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相生)을 염원하는 소쩍새는 다시 운다.
-성북동 골짜기에 찾아드는 봄의 소리-
김 주 석
북한산남쪽끝자락 초록물감이 풀어진 골짜기에 짙은 어둠이 널려져 있는 야심한 밤이다.
한양도성 성벽을 끼고 있는 산기슭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이 7부 능선까지 올라타고 있는 사이로 낡은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고, 드문드문 방범등이 켜져 있는 가운데 차량의 불빛만 번쩍거리며 오가고 있다
어둠을 뚫고 어디선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소쩍 소쩍’ 우는 소리는 틀림없이 귀에 익은 소쩍새 울음소리 였다. 까마득히 먼 기억의 저편 고향의 밀봉된 추억들이 되살아나면서 진한 그리움으로 닥아 왔다. 매정한 인간들은 관심 밖으로 무심히 지나치고 있으나 소쩍새는 변함없이 우리 곁에 다가와 자신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울음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우선 대 도시 작은 숲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경이롭고 대견하였다. 이와 함께 이 울음소리는 긴 겨울을 외롭게 연명하다 봄을 한 걸음에 불러내고 있어 뭔지 모르게 아련한 긴 여운의 노래와 같았다.
또한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회한(悔恨)의정이 깃들어 있는 가운데, 뭔가 이루어 놓고야 말겠다는 피맺힌 절규가 담겨져 있었다. 그런가하면 감성을 자극하는 은은한 내면의 소리도 느껴진다. 어쨌든 한밤에 듣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귀를 환하게 열리게 해주었다.
봄날에 우는 새는 대부분 수컷이 암컷을 부르는 소리라고 조류학자들은 말한다.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수컷의 존재감을 알리고 암컷을 끝임 없이 불러내고 있는 것으로 원초적인 본능에 의한 종족보존의 강한욕구 이면에 자연 속에 녹아드는 사랑의 찬가인 샘이다.
주변에 있는 새들 가운데 소쩍새는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사연을 간직하였기에 전설로도 전해지고 있다.
옛날 고단하고 굶주리든 시절, 못된 시어머니가 착한 며느리를 보고 “밥을 많이 하면 찬밥이 남으니 꼭 한번만 하거라” 하며 작은 솥을 며느리에게 주어 밥을 짓도록 하였다. 며느리는 작은 솥에 밥을 하면 식구들의 밥이 항상 부족해 누룽지를 긁어 부엌에 앉아 겨우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마저도 못마땅했든 시어머니는 쌀의 양을 줄이고, 더 작은 솥을 주어 밥을 하게 시켰다. 이후로 누룽지마저도 식구들에게 주게 되어 며느리는 먹을 밥이 없어 바가지에 물을 떠 마시며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며느리는 배가고파 굶어 죽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 집근처에 새 한마리가 날아와 “솥적다 솥적다” 하며 구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하다 배고파 죽은 며느리의 서럽고 한 많은 영혼이 새가되어 이같이 애달피 울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소쩍새가 ‘소쩍 소쩍’ 하고 울면 흉년이 들고, ‘솥적다 솥적다’ 하며 울게 되면 풍년이 든다고 했다. 이른 까닭으로 소쩍새를 풍년을 예고하는 풍년조(豊年鳥)라 부르기도 한다.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러한 소쩍새에 대하여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그중 고려시대 이조년이 지은 ‘다정가(多情歌)’를 적어본다.
다 정 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梨花 月白 三更天)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啼血 聲聲 怨杜鵑)
다정도 병인가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儘覺 多情 原是病 不關 人事不成眠)
새하얀 배꽃에 달빛이 하얗게 비추고 자정 무렵은 은하수가 저리도 펼쳐졌는데
배꽃이 핀 봄 가지를 보며 느끼는 내 마음을 소쩍새가 알고서 저리도 우는 것인지
이런 저런 생각과 정이 많은 것도 병인 것인지 오늘밤은 잠들지도 못 하겠내.
야심한밤 북한산 등성이를 넘어온 바람이 아카시아 꽃 향과 어우러져 향기롭고 달콤하였다. 이 꽃바람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말년에 살았든 심우장(尋牛莊)까지 퍼져 내려간다.
이맘때쯤이면 내 고향의 온산은 아카시아 꽃으로 뒤덮여 봄의 향연이 펼쳐진다.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긴 꽃자루에 뽀송뽀송한 꽃송이가 탐스럽게 피었다. 아카시아 흰 꽃은 화려하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지는 않지만 시골처녀처럼 청순하고 순후한 모습을 지닌다. 그러나 꽃 향만은 매혹적이면서 그윽하고 진하여 코끝이 얼얼할 정도로 후각을 마비시켜 취하게 하였다. 향긋한 꽃 내음이 진동하면 사방에서 벌과 나비 그리고 곤충들이 코를 벌렁거리고 ‘앵앵’ 그리며 몰려들어 양식으로 꿀을 따간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허기지든 시절 동내꼬맹이들은 뒷동산으로 우르르 몰려가 아카시아 꽃을 한 입 가득 물고 조근 조근 씹으면 꽃 속에 들어있는 달 부드레한 꿀맛과 상큼한꽃 향으로 입안은 달콤하면서 향긋하게 된다. 너덜너덜 해지고 서럽게 흔들리는 삶 가운데 그리움 너머로 보고 싶은 얼굴들이 흐릿하게 하나 둘 떠오르며 깊어가는 봄이 어느새 가슴을 파고 듣다. 그리고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서민들의 삶이 진하게 녹아있는 아카시아 꽃은 우리들이 어릴 때 애창했든 ‘동구 밖 과원 길’ 동요에도 담겨져 있다.
동 구 밖 과수원 길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 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생긋/ 아카시 꽃 활짝 핀/먼 먼 옛날의 과수원 길 그러나 우리들의 온산에 지천으로 널려있든 아카시아 나무가 근래 자꾸만 줄어들면서 밀원이 사라짐에 따라 꿀 벌 들의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이처럼 꿀벌들이 사라지는 후유증으로 각종 유실수나무와 식물들은 암수꽃가루교배가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하여 생태계의 큰 혼란을 일으키며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아카시아 꽃 향에 취해 잠시 몽롱해져 있든 순간 멀지 않은 수월암(水月庵)의 풍경소리가 ‘땡그랑 땡그랑’그리며 청아한 소리로 닥아 왔다. 바람으로 소리가 나기에 풍경(風磬)이란 이름이 지어 진 것이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온갖 상념을 가라앉히는 맑은 소리에 마음까지 청정해진다. 또한 삼경에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는 번뇌로 가득한 사바세계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널리 퍼지게 한다는 큰 뜻을 담고 있다. 어둠을 헤치고 밝고 새로운 염원을 추구하는 한줄기 생각이 얹히게 되면 그것으로 간절한 기도가 될 것이다.
계절의 여왕 5월, 성북동 계곡에 짚 푸른 물결이 너울거리는 숲속은 싱그러움이 전해진다. 그리고 서러움을 흔드는 소쩍새울음소리와 향긋한 아카시아꽃향기가 풍경소리와 어우러져 자연의 소리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으로 지속적인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가 자행된다면 작고 힘없는 것들은 사라지거나 내몰리게 되어 결국은 자연생태계가 불균형을 이루어 인간도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쩍새의 울음이 그치는 날에는 그리움이 사라지고 어둠의 그림자만 남게 될 것이다.
자연의 공간을 꾸준히 넓히고 가꾸어 다양한 동식물이 공생하며 살아간다면 인간도 이들과 함께 어울려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자연 속에 웅크리며 살고 있는 소쩍새의 ‘생명의 힘’ 에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변함없이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인간과 어우러져 상생(相生))과 친화(親和)로 살아가길 고대한다.\
약 력
김 주 석(金 柱 錫)
° 1998년 「순수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 노원문인협회회원 ,등마루회동인
° 수필집「반전의 미소」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