아무런 동정심도 보이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시므온이 자기를 결박한 것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까?
시므온도 그 사실을 기억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르우벤이 방금 형제들이 요셉을 잔인하게 취급했던 사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창 42: 21-24).
요셉의 마음 속에는 아무런 원한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이리로 보내신 자는 당신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고 하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창 50:20)고 말할 수 있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요셉은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만 보았다. 노예로 보디발에게 팔렸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굳게 붙들었고 보디발을 섬기는 동안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니라”(창 49:24).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다(시 105:19)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를 교훈해 온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애굽의 감옥에서도 굳세었으며, 애굽을 다스리면서도 겸손했던 것은 모두 이 말씀의 덕이었다. 역경에나 순경에나 한결같던 그의 능력은 모두 “야곱의 전능자”로부터 온 것이었다.
우리는 요셉이 애굽의 짙은 암흑 속에서도 완전한 고결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열여섯 살 될 때까지 살았던 그의 어머니 라헬의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아들의 앞에 놓인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경건한 교육으로 그를 훈육한 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기 직전에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잠들었다. 그러므로 이 큰 슬픔을 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그의 훈련의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성실한 어머니의 교육이 요셉을 하나님과 아주 가깝게 연결시켜 그의 “활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창 49:24)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49:26을 ?70인역?(LXX)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어머니의 이름을 넣어 축복한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이로다.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요셉의 성격을 생각하면서 죽음에 직면한 족장은 그의 어머니 라헬이 그를 낳아서, 그녀가 죽어 헤어질 때까지 베풀었던 진실된 교육을 기억하였다. 이 축복에서 다른 아들들의 어머니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교훈을 주는 어머니는 행복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는 어린이는 3배나 더 행복하다! 어린 시절의 경건한 훈련엔 능력이 있다. 그런 교육을 받는 자의 머리 위에 아름다운 관이 씌워질 것이다(잠 1:7-9).
요셉은 자신의 생애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욥도 같은 정신을 보여주었다. 마귀가 그의 모든 재산을 취하여 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후, 욥은 마귀를 염두에 두지도 않고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말했다. 욥과 요셉의 시대에처럼 오늘날에도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위대한 인물로 쓰여질 것이다.
요셉이 보낸 애굽에서의 생애 중 처음 몇 해는 보디발의 집에서였는데, 그는 요셉을 자기 수입을 관장하는 감독으로 삼았다(창 39:4-6).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요셉의 용모는 “준수하며” “아담”하였다. 그러므로 주인의 아내가 유혹하였을 때, “내가 어찌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라고 하면서 그의 철저한 고결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그는 현재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그는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서 감옥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옹호하셔서, 그곳에서 그는 모든 죄수들을 다스리는 영광을 누렸다(창 39:20-23). 그는 감옥에서의 그의 직무를 마치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주신 것처럼 받아들였다.
수년간의 감옥 생활을 치른 후, 30세 되던 해, 그는 바로 앞에서 왕의 꿈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그러자 그는 그 나라에서 두 번째 가는 지위에 올랐고, 그곳에서 애굽의 원로 정치인들에게 지혜로 교훈하였다(시 105:21-22).
요셉은 7년간의 풍년 동안에 장차 있을 7년간의 흉년을 대비하여 막대한 양의 곡식을 저장하였다. 그는 애굽 여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그가 다스리던 7년의 풍년기 동안에 출생했다(창 41:45, 50-52).
그의 형제들이 양식을 가지러 애굽으로 왔을 때는 그가 애굽을 다스린지 9년째 되던 해였다(창 41:46-47; 45:6).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베냐민을 볼모로 잡고 있겠다고 말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는 유다의 말을 듣고 만족해 했다. 그는 수년 전에 은 20을 받고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고 제안했는데, 이제는 베냐민 대신으로 자기가 노예가 되겠다고 나섰다(창 44:33).
야곱의 아들들은 모두 변화되어 있었다. “요셉이 그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있던 여러 해 동안에 야곱의 아들들의 성품은 변화되었다. 그들이 전에는 질투하고 불온하고 속이기 잘하고 잔인하고 복수심이 강했으나, 역경을 겪은 지금에는 이타적이고 상호간에 신실하고 그들의 아버지에게 효도했으며, 그들이 중년에 접어들었으나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다”(PP, 225). “요셉은 만족했다.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서 참 회개의 열매를 보았다”(PP, 230).
족장 야곱은 임종시에 그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야곱은 항상 깊고도 열렬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고, 아들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강하고도 부드러웠으며, 그들에게 한 그의 임종의 증언들은 편애나 분노가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로서의 그의 부드러움이 격려와 희망의 말로 표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시고 그가 영감의 감화를 받을 때, 그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사실대로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PP, 237).
“그들은 요셉을 종으로 팔았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종이 되도록 용인하심으로써 그들을 벌하시기로 계획하셨을까 두려워하였다”(3SG, 156).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은 걱정과 근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요셉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의 분노를 참고 있었지만 이젠 아버지가 죽었으니 그가 그들의 손에서 당한 고초를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SG, 173).
“요셉은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 그의 형들이 자기가 복수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았을 때,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요셉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오셨으나 그의 배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SG, 174).
요셉은 여러 해 동안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보살필 특권을 가졌다. 이는 그의 소년 시절의 꿈의 실현을 보는 것이었다.
110년이라는 긴 생애를 통하여 요셉이 하나님께 불성실했다는 기록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약속에 대한 굳은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창 50:25)는 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향으로 채워졌고, 그들이 출애굽할 때, 그의 유언을 실현하였다(출 13:19).
그리스도의 음성이 진토에서 잠자는 성도들을 깨우실 때, 요셉은 영광스러운 불멸을 입고 일어나,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그의 모든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창 49:24)에게 인사를 드릴 것이다.
요 약
♤ 요셉의 두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두 큰 지파가 이루어졌다(창 46:27).
♤ 요셉의 자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의 수효는 85,200명이었다(민 26:34-37; 창 49:22).
♤ 요셉은 장자권의 일부와 유업의 갑절을 받았다(대상 5:1).
♤ 요셉이 장자권의 일부를 부여받음으로 144,000 가운데서 두 지파가 영원히 요셉의 가족을 대표할 것이다(계 7:6, 8).
11.베냐민(BENJAMIN)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인 베냐민은,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의 어머니 라헬이 남긴 유일한 요청은 아이를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이름을 베냐민, 곧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개명했다(창 35:16-18).
어머니 없이 자란 아이에 대한 야곱의 지극한 사랑은, 그 형제들이 애굽으로 갈 때, 그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창 42:38). 그가 애굽으로 갈 때 자주 그를 “아이”(창 43:8)라고 불렀으나, 기록을 보면 그때 그는 이미 열 아들의 아버지였다(창 46:21).
족장 시대의 사회 제도 때문에 그가 오늘날의 결혼한 자녀들보다도 훨씬 더 부친의 지시를 잘 따랐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베냐민 개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그의 이름을 가진 지파에 대한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파의 성격에 대하여는 임종시에 남긴 야곱의 예언에 잘 묘사되어 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창 49:27). 이 말은 샘이 많은 성격을 묘사한다기보다는 어린 아이가 고집을 부리거나 시샘을 하여 토라지는 것같은 버릇없음을 말한다. 이런 일은 많은 식구 중에 가장 막내둥이에게 흔히 있는 일로 어머니도 달래기가 힘든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정신은 그들이 거의 전멸되기까지 싸울 때의 베냐민 지파에게 잘 드러났는데, 그들은 오히려 기브아의 악한 사람들을 도로 놓아줌으로 징벌을 당했던 것이다(삿 20:12-48). 이로 인하여 그들의 숫자는 600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다윗의 시대에 와서는 다시 상당한 수의 지파가 되었다(대상 7:6-12).
사사 시대의 베냐민 족속은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없는” 사람들 700명을 배출할 수가 있었다(삿 20:16).
약 350년 후에 베냐민 족속의 사람들 가운데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살도 발하는” 자들이 있었다(대상 12:1-2). 베냐민 족속은 특수한 목적으로 궁술(弓術)을 익혔으며, 활과 물매를 사용할 줄 아는 기술이 뛰어나 찬양을 받은 유일한 족속이었다(대상 8:40; 대하 17:17; 삼하 1:22). 베냐민의 영토는 유다의 북쪽에 있는데, 두 지파 사이에 놓여진 경계선이 예루살렘 도성을 지나가고 있었다.
기브아에서 불행한 처신의 결과로 위기를 맞은 이후로(삿 19:14-39), 그 지파가 가지고 있던 완고하고 고집불통이었던 성격이 변화된 증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가 20년 동안이나 그들의 지경인 기럇-여아림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제사장이 그 법궤를 돌보고 있었다(삼상 7:1-2).
라마는 베냐민의 도시로, 이곳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희생을 드렸던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다.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다(삼상 7:15-17).
이스라엘의 많은 군중이 모였던 미스바는 베냐민의 지경 안에 있었다(삿 20:1; 왕하 25:23). 여기서 여호와께서 무서움에 떠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삼상 7:5-11).
모세가 임종시에 각 지파에게 말한 예언을 보면, 야곱이 묘사한 베냐민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화가 따랐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신 33:12).
야곱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이리로 비유했던 그 겁없는 성격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이제는 그 무모한 힘을 여호와께 대한 관심과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데 사용한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고대 베냐민 지파의 성격과 이방을 위한 사도 바울의 유용성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바울은 “나도 … 이스라엘인이요 … 베냐민 지파라”(롬 11:1)고 말했다.
후에 바울이라 부른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동의한” 사람이었다(행 7:58; 8:1). 다음으로 그는 “물어뜯는 이리”로 “교회를 잔멸”하려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었다(행 8:3). 무서운 이리가 피에 굶주려 그 먹이를 찾는 것처럼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이런 사람의 곁에 있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안전함이 없었다. 그러나 “물어뜯는 이리”와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 회심을 하면 그만큼 더 열정적으로 주의 사업과 그의 영광을 보살피고 보호하게 된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목격한 다음부터(행 9:3-9) 그의 이리 같은 습성이 사라지고, 주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그의 곁에 안전하게 거할 수 있었다. 다메섹에 있던 성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다. 그들을 잔해하려던 자가 이제는 친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느 때든지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행 9:10- 19).
하나님은 하나의 친절한 행위라도 결코 보상하시기를 잊지 않으신다(삼상 2:30). 사울이 “주의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보살필 때, 주께서 그를 항상 품고 계셨다.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었다. 무서운 독사가 물어도 힘을 잃었다(행 28:1-6). 그를 빠뜨릴 물도 없었다(행 27:23-25). 하나님은 그를 언제나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축복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실(신 33:12) 것이라고 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베냐민의 지경 안에 있는 모리아 산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 거칠고 험한 곳들을 지날 때 아버지의 강한 어깨 사이에 안겨서 옮겨진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가진 사람에게 이 말씀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해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생애의 노정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전능의 팔로 우리를 번쩍 들어, 그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전혀 불가능한 곳에 우리를 안전히 내려놓으신다. 마치 어린 아이가 두 팔로 힘껏 아빠의 목을 껴안고 그 두 어깨 사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할 때, 인간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복된 곳이 있도다! 이곳은 주를 사랑하는 자가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불평과 중상의 소리가 영원히 잠잠할 것이다(약 1:26).
이스라엘 백성들이 80년 동안 태평하게 살도록 다스렸던 에훗은 베냐민 사람이었다(삿 3:15, 30). 그는 왼손잡이였는데,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모압 왕 에글론을 단칼에 죽여버렸다(삿 3:21-26).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출신이었다(삼상 9:21).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삼상 10:9). 그는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행했고(삼상 10:26), 그가 겸손하게 머물러 있는 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삼상 15:17-23). 그가 자기 자신의 마음대로 자고(自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여호와께 버림을 당하였다. 그러자 그의 성격 가운데 있던 이리와 같은 성향들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먹이를 찾는 이리처럼 여러 해 동안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것”(삼상 26:19, 20) 같이 다윗을 추격하였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욕망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다윗을 살해하는 것이다(삼상 18:11; 15:28).“베냐민 지파”요 “기스의 아들”인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를 죽이려고 음모하는 일에 자신의 사나이다운 정력을 소비해버린 사울과는 너무나 두르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울의 아버지와 모르드개의 아버지 이름이 같은 것을 보면 이들은 지파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모르드개에 대한 전 역사는 난관 속에서 백성들을 구출하는 일련의 기록인 것이다. 그는 페르시아 왕의 목숨을 구해 내었다(에 2:21-23). 후에 사단과 하만이 참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멸하고자 시도했을 때(에 3:8-15), 모르드개는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탄원하였다(에 4:1-3).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왕에게 베풀었던 친절을 환란을 피하는 한 수단으로 삼으셨다(에 6:1-11). 모르드개는 왕국의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하는 방패로 그를 사용하셨다(에 8:7-17). 영원히 얻는 결정적이고도 참된 승리는 어떤 지파와 관련을 가졌다거나 물려받은 성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겸손히 신뢰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살피신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대하 16: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경멸하는 왕을 낮추시고(대하 36:1-4, 9-10), 포로로 잡혀온 자를 취하셔서 왕 같은 세력을 주시기도 하신다(단 6:1-3; 에 8:15; 10:3).
베냐민의 본성은 각 시대를 통하여 회심하지 아니한 사람들을 대표한다(렘 17:9). 오늘날도 모르드개처럼 원칙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자는 복있는 자이며, 그는 옛날에 베냐민에게 주신, “여호와께서 …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라는 그 약속을 주장할 수가 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베냐민의 이름을 계승할 12,000명의 사람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계 7:15).
요 약
♤ 베냐민은 열 아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 이루었다(창 46:21).
♤ 그들이 언약의 땅에 들어갔을 때, 이 지파의 수는 45,600명이었다 (민 26:41).
♤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은 궁술과 왼손잡이로 유명했다(대상 8:40; 대하 17:17).
♤ 사무엘의 고향 라마는 베냐민 지경 내에 있었다.
♤ 이스라엘의 온 백성이 운집했던 미스바는 베냐민의 땅이었다.
♤ 에훗은 80년간 이스라엘의 사사였다(삿 3:21-26).
♤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첫 왕이었다(삼상 9:21).
♤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에스더 시대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 여 사용한 인물이었다(에 2:5).
♤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일한 지도적인 사도였다(롬 11:1).
?예언의 신?에 묘사된 베냐민
♤ 그의 형제 요셉이 베냐민을 찾음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무리를 돌아보고 그들 중에 베냐민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냐민도 이 잔인무도한 사람들의 무도한 책략의 희생이 되고 말았는가? 그는 그 진상을 알고자 결심하였다”(PP, 224-225).
“총리 대신은 그들의 이야기의 진실성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아직도 그들을 정탐꾼으로 본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애굽에 남고 그들 중의 한 사람만 가서 그들의 제일 어린 동생을 데려오도록 요구하는 일로 그들을 확인해 보겠다고 선언하였다. … 그들은 죽임을 당하든지 노예가 되든지 될 것만 같이 보였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더라도 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더 안겨주는 것보다 차라리 남아서 함께 고통을 당하기로 작정하였다”(PP, 225).
“그의 아들들이 꺼림칙한 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에 연로한 아버지는 일어나 손을 하늘로 들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 43:14)고 기도하였다”(PP, 227).
♤ 그가 베냐민으로써 그의 형제들을 시험함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5 배나 주었다. 베냐민을 총애한다는 티를 보이고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시기와 질투를 그 어린 막내 아우에게도 나타내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PP, 228).
“베냐민의 자루 속에서 그 잔이 발견되었다”(PP, 229).
“유다는 이제 깊은 근심 중에 통치자에게 같이 나아가 … 감동을 주는 웅변으로 그는 요셉을 잃어버린 그의 아버지의 슬픔과 베냐민을 그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던 일을 고하고, 그 이유는 베냐민이 야곱이 매우 사랑하던 그의 어머니 라헬이 남긴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임을 설명하였다. …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창 45:14)”(PP, 230-231).
♤ 사울 왕이 이 지파에서 나옴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편, 그를 반대하는 큰 무리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지파들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에서-그것도 가장 크고 가장 강한 지파들인 유다와 에브라임을 무시하고-군주가 선택된다는 것은 그들이
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PP, 611).
12. 므낫세(MANASSEH)
고대에 족장(族長)이 죽을 때의 축복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의 아버지가 병상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그 나이 많은 족장은 아브라함에게 주었으며 이삭과 야곱에게 되풀이해 준 그 가나안 땅에 대한 허락을 반복한 후, 말하기를,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창 48:5)라고 했다. 야곱이 그 소년들을 보고는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창 48:9)고 하였다.
요셉은 장자를 야곱의 오른편에, 그리고 동생을 그의 왼쪽에 두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족장은 그의 오른손을 들어 왼쪽에 있는 동생의 머리에 얹고, 왼손은 그의 형에게 얹고 축복하였다. 이것을 본 요셉은 야곱의 오른손을 오른쪽의 므낫세에게 놓으려고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창 48:18)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를 거절하면서,“나도안다.내 아들아.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리라(창 48:19)고 하였다.
그의 큰 조부인 에서처럼 므낫세도 장자로 태어났으나 차자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 입장은 전혀 달랐다. 므낫세는 가족 중에서 장자의 특권을 고수하려고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므낫세는 이스라엘 왕국을 세울 정도로 호전적인 에브라임의 성격을 가지지도 않았으나 그는 에브라임보다 더 오래 그 이름을 남겼다.
족장의 축복 가운데는 므낫세가 그의 동생의 몫보다 더 크게 받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사자가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창 48:16).
여호와의 축복은 므낫세와 그 후손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비록 왕국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성전으로부터 원거리에 있었으며, 북방 왕국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유다의 선한 왕들에 의해 일어난 신앙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사 왕이 우상을 부수고 여호와께 대한 예배를 새롭게 하였을 때, 므낫세 지파 가운데 “아사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 돌아오는 자가 많”았다(대하 15:8-9).
유다 왕 히스기야가 유월절 잔치를 베풀었을 때, 므낫세 지파로부터 대표자들이 와서 심령을 겸비케 하고 유월절에 참여하였다(대하 30:1, 10, 11, 18). 그들은 또한 그들이 거하는 지방에서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대하 31:1).
요시야 당시에 있었던 개혁 운동도 역시 므낫세 지방까지 미쳤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므낫세와 아몬 당시에 더럽혀졌던 성전의 재건을 위해 그들의 재산을 헌납했다(대하 34:9). 아마도 시편 80편은 이 개혁의 시대에 요셉의 가문에서 나온 어떤 사람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 같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므낫세 지파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기 저기 조금씩 표현된 기록들은 그들이 항상 그의 주를 공경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주의 사자의 축복이 므낫세에게 임하였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에게 주어진 지상의 축복의 두 배를 받을 사람들이었다. 144,000의 구속받은 자들 가운데 두 지파의 사람들이 므낫세와 요셉의 이름을 받을 것이다(계 7:6, 8). 이렇게 하여 므낫세의 이름은 영원히 그 존재가 빛날 것이나, 에브라임의 이름은 잊혀지고 말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사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였다. 그는 서쪽에 자리잡은 지파의 절반 가운데 유일한 용사였던 것 같다. 동쪽에 자리잡은 지파들은 보다 호전적이었다.
다윗이 사울을 대항하여 블레셋 편으로 싸우러 나갔을 때, 므낫세 지파로부터 많은 병사들이 다윗에게 가담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시글락에 있던 다윗에게 합세한 므낫세의 강한 용사들의 대장이 일곱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다윗을 도와 잔당-다윗의 가족들을 붙잡아 간-을 쳤는데, “저희는 다 큰 군대요 군대 장관”이었다(대상 12:19-22).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서 므낫세의 반 지파 가운데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 자의 수가 “일만 팔천”이었다(대상 12:31).
므낫세 지파 가운데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유업을 물려받은 자로서 성서에 언급된 첫번째 사람들이다(민 27:1-8).
만약 르우벤이 범죄로 말미암아 그의 장자권을 잃지 않았거나 단이 사단과 유사한 성격을 갖지 않았었다면, 므낫세의 이름은 12 지파의 명부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결코 144,000의 일부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경험 가운데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교훈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는 권면에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주께 대한 사랑을 빼앗아 가도록 용납한 것과 우리의 판단력이 죄와 불신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흐려져버린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르우벤처럼 우리가 마땅히 성취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일을 조금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요셉과 같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우리가 누려온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지나온 이들 중의 더러는 단순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써 우리가 실패한 일을 잘 수행하고, 우리가 받을 뻔했던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시간이란 길 위에는 파선된 품성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의 참되고도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이던 사람들(롬 2:28-29), 그 이름이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사 4:3) 사람들, 그러나 사단으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에 시기와 불평과 비평으로 가득 채우도록 용납함으로써, 단 지파처럼 하늘의 사물을 붙들었다가 놓쳐버리고 더 이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네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요 약
♤ 므낫세의 유일한 아들은 마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첩이었다.
♤ 마길을 통하여 므낫세 지파가 이루어졌다(대상 7:14).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므낫세 지파는 52,700명이었다(민 26:34).
♤ 위대한 사사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였다(삿 6:15).
♤ 여자로서 유산을 물려받은 첫번째 사람들은 므낫세 지파였다(민 27:1-8).
?예언의 신?에 묘사된 에브라임과 므낫세
♤ 지파로 편입됨
“다른 중대한 문제가 주의를 요구했다. 요셉의 아들들도 이스라엘의 자녀들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야 하였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회견하러 오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왔다. 이 두 청년은 저희 어머니 편으로 애굽 사제의 최고위층과 혈연이 있고 그들이 애굽인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그들의 아버지의 지위는 저들에게 부귀영달의 대로를 열어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백성과 연결되는 것이 요셉의 소원이었다. …
“야곱은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창 48:5)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되어 각기 분리된 지파들의 머리가 될 것이었다. 이리하여 르우벤이 잃어버린 장자의 권리 중의 하나가 요셉에게 넘어갔다. 그리하여 요셉은 이스라엘 중에서 두 몫을 차지했다”(PP, 234).
♤ 그들의 정신
“토지의 분배에 관하여 다른 요구가 있었는데, 이것은 갈렙의 정신과는 크게 다른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요셉의 자손들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의 반 지파에 의하여 제출되었다.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고려하여 이 지파들은 두 몫의 영토를 요구하였다”(PP, 513).
상실된 두 지파:에브라임 (EPHRAIM)과 단 (DAN)
이스라엘의 상실된 지파들에 대하여 많은 것들이 언급되고 기록되었으며, 그들에 대한 환상적인 이론들도 많이 창출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논증들 중의 어떤 것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상실된 지파들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의 장(章)들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 그리고 므낫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한 영역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이름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에서 지파들의 대표로 나타날 것이다. 이에 반해 에브라임(Ephraim)과 단(Dan)의 이름은 잊어버린 바 되었다. 바로 이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상실된 지파들이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왕국의 세력이었던 당당한 에브라임 지파와, 약속된 땅에 들어갔을 때 유다 다음으로 용사가 많았던 단 지파가 이스라엘의 지파를 최종적으로 계수할 때 빠지게 되었는가?
우리가 갖고 있는 기록에 관한 한, 에브라임(Ephraim)은 우상 숭배자였던 애굽 공주의 아들이었다. 에브라임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기까지(출 1:8) 그의 오만한 측근 연고자들과 더불어 고센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많은 교제를 가졌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십중팔구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애굽인들 사이에서 보냈을 것이다. 므낫세도 같은 환경에서 살았다. 하지만, 에브라임이 족장[야곱]의 축복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한 사실은 그의 마음을 교만으로 채우고 그의 생애를 다른 형태로 꼴지어 나갔을 것이다. 에브라임이 야곱의 축복을 받았을 때는 약 21세였다. 요셉이 에브라임의 삼대 손자를 볼 때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미루어, 그는 에브라임에게 오랫동안 아버지로서의 경건한 모본을 보였을 것이다(창 50:23).
에브라임의 개인적인 생애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만이 언뜻 나타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에브라임의 아들들이 원정을 나가, 가드 사람들에게 속한 짐승을 약탈하였으며, 가드인들은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 “그 아비 에브라임이 위하여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 형제가 와서 위로하였더라”(대상 7:21-22).
에브라임이 잃어버린 아들들로 인하여 슬퍼하는 동안, 다른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집이 재앙을 받았으므로”(대상 7:23-24) 그 이름을 브리아, 즉 “재앙”이라 하였다. 신기한 것은 브리아에게서 그의 자손들 가운데 가장 출중한 자, 곧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나온 것이다(대상 7:27). “눈의 아들 호세아”(민 13:8, 16)는 10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하나로 뽑혔으나, 그의 믿음이 시험을 받은 다음,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도움”이라는 여호수아로 바뀌었다. 개명(改名)하는 일은 고대에 흔히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름이 그 소유자의 개성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이 되었으며, “빼앗는 자”라는 뜻의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던 밤이 지난 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 되었다(창 17:5; 32:28).
에브라임의 또 다른 훌륭한 자손은 그의 딸 세에라였는데, 그는 두 도성을 건축하였다(대상 7:24).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의 소생은 아니었으나 지역 상으로는 에브라임 산지 출신이었다(삼상 1:1). 한나가 제사장 엘리에게 사무엘을 맡긴 곳은 실로에서였다(삼상 2:24-28). 사무엘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무엘처럼 길고도 유용한 생애를 보내며 수많은 봉사를 한 사람도 흔하지 않다. 그는 제사장 족속인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서(대상 6:34, 43) 제사장의 직무도 수행하였다(삼상 7:9). 그는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삼상 7:15). 또한 그는 위대한 교육자로서 선지자 학교를 설립하였다. 어렸을 때에 예언의 영을 받았으며(삼상 3:1-21), 성경의 한 부분을 그가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족속으로서의 에브라임은 많은 장점이 있었으나, 그 유익을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들은 매우 시샘이 많고, 작은 일에도 항상 민감하였다(삿 8:1; 삼하 19:41-43).
솔로몬이 죽고 난 뒤, 왕국은 분열되었으며, 그 때로부터 에브라임의 역사는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되었다.
그들의 첫 번째 임금인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족속이었다(왕상 11:26). 르호보암의 손에서 나라를 찢어내어 10 지파를 여호보암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며(왕상 11:29-31), 만일 그가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다면 에브라임에 대하여 전혀 다른 역사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여로보암에게 영향을 끼쳐 금 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움으로 우상 숭배 제도를 세우게 한 것은, 그 지파의 역사를 망치게 했던 그 동일한 시기와 의심의 정신이었다(왕상 12:26-33). 여호와께서 경고의 기별을 보내시고 왕의 앞에서 이적까지 행하였으나(왕상 13:1-6), 여로보암은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였다(왕상 13:33).
불손함으로 내리막길로 향하면서 시기심이 많던 에브라임 족속을 성공의 정점-그들의 지도자가 국가의 지도자였으며, 예배의 중심인 실로는 그들의 경계 안에 있었다-으로부터 갑작스럽게 포로가 되어 성장하던 길목을 막아 완전한 망각 속으로 빠져들게 한 것보다 더욱 슬픈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족속에게 가장 애처로운 기별을 주셨다. 호세아의 증언들 가운데 대부분은 에브라임이 회개하도록 외치는 탄원이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줄, 곧 사람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호 11:3-5).
호세아는 에브라임의 멸망 원인을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호 7:8)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은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과 황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었고, 그는 하나님의 사물에 대한 철저한 경험을 갖지 못하였다. 세상의 부와 명성을 추구하는데 힘을 쓰면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사는 자는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에브라임에게 호소하셨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호 11:8).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
우상 숭배는 에브라임의 큰 죄악이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물들을 식별하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호소를 거절한 후에 임한 말씀은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호 4:17),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니”(호 9:17)라는 말씀이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아니하였다.
오늘날 세상에는 에브라임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걷는 우상 숭배자들이 많이 있다. 현대인들은 금속이나 나무 혹은 돌로 만들어진 우상들을 섬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의 인기있는 신들은 그러한 형태의 것이 아니라 금전과 부와 연락과 높은 지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고 계시지만 저들은 에브라임처럼 저들의 우상과 합하였다. 고대의 에브라임 족속처럼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로 여겨지지만, 극장이나 유흥지가 기도의 집보다 더욱 매력적이며, 성도들과의 교제보다는 세속적인 사교가 더욱 즐겁게 여겨진다. 저들은 언젠가는 앗수르나 바벨론의 왕들보다 더 크신 왕에 의해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모든 왕들 중에 가장 위대하신 왕께서 일어나사 무섭게 땅을 진동시킬 것이다.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는 그의 위엄과 그 장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사 2:20-21).
단(Dan)은 야곱의 다섯째 아들이며, 그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강한 족속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는 용사들이 단의 깃발 아래 모여 정렬하였다(민 26:42-43). 어떤 이유 때문에 커다란 단 지파는 분깃의 가장 작은 몫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때맞춰 그들은 북으로 진격하여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수 19:47). 여로보암은 금 송아지들을 만들어 하나는 에브라임 영토 내의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의 도성에 두게 하여 단 족속도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 여로보암 이전에도 단 자손이 새긴 우상을 섬겼음을 알 수 있다(삿 18:30).
성막이 광야에 세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의 오홀리압에게 지혜를 주셔서 “공교한 일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였으며(출 31:3- 6), 같은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출 35:34). 이 재주를 계속 소유하고 있던 단 족속들은 부요한 도성 두로에 매력을 느껴 그 거민들과 혼인하게 되었다(왕상 7:13-14). “브사렐과 오홀리압 … 이 장인(匠人)들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부여되었던 재능들을 많이 물려받았다. 유다 지파와 단 지파에 속하는 이 사람들은 한 동안 겸손과 무아심을 유지하였다”(PK, 62).
여러 해가 지나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 왕 히람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여 금과 은과 놋 일을 공교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선조들에게 주신 재능을 그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단의 자손 한 사람을 보냈다(대하 2:13-14).
단 족속은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 족속들 가운데서 자기 위치를 여전히 지키고 있었으나(대상 27:22), 그 후로는 지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서는 사라지고, 단지 북쪽에 있는 도성을 가리킬 때를 제외하고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삼손은 단 지파에서 나온 유일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을 20년간 다스렸다(삿 13:2; 15:20).
야곱이 단에게 축복을 내릴 때, 그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6-17). 르우벤에게 선포한 축복처럼 앞 부분에서는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그의 첩경을 따라 기회를 잘 포착했더라면 소유했을 그의 성격을 묘사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명예를 얻는 재판장과 지나는 길손의 몸 속으로 사망의 고통을 넣기 위해 길가에 숨어있는 뱀과는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가!
단은 첩들에게서 난 첫번째 아들이었으나, 연로한 족장은 그에게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영예로운 자리를 주었다. 마땅히 훌륭한 심판을 내릴 신속하고 예리한 분별력을 부여받았으나, 그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그 재능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선을 찾아내는 대신에 악을 찾아내는 데 사용하였다.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 49:17). 악한 혀의 묘사로 “지옥불에서 나”며,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8)는 표현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겠는가? 독사가 말의 말굽을 공격한다 하였으니, 단은 뒤에서 무는 자 곧 참소하는 자를 표상한다. 이러한 성격들은 사람이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들이다. 주께서는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시 101:5)이라고 말씀하신다. 야곱의 예언적인 말은 어찌하여 단 지파에게 영원한 유업의 몫이 없는지를 알려준다. 단 족속이 저들의 악한 행위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참소하는 자는 시온 산에 설 수 없다고 선포하셨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리이까?”(시 15:1). 말하자면 “누가 당신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섬기며, 누가 시온 산에 당신과 함께 서리이까?”하는 것이다.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며, 그 벗에게 행악치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시 15:3) 자라야 설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이다.
르우벤은 크게 마음을 살핌으로 물같이 불안정한 자신의 본성을 극복하여, “르우벤이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레위는 아버지가 내린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다. 유다는 매일의 생애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자기 형제들보다 승하여, 운명하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라는 말을 듣기까지 하였다. 갓은 비록 큰 시험에 빠지기는 하였지만, 마침내 승리를 얻는 자가 되었으며, 물어뜯는 이리였던 베냐민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를 배워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신 33:12)라는 말을 들었다. 아셀은 “그 발이 기름에 잠기”게(신 33:24) 하는 법을 배워 하나님의 신의 도움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을 가볍게 통과하였다.
에브라임과 단은, 그들의 성품 가운데 있는 악한 특성을 극복함에 있어서 다른 형제들과 꼭 같은 기회를 가졌었으나 승리를 얻는 일에 실패함으로, 하나님의 성산에 서며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144,000 가운데 계수되지 못하게 되었다.
지상에 사는 모든 가족들 가운데 오늘날도 똑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난 형제들이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에서처럼 그들을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두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똑 같은 태양과 바람이 곡창의 황금빛 이삭을 영글게 하며, 마지막에 멸망받을 가라지도 영글게 한다. 마찬가지로 빛의 아버지께서 매일 주시는 똑 같은 축복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성숙하게 하며, 다른 영혼에게는 최후의 심판을 위해 성장하게 한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성품을 쌓아 가고 있는 건축가이다. “나를 앙망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초청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바라봄으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은 변화될 것이다. 날마다 그 영혼 속에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이 변화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천사들을 경탄하게 할 것이다.
인간의 모양을 옷입으시고 지상을 거니셨던 그 동일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께서 들어오시도록 초청하는 모든 자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명상하며, 그분의 죄없는 생애를 연구하는 자들은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고후 3:18)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제자 속에 당신의 초상(肖像)을 그리도록 좌정해 계신다”(“Christ is sitting for His portrait in every disciple”). 가련하고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신성한 성품을 반영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흠없는 의의 두루마기로 상처 투성이의 인생을 덮으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개개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과 천사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의 온전한 성품만을 보며, 영원히 끊이지 않는 세대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증거할 것이다.
십사만사천인 (144,000)
창세기가 시작의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종결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기자들에 의하여 주어진 가장 중요한 진리들이 요한계시록에서 만난다.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도 그 지파의 마지막 대표자들이 영원한 왕국의 시온 산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계 14:1).
여호와의 구속을 받은 자들은 아무도 셀 수 없는 무수한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리들 가운데 특별히 계수되고 그들의 수-144,000-로써 지칭된, 일단 따로 분리된 무리가 있다. 이 무리는 각기 다른 12 부류로 이루어졌는데, 각 부류는 12,000명의 구속함을 받은 영혼들로 채워져 있으며, 각 부류는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 한 이름씩을 가지고 있다(계 7:4-8).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 명단은 야곱의 12 아들의 명단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단이 빠지고 대신 요셉의 장자 므낫세가 들어 있다.
이 무리는 남다른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온 산에 서서(계 14:1),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게(계 14:4) 된다. 그들은 하늘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가지며(계 7:15), 모든 구속된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고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들이다(계 14:5).
큰 추수자인 사망은 조용한 무덤 속에 하나님의 성도들을 한 세대씩 뉘어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이 무덤을 충성된 자들의 궁극적인 종말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 13:14).
144,000은 지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다(계 14: 3, 4).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지상에 살아 있으며, 영광스러운 불멸의 몸을 입고 땅 속의 침실에서 나오는 셀 수 없는 무리들과 함께 하늘로 올리우게 될 것이다(살전 4:16-17).
144,000은 그들의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음으로써 다른 모든 구원받은 자들과는 구별된다. 이 인을 맞은 모든 사람이 이 무리 가운데 포함된다(계 7:2-4). 이 구별하는 표는 “아버지의 이름”(계 14:1)이라고 불려진다. 에스겔은 이와 똑 같은 일을 분명히 보았으며, 그것을 이마에 있는 “표”(標)라고 언급하였다(겔 9:4).
우리는 법적인 문서와 연관시킬 때, “인”(印)이라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인에는 문서를 발행하는 이의 이름과 직위 또는 권위, 그리고 통치하는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144,000의 이마에 찍힌 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다. 인은 법률이나 법적인 문서에 찍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인이 하나님의 율법에 찍혀져 있음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수 세대를 내다보면서 선지자 이사야는 하늘 성소로부터 지상에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는 한 백성을 보았으며,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별은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사 8:16)는 것이었다.
성경은 선지자들-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실 때 대변인으로 사용하신 거룩한 사람들-을 통하여 주어졌으나(벧후 1:20-21),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은 어떤 인간 대리자도 거치지 않고 주어졌다. 그 무수한 이스라엘 회중들, 곧 백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십계명이 선포되었을 때(신 4:10, 13, 32-33),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와, 수많은 하늘 존재들이 시내 산에 내려오셨다(시 68:17).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기록하는 일에 혹 실수가 있을까 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고, 무리가 듣는 가운데 말씀하셨던 그 동일한 십계명을 당신의 친수로 그 위에 기록하신 두 돌비를 주셨다(신 10:1-5; 출 31:18; 32:15, 19). 이 율법은 아담의 모든 자손이 그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표준이 될 것이다(약 2:10-12; 롬 2:12-13; 전 12:13-14).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에 당신의 인을 두심으로써 이 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이 율법의 구속력 있는 주장을 알게 하신 것이 사실인가? 인(印)은 첫째, 법을 공포한 자의 이름과; 둘째, 입법자가 가진 직위 또는 권위와; 셋째, 그가 다스리는 영역이 명시되어 있어야 함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율법 속에 있는 인을 살펴보도록 하자.
처음 세 계명과 다섯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만(출 20:3-7, 12) 다른 신들과의 구별이 없다(고전 8:5). 뒤에 있는 다섯 개의 계명들은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나타내고 있으나,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다(출 20:13-17).
넷째 계명은, 첫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이름과; 둘째,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므로 이 율법을 제정할 권리가 있다는 진술과; 셋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그분의 영토라는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출 20:8-11).
넷째 계명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토 안에 거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기념으로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주신 주일 중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한다(창 2:2-3).
안식일 계명은 율법의 인(印)을 포함하고 있다. “표징”이라는 말은 때때로 “인”이란 말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롬 4:11).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출 31:13, 16-17);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 20:12).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 2:2-3).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안식일은 그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징이며 인이다(사 58:13-14). 안식일을 올바로 준수하는 일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따른다.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는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겔 20:20).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숨겨졌던 암흑 시대 동안 하나님의 율법에서 그 인이 제거되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날인 주일 중 제1일 일요일(창 1:1-5)이 하나님께서 쉬신 날인 제7일 안식일(창 2:2-3)을 대신하고 말았다.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주께서는 한 세력이 일어나 하나님의 율법을 변개코자 할(단 7:25) 것을 보여주셨다. 이 법은 다니엘과 요한에 의해 언급된 기간인 1,260년간 이 세력의 손에 붙여질 것을 계시하셨다(단 7:25; 12:7; 계 11:2; 12:6; 13:5). 그 기간이 지나자 성경은 또 다시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고, 넷째 계명의 참 안식일이 회복되어 지켜지게 되었다. 율법의 무너진 곳이 보수되었으며(사 58:12) 율법은 그분의 다시 오심을 열심히 사모하는 자들인(사 8:16-17) 주의 제자들 가운데서 인친 바 되었다.
요한계시록 7:2에 보면, 이 인치는 기별은 동쪽 혹은 해돋는 데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인치는 사업을 해돋는 것처럼 처음에는 희미한 빛으로 시작하나 결국에는 온 땅을 비추기까지 자라나게 될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 사업이 완수될 때까지 네 천사는 네 바람을 붙잡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람은 전쟁을 상징한다(단 11:40). 이를 성취시킴에 있어서 우리들은 세계사의 어떤 기간 동안 전쟁의 바람이 신비스럽게 제어되고, 그 동안에 하나님의 율법에 인을 회복시키는 사업이 이 땅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찾아내도록 기대해야 한다.
지상에는 항상 제칠일 안식일 준수자들이 존재해 왔으나, 율법 가운데 무너진 곳을 수보하는 사업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에 의하여 1845년에 시작되었다. 1844년 가을, 주께서 오실 것으로 생각했던 시간이 지나가자,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실 것으로 기대했던 자들의 관심은 하늘 성소로 돌려졌으며, 여기에서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봉사하시는 구세주를 주목해 볼 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던(계 11:19) 것이다. 저들의 관심은 법궤 안에 있는 율법(출 25:16)으로 이끌렸으며, 그들 가운데 몇몇은 여호와의 안식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를 율법의 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1847-1848년경에 안식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율법의 인으로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848년 유럽에는 수세기 동안 있었던 국가적인 사건들 가운데 가장 큰 것들 중의 하나가 일어났다. 결정적인 변화가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유럽에 있는 여러 왕국들이 백성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국제적인 전쟁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소동과 분쟁 가운데 갑작스런 고요가 깃들었다. 아무도 그 원인을 지적할 수 없었으나, 예언을 연구하는 학도는 하나님의 종들이 저들의 이마에 인침을 받기까지 천사들이 네 바람을 붙들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이마는 지성의 자리이다.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구속력 있는 주장을 깨닫고 시인할 때, 저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 하나님만이 마음을 읽으실 수 있기 때문에 천사들에 의해서 이마에 쳐진 그 인을 인간은 읽을 수가 없다. 단순히 일곱째 날에 모든 육체적인 노동을 쉬는 것만으로는 어느 누구의 이마에 인을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쉼은 필요하지만, 쉼과 함께 거룩하고도 성별된 날에 조화를 이루는 거룩하고도 성별된 생애가 함께 따라야 한다(사 58:13).
에스겔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죄로 인하여 슬퍼하고 있는 자들의 이마에 한 천사가 “표”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겔 9:1-4). 세상에 애정을 두고, 시온에서 안일하게 물결 따라 떠도는 사람들은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1-4의 인치는 사업인 안식일 개혁은 태양처럼 떠오른다. 수 년 동안 넷째 계명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 저기 세계의 도처에 개인적으로,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이 제칠일이 안식일임을 가르치며, 그리스도(눅 4:16; 마 5:17-18)와 사도들(눅 23:54-56; 행 17:2; 16:13; 18:4, 11)이 안식일을 지켰음을 발견하고, 안식일을 받아들이며(롬 3:19),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기념으로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주신 날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창조주로 공경하는 자들이 오늘날 세상의 모든 지역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갈 3:28).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접붙임을 받았다(롬 11:17-21; 갈 3:29). 144,000은 문자적으로 유대인의 후손일 필요는 없으나(롬 11:21-23),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은 자들이며 저들의 생애는 여호와의 거룩한 명령과 조화를 이룬 자들이다.
요한계시록 14:9-14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하게 될 한 세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세속의 세력을 수단으로 하여 백성들을 강압하려고 노력하는 표를 가지고 있다(계 13:13-18). 하나님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권의 표로서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므로, 주일 중 첫째 날, 곧 거짓 안식일인 일요일을 반대하는 세력의 표가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기념일이므로 주일 중 일곱째 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지만, 땅의 법은 모든 자들에게 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에 쉬라고 명한다(계 13:16-17).
이러한 시험이 닥쳐오게 될 때, 각 사람은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처럼 재판관 앞에 서며 투옥을 당하게 될 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고 말할 것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이 싸움은 곧 사단이 교회를 인해 심히 분노하여,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울”(계 12:17)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투쟁으로부터 144,000이 모이게 될 것이다. 저들의 경험은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의 경험과 흡사할 것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일에 쉬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경고를 “거짓말”이라 하였으며(출 5:9), 애덤 클라크(Adam Clarke) 박사가 표현한 바와 같이, 바로는 “종교는 내버려두고, 너희 일에나 전념하라”고 했다.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에게 쉬는 것을 가르침으로 불평한 바로는 “당일에”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소용되는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라”(출 5:5-6)고 명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역은 더욱 크게 증가하였다(출 5:7, 8). 사단은 여호와의 안식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경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를 멸망시키셨다(출 14:19-31).
지상에서 144,000을 구별하는 표는 이마에 있는 하나님의 인이고, 하늘에서 그것은 저들이 부를 놀라운 다음과 같은 노래일 것이다: “저희가 보좌에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계 15:3). 이 노래는 아름다운 선율로 이뤄진 경험의 노래이다. 이 노래가 하늘 문들을 통하여 울려 퍼질 때, 어떤 천사도 이 놀라운 찬양에 동참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도 그의 모든 믿음을 가지고라도 이 노래에 가담하지 못한다. 144,000인이 완전한 음조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찬양일까!
홍해를 건넌 후에 12 지파가 모두 연합하여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마지막 대표자들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진 유리 바닷가에 서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요 약
♤ 144,000인은 그들의 이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印)을 받는다 (계 7:2-4).
♤ 그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다(계 15:2).
♤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다(계 14:3-4).
♤ 그들은 시온 산에 설 것이다(계 14:1).
♤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계 14:4).
♤ 그들은 다른 사람이 부르지 못하는 노래를 부른다(계 14:3).
♤ 하늘 성전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한다(계 7:15).
♤ 합법적인 문서에 찍힌 인에는 문서를 발행하는 자의 이름과 직위 또는 권위와 통치하는 영토가 적혀 있다.
♤ 하나님께서도 인을 갖고 계시며, 이 인은 하나님의 율법과 관계가있다(계7:3-4;사 8:16).
♤ 넷째 계명에는 하나님의 인이 들어 있다. 넷째 계명에는 그분의 이 름[여호와 하나님]과 권위[창조주]와 영토[그분께서 창조하신 하늘 과 땅]가 명시되어 있다(출 20:8-14).
♤ 표와 인은 같은 것을 뜻한다(롬 4:11).
♤ 안식일은 하나님의 율법의 표징 혹은 인이다(겔 20:12, 20).
♤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선언되어 있다(사 5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