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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직한 역사를 위한, 나의 외침 원문보기 글쓴이: 이드
1899년에 일어난 미국-필리핀전쟁은 아시아에서 미국과 싸운 최초의 민족해방 투쟁이란 의미와 제국주의 미국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미국의 교과서는 말할 것 없고 필리핀에서도 그 실상이 왜곡되어 있다. 필리핀의 근세사는 한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필리핀의 독립전쟁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필리핀전쟁의 배경
필리핀의 수도는 마닐라(Manila)이며 언어는 타갈로그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인구는 2010년 기준 97,976,603명이고 300,000㎢의 면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족은 말레이인 96%, 기타 인도네시아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종교는 가톨릭(83%)이다. 그 외의 종교는 개신교 9%, 회교 5%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필리핀의 역사를 간략히 간추려 보자. 필리핀이 서구인들에게 노출되기 시작한 시기는 1521년 스페인의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하고 부터였다. 그리고 8년 후인 1529년 스페인은 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로부터 필리핀의 영유를 인정받는다. 본격적인 식민지 시기는 1565년 세부 섬에 식민지 기지를 건설하고 1571년 마닐라 시가 설치되면서 시작된다.
필리핀은 긴 세월 식민통치를 받은 때문인지 식민지 이전 역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900년 경 마닐라 만을 중심으로 중국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했던 ‘톤도 왕국’이 어느 정도 알려진 정도다. 스페인은 당초 토르데실라스 협약에 저촉하지 않고 향신료가 생산되는 곳을 찾아 필리핀을 정복했지만, 예상한 향료가 발견되지 않자 필리핀을 교역중계지로 취급하였다. 1573년 중국 교역품이 처음으로 멕시코까지 수출되는 갈레온 무역이 시작되었다. 갈레온 무역은 1년에 1척의 갈레온이 계절풍을 이용하여 마닐라에서 멕시코 아카풀코까지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이다.
아카풀코에서 카리브해 연안의 베라크루즈까지 무역중개로 아시아 물품을 유럽까지 보냈다. 또 1581년과 1582년에는 마닐라에서 남미 페루 부왕령의 칼라오까지 갈레온이 보내졌지만, 페루와 마닐라의 무역은 1631년에 금지되었다.
갈레온 무역에서 스페인의 결제는 멕시코 은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필리핀은 스페인 함대가 미군에 격퇴된 직후인 1898년 6월에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333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스페인은 이 기간 동안 34회 이상 필리핀인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자세한 과정은 생략한다.
미-스페인전쟁과 미-필리핀전쟁
필리핀인들이 자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던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 미-스페인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과 미-필리핀전쟁(War of Independence, Philippine–American War, 1899-1902), 이 두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룰 수밖에 없다.
19세기 마지막 분기에서, 미국은 강력한 산업 국가가 되었다. 대기업과 큰 사업체가 경제계와 정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자랑하는 "From Coast to Coast" 즉 대서양 해안에서 시작하여 태평양 해안까지 미 대륙 전부를 차지하지만, 미국의 대형 자본가들은 새로운 시장과 자본의 수출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타켓은 점차 쇠락해가고 있던 스페인 통치하의 식민지들이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이 쿠바를 지나치게 억압한다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아바나(하바나)항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함 메인호(USS Maine)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260여명의 해군들이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선정적인 언론들은 “메인호를 기억하자”(Remember the Maine!)면서 전쟁을 부추겼다. 미-스페인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폭발을 조사한 잠수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체가 안에서 밖으로 터져있었다고 하니 단순 사고 또는 자작극이었다. 이 사건이 자작극(false flag operation)이었음을 입증하는 발언이 있다. 1897년 당시 맥킨리 대통령이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해군차관으로 임명했을 때,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전쟁이든 환영한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즈벨트가 이 말을 한 1년 후 우연의 일치인지 메인 호 사건이 터진다. 루즈벨트는 1898년 2월, 함대를 홍콩으로 발진시켜 스페인에 항쟁 중인 필리핀을 접수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조지 듀이(George Dewey) 제독에게 지시한 바도 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승리하였다. 그 결과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카리브 해 연안의 푸에르토리코, 태평양의 괌, 그리고 필리핀을 미국이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미국과의 독립전쟁으로 전환하였다. “스페인의 왕 필립 2세 (Philip II 1527–1598)의 땅”이라는 뜻의 필리핀이라는 나라 이름처럼 필리핀은 비극의 땅이다. 스페인은 초대총독 미구엘 로페즈(Miguel López de Legazpi 1565-1572)로부터 마지막 총독 니콜라스 자라밀로(General Nicolas Jaramillo 1899-1898)까지 118명의 총독이 혹독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다. 필리핀이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스페인의 식민통치 말기 무렵인 19세기 중반부터다.
16세기 말 식민지로 전락해 3세기가 넘도록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오던 필리핀,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필리핀인들은 자신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과 민족주의에 점차 눈을 뜨게 되었고, 식민통치 하에서 점차적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1872년 2월 20일 필리핀 독립군들에 의해 카비테 스페인 군 무기고 습격과 스페인장교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스페인당국은 필리핀 신부 3명(자신토 사모라, 호세 불고스, 마리아노 고메스)을 포함하여 수많은 필리핀 애국지사를 처형한다. 그 이후 스페인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1872년, 20∼30대 초반의 부유하고 훌륭한 가문의 지식인 층들이 평화롭게 전개한 개혁운동(Propaganda Movement)은 책, 언론기사, 팸플릿, 대중연설 등을 통해 스페인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그 중 1889년 2월 15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창간된 “라 솔리다리다드(La Solidaridad)”가 스페인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1895년 11월 15일 자금부족으로 폐간되었다. 이러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중심에 호세 리살(Jose Rizal 1861-96)이 있었다.
호세 리살의 비폭력저항운동
호세 리살은 1861년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의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테네오데마닐라 대학, 산토토마스 대학 수학 후, 1882년 유학하여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리살은 전공 외에도 건축과 경제, 인류학, 사회학, 무술과 펜싱, 사격에도 조예가 깊었고 11개 언어를 구사한 재능 많은 시인이자 특파원, 소설가였다. 그는 스페인 식민통치하에서도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호세 리살은 스페인의 심장을 향해 펜대를 겨누었다. 그가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2년 유럽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부터였다.
필리핀의 독립영웅인 호세 리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1년 발행한 은화
그는 마닐라에서 필리핀민족동맹(Liga Filipina)을 결성, 비폭력저항운동을 전개했다. 1886년 타갈로그어로 발표된 첫 번째 소설『나에게 손대지 말라 Noli me tangere』등 수많은 작품은 필리핀 민중들에게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특히 스페인 관료들과 신부들의 직권남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Noli Me Tangere와 El Filibusterismo'는 1896년에 일어난 필리핀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처형 전날, 산티아고 요새에 갇혀 있을 때 지은 리살의 “마지막 이별” (Útimo adiós)은 19세기 스페인 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1892년 7월 7일, 보니파쇼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마닐라 톤도에 위치한 데오다토 아렐라노의 집에서 카티푸난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하면서 필리핀의 독립을 위한 무장혁명이 시작된다. 회원등급을 카티폰(핵심인물로 조직), 까왈, 바야니(애국자)로 나누어 관리했고, 조직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담했다.
1895년 4월 10일, 보니파쇼와 참모들은 몬탈반의 동굴에서 혁명의지를 다짐하며, 동굴벽에 “필리핀 독립만세”라는 구호와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몬탈반의 함성'을 실시했다.
보니파쇼 등 혁명지도자들은 일본과 호세 리살에게 카티푸난의 혁명 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재력가, 지식인 계층에게서 외면당한 카티푸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각의 빨간 바탕위에 ‘K.K.K'라고 적힌 카티푸난 혁명기를 만들어 투쟁했으며 농부들과 마닐라 지역의 노동자들도 카티푸난의 혁명 활동에 대거 가담하게 된다.
1896년 8월 19일, 테오도로 파티노의 밀고로 스페인당국은 수백 명의 카티푸난 조직원들과 애국자들을 투옥했다. 1896년 8월 30일, 보니파쇼와 800여명의 혁명군은 산후안 델몬테의 스페인 군 무기고를 최초로 습격한다. 비록 열악한 무기와 전투경험의 부족으로 패하였지만 그들의 반 스페인 투쟁은 필리핀 군도 전역을 혁명의 열기로 들끓게 만들었다.
리살은 카티푸난과 무관했고 폭동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나 체포되었다. 리살의 노선은 철저히 비폭력 평화적인 투쟁이었으나 독립운동의 싹이 커질 것을 우려한 스페인 식민당국은 카티푸난 폭동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해 공개 처형했다. 그의 나이 35세일 때다.
그가 처형당한 12월 30일은 “호세 리살의 날”로 기념되고 있으며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로하스 거리에는 그를 추모해 세운 리살 공원과 그의 동상이 있다. 호세 리살의 희생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기날도의 무력항쟁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오랜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또 다시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98년부터 1902년까지 계속된 독립전쟁에서 수많은 군인, 시민들이 직접 혹 간접적으로 사망하였다. 이 무렵 등장한 인물이 필리핀 건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1964)이다.
아기날도는 1895년 카비테 시장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카티푸난 조직에 참여했다. 그는 국가적 영웅 호세 리살의 처형에 대응하여 다른 반란들을 이끌었다. 그가 이끌었던 필리핀 해방군은 1896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전개된 카비테 비나카얀 전투에서 스페인의 라몬 블랑코 총독부대를 대파하는 첫 승을 거둔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하지만 보니파쇼(Andres Bonifacio, 1863-1897)가 1897년 5월 10일 분티스 산에서 총살당한다. 이후 스페인군에 밀려 도망 다니던 아기날도와 혁명정부는 불라칸의 비악-나-바토(Biak-na-Bato)에 숨어 1897년 11월 1일 헌법을 제정하고 비악-나-바토 공화국을 수립하며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베라 총독의 평화제의를 받아들인 아기날도는 1897년 12월 14일과 15일 양일간 만나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합의사항에 따라 홍콩으로 망명하면서 비악-나-바토 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 전쟁피해 보상금인 170만 페소 중 60만 페소만을 받았고, 혁명전투 또한 계속되어 평화협정은 준수되지 않았다.
아기날도와 그 추종자들은 홍콩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이 추방으로 독립운동이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1898년 4월 25일 스페인과 미국 간 전투가 발발하자 홍콩에 있던 듀이 해군 준장이 코레히도르 섬을 통해 마닐라 만으로 들어와 스페인 해군을 대파했다. 듀이장군의 마닐라 만 전투 승리 후 아기날도와 혁명지도자들은 1898년 5월 19일 카비테로 돌아와 스페인과의 투쟁 재개를 선언한다.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 정부는 수천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카비테의 카윗에서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다. 아기날도 자택의 발코니에서 리안자레스 바우티스트가 자신이 직접 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으며 그날 아기날도는 최초로 필리핀 국기를 선보였고 필리핀 국가도 최초로 연주되었다. 필리핀 국기는 필리핀 외교관 펠리페 아콘실로의 아내인 마르셀라 아콘실이 홍콩에서 만들었으며, 필리핀 국가는 당시 카비테의 음악교사였던 훌리만 펠리페가 작곡했다. 1898년 8월 필리핀에 도착한 미군은 3만 명의 필리핀군이 14마일에 걸쳐 참호를 파고 마닐라를 포위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루손섬에서 아기날도가 이끄는 필리핀 해방군이 스페인인들을 몰아냈던 것이다. 필리핀군과 합류한 미군은 참호 조성 작업의 일부에 가담하였다.
배신의 서곡-미제국과 스페인의 동맹
이 무렵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전쟁이 스페인의 패배로 결정이 나자, 스페인 잔류군은 미국과 비밀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과 가짜 전쟁을 하기로 몰래 약속했다. 필리핀인들은 미국과 함께 싸우려고 했으나 미국은 어떤 필리핀인들도 도시 안으로의 진입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스페인군은 어떤 필리핀인도 도시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미국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인들은 도시 밖에서 도시를 포위한 채로 남겨지자 격노하였다. 미군은 필리핀인들을 향해 방어선을 만들었다. 아기날도는 평화 유지를 원했으나 미군 사령관 오티스(Elwell Otis)는 필리핀과의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였고, 미국과 필리핀군 사이엔 긴장이 흘렀다.
동맹군이 침략군으로 변신하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Treaty of Paris)에 서명한 미국과 스페인은 필리핀·괌·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양도하고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가로 스페인에 2천만 불을 지불한다. 이 무렵 필리핀 혁명정부는 1899년 1월 21일 마닐라 북쪽에 위치한 말로로스(Malolos)에 모여 헌법을 공포하고, 이틀 후 아기날도가 신임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해 2월부터 혁명정부는 미국군과 무력전을 벌이면서 3년간에 걸쳐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1901년 3월 아기날도가 체포되면서 항복하게 된다. 아기날도는 혁명군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을 명하였지만 혁명군의 무력항쟁은 1903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파리조약 조인 몇 달 후 미국대통령 맥킨리는 “미국이 침략자나 정복자가 아닌 친구로서 왔다”며 자비로운 합병을 선언한다. 필리핀인들이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독립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긴장이 높아가는 가운데 1899년 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마닐라 점령 후 시(市)의 외곽선을 계속 새로 그려가면서 필리핀인들을 시 바깥으로 몰아냈다. 파리조약에 동의하지 않은 필리핀인들은 매우 화가 나 있었고, 미국의 행위는 필리핀인들에게 혼란과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아기날도는 미군정 총독 오티스에게 평화를 요구하였으나 오티스는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고 험상궂게 말할 뿐이었다. 3시간 후 미군 포병대는 강력한 포격을 실시했고 5천 명의 미군이 필리핀군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3천 명의 필리핀군이 죽었다.
수백 명의 필리핀인들이 파시그(Pasig)강을 헤엄치다 죽었는데 한 미국병사가 이를 다음과 같이 지꺼렸다. "깜둥이를 물속에 빠뜨리는 것은 칠면조 쏘기보다 더 재밌었다" 미군은 단지 6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이다. 2월 5일의 전투는 미국인들에게 야훼의 계시였다. 그들은 이 잡종(雜種) 무리들이 첫 번째 발포에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이 첫 번째 포격이 있던 장소에 내가 있었던 것은 나의 행운이다. 미군은 그때까지도 대포를 검사하는 중이었다. 우리들의 포병대는 그러고 나서 적에게 강력한 포격을 시작하였다. 이후 테네시와 네브라스카 연대는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파리협정은 곧 의회에서 비준되었고 공식적으로 필리핀은 미국의 소유임이 선포됐다.
침략군 미군의 소탕작전
필리핀과 미국의 독립전쟁 첫날인 1899년 2월 5일 싼타 아나(Santa Ana) 근처에서 미군에 의해 학살된 필리핀 독립군들의 처참한 모습
아기날도의 독립 운동 단체는 스페인 점령 시절보다 더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다. 미국 역시 스페인과의 전쟁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기날도의 군대는 몇 달간에 걸쳐 서서히 땅을 잃어갔고 마닐라에서 멀리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루손 섬에 이어 세부 섬, 파나이 섬 등을 연이어 함락했다. 그러나 미국의 승리는 제한적이었다.
루손 섬 전투에서 미국-스페인전쟁보다 더 오랜 기간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미군은 마닐라 남북의 30마일정도만 점령했을 뿐이다. 칼룸핏(Calumpit)에서도 미군은 승리했으나 해군이 너무 빨리 공격하는 바람에 많은 필리핀군이 미국의 덫에서 빠져나와 남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6월 12일 아기날도의 라이벌이었던 루나(Antonio Luna)가 아기날도를 따르던 필리핀인에게 암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이미 밀리고 있던 필리핀군에 치명타가 되었다. 미군은 계속해서 아기날도 군을 북으로 몰아붙였고 12월 그를 거의 포위하였다. 산 속까지 추격당한 아기날도는 청년 장군 필라(Gregorio del Pilar)와 60명의 결사대를 티라드(Tirad)통로에 남기고 퇴각하였다. 이들 60명은 33미군보병연대와 결전을 치르게 되는데 7명만이 살아서 퇴각했다. 필라는 피살되었고, 33연대는 그의 사체를 벌거벗겨서 야산에 버렸다. 나중에 미군은 다시 시체를 찾아서 영웅적인 저항에 경의를 표하며 군사의식 속에 매장한다.
필리핀독립군 게릴라군으로 변신하다.
미군은 아기날도를 놓쳤으나 티로나(Danilo Tirona) 휘하의 필리핀군 1,100명이 항복하였다. 2주 후 미국장군(Henry Lawton 1843–1899)이 마닐라 외곽의 산 마에토 전투에서 전사하였지만 계속적인 패배로 필리핀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그러자 1900년 초 아기날도는 전통적인 전쟁을 포기하고 게릴라 전투를 하기로 결정한다.
3월 17일 미군은 보홀(Bohol)섬을 점령했으나 필리핀군이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미군의 점령 계획을 어렵게 만들었다. 전진은 매우 느렸고 결국 오티스 장군은 아더 맥아더장군으로 5월 2일 교체된다.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민간통치를 준비하기 위하여 태프트 위원회가 6월 달에 도착했다. 이에 의해 미국의 무력우위를 확인한 일부 필리핀인들이 미국과의 협력을 하기 위해 Partido Federal을 만들게 된다.
미국은 이 친미단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필리핀의 필리핀인 공직은 이 Partido Federal 의 회원들에게만 주면서 친미파를 지원한다. 1901년 2월 2일 공식적으로 Partido Federal이 출범함과 동시에 파나이의 필리핀군이 항복하였다. 5월 8일 보홀섬 로노이(Lonoy)전투에서 미국은 대승을 거두었다. 로노이의 대학살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가장 잔인한 전투 중 하나였다. 1901년 3월 미국은 보올섬의 자그나와 로노이에 2개의 강력한 기지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군인들이 필리핀 독립군들을 잡아 목매달아 죽이고 있다.
카세나스(Gregorio Casenas)가 지휘한 필리핀군은 좁은 길을 따라 매복을 준비했다.
그러나 필리핀인 살라스(Francisco Salas)의 배신으로 미국은 이 매복을 알았고 살라스는 미군을 후방으로 몰래 잠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참호에 사로잡힌 필리핀군은 포격과 총검으로 살해당하였다. 미군은 항복하는 필리핀인들도 모조리 사살하였다. 단지 7명만이 살아남고 필리핀군은 모두 전멸 당했다.
아기날도의 체포
아기날도는 루손 섬에서 프레더릭 펀스턴에게 사로잡혔다.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아기날도를 잡기위해 노력했으나 계속 실패하였고 아기날도는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 후 1901년 3월 아기날도는 루손 섬의 북쪽 팔라낭 마을에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의 고립성과 산악지형이 미국의 공격을 무력화시키자 펀스턴은 음모를 꾸몄다.
펀스턴(Frederick Funston)은 더 많은 병력을 요구하는 문서를 지닌 필리핀 연락병을 잡았다. 그는 81명의 ‘마카베베’족(族)을 그 병력으로 위장시켰다. 마카베베 족은 팜팡가(Pampanga)섬의 원주민이었지만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배에 찬동했다. 그들은 스페인군과 미군에 참여하여 수많은 학살과 강간을 행했다.
마카베베 족 5,000 명이 미군에 참여했으며 이는 미군의 5∼6% 가량을 차지했다. 그리고 펀스턴과 다른 4명의 미국인이 포로인 것처럼 꾸몄다. 5월 6일 이 그룹은 Casiguran만으로 향하였고, 아기날도 캠프에서 50마일 떨어진 빅스버그에 상륙했다. 아기날도의 본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마카베베족은 그들이 5명의 미국인을 잡아서 달아나고 있다고 주민들에게 말했고, 이에 속은 주민들이 그들을 환대하고 아기날도의 캠프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본부에 5마일까지 접근한 일행은 메시지를 아기날도에게 보냈다. 아기날도가 필리핀인은 계속 들어오고 미국인들을 아기날도 군에게 보내라고 했다. 예기치 못한 반응으로 인해 미군의 음모에 장애가 발생했으나, 마카베베 족의 리더인 플라시도(Hilario Placido)는 메시지를 위조하여 미국인들을 캠프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미국인들이 캠프 밖에 숨고, 3월 23일 마카베베 족이 캠프에 도착한 그날은 마침 아기날도의 32번째 생일날이었다. 아기날도는 이들에게 축제를 즐기라고 하였고, 바로 이 때 플라시도는 신호를 보내 아기날도 호위대를 사살하였다. 미국인들도 즉시 무기를 잡고 본부로 돌격하였다.
펀스턴은 충격 받은 아기날도를 사로잡았고 나머지 무리는 달아났다. 빅스버그로 돌아간 이들은 마닐라로 향했다. 한편 아기날도는 잔류군을 항복시키라는 강력한 압력을 받았고, 그는 결국 다른 장군들에게 항복하라는 설득을 하였다. 이리하여 알레얀드리노, 티니오, 루콘, 카일레스, 산디코 그리고 아버지인 아길파이와 형인 발더모까지 모두 항복하였다. 저항은 바탕가와 사마르에서만 남게 되었고 미국인들은 승리를 축하했다. 1901년 3월경이었다.
계속된 저항과 미군의 인종청소
미국이 아기날도를 도와 스페인과 함께 싸울 때는 그를 가리켜 필리핀의 조지 워싱턴이라는 영웅 칭호를 붙여가면서 찬양했으나 막상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한 후에는 그를 가리켜 워싱턴의 탈을 쓴 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체포에 열을 올렸다. 미국은 스페인군과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아기날도를 이용한 것뿐이다. 이에 아기날도가 이끄는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미군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벌인 것이다.
아기날도가 체포된 이후에도 미구엘 말바르가 아기날도의 자리를 이어받아, 필리핀 독립군은 끊임없이 저항하였다. 미국의 지휘권도 바뀌어 7월 4일 행정권은 태프트에게 군사권은 애드너 채피(Adna Chaffee) 장군에게 이양된다. 그리고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되자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는데 루즈벨트와 미군은 필리핀에 대한 채피의 강경책을 열렬히 지지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미군은 포로로 잡힌 게릴라들을 살인자로 취급하여 전원을 즉결 처형시키는 보복행위를 저질렀다. 미국은 유럽과의 전쟁에서도 저지르지 않았던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과 포악한 만행을 필리핀 사람들에게 저질렀다. 미군이 게릴라전을 치르는 동안 어떤 마을은 송두리째 파괴하고 주민들을 강제 수용소로 소개시키는 등 미군은 필리핀 사람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하고 살인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여러 자료가 증명하고 있다. 또 미국은 필리핀 게릴라들을 전쟁포로가 아닌 전범자로 취급하여 모두 처형해버리는 끔찍한 살인행위를 저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영국·프랑스·스페인과의 전쟁에서는 포로로 잡힌 군인들에게 인간대우를 해주었으나, 누런 색깔의 피부를 가진 필리핀 군인들과 민간인들은 문명을 갖지 않은 야만인으로 취급한 것이다.
필리핀독립군의 작은 승리와 발랑기가 학살
미군들에 의한 타이타이 학살 때 자신들이 불태운 성당의 종들을 전리품이라며 앞에 놓고 찍은 기념사진. 이 종들 중 하나는 이 전투에 참가한 미2사단인 한국 의정부 주둔 미군 부대 안에 전시되어 있다. 이 종을 돌려 달라는 필리핀 의회의 결의와 요청에도 반환하지 않고 계속 전시하고 있다.
최근 필리핀 국회의원들이 100여 년 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던 기간 동안에 필리핀 중부 사마르 주의 한 가톨릭 성당에서 가져간 교회 종 3개의 반환을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테오도로 카시노, 네리 콜메나레스, 벤 에바르도네 등 국회의원 3인은 미국이 필리핀-미국 전쟁 동안 저지른 “역사적 죄악을 바로 잡기 위해” 미국이 종교 예술품들을 반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발랑기가 종’은 1901년 미군이 사마르 섬의 발랑기가(Balanggiga)마을에서 탈취해 간 것이다.
1901년 8월 11일, 9연대의 C중대는 사마르의 발랑기가 마을로 향했다. 이 군대는 코넬(Thomas W. Connell)이 지휘했는데 이 자는 에이레계 가톨릭교도로 마을을 가톨릭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원주민을 고용했고 이중에 룩반(Vicente Lukbán 1860-1916)이라는 병사도 포함됐다.
9월 26일 밤 옷을 잔뜩 껴입은 여자들이 마을의 교회로 조그만 관을 운반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미군이 관을 열자 관에는 콜레라로 죽은 아이들이 나왔다. 하지만 관에는 칼들이 숨겨져 있었고 많은 여자들이 실제로는 남자였다.
다음날 아침 지휘자 페드로 산체스가 한 보초와 이야기를 나눈 뒤 총성이 울렸다. 이를 신호로 교회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칼과 도끼 그리고 삽으로 미군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했다. 미군은 코넬의 명령에 따라 보초와 장교들만이 무장하고 있어서 단체로 식사를 하던 많은 미군들이 죽었다.
미군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코넬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다. 브레튼이 지휘하는 그룹이 간신히 무기를 확보하였고 그들은 즉시 필리핀인들 250명을 사살하였다. 미군의 경우, C중대원 중 59명이 죽었고 23명이 부상하여 6명만이 무사하였다.
생존자들이 바세이에 도착하자 북밀러(Bookmiller) 중령은 55명의 자원자와 함께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마을과 해안근처의 필리핀인들을 모두 사살했다. 그들은 마을에서 동료들의 시체가 난도질당한 것을 보았거나 승리를 축하했던 필리핀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스스로 땅을 파야했고 미군은 그들을 모두 매장했다. 나머지 필리핀인들의 시체는 모두 모아서 불태웠고 마을을 아예 없애버렸다.
이 사건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매우 격앙된 미군들은 이후 전법을 초토화전과 대규모 학살전으로 바꾼다. 이리하여 이후 일상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게 되었다.
채피(Chaffee)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잔인한 수단들을 모두 승인했고 잔인성은 이후 전쟁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10월에 세부 섬이 항복하였고 12월엔 바홀 섬이 함락되었다. 1902년 룩반(Lukban)이 사로잡혔고 사마르 섬의 항쟁은 끝이 났다.
루손 섬의 전쟁이 끝나갈 때 프랭클린 밴은 악명 높은 작전을 실행하였다. 모든 시민들은 특정 도시로 소집되었고 이 도시들은 교도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밖에 있는 모든 마을과 집들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4월 16일 말바르 섬이 함락되었고 7월 4일 프랭클린은 전쟁 종결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 전쟁 중 엄청나게 많은 잔학행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바탕가스 대학살(batangns massacre)
1901년 바탕가스는 저항이 지속되는 최후의 지역 중 하나였다. 사무엘 서머장군은 남루손의 1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러자 1901년 11월 30일 벨(Franklin J. Bell)로 지휘관이 교체되었다. 벨은 비교적 서머보다 덜 잔인했으나 벨도 북 루손에서 잔학함을 과시한 인물이다. 벨은 자신이 북루손에서 한 것과 같은 방법을 이용했다. 12월 8일 벨은 필리핀인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만든 후 몇몇 마을을 선택하여 그곳에 모든 주민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죽음의 선을 그려놓고 이 선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 죽여 버렸다. 사람·집·동물·가게·배·농작물 등을 모조리 태워버려 민간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어버리고 저항세력의 공급을 차단했다. 1902년 1월부터 4월까지 4000명의 미군들이 이 존(ZONE)의 바깥을 경비 하였고 다른 반쪽이 그 외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 기간 중 8,350명의 필리핀인이 존에서 사망했다.
조그만 지역에 사람들을 모아놓다 보니 위생이 엉망이 되었고 식량부족으로 사망자들이 또 발생했다. 캠프는 길이가 2마일 폭이 1마일이었는데 여기에 8천명의 필리핀이 살았고, 한 건물에 이백 명이 살기도 하였다. 로보와 산 주안의 캠프는 20%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정말 웃기는 것은 깜둥이들이 우글거리는 이 작은 지역은 바깥에 죽음의 선을 가진 우리였고 이 선 바깥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임을 당했다. 도착했을 때 난 천연두환자를 30명을 발견하였고 매일 5명의 환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 죽음 직전이었다. 밤이 되면 흡혈박쥐들이 시체들에서 잔치를 벌이고 모기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 시체들의 악취는 곳곳에 흘러 다녔고 이는 사랑스런 지배의 평판을 약간 불편하게 하였다." (Commander of one of Bell's concentration camps)이 존(지역)에서의 사망은 질병과 기아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양민들은 항상 처형의 위협 속에 있었다. 미국인 사망자가 생긴다거나 필리핀인들이 조금 다른 일을 한다싶으면 죽여 버렸다. 1902년 봄 한 미국인 병사는 1300명의 양민학살을 묘사하였다. 편지에 따르면 한 필리핀 성직자가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미군은 신도들 앞에서 그 성직자를 교수형으로 처형했다.또 몇 주 동안 20명씩 묶여서 양민들은 그들의 대규모 묘지를 팠고 처형되었다. 필자에 따르면 식량이 부족해서 그렇게 양민학살을 하는 것이 필리핀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게 학살의 모든 이유였다. 미국인이 죽으면 무작위로 양민들을 추출해서 죽여 버렸다. 잘살거나 영향력이 있는 필리핀인은 독방에서 특별히 나쁜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작은방에 한명씩 투옥되었고, 미국에 복종을 맹세할 때까지 갱을 불러 그들의 집을 부쉈다. 벨 장군에 따르면 이런 건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죄없는 사람들도 이 범죄들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바탕가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대개 1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 학살전을 수행한 벨 장군은 전 인구의 1/6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벨 장군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라도 이런 가혹한 처사를 단행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수용소는 1902년 4월 16일 말바르의 항복으로 폐쇄되었지만 부작용은 오래갔다. 태프트에게 보내진 편지에 1896년에서 1905년과의 비교에 대한 조사가 적혀있다. 발라양이란 마을에서 1896년 41,308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1905년엔 인구가 13,924명으로 줄었다. 소의 숫자는 3,680마리에서 80마리로 줄었다. 10만 마리의 닭은 5,000마리로 줄었다. 이 바탕가존 사건은 미국의 잔학성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유타에서 토끼를 잡으면 토끼들은 달아나기만 하였으나 필리핀의 폭도들은 그러지 않았다."(Fred D. Sweet, of the Utah Light Battery)
“10살 이상은 모조리 죽여라”라는 명령을 기사화한 신문 보도 사진
미군지휘관 중 특히 스미스(Jacob Hurd Smith 1840-1918) 준장이 악명 높았다. 그는 “열 살 이상은 모조리 죽여라(KILL EVERYONE OVER TEN)”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는 포로를 원치 않는다. 나는 너희들이 죽이고 불태우기를 원한다. 더 많이 죽이고 불태울수록 더 기쁠 것이다.” 라면서 학살을 명령하였다. 그 뒤에 문제가 되자 미군은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했지만 구두경고와 전역이외에는 어떤 처벌도 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재판 도중 자신의 학살명령을 모두 인정했으며 그것이 전쟁 중에 필요한 것이었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자랑했다. 제국주의 신문들조차도 그의 잔혹행위를 비난하였으나 법정은 그를 무죄로 판결한다.
그리고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전쟁영웅으로 금의환향하나 군대에서는 퇴역해야 했다. 그밖에도 많은 학살혐의자들이 기소되나 모두 무죄 방면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의 최종 지휘자이며 작전입안자인 채피(Chaffee)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이로서 전쟁 중의 모든 잔학행위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이후에도 미군은 민다나오 섬과 졸로 섬에서 모로족과 11년간 더 전쟁을 하게 되지만 이후 필리핀은 점차 미국화 되어 간다.
매킨리의 망언-필리핀 침략은 신(야훼)의 뜻이었다.
모든 미국인들이 필리핀전쟁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제국주의자들은 작은 그룹이었으나 많은 활동을 했다. 그들이 주장한 필리핀합병에 대한 반대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에 대한 믿음과 미국을 소수민족들이 더욱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우려 등 여러 가지였다.
1900년 당시 ‘반제국주의자 동맹’의 부회장이었던 마크 트웨인(본명 Samuel Langhorne Clemens 1835-1910)은 “미국이 필리핀을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리핀의) 정복을 목적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反)제국주의자다. 나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미국의 우수한 젊은이들이 더럽혀진 깃발(성조기) 아래 불명예스러운 총사(銃士. 총잡이)로 전락하여 다른 나라로 보내지는 것에 강한 불쾌감이 든다.” 라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난했다.
트웨인 외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총장인 데이비드 S. 조단 등의 지식인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필리핀의 미국에 합병시키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합병 반대론자들은 필리핀 합병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손상시키는 처사이며 필리핀을 병합한다는 것은 각국의 민족자결권을 무시하는 것이며 먼로 독트린과 제퍼슨이 제정한 미국 민주주의 이념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소리는 무시되었다. 합병 찬성론자들은 그들의 선조인 청교도들이 처음 신대륙에 진출해서 인디언들을 교화시키려했으나 무지몽매한 그들이 반대했다고 해서 청교도들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가 되었음을 상기시켰다. 또한 그렇게 반항했던 인디언들도 미국에 복종하고 미국의 법을 따르게 되었으므로 필리핀도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야만적인 필리핀 사람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다수의 의견으로 대두하였다.
필리핀 침략과 지배를 둘러싼 논쟁에 대한 월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답변은 경악과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그는 백악관을 방문한 각료들에게 필리핀 합병을 결정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신에게 간청 기도를 하던 중에 그 섬들을 모두 흡수한 후 필리핀 사람들을 교육하여 문명화하고 기독교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어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라고 했다." 필리핀 침략은 신(야훼)의 뜻이었다는 주장이다.
매킨리 암살 후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전쟁이든 대환영이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97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해군차관으로 임명되면서 한 말이다. 루스벨트의 말 이후 그 이듬해 스페인과 전쟁이 일어났으며 미국-스페인 전쟁 종전 즉시 필리핀-미국 전쟁이 일어났으니 미국의 최고위직이 원하는 바대로 역사는 전개된 셈이다.
전쟁은 미국의 해외정책에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아직 국가는 고립주의를 요구하였지만 미국의 영향력은 모든 아시아에 확장되고 있었다. 미국에게 필리핀은 중국으로의 문을 열었고 엄청난 경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제국주의일본이 역시 중국으로 확장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수십 년 후 필리핀의 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중요한 요충지가 된다.
민간인 학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해야 할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자유를 원하는 필리핀 군인과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미국은 필리핀인들과의 협상도 거절하고, 오로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굴복만을 요구했다.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은 1900년 12월 아서 맥아더 장군이 현지 미군에게 하달한 내부지침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필리핀인에게는 전쟁규칙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되어있다.
필리핀 독립전쟁 기간 중인 1898년에서 1913년까지의 희생자 수는 필리핀 독립군 약 2만 명, 민간인 20만 명에서 150만 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 학살의 경우 편차가 큰 것은 그만큼 사건의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된 증거의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면 미군 희생자 수는 어느 정도 될까? 대략 5천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미군 사망자는 전쟁보다 질병으로 인한 것이 더욱 많았다. 말라리아 등 풍토병은 필리핀군보다 더욱 무서운 적이었던 셈이다. 필리핀 독립전쟁 시기에 미군들이 필리핀인들을 어떻게 학살했는가를 당시 참전했던 미군들의 증언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① F. A. Blake, of California, in charge of the Red Cross
"나는 그런 처형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다시는 그 광경을 보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지나친 모든 지역에서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아주어야 했는데 다리나 팔은 거의 다 부서져 있었다. 목 자르기, 가슴이나 배의 무서운 상처들…보이는 곳마다 미군들이 원주민을 죽이고 있었다. 필리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영웅적으로 버텼으나 잘 훈련되고 사기 높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나는 한 조그만 들판에서 79명의 시체를 셀 수 있었고 강의 반대편에도 시체가 곳곳에 가슴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② A private of Company H of the First Regiment,
Washington State Volunteers
"곧 우리는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우리는 참호에서 나아가 허리까지 차오르는 진흙탕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끓어오르는 피로 그런 것 따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깜둥이들을 죽이길 바랬다. 사수들에게 이는 화끈한 게임이었고 토끼를 조각조각 내듯이 사냥하였다. 다시 곧 그들에게 돌격하는데 그런 학살은 아마 본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백? 아니 수천의 그들을 토끼처럼 사냥하였다. 우리 모두 미쳤다. 전쟁이 끝나면 정말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전쟁이다. 우리는 곧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아직 살아있는 그 모두를 죽였다. 죄수는 없다. 그들이 우리를 괴롭혔으므로 우리는 부상자와 그 모두를 죽일 것이다."
③ A Corporal in the California Regiment
"우리는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임무를 수행했는데 거리를 순찰하였다. 7시까지 모든 사람은 집에 들어가야만 하고 사람을 말하면 단지 한번을 경고하였다. 거부하면 즉각 사살하였다. 우리는 첫날 300명이상을 죽였다. 그들이 공격하려 하면 우리는 집을 불태우고 근처의 모든 집을 태웠고 원주민은 사살하였다. 그러니까 마을은 현재 매우 조용하다."
④ A. A. Barnes, Battery G., Third United States Artillery
"Titatia마을은 며칠 전 우리에게 항복했고 2개의 중대가 점령중이다. 지난밤 중대원중 하나가 위장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즉각 휘튼장군은 마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은 즉각 시행되어 천 명 가량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죽었다. 나는 강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고 영광 속에서 검은 피부를 한 자들에게 포격할 수 있었다"
⑤ Sergeant Will A. Rule, Co. H, Colorado Volunteers
"5내지 6개의 블록에 4-5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자나 아이들은 나오게 한 후 집에다 불을 지른다. 달아나려 하는 깜둥이들은 쏴 죽인다. 이게 필리핀식 전쟁이다."
⑥ Leonard F. Adams, of Ozark, in the Washington Regiment"
테네시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죽였는지 난 모르겠다. 그들은 포로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테네시의 한 중대는 본부에 30명의 포로를 보냈는데 본부엔 백 마리의 닭이 있었고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사로잡힌 자들에게 행운은 없었다. 이들에게는 General Order 100이 적용되었다. 이 일반명령 100은 남북전쟁 때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인인척 하거나 전쟁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릴라전을 하는 자들을 즉각 처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로잡힌 자들은 보복 등으로 항상 처형될 처지에 놓였다. 한 예로 대위 콜러가 필리핀의 덫에 걸려 도끼질을 당하자 훈스턴 대령은 24명의 필리핀 포로를 처형하였다.
불타고 있는 필리핀 원주민의 집
필리핀의 미국과의 독립전쟁 기간 중인 1901년 11월 9일 미군의 방 화에 의해 타고 있는 필리핀 민가의 모습
반면 필리핀인들은 미국포로를 비교적 편하게 대우했다. 그들은 잘 먹었고 필리핀군대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하였다. 1899년 아기날도는 미국의 언론인들을 초청하고 미군포로들의 상태를 보게 했다. 그들은 미군포로들이 죄수라기보다 손님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몇 명의 포로를 석방하면서 아기날도는 포로를 정당하게 대우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했다. 아기날도가 체포된 후 필리핀인들은 더 이상 포로들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필리핀 사람들을 스페인의 압제로부터 독립된 민주국가로 만들어주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이행하는데 무려 50년이 걸렸다. 미군은 투항한 필리핀 독립군을 포로로 대우하지 않았고 살인자라는 이름을 붙여 모두 처형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 사람들이 처절한 저항과 극렬한 게릴라전을 통해 미국의 통치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과연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었을까? 아무튼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이 없었다고 믿는 독자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