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문학기행/石泉 전성훈
전설을 찾아가는 9월 끝자락, 청명한 가을하늘이라는 옛말에 어울리듯 하늘은 더없이 맑고 깨끗하다. 구름은 한가로이 높이 높이 두둥실 떠돌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얇은 반소매 옷 속으로 살포시 파고든다.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멋진 날씨다. 1년에 몇 번이나 이런 매력적인 황홀한 날씨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누구라도 함께 그도 아니면 혼자라도 무작정 어딘가로 정처 없이 떠나도록 유혹하는 날씨다.
도봉문인협회 가을 문학기행으로 충남 부여 신동엽 문학관을 위시하여 부여 일원을 찾는다. 문인협회 회원 40여 명이 참석한 문학기행이다. 관광버스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예쁜 그림을 그린 마대 천 주머니에 김밥과 먹거리, 음료수와 과자를 넣어 개인별로 하나씩 나누어준다. 행사를 준비한 집행부 임원들의 수고가 한 눈에 들어온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관광버스가 강변북로를 지나는데 아침 햇볕이 따갑게 차창으로 비친다. 도로를 꽉 채운 자동차는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달린다. 마음속 근심과 걱정거리를 오늘만큼은 다 내려놓고, 하루만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 속에 하나가 되는 충만한 삶의 모습을 만끽하고 싶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부여 출신 선배 문인이 백마강의 전설을 말해준다. 전북 장수에서 발원하여 충청도로 흐르는 금강이, 부여 지역 16km 구간에서는 ‘백마강’으로 불리고 부여를 벗어나면 다시 금강으로 불린다고 한다. 백제를 정복하려고 침입하였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臺)라 부르고, 강 이름도 사하(沙河)에서 백마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 무령왕 시절에 금강을 백강(白江)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백강은 커다란 강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으니,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서로 다르다.
출발한 지 4시간이 지나서 부여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이다. 마침 백제문화제가 거행되어 입장료가 무료인 탓인지 많은 사람이 구경하고 있다. 공기도 맑고 바람 속의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어 기분이 좋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초행이다. 부여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 앞에는 사람들이 분주하다. 향로는 향을 피워 나쁜 기운을 막는 도구이다. 부여 능산리 사찰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봉황 한 마리가 향로 꼭대기에 앉아 있는 모습이 신비롭다. 향로의 받침에는 용이 힘차게 용틀임하면서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안내문 참조)
부여박물관을 벗어나 정림사지(定林寺址)를 찾으니, 옆에 있던 부여 출신 문인 선배가 정림사지 5층 석탑의 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석탑에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부여 사람은 평제탑(平濟塔)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오랜 옛날의 역사는 승자의 전리품이 되기에 승자의 영웅담과 패배자의 슬픔만 진하게 전해져 온다. 지나간 역사적 과거를 지금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없었던 일처럼 묻어버리는 행위는 잘못된 역사 인식이라고 여겨진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신동엽 문학관을 찾는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비극적 현실을 온몸으로 맞이하면서도 미래를 낙관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동엽 문학관에서는 2020년부터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되었다]라는 표제로 ‘신동엽 시인의 길’을 조성하고 있다. 학창시절에 신동엽 시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껍데기는 가라’뿐이다. 시인의 생가 초가지붕 위에는 탐스럽게 익어가는 커다란 박 하나가 무거운 몸을 힘겹게 지탱하면서 매달려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지, 마음이 예쁘고 생각이 고와야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사물도 아름답거나 귀엽게 보이는가 보다. “보시니 참 좋았다”는 성경 말씀처럼, 보이는 현상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는 오로지 나의 몫이지 너의 탓은 아닐 것이다. 문학관으로 들어가 전시된 몇몇 작품을 읽어보았다. 많은 작품 중에서 ‘껍데기는 가라’의 전문을 소개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앞에서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스만 남고 그 모으든 쇠붙이는 가라.” 문학관을 둘러보다가 부소산에 핀 진달래를 보고 쓴 시 ‘진달래 산천’의 이미지를 꽃의 채색으로 단장해 놓고,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라는 시인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조형물 앞에서 멋진 자세로 기념사진을 한 장 찍는다.
신동엽 문학관을 벗어나 보령 해저터널을 지나서 안면도로 가는 길에는 차도 양쪽에 백일홍을 심어놓았다. 강렬한 햇살을 받아 붉은 꽃이 핀 백일홍이 너무나 예쁘다. 그 지역마다 특색있게 가로수를 가꾸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걷이를 앞둔 넓은 평야에는 익어가는 벼가 몸이 무거운 듯 휘어져 있고, 들녘을 낮게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도 한껏 여유롭다. 가을이 포근하고 평화로운 계절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곧 다가올 겨울을 의식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리라. 카르페 디엠(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노년에 들어선 내 삶에는 지금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오늘따라 마음속에 깊이 다가온다. 세월 따라 전설은 그 영롱한 빛을 후세에게 전해주리라. (202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