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30년의 광야 생활의 거룩한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했던 세례 요한. 지나간 400년간의 성령의 사람도 없고, 계시가 침묵하고, 은혜가 고갈되고 사막화되어버린 백성들의 가슴. 다 졸며 다 자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들어 깨우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목이 쉬어 버린 세례 요한...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라고 인정받은 세례 요한을 직접 만났다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영적인 거장, 세코이아 나무처럼 영적인 거목을 대하는 느낌이다. 영적인 거장의 모습이다. 과거를 땅에 묻고 미래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담대히 외쳤던 세례 요한이 오늘은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다.
예수를 무대위로 자신은 뒤안길로 본문에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바로 세례 요한이 무대에서 내려오고 예수님께서 서서히 무대 위로 나오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던 세례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오직 예수님만을 주목하기를 원했다.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수님만 바라보라”라는 것이 요한의 메시지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믿음 생활이 무엇인가? 나는 날마다 쇠하기를 자처하고, 예수님은 날마다 흥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점점 작아지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점점 거대해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교회생활이다.
반복의 중요성 우리의 예배는 예수님만을 높여야 한다. 예수님만을 증거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요1: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1:35절에서 세례 요한은 그 다음날도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날짜는 바뀌어도 메시지는 동일했다. 처음 요한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날 똑같은 말씀을 증거했을때 37절에 보니까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하며 반응을 보였다. 날짜는 바뀌어도 메시지는 같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목하게 하라. 한 방울 한 방울의 일정한 낙수가 바위를 뚫는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는 그 즉시 회심을 하게되는 경우는 드물다. 한 방울 한 방울같은 메시지들이 헛되지 않고 언젠가는 심령의 가슴을 뚫어내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게 될 것이다.
실례: 어느 조사 기관이 낸 통계에 의하면 최근 예수를 믿는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당신은 몇 번째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평균적으로 네 명 이상으로부터 복음을 들었고, 주변에 열 네 명 이상이 기도해주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사단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낙심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간다. 침체에 빠뜨려서 사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낙심 속에 갇혀서는 안 된다. 영적인 은혜를 채우기 위해 내가 노력해야 한다. 은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힘이다. 예수 안에서 누리는 감격이다.
무엇을 구하느냐? 1:38절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좇아오는 동기를 물으셨다. 어떤 사람은 빵과 고기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따랐다. 어떤 사람은 병 고침받기 위해서 따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시는가? 무엇 때문에 예수를 찾는가?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어디서 살고 계시죠? 주소가 어디예요! 이 말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의미이다. 요한복음 12장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이 제일 사랑하는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예배의 삶이다.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서 하루를 지냈다. 그리고 나타난 일을 보라. 안드레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이다. 요1:41절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믿는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전하게 만든다. 43절에서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도 예수를 만난 후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45절에 나온다.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께 데려온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잇느냐”고 말하니까 “와보라”고 단호하게 선포했다. 빌립의 강력한 호소력 앞에 나다나엘은 예수께 이끌려 나아왔다. 나다나엘의 태도를 보라. 의심은 했으나 빌립이 전하는 예수를 향해 걸어 나왔다. 우리도 아직은 깊이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교회에 나와야 한다. 예배에 나와야 한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어떻게 해주셨나?
첫째로 인정해주셨다. 요한 1장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상하다. 나다나엘은 방금 전에 예수를 의심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고 비웃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자마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인정해주고 칭찬해 주었다. “네가 날 의심했어? 날 가난하고 초라한 동네 나사렛 출신이라고 놀렸냐? 너 혼 좀 나 볼래?”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다나엘이라고 왜 흠이 없었겠는가? 잘못한 일이 없었겠는가? 실수가 없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향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시고 인정해 주셨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면 노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구시대를 홍수 심판으로 끝내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실 때 노아를 선택했다. 그런데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행한 첫 번째 사건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실수였다. 지구촌에 달랑 자기 식구 8명만 남았으니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노아의 행동은 주책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노아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노아의 허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에게는 허물이 있고, 실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에 주님은 무엇을 보나?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아브라함은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거짓말하고 자기 목숨을 건지려는 비겁함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아브라함은 여전히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을 보신다. 믿음을 보여야 한다.
둘째로 십자가의 비밀을 알려 주셨다. 사도 요한은 1장에서부터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 사건 예고해 주고 있었다. 요한복음 1장 51절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인자 위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한다.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예고 하고 있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하나님의 사닥다리이셨다. 요한복음 14장 6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자의 십자가를 사닥다리삼아서 하늘로 들어가는 축복의 세계를 깨달아야 한다.
십자가의 비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히브리서 기자가 휘장을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주석하고 있다. 히브리서10장 19-20절을 보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9-10). 이날 이후로 우리는 율법의 거치는 것들을 다 뛰어 넘어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달려와도 거칠것이 없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가 전에는 선전 뜰에거 낭자하게 흐르는 짐승들의 피와 울음소리에 가슴을 치며 울던 죄인들이었다. 짐승을 죽여 번제로 드리면서도 내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며 긍휼을 구했던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성소에 들어갈 담력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야 한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야 한다. 피로 씻음 받은 죄 사함이 살아나야 한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려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10장 23-39절 말씀이다. 다같이 읽어보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