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상고사
중화사상(中華思想)-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주위로 동이, 북적, 서융, 남만이라는 오랑캐가 있다는 화이관(華夷觀)
중국 문명이 中原지역 (오늘날 산시성山西省 남부 및 허난성河南省 서부)에서 황하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 발생한 선진문화가 점차 주변의 야만국으로 전파되었다는 황하중심문화를 기본 정설로 견지해 왔다. 중국이 ‘만국의 중심, 또는 천하의 중심(萬國之中心, 天下之中心’)이라는 뜻. ‘시경’(소아편, 小雅)의 ‘천하는 전부 중국의 땅이고 온 백성은 그들의 신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賓 莫非王臣)라고 자칭
1.유적-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중의 하나인 황하문명의 대표로서 앙소문화와 용산문화가 있다
(1)앙소문화(仰韶文化)
중국의 황허강[黃河] 중류 유역에서 번영한 신석기시대 말기의 농경문화. 채도가 특색으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밭농사와 목축업
(1921년 스웨덴의 J.G. 안더손이 河南省 멘츠현 양사오촌에서 채도와 磨製石器를 포함한 신석기문화를 발견한 데서 이 이름을 붙였다)
분포는 화북(華北)지방의 산시성[陝西省] 남부, 허난성 서부에 걸친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동쪽은 허난성 동부와 허베이성[河北省] 남부, 남쪽은 후베이성[湖北省] 북부의 한수이강[漢水]의 상류·중류유역, 서쪽은 웨이수이강[渭水]의 상류 및 황허강 지류의 타오허강유역, 북쪽은 오르도스 부근까지의 넓은 지역에 미치고 있다.
신석기시대 황하유역과 화북평원의 황토지대 -> 식물성장의 호조건 -> 농경 시작
탄소동위원소법 측정에 의한 연대는 대략 BC5000~3000년으로 밝혀졌다.
앙소촌 이외에도 주로 황하 중·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하남성으로부터 섬서·감숙성에 걸쳐 1천개소 이상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섬서성 서안의 반파촌유적이다.( 서안의 반파유적+ 임분의 묘저구유적+ 그리고 서안의 서북쪽인 마가요유적의 통합 명칭)
대량의 마제도구가 제작. 찌르는 어로용 작살, 낚시바늘, 구멍을 뚫는 골침 등은 원시수공업의 기술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채도와 함께 대량의 식량용 및 종자용의 조가 출토되어 이것이 그들의 주식이었다고 생각된다. ( 두산세계대백과와 인터넷에서 발췌)
(2)용산 문화(龍山文化)
중국인 배문중(裴文中)이 산동성 역성현(歷城縣) 용산진(龍山鎭) 성자애(城子崖) 유적에서 흑도가 중심이 된 용산(龍山)문화를 발견.
황하 중류에서 하류에 걸쳐 퍼져 있는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 - 흑도가 발달하여 흑도 문화라고도 한다.
도기뿐 아니라 돌칼(石包丁) 등 석기나 골기 등의 무기나 도구, 비취 등의 구슬도 출토되었다.
룽산 문화 후기에는 청동기도 출현하였고, 은대, 주대(또는 殷나라 이전의 夏나라)의 청동기 시대로 가는 과도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2.인종-화하족(華夏族)
대륙 중원의 화하족이 문명을 주도하며 살다가, 대륙의 적통이자, 황제의 후손인 漢族으로 통일되어, 대륙 변방의 동서남북에 퍼져 살던 야만인들(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리는 수많은 오랑캐 족속들)을 다스리며, 대륙의 역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화하족(華夏族)은 인종학상 몽골로이드에 속하나 언어는 알타이어족이 아닌 남방계통의 한장어(티벳어 계통)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고대사에서 하남성 지역에 속하며, 황하강 중류의 앙소문화의 후예들을 전통적으로 화하족이라고 한다. 이들이 동일한 황인종들임에도 불구하고 북방 알타이어족들과 언어와는 다른 유럽언어구조와 동일한 남방계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들이 북방 유목민족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북상하여 중원 깊숙이 유입된 민족이라 볼 수 있다. 앙소문화 지역에서 사용되던 원시 한장어(漢藏語) 계통 언어가 마침내는 전 중국대륙의 모든 언어를 대체하게 끔 되었다.(플러스 코리아 타임즈에서 발췌)
3.기록- 중국인들에게 역사의 시작은 삼황(三皇)시대 부터이다.
(1)춘추(春秋)-공자가 지은 중국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
(BC722년부터 공자가 죽었던 BC479년까지, 노魯나라의 12제후가 다스렸던 시기의 주요사건들을 기록)
(2)사기(史記)- 사마천이 기원전109~기원전91년에 지은 신화시대부터 BC87년 한무제漢武帝까지의 역사서-
1권 五帝本紀, 2권 夏本紀, 3권 殷本紀, 4권 周本紀, 5권 秦本紀 6권 秦始皇本紀... 등 130권으로 되어있다.
1권 五帝本紀에서는 황제(黃帝), 제전욱(帝顓頊),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이 기록되어 있다.
( 황제黃帝가 漢族들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삼황을 신화로 단정해 ‘사기(史記)’에 싣지 않았다. 현재 ‘사기’에 수록된 삼황본기는 사마천이 아니라 당나라때
사마정(司馬貞)이 가필한 것이다. 타인의 저서에 마음대로 가필한 사료 조작의 한 예이다. (이덕일)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고대의 전설적 제왕들이나 그들이 누구인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3황(皇)은 수인(燧人)씨, 복희(伏犧)씨, 신농(神農)씨인데 각각 인황(人皇), 지황(地皇), 천황(天皇)이라고도 한다.
공안국(孔安國)*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로 기록되었다.
태호포희씨(太昊包犧氏)·여와씨(女媧氏)·신농씨(神農氏)라는 설(三皇本紀),
복희(伏羲)·여와·신농이라는 설(春秋 「運斗樞」),
수인(燧人)·복희·신농이라는 설(書經 「大傳」),
복희·신농·축융(祝融)이라는 설(白虎說)등이 있다
오제(五帝)는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
이라는설 (史記 「五帝本紀」),
대호(大昊)·전욱·신농·소호(少昊)·황제라는 설(禮記 「月令」),
소호·전욱·제곡·요·순이라는 설(帝王世紀) 등이 있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하(夏)나라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3명의 황과, 5명의 제왕으로서, 여러 계통이 있어 삼황과 오제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있지만 사기의 기술에 따라 대체로 신농씨(神農氏), 복희씨(伏羲氏), 여와씨(女媧氏)를 삼황으로,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오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五帝는 전설 속에서는 모두 황제(黃帝)의 일가(一家)에 속한다. 황제의 아들인 창의(昌意)에게서 전욱(顓頊)이 태어나고, 또 다른 아들인 현효(玄囂-少昊金天)에게서 제곡(帝嚳)이 태어났으며, 제곡과 부인 진봉(陳鋒) 사이에서 요(堯)가 태어나고, 순(舜)은 전욱의 6세손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함께 역사적 상식을 발휘해서 생각해 보면 중국민족의 형성이 이처럼 단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원시시대 인류가 무리를 지어 군거하면서 씨족이 생겨났고, 씨족으로부터 부족과 방국(邦國)이 생겨났으므로, 중국 또한 처음에는 수 없이 많은 씨족이 활동하던 시기를 거쳐 발전하였을 것이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944P&articleno=15957933&categoryId=0�dt=20140904143817&totalcnt=23 )
전설상의 복희와 여와는 뱀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인류에게 문자와 불 및 혼인제도를 가르쳐준 주인공이다.
신농은 사람의 몸뚱이에 소의 얼굴이라고 하며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어 농업과 관련된 태양신으로 추앙된다.
황제는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군주이자 여러 문물을 창안한 창시자로서 숭배되고 있고(성은 公孫, 모계인 姬氏)
전욱과 제곡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에 비해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추앙받는 것은 요와 순이다. 전통적으로 이상적인 태평시대를 열었다는 요순시대는 治者의 능력이 개인적인 능력보다 도덕적인 덕목을 중시했고, 따라서 지배자는 문화와 도덕의 체현자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또한 후대에 가장 이상적인 왕위계승의 형태인 선양(禪讓)의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고전승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그 내용에 반영되어 있는 불의 사용, 농경의 발명, 제위의 계승방식 등은 대략 신석기시대 혹은 그 말기에서 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일어났음직한 인류문물의 발전과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오제의 전설에 뒤이어 나타난 우(禹)의 치수전설과 하왕조의 건국에 대한 전설은 중국 최초의 국가출현을 시사하고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夏는 禹에서 걸(桀)에 이르기까지 17왕 472여년간(B.C. 1650경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http://cafe409.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qDgC&fldid=9AQY&datanum=12&contentval=&docid=qDgC9AQY1220040713182425) 에서 발췌
공자나 사마천의 기록에는 삼황오제, 夏나라, 商(殷)나라에 관한 기록은 있으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신화나 전설상의 존재로 간주하여, 유물과 유적이 역사 기록과 일치하는 周나라(기원전1046년경~기원전256년)를 중국 최초의 국가형태로 봄이 대체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종래의 주장에 대해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다원문명론(多元文明論)
1.고고학적 발견
(1)장강 문명(長江文明)-하모도 유적(河姆渡文化)- 20세기 전반에 황하 문명의 양사오(仰韶)문화가 발견된 이래, 중국 문명의 발상은 황하 유역이며, 그 후 점차 장강 유역 등의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었다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는데 1973년, 1978년의 발굴조사에서 후진지역으로만 생각했던 양자강 하류 절강성 여요현 하모도 유적(河姆渡文化)이 발굴됨으로서 이 설이 뒤집어졌다.
하모도 유적은 기원 전 6000년 ~ 기원 전 5000년경으로 추정되어 앙소문화보다도 앞서며, 1미터가 넘는 두꺼운 벼의 퇴적층과 물소와 사슴 갈비뼈로 만들어진 쟁기가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서 이미 7000년 전쯤에 논농사가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벼농사가 중심이며, 밭농사 중심의 황하 문명과의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양자가 독자적인 농경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장강 문명의 발견으로 벼(자포니카 쌀)의 원산이 장강(양쯔강) 중류 지역으로 거의 확정되어 벼농사의 발상도 여기라고 볼 수 있다.
구슬로 만들어진 옥기나 칠기 등이 발견되고 있어 우청 문화(呉城文化, 기원 전 1400년? ~ 기원 전 1000년?)에서는 瓷器가 발견되고 있다. 수도(水稻)를 재배하고 대형 목조건축물을 축조하는 등 앙소문화보다 수준이 높은 것이 현재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하모도 유적은 황하 문명과는 뚜렷하게 계통이 다른 것이어, 지금까지의 중국 문명이 황하 문명이라고 하는 공식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이 세계4대문명이라고 하는 공식도 타파되어 당시의 정설을 크게 뒤집는 일이 되었다.
이후 B.C. 4500-3000년에 이르는 수도작(水稻作)을 위주로 한 다양한 양자강 유역의 문화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양자강 하유역 강소성을 중심으로 한 청련강(靑蓮崗)문화,
양자강 하류지방 절강성을 중심으로 한 양저(良渚)문화(B.C. 3000-1000)와 마가병(馬家浜)문화 (하모도문화와 비슷한 시기),
양자강 중류지방 호북성 중심의 굴가령(屈家嶺)문화(B.C. 3300-2000),
양자강 상류 사천성을 중심으로 한 대계(大溪)문화(B.C. 4400- 3300) 등이 그것이다.
황하 유역에서는 밭농사 중심의 문명이, 양자강 유역에서는 벼농사 중심의 문명이 발생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의 신석기 문화는 황하 중심의 선진 문화가 주변으로 확대되어 나간 것이 아니라, 기원과 계통이 다른 문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발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문명의 형성을 반드시 황화유역으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게 되었기 때문에, '황하문명'이라는 용어보다는 양자강과 황하를 중심으로 한 '하강(河江)문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위키피디아>
하류 지역의 량주 문화(良渚文化, 기원 전 3300년? ~ 기원 전 2200년?)의 시대를 최절정으로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며, 중류 지역에서는 황하 유역의 얼리터우 문화가 이식되었다. 황하 유역의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결과라고 추측되며, 황제와 신농이나 치우의 대립 등의 전설은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의 세력 다툼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양저良渚문화와 한 계통인 상해의 복천산福泉山 145호 묘는 양저문화가 동이족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갖고 있다. 그것은 순장 제도인데 동양에서 이 제도는 중국인과는 달리 동이족의 풍습으로 인식한다-동이족의 순장殉葬과 사각형 제단)-<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 에서 발췌
이러한 문화들은 이후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에 계승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흐름으로 연결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강남의 나라 오,월(하류), 초(중류)
항우와 유방은 둘다 강남출신이지만(강소성 하상과 패현) 유방이 승리한후 장안을 수도로 삼은후 강남은 야만인의 땅으로 전락.
삼성퇴 유적(三星堆遺跡)-쓰촨 분지에서는 오랫동안 문명의 발견이 없었지만, 1986년에 쓰촨성 광한 시의 삼성퇴 유적(三星堆遺跡)에서 대량의 청동기를 비롯한 특이한 특징을 가진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청동상의 얼굴에 썼던 황금가면도 발굴되었다. 고대에 존재하였던 촉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촉나라는 《사기》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오직 기원 전 316년에 진나라의 혜문왕 사마착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진나라의 세력권에 들어갔던 것만 기록되어있어 아직 중화문명의 시야의 밖의 지역이었다.
또한 촉 지역의 지역 사서인 《화양국지》에서는 이 고대 촉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지만, 황하 문명 중심의 사관에서는 이러한 문헌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퇴 유적의 발견으로 현실성을 띤 것으로 증명되었다.
2004년까지도, 장강 문명, 쓰촨 문명에서도 체계화된 문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문자모양의 기호는 발견되었으며, 그 연대는 기원 전 2000년 ~ 기원 전 600년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출토하고 있는 최고의 갑골 문자가 기원 전 1,300년 정도(무정기)의 것이므로, 이것이 문자라고 증명되면 갑골 문자에 앞선 문자가 된다. <위키백과>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1930년대 부사년(傅斯年)이 주장하였던 견해로서, 앙소문화와 용산문화를 황하의 동서에서 동시에 병존대립하던 문화유형으로 화하(華夏)족은 서쪽 섬서성을 기반으로 하여 앙소문화를 바탕으로 周를 건설하였고, 동이(東夷)족은 동쪽 산동성을 기반으로 하여 용산문화를 바탕으로 은(상)을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앙소문화가 B.C. 2000년경의 것이고 용산문화가 B.C. 1500년경의 것이라는 연대를 근거로 하여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商과 周의 민족의 기원을 달리 봄으로써 토기유형의 차이와 문화의 주인공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당시 대내외에 커다란 반향과 긍정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견해는 이후의 고고학 연구 성과에 의해 두가지 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되었다. 첫째는 앙소문화는 이후 B.C. 5000-3000년 경의 문화라는 것이 확인되지만, 용산문화는 아무리 해도 B.C. 25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두 문화가 대립병존하였다는 견해는 무리였다. 더욱이 1974년에 발표된 대문구(大汶口)문화(B.C. 4500-2300)가 산동 용산문화에 선행하는 문화유형이라는 것이 확인 된 후에는, 오히려 앙소문화와 대립했던 것은 대문구문화라는 것이 확인되어, 이하동서설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 두 문화의 관계는 이후 하남성 섬현(陝縣) 묘저구(廟底溝) 2기 문화에서 확인된 대로 앙소문화에서 용산문화로 계층적으로 발전되었다. 결국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의 계층적 발전설이 받아들여졌다. 즉 황하 중유역이 초기 국가를 성립시킨 지역으로서, 앙소문화에 속하는 반파(半坡)문화가 산동지역의 대문구문화와 대립병존하다가 묘저구 2기 문화 단계에서 두 문화가 합류되어 하남용산문화가 성립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이후 商,周의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견해로 집약되었다. (http://www.chinahistorio.com/bbs/board.php?bo_table=lecture13&wr_id=3939&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19)
(2)대문구문화 大汶口文化-1974년 이후 산동성을 중심으로 강소*안휘 북부에 걸친 지역에 하남성 서쪽의 [앙소문화]와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면서 [용산문화]의 전 단계를 이룬 大汶口文化(BC 4500년∼2300년)가 확인되었다. 현 산동성의 陽嶺,泰安 즉 泰山지역에서 발굴된 초기 신석기 문화로서 전형적인 북방인류 문화를 보여준다. 이에 따라 [용산문화]도 하남 용산문화와 산동 용산문화로 재분류되었으며 산동 용산문화는 [대문구문화]의 기초 위에 발전한 것으로 최종적으로 인정되었다
당시 성자애 유지遺址에서는 채색토기 대신에 계란껍질처럼 얇고 검은빛의 광택이 나는 흰 바탕에 가늘고 복잡 다양한 형상을 지닌 도기陶器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흑도黑陶이다. <성자애>의 석성石城은 20만 평방미터에 달하고 있다. 대체로 BC 2300년경-1800년경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역적으로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요동지방과 강소 북부에까지 문화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하남성 <묘저구>에서도 발견되어 연대적으로는 상대商代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土器의 대부분은 적색(홍도紅陶)이고 손 빚음이지만 後期가 되면 진짜 녹로熝爐를 사용해서 제작된 회도灰陶로 대체된다. 발견된 토기土器의 대부분은 무문無紋이지만 채도彩陶도 있으며 거의가 백색 내지 적색의 슬립을 바른 후에 만들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玉조형물, 통형기筒形器, [석관묘]와 [적석총]빗살무늬토기
山東龍山文化(BC 2,500~2,000) -위 대문구문화의 지층바로 위에 형성된 지층으로 대문구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문화로 판단.
흑도로 대표되는 문화이지만 가장 특징적인것은 바로 이문화가 殷,周時代의 청동제기의 문양을 포함하고 있다.
즉 대문구문화의 후계자인 산동용산문화가 대륙최초왕조인 殷(商), 周 의 모태가 되었다.!!!
지나정부에서도 동이족의 문화로 인정하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가 없다.
河南龍山 및 陝西龍山 문화도 대문구문화의 후계문화 (bc2,700~2,000)
(http://www.coo21.rgro.net/bbs/zboard.php?id=data_art&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desc&no=121)
(3)요하문명과 홍산문화-80년대 이후 요하 유역에서 소하서문화, 홍륭와문화 등을 거쳐 초기 국가단계인 홍산문화가 출현하면서 중화사상의 중심이 된 황하문명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면서 황하유역의 문명만으로는 중국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다원문명론(多元文明論)
중원지역에서도 앙소문화보다 앞서 B.C. 6000년을 상회하는 자산(磁山)문화나 배리강(裴李崗)문화 등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결국 ① 동북내몽고지역, ② 황하 상유역(甘靑지역), ③ 황하 중유역(중원지역), ④ 황하 하유역, ⑤ 양자강 유역, ⑥ 화남지역 등에서 모두 비슷한 시기에 신석기시대로 진입하였고 이후 이들이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商이라는 고대국가를 탄생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商은 하남 용산문화 계통에서 나왔다고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문구문화에서 발전한 산동 용산문화, 내몽고의 홍산문화, 하모도문화와 마가병문화에서 발전한 양저문화 등 역시 크게 기여하였다. 따라서 '중국문명'이라는 용어가 보다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고, 중국 신석기문화의 다원성이 지적되었다.
중국 신석기문화의의 초입연대는 현재 B.C. 9500년까지 소급되고 있다. 이는 서아시아에서의 신석기문화와 거의 비슷하며 따라서 신석기문화의 서방전래설 역시 설득력이 없게 되었고, 중국 신석기문화의 독자성과 자생성은 이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중국 한자의 기원도 기존 갑골문에서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약 3000년경에 이미 한자의 원형이라고 생각되는 문양들이 발견되고 있다.
요하 지역의 주요 신석기·청동기문화들을 오래된 순서대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석기시대>
①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년) 1987년 내몽고 적봉시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오한기 소하서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동북아시아 최초의 신석기문화 유적’. 半地穴式 주거지 발굴과, 각종 토기, 석기, 동북지역 최고의 흙으로 만든 얼굴상’이 발견되었다.
②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기원전 6200~5200년) 는 적봉시 오한기 보국토향 흥룡와촌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대규모의 집단주거지(華夏第一村)의 발굴,‘세계最古의 옥결玉玦'과 玉器, 최초의 용 형상물‘저수룡’의 발견,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빗살무늬토기’와 평저통형平底筒形 토기등이 발견되었다.
③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년 이후) 요녕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 몽고족 자치현에서 1982년에 발견되었다. 집단주거지, 돌로 쌓은 용 형상의 석소룡石塑龍(中華第一龍), 다양한 옥기, 빗살무늬토기등이 발견되었다.
④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5000년) 적봉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간 통료시 파림좌기 호얼토향 부하구문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중요 발견은 가장 오래된‘복골卜骨’석기, 骨器, 빗살무늬 토기등이 발견되었다
⑤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4400년) 적봉시 오한기 고가와포향 조보구촌에서 발견됐다. 최초의 봉형상의 토기( 中華第一鳳), 영물도상 靈物圖像토기, 세석기, 빗살무늬토기등과 요서 지역 최초의 채도彩陶발굴이 눈에 띈다.
<신석기, 청동기 병용>
⑥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700~3000년) 내몽고와 요녕성의 접경지인 적봉·조양·능원·객좌·건평 등을 중심으로 유적지가 분포한다.
대표적인 유적지로서 1980년대에 발굴된 동산취(東山嘴), 우하량(牛河梁)유적지에서는 국가의 존재를 나타내는 대규모의 총묘단 塚廟壇(적석총, 여신묘, 제천단)시설등 대규모 종교의례를 상징하는 건축군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는 중국 고고학계에 일대 충격적 사건이었다. 대형 피라미드, 여신상, 옥웅룡玉熊龍등 다양한 옥기, 청동주조유물, 석기, 채색토기, 무문토기, 제사용토기등이 발견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황하유역의 앙소(仰韶)문화를 중국고대문명의 시원이라 여겨왔으나 문화의 불모지대로 인식해왔던 북방 요하유역의 동산취, 우하량에서 지금부터 5000년-6000년전에 이미 국가단계(중국 고고학계의 대부 蘇秉琦-古國에 해당)에 진입한 인류문명유적과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됨으로써 중국문명사의 시원을 다시 써야하는 기로에 봉착하게된 것이다.
신석기시대로 알려져 있으나 청동기가 아닌 순동을 주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동석병용銅石竝用시대로 보고 있다.
⑦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 기원전 3000~2000)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잇는 고리역할을 한다. 다양한 문양의 토기, 부호문자토기, 석기, 세석기, 골기등 발견.갑골문의 전신인‘도부문자’가 발견됐다.
<청동기시대>
⑧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기원전 2200~1500년) 비파형동검, 적석총, 석관묘, 치雉가 있는 석성, 대형건물터, 옥기, 三足토기, 일상용 토기와 의례용 토기, 卜骨등
⑨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기원전 1500년 ~)
(홍산문화는 소하서 문화에서 하가점의 하층문화까지 포괄한다.대표적인 유물로는 적석총積石塚, 제천단祭天壇, 여신묘女神廟와 다양한 옥기玉器들을 들 수 있다)
(http://www.greatopen.net/index.php?m=ci&cc=gb&mm=view_text&idx=5546) 에서 발췌
BC 3500년을 기점으로 만리장성 밖의 홍산문화와 북방 초원문화가 황하 중류 만곡부인 오르도스 지역과 태항산 사이의 노선을 따라 중원으로 전파되었다. 이 문화 전수 경로를 중국 학자 쑤빙치蘇秉琦가 ‘Y 벨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Y벨트를 따라 동방 신교의 제천문화와 삼족오, 용봉, 칠성과 같은 천자문화의 상징이 중원에 흘러들어 갔으며, 이것은 중국을 대표하는 신석기 문화인 앙소문화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한마디로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원류인 것이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이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지역< 요녕성 우량하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그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지나의 경우 殷 (나라)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한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古朝鮮 >이므로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夫餘, 高句麗 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적석총(돌널무덤)부터 보면, 홍산에서 발견된 적석총이 놀랍게도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구조나 축조 방식이 같다. 다른 유물들은 놔두고 이 적석총 하나만 보아도 홍산문화는 동이족 문명이다, 그리고 이들의 후예가 나중에 한반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역시 그 형태가 우리 한민족과 깊은 연관을 갖는데 중국학자들은 우하량 제2지점에서 발견된 원형圓形 제단과 방형方形 적석총 유적이 동방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사상을 표현하고 있고 그 구조가 저 북경에 있는 천단天壇의 원형이라고 보고 있는데. 실제로 우리 대한제국 때 만들어진 원구단도 같은 형태이다.
지나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 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하층문화 (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산(紅山)문화는 소하연(小河沿)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지나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 요동, 요서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 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 되기까지 한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크다. 지나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지나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화>를 들고 있다.
<<<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지나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산동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된다. 또한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韓民族의 先祖 가 되는 것이다 >>>
과연 홍산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인가? 개인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지나학계에서도 은나라때까지 화하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지나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http://saso8888.egloos.com/m/8577012 )에서 발췌
홍산문화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중국은 오래 전부터 황하문명이 最古라고 주장해 오던 ‘황하 중심의 문명전파론’을 철회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多中心 문화발전론’이란 것을 내놓았다. 더욱이 홍산문명이 한국의 고대문명을 일군 주인공인 동이족의 것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이것이야말로 중국의 요하문명’이라고 외치고 있다.(http://www.greatopen.net/index.php?m=ci&cc=gb&mm=view_text&idx=5660)
※하상주 단대공정-중국은 21세기 ‘대중화주의 건설’을 위해 ‘하상주 단대공정’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유적 발굴과 연구를 추진했다. 이 결과 나온 것이 고대 왕조인 하(夏)·상(商)·주(周)의 존재 연대이다. 이들은 夏나라를 신화에서 역사의 영역에 포함시켜 夏나라의 연대를 기원전 2070년에서 기원전 1600년으로 확정짓고, 商나라는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19대 盤庚王이 기원전 1300년 도읍을 殷으로 옮겼으므로 이후 殷이라고 함),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은 기원전 1046년으로 확정짓고 기원전 771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다시 설정했다. 이런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하(夏)나라를 기원전 2070년~기원전 1600년으로 올려 중국에서의 국가의 시작을 대체로 기원전 1500년에서 2000년으로 잡게 되었다.
그러나 夏나라를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리두유적은 결정적으로 夏나라의 존재기간보다 존속기간이 훨씬 짧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연대를 확정짓는데 있어서 청동기나 갑골문에 있는 천문기록과 갑자를 분석하여 이를 오늘날의 60갑자와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역법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음력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 이루어졌다. 또한 고고학적 자료들의 연대측정방식으로 쓰인 방사성 탄소 연대특정법은 최소한 수 십 년의 오차범위를 지니는 것으로 역사 시대를 연구하는데에는 부적합하며, 오차범위로 인해 딱 떨어지는 연대를 얻어낼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4)‘역사 바꾸기’사업
요하유역은 지나족들이 멸시하던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의 거주지이다. 수천 년 동안 그렇게도 야만인이라 卑下하던 오랑캐족속들이 살던 요하유역에서, 황하문명보다 1000~2000년 앞선 문명, 이집트 피라미드 보다 500~1000년이 앞서는 신석기 시대의 발달된 문명이 발견되어, 중원의 문명은 오히려 동북의 요하문명의 아류임이 속속 밝혀지게되자 역사바꾸기를 시도하였다
당시 발해유역에서 동북문화의 특징인 지자문之字文 빗살무늬 토기(통형관)와 중원 앙소문화仰韶文化의 특징인 홍도紅陶 및 채도彩陶가 공존했는데 그 당시는 우월한 中原의 [앙소문화]가 열등한 [홍산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오랑캐의 소굴로만 여겨졌던 동북방 우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에서 제단(단壇)과 신전(묘廟) 그리고 무덤(총塚) 등 엄청난 국가제사유적이 삼위일체三位一體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龍信仰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龍形 돌무더기가 흥륭와(興隆窪 BC 6000년)에서 옥기玉器의 원형과 빗살무늬 토기 및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지자 중국학계는 기절초풍했다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長江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양저良渚문화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中華主義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홍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양저문화]의 찬란한 옥기玉器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 터와 제사유적 등이었다.
예컨대 [양저문화]의 대표격인 [양저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그리고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반산反山 12호는 대표적인 중심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뚫린 팔각형 모양의 玉그릇) 등 옥玉문화는 휘황찬란함 그 자체이다.
"홍산문화의 玉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죠. <양저>보다는 이른 시기인 홍산옥紅山玉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양저>의 옥玉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玉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죠" <이형구 교수>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玉鐘-예기禮器)과의 비교에서 홍산옥紅山玉이 조형적인 반면 <양저> 玉문화는 세밀화를 그린 듯 정교함을 뽐낸다. 옥월玉鉞과 玉鐘은 禮器이자 威勢品이다. 玉鐘이 儀式에 사용됐다면 옥월玉鉞을 포함한 각종 부월斧鉞(도끼)은 軍權을 뜻한다. 이 反山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神權과 軍權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반산反山 인근의 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양저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 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人工土築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座臺를 3개 조성했다.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紅土 퇴적층이 보인다. 모두 이곳이 궁전 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회색*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양저>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都城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5)고국(古國-홍산)과 방국(方國-양저) -문제는 [홍산문화]와 [양저문화]의 관계였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이야기한다.
양저문화 초기의 玉器를 보면 규범화한 짐승 얼굴 도안이 대량 활용되었는데 이는 홍산문화 玉器 가운데 용형옥기龍形玉器의 원형을 연상시킨다. 이는 양저문화가 홍산문화의 영향을 또 받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형구 교수>
동방족의 본거지에서 잇따라 中原을 능가하는 문화가 터지자 중국학계는 곽대순郭大順 요령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의 표현대로 [痛苦的 아픔을 겪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黃河 중류(중원)는 중국문명의 中原이 아니었다. 중국고고학의 태두 蘇秉琦는 이렇게 인정했다. 그리고 후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夏와 商을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홍산문화와 양저문화는 차례로 中原으로 몰려와 中華 대지에서 4000~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蘇秉琦>
<蘇秉琦>는 그러면서 [중화문명론]이라는 것을 개진했다. 즉 세 부곡部曲이라 해서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의 3 단계론을...그러면서 홍산문화를 중국 최초의 원시 국가단계인 古國으로 양저문화를 그 다음 단계인 제후국의 형태인 方國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형구 교수>
<소병기>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최고위층 즉 王의 신분임을 입증해주는 유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했다.
취락이 있다 해서 다 국가단계가 되는 건 아니다. 일반취락과 중심취락 그리고 중심취락을 초월하는 최고위층의 공간을 갖춰야 국가단계라고 할 수 있다. <소병기>
이미 살펴봤듯 <우하량>은 단壇*묘廟*총塚 등 삼위일체의 조합이 엄격하게 구분된 홍산인들의 聖地이며 특수신분인 제정일치시대의 王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또한 종교제사 중심인 이곳은 1개 씨족이 아니라 여러 씨족의 문화공동체가 모셨던 곳이었다.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보다 시기가 다소 늦은 양저문화(BC 3200~BC 2200년)는 취락분화의 層位가 더욱 뚜렷하다. 모든 유적이 정남북의 정교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玉器文化 또한 훨씬 정교했다.
<소병기>는 이런 양저문화를 [방국]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양저*홍산 축록중원 良渚*紅山 逐鹿中原』양저*홍산, 두 문화가 中原을 향해 다투어 진출한다』는 뜻으로 그 증거로서
① 중원 앙소문화의 본거지인 도사陶寺 유적에서 확인된 반용문 토기가 龍의 본향인 홍산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② 우선 동북의 홍산문화와 중원의 앙소문화의 접촉이 두드러진다. 오랑캐의 문화를 痛苦의 과정 끝에『중국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계가 주목한 곳은 河北省 서북부였다. 1970년대 말 상간하桑幹河 유역인 울현蔚縣 삼관三關 유적에서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문양인 龍무늬 채도관과 앙소문화의 상징인 장미문양의 채도(彩陶-이른바 묘저구廟底溝 유형이라 한다)가 나란히 나왔다.
③ 최근에는 상간하 인근 신석기 유적에서 홍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옥조룡(玉造龍-용 조각 玉器)이 출토되었다. 中原인 晋南 도사陶寺유적에서 출토된 주칠朱漆을 한 반용문(아직 승천하지 못한 龍) 토기그릇과 외방내원外方內圓의 옥벽玉璧은 홍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관중 분지(中原)에서 자생한 장미문양의 채도(彩陶-앙소문화)와 연산燕山 이북*대릉하 유역에서 자란 용인문(龍鱗紋-용과 비늘모양 무늬) 채도彩陶 및 빗금 토기 옹관(甕棺-홍산문화)이 북으로 남으로 향했다. 두 문화는 결국 하북성 서북부에서 조우했다. 이곳에서 융합된 두 문화는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홍산문화의 꽃인 제단(단壇)과 신전(묘廟) 그리고 무덤(총塚)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소병기>
비단 [홍산문화]만이 이렇게 中原으로 남으로 퍼진 것은 아니다. 홍산보다 늦은 양저문화의 [축록중원]을 살펴보자. 요堯*순舜시대 유적으로 꼽히는 晋南의 도사陶寺 유적에는 양저식 토기와 玉器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또한 산동반도 남쪽인 소북蘇北 화청花廳 유적은 이른바 大汶口 문화 유적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도 양저문화의 전형적인 정(鼎-솥)과 호(壺-항아리)와 玉 등이 나왔다. 이는 양저문화가 중원은 물론 산동반도까지 결합되었다는 소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엄문명嚴文明은 이런 사실을 눈여겨보고『양저문화가 대문구문화를 정복했다』라고까지 단언했다.
"중국학계는 수레바퀴통으로 문화의 접변과 교류를 설명했어요. 5000년 전 중국문명은 여러 부족들의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중원으로 모였다고...먼저 북방(홍산문화)이 중원(앙소문화)과 교류를 시작하였고 이어 동남(양저문화*대문구문화)과 중원이 교류하고 북과 동남이 관계를 맺고...뭐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정리했죠" <이형구 교수>
중국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문명은 中原에서 나왔다는 [一元一體]의 역사관이 어이없게 무너지자 재빨리 얼굴을 바꾸어 홍산*양저 등 여러 문명이 모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多元一體]의 역사관으로 대체했다. 그러면서 하나 둘씩 고대의 전설을 이런 고고학적인 성과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사기] 등 역사서에서 전설로 등장하는 黃帝와 炎帝 그리고 黃帝와 蚩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아전인수적인 해석으로 끌어들인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Nroq&articleno=268&categoryId=0�dt=20100331215707#ajax_history_home)
중국의 ‘역사 바꾸기’사업을 대강 정리해 보면,
기존의 중원의 華夏族을 華족과 夏족으로 분리하여
황하중류의 앙소문화권 지역을, 염제 신농씨의 華족이 일으킨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삼고,
동이의 구려족, 묘족苗族, 백월족百越族, 형오족荊吳族 등이 살던 장강 유역의 하모도문화권河姆渡文化 지역을, 夏족이 일으킨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삼았으며(문헌상 나타나는 東夷族의 활동무대는, 하북성 동북부, 산동 일대, 양자강유역이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임)
요하일대 査海文化와 紅山文化 지역을,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으로 묶어, 皇帝族이 일으킨 중화문명의 기원지로 삼아, 신화시절부터 요하일대는 모두 黃帝의 세력권으로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黃帝와 그 손자뻘인 고양씨 전욱과 고신씨 제곡의 후예라는 주장을 펼쳐, 이 지역에서 발원한 단군, 웅녀, 해모수, 주몽 등이 모두 黃帝의 후예로 만든 것이다.
黃帝는 북경 부근, 고양씨 전욱은 황하 중류의 위쪽, 고신씨 제곡은 황하 중류의 아래쪽이 세력권이라던 기존의 학설을 뒤엎고, 고대 중국사를 이끈 집단을 다시 재편하여, 지금까지 四夷로 분류했던 오랑캐 족속인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모두 중화민족에 포함시켜. 중국민족의 기원은 화족, 묘족, 동이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중화 삼족설’로 급선회 하였다.
( http://blog.daum.net/sungwon0409/85) 에서 발췌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 이리두 문화가 더 이상 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양자강과 요하 유역에서 하모도문화나 홍산문화 등, 중원 지역에서의 문명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면서 중화 문명의 발생과 변과과정, 특징, 경로 등을 찾아내는 것을 주요과제로 하고 있다
요하문명론에 따르면 중원의 기원은 중원의 염제신농씨를 중심으로 하는 화(華)족 집단, 동남 연해안의 하(夏)족 집단, 동북 연산 인근의 황제(黃帝)족 집단으로 정리되었고, 이 3가지의 세력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지금의 한(漢)족을 형성하고 중국문명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 요하문명론의 중요한 점은 漢족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중원과 요화유역의 동북지역의 부여, 고구려, 만주족을 비롯한 제(諸)민족들, 그리고 동남지역의 제(諸)민족들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모두 漢족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결국 중원문명탐원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과는 약간 방향을 달리하여 모든 민족이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확산되고 있는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제어하고, 통일적다민족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동북공정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다.
(http://ehddu.tistory.com/m/post/537 )에서 발췌
80년대 랴오닝(遼寧)성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훨씬 앞서는 문명이 존재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국 문명의 기원을 끌어올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교수는 "요하 일대에 황하문명보다 2천500여 년 앞선 기원전 7천 년에 이미 신석기문화(요하문명의 일부인 홍산(紅山)문화)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고 기원전 3천500~3천 년(홍산문화 후기)에는 이미 초기 국가형태가 갖춰졌음이 규명됐다"라고 전했다. 우 교수는 이어 "홍산문화 주도세력을 오랑캐인 동이족이나 예·맥족의 것으로 치부했던 중국 역사계는 90년대 후반 들어 전설의 인물인 황제의 후예들이 홍산문화를 건설한 것으로 정리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인 홍산문화 주도 세력이 황제족이며 홍산문화가 중국 문명의 기원인 만큼 중국 내 모든 민족의 시조는 황제라는 논리가 안착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요하를 발원지로 하는 웅녀족과 고조선의 단군 등 우리 민족의 선조 역시 자연스럽게 황제의 후예가 된다"라며 "중국의 '국사수정공정'은 동북아시아 문명, 더 나아가 세계 문명의 기원을 통째로 바꾸려는 거대한 고대사 재편 작업"이라고 지적했다.
http://artattacker.tistory.com/ 2010.09.02. 연합뉴스
중국이 그동안 황제(黃帝)만을 중국인의 시조로 모시다가 1980년대부터는 염제(炎帝)를 포함해 염황(炎黃)이 중국인의 시조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하북성 탁록현(涿鹿縣)의 황제성과 황제천이 인접한 평원에 귀근원(歸根苑)과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하면서 황제·염제·치우제의 삼시조시대(三始祖時代)를 선언했다. 이것은 5천 년 전에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기원전 2700년경에 황제와 치우 간에 벌렸다는 탁록 전투를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하량지역 즉 요령 지역은 그동안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돼 동이족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곳이다. 간단하게 말해 이런 유물들이 나온 지역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던 터전이며 특히 한국인의 첫 국가인 단군조선의 무대(아사달이라는 주장도 있음)로 알려진 곳이다단군조선보다 1,000여 년 전에 과거부터 한국인의 고향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한국인의 선조가 세웠다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중국측이 성자산산성의 표지석에조차 국가 성립이 완성됐다고 기록하는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와 연계된다 (이종호 과학저술가)
고대 요하문명(홍산문화)은 옥을 매우 중요시 여겼고 중요한 부장품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것은 그와 같은 옥이 우리 한반도에서 수없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기원전 2000년전 요하문명에는 수없이 많은 성이 건축되기 시작한다.
무려 70개 이상의 성이 발견되었고 70개의 성을 관리하려면 기본적인 국가 제도가 존재했다는 증거인데 그렇다면 그 국가는 어느 민족인가?
중국의 사서와 우리의 사서를 검토해 보았을때 그 당시의 국가는 고조선밖에 없었다.
요서지역의 여러 유적지를 조사했을때 60% 이상이 우리 민족과 친연성이 있는것으로 밝혀짐.
이 지역의 청동검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검과 매우 유사함.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1000~2000년 앞선 유적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죠.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바로 최근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동북공정입니다. 동북공정은 흔히 고구려 공정이라고 알고 계시지만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을 모두 중국 황제의 후예라고 만드는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의 황하문명은 그들이 주장하는 변방 오랑케 문명보다 뒤늦게 발생된 문명이 되버리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점은 요하문명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중국 중원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우리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같은 유물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우리가 동북공정을 경계해야할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요하문명에서 발견되는 유물이 중국 중원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에 대한 모순을 극복하려면 중국의 黃帝가 요하문명에서 시작이 되었고 한반도로 내려와 그 문명을 전파했고 우리는 중국 黃帝에게 문명을 전파받은 소수민족이 되어야 그들의 논리가 모두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북공정에서 끝나는것이 아닌 한반도 전체가 그들의黃帝의 땅이었으며 그와 같은 역사를 배우는 중국의 아이들은 한반도가 과거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시작인 동북공정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며 전 세계에 홍보를 해야 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1553.html)
2.인종-
(1)漢族의 구성
한족漢族이 단일민족이 아니며 다양한 종족의 결합이라는 견해를 최초로 제시한 학자가 <몽문통>으로서 저서著書인 [고사견징古史甄徵 1933]에서 한족漢族은 황하黃河 상류의 하락민족河洛民族과 양자강 유역의 강한민족江漢民族 그리고 동해안의 해대민족海岱民族이 융합했다는 [지리적삼분론地理的三分論]을 주장했다. 이후 <서욱생>은 [중국고사의 전설시대 1935]에서 서북방의 한족漢族과 동방의 동이족東夷族 그리고 남방의 묘족苗族으로 3分하였는데 이 관념이 해방 후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과 맞물려 1981년에 개최된 <중국민족 관계자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결의된다.
① 서방의 화하족華夏族 황제黃帝*염제炎帝*요堯*순舜*우禹
② 동방의 동이족東夷族 예羿*테호太昊*소호少昊*치우蚩尤
③ 남방의 묘족苗族 복희伏羲*여왜女媧*반고盤固
(http://www.coo21.rgro.net/bbs/zboard.php?id=data_ar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vote&desc=desc&no=119)
(2)홍산문화의 주인공은?
① 우하량에서 발견된 적석총은 황하문명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고구려와 삼국 등 우리민족 고유한 묘장형태이다.
② 흥륭와에서 발견된 옥기(玉器)는 압록강 근처의 수암에서 생산되는 수암옥이다.
③ 흥륭와와 동일한 형태의 옥기가 강원도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④ 유물 중에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옥기가 있다.
⑤ 홍산문화유적지는 고조선의 강역에 해당한다.
⑥ 유적지에서 나온 유골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한국인에게 많은 유전자 변이가 나타났다.
⑦ 고성 문암리 토기와 치하이 흥륭와 토기의 문양기법이 상당히 유사한 빗살무늬 토기다.
상명대 박선희 교수는 <만주요하문명이 고조선문명인 까닭>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더 거론하였다.
① 요하문화에서 발견된 옥대는 가장 최초의 옥대이면서 고구려와 삼한으로 그 전통이 내려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② 옥`돌`뼈`청동`철 등 재질은 다르지만 요하문화유물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장식단추들과 장식품은 한반도 도처의 석기-청동기 유물과 공통적이며, 고구려와 삼한으로 이어지고 있다.
③ 이러한 장식물과 함께 발견되는 새김무늬질그릇 또한 요하문화유물과 한반도의 많은 선사유물과 같은 형식이다.
(3)홍산문화인은 어디로 갔을까?
홍산무덤의 유골이 한국인과 유사한 면이 있어, 홍산문화인이 한국인의 선조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홍산문화의 전승자임을 주장하기엔 결정적 문제가 하나 있다. 홍산의 그 수준높은 문화가 소수의 일부유물을 제외하고 요녕과 한반도(고조선-예맥족-한족)의 후기문화와 충분히 이어지지 않는 점이다.
홍산문화의 유물 중에는 초기 문자가 새겨긴 陶器도 있다. 우리가 홍산문화를 이어받았다면 그 글자를 발전시켰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우리 조상은 문자없이 4000년이나 지낸 것일까? 우리 문자로 적은 기록만 남아있었어도 홍산과 고구려를 뻇어가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간단히 좌절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기원전 3000년경 홍산지역의 강우량이 줄면서 농경지가 스텝화하자, 홍산주민이 고향을 버리고 떠났고, 홍산주민이 떠난 자리를 북방계 유목민이 들어와 살았다. 홍산문화 이후에는 북방계 문화유물과 유골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가점 상층문화)
스텝화는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주민이 순차적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어디로 간 것일까?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이 하북이라서, 하북에 살고 있던 치우가 먼저 이주한 홍산문화인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① 치우의 거점인 하북성-산동성서북부에서 홍산과 한반도까지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다.
② 치우의 후손으로 알려진 묘족과 요족이 북방계다.
③구려족은 육묘, 이묘 등의 선진농업기술로 유명하였는데 이는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발달한 홍산의 주민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주한 무리가 바로 黃帝이다.
黃帝가 홍산출신이라는 점은 이미 중국에서 여러학자가 널리 주장하는 중이라서 달리 설명이 필요없지만, 요약하면
① 곰, 호랑이 등 토템문화
② 북융으로 불리던 북방민족 중에 黃帝의 후손이 상당수 있었다.
③ 뛰어난 기술을 가진 집단으로 치우를 이긴 것도 결국 기술력이었다.
④ 수많은 발명이 黃帝가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黃帝집단이 홍산의 문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⑤ 우월한 문화를 가진 집단이 사회발전을 이끄는 법이다. 전욱, 제곡, 요 등 화하문명의 근간을 형성한 사람들이 黃帝의 후손이다.
[탁록전쟁의 이유]
도대체 뭐 때문에 5000년전 탁록에서 “시산혈해에 낭아봉이 핏물이 떠다니는” 참혹한 전쟁을 벌인 것일까? 수 많은 병사가 오랫동안 싸우는 대규모 전쟁은 영토국가시대로 진입한 전국시대(기원전475년-기원전221년)부터다. 그 이전 거점국가 시대에는 쳐들어가서 사람이나 재물을 약탈하면 다시 되돌아 오는 전쟁이었다.
철제농구를 사용하여 황무지도 농경지로 바꿀 수 있던 철기시대 이후에 비로소 영토형 국가가 출현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늘리기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쳐들어가서 선을 긋고 눌러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살기좋은 물가부근에 군데군데 거점을 형성하고 농사짓기 어려운 땅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주시대만 해도 화하민족 국가 사이에 북융국가가 섞여 있는 경우가 흔하였다. 이때의 전쟁은 상대 거점을 공격하여 재물이나 사람을 뺏고 나면 다시 자신의 거점으로 돌아오는 전쟁이었다.
탁록전쟁은 늦게 내려온 황제가 치우의 거점을 뺏으려고 벌린 전쟁이다. 자연 영토전쟁과 비슷하게 전 부족의 역량을 기울인 한 판 싸움이 되었다. 탁록전쟁이 그처럼 장기적이고 참혹하게 벌어진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쟁 후에 구려족이 고향을 떠난 것도 같은 이유다. 거점을 뻇긴 치우족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때문이다.
또 하나 이유는 모두 홍산출신으로 양 집단의 문명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문명의 차이가 나면 싸움이 되질 않는다. 먼저 내려온 치우가 쉽게 하북지역에 정착한 것은 당시 원주민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의 후손인 요순우가 집요하게 삼묘를 공격한 것도 이들의 적수가 문화수준이 대등한 삼묘족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와 치우가 모두 우리와 같은 혈통] 이렇게 생각하면 황제와 치우는 우리와 훨씬 최근에(5000년전) 분파된, 상당히 가까운 혈통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만년전 북방계가 유목생활을 하던 알타이계와 농경생활을 하던 홍산계로 분리되고, 오-육천년전 홍산계에서 치우(묘요어계)와 황제계 그리고 고조선계로 갈라졌을 것이다. 황제부족은 남하해 중원을 차지함으로서 중국문명의 근간을 형성했지만, 중화계에 섞여듦으로서 인종적 특징은 소실되었다.
이렇게 보면 치우는 우리민족의 직계 조상이 아니라 황제와 함께 방계선조다. 오히려 황제가 더 후기에 분화된 선조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치우의 후손 중에 단군이 나옴으로서 그 중요성은 황제와 완연히 다르게 되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944P&articleno=15957930&categoryId=0�dt=20140903195846&totalcnt=23)발췌
[단군신화]
다음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내용이다.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여고동시(與高同時)란 당고(唐高) 즉 요와 같은 시기란 뜻으로 단군왕검이 신시를 개창한 연대를 2333년으로 비정한 주요 근거가 되는 문구다.
삼위태백(三危太伯)- 삼위(三危)는 삼묘족이 堯에 의해 유배된 산 이름이다. 堯는 대략 기원전 2400년에서 기원전 2290년에 활동한 사람이니, 삼묘가 堯에 의해 삼위산에 유배된 시기는 2300년대라고 볼 수 있다. 《후한서?서강전(西羌傳)》에 “서강(西羌)은 본래 삼묘(三苗)중에 강성(羌姓)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순(舜)이 사흉(四凶)을 유배할 때 삼위(三危 ; 돈황)로 보낸 무리들이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944P&articleno=15957932&categoryId=0�dt=20140904142308&totalcnt=23
풍백우사(風伯雨師)- 『산해경(山海經)』「대황북경(大荒北經)」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功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應龍已殺蚩尤, 又殺夸父.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하였다. 황제가 이에 응룡에게 명하여 기주의 들판에서 공격하였다. 응룡은 물을 관장하였다. 치우는 풍백 우사를 청하여 큰바람과 비를 일으키니 이에 황제가 발이라는 천녀에게 명하여 비를 멈추게 하고 이어서 치우를 살해하였다. 응룡은 이미 치우를 살해하고 또 과보를 살해했다.
'풍백우사는 탁록전쟁에서 치우 휘하의 장수로 나오는데 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바람과 비를 담당하는 관리의 명칭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내용을 기억하고 단군신화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① 기원전2600년경 탁록전쟁에서 치우가 죽고, 구려족이 장강유역으로 남하하여 삼묘족이 된다.
② 기원전 2300년경 삼묘족이 堯에 의해 삼위산에 유배된다. 이때에도 삼묘족에는 풍백 우사라는 직책이 존재했을 것이다.
삼위산三危山이 어디인가에 대해 여러 이설이 있으나 대체로 감숙과 섬서의 경계에 있는 고삼위(古三危)로 여겨진다.
③ 三危山의 삼묘족은 곧 남하하여 광서, 사천, 광동, 호남 등지에 산재하게 되는데 그 일부는 요동으로 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즉 삼위산의 삼묘족이 어디로 갈 것이냐 의견이 분분하던 때, 그 중 환웅을 우두머리로 하는 3000명 정도의 무리가 태백(太伯)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④ 삼묘족의 수령인 환인(桓因)이 허락하고 환웅(桓雄)에게 신표(信標)로 천부인 세개를 주어 보냈다. 이 환웅의 무리에 풍백 우사가 있었다. 태백산(太伯山)이 어디인지 이 역시 이설이 많지만,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고조선의 강역 어딘가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당요 시기에 삼위산의 삼묘족 중 3000의 무리가 요동반도어딘가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 단군신화인 것이다.
⑤ 곰과 호랑이는 토템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황제와 치우, 예맥족과 삼한(三韓)이 모두 홍산계라는건 앞에서 말한 바 있으며, 황제와 예맥족이 곰, 호랑이 등 토템을 갖고 있던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특히 예족은 호랑이 토템이고 맥족은 곰 토템이어서, 환웅의 무리가 맥족의 일부와 연합, 혹은 맥족의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흉노족인 김알지 무리가 신라에 와서 알영을 토착세력인 박혁거세에게 시집보낸 것처럼 혼인은 정착하기위한 한 가지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같은 홍산계통인 예맥족과 환웅의 무리는 아마도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가 그랬던 것처럼 언어소통에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944P&articleno=15957932&categoryId=0�dt=20140904142308&totalcnt=23)
(4)그러면 중국 漢族과 동이족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3.기록
(1)漢族의 시조 黃帝 헌원-사마천의 史記 제1권 五帝本紀에서
五帝本紀第一 黃帝者,少典之子,姓公孫,名曰軒轅。生而神靈,弱而能言,幼而徇齊,長而敦敏,成而聰明。
軒轅之時,神農氏世衰。諸侯相侵伐,暴虐百姓,而神農氏弗能征。于是軒轅乃習用干戈,以征不享,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為暴,莫能伐。炎帝欲侵陵諸侯,諸侯咸歸軒轅。軒轅乃修德振兵,治五氣,蓺五種,撫萬民,度四方,教熊羆貔貅貙虎,以與炎帝戰于阪泉之野。三戰,然後得其志。蚩尤作亂,不用帝命。于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于涿鹿之野,遂禽殺蚩尤。而諸侯咸尊軒轅為天子,代神農氏,是為黃帝。
"神農氏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이때 軒轅이 무력으로 제후를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헌원은 阪泉들에서 炎帝와 세번 싸운 후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 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모아 涿鹿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神農氏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그런데,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軒轅····敎熊、、貔、、虎,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염제가 제후들을 침범하려고 했다. 제후들이 다 헌원에게 귀의하였다. 헌원은......곰ㆍ말곰ㆍ비휴ㆍ추ㆍ호랑이를 길들여 염제와 판천의 들판에서 싸웠는데, 3번 싸운 다음에야 그 뜻을 얻었다.
《列子·黃帝》: 黃帝與炎帝戰於阪泉之野,帥熊、羆、狼、豹、貙、虎為前驅,鵰、鶡、鷹、鳶為旗幟,此以力使禽獸者也
황제와 염제가 판천의 들판에서 싸웠다. 곰ㆍ말곰ㆍ이리ㆍ표범ㆍ추ㆍ호랑이를 앞에 치닫게 하고 독수리ㆍ할새ㆍ매ㆍ소리개로 깃발을 삼았다.
《좌전(左傳)》소공19년(昭公十九年) 昔者黃帝氏以雲紀, 故爲雲師而雲名.
옛날에 황제씨가 구름으로써 벼슬을 하였으므로 운사가 되었고 구름으로 이름 지었다.
설명: 사(師)는 관직을 말한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도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는 구름으로 관직에 있었다”라고 했고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의 정의(定義)에는 “황제는……또한 진운씨(縉雲氏)라고도 일컫는다”라고 적혀 있다.
(곰, 호랑이, 운사등 황제가 동이와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탁록전쟁
-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족(九黎族)은 묘족의 조상이라고 하며 양쯔 강 유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치우로 상징되는 양쯔 강 유역의 남방 부족과 황제로 상징되는 황하 유역의 한족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고,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흩어져 사는 묘족, 흐몽족 등은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한다.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위키백과)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지을 때 <상서>, <춘추>, <국어> 등의 고문헌들에만 의존하지 않고 “서쪽으로는 공동空桐까지, 북쪽으로는 탁록까지,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남쪽으로는 장강과 회수를 건너서까지”라는 그 자신의 말처럼, 현장 답사를 통해 과거 문헌에 대한 사실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관한 기록은 이와는 좀 다르다.
<사기 집해(集解)>에서 “응소應劭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고 말했다”천하의 지배자는 황제헌원이 아니라 치우천황이었다는 말이다. . 응소는 2세기 무렵 태산태수(泰山太守) 등을 역임했던 후한(後漢)의 학자이고 사기집해는 그가 쓴 사기 주석서인데, 그가 치우를 ‘옛 천자’라고 본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기 정의(正義)>에서 공안국(孔安國)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공자(孔子)의 11세손(世孫)이고 사마천의 스승이며 사기정의는 사기에 대한 또 다른 주석서이다.“구려(九黎) 임금의 호가 치우(蚩尤)이다”라고 설명했다. <사기 정의(正義)>는 또 <산해경>을 인용해 “황제가 응룡(應龍)에게 명령해 치우를 공격하게 했다.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불러 따르게 하니 큰비와 바람이 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 ‘왕검 조선’조에서 지금은 전하지 않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고 전한 것과 부합하는 내용이다.(이덕일)
五帝本紀에 黃帝者,少典之子,姓公孫,名曰軒轅 황제는 少典의 아들이고 이름을 軒轅이라고 했다
중국 최고의 문헌 산해경 <帝繫>편에 黃帝產元囂,元囂產蟜極,蟜極產高辛,是為帝嚳
《산해경(山海經)ㆍ대황동경(大荒東經)》에...有白民之國 帝俊生帝鴻 帝鴻生白民 白民銷姓 黍食 使四鳥 虎 , 豹 , 熊 , 羆 .
백민국(白民國)이 있다. 제준이 제홍(帝鴻)을 낳고 제홍이 백민을 낳았다. 백민은 성이 소(銷)씨이고 기장을 먹고 살며 호랑이 ㆍ표범ㆍ곰ㆍ말곰 네 종류의 짐승을 부린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제홍황제야 帝鴻 黃帝也 제홍은 황제다. <사마천의 사기 주석집인 사기 집해 가규의 주석>
제홍 황제 帝鴻, 黃帝. <좌전左傳 문공文公 십팔년十八年 부분의 두예杜預 주석>
黃帝生(於)白民 <산해경 학의행의 주석> 라고 되어 있어 황제는 백민국 출신이 맞으며 따라서 그 출자出自는 동이에 속한다
(사마천이 史記에서 한족의 시조라고 한 황제가 동이족인 것이다)
[海外西經] 肅愼之國在白民北 有樹名曰雄常 先入伐帝 于此取之 : 숙신국이 백민의 북쪽에 있다. 나무가 있는데 웅雄상이라 부른다. 임금들이 대를 이어 즉위할 때 이 나무에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大荒北經]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 대황의 한가운데 불함산(백두산)이 있고 숙신씨국이 있다...
숙신肅愼이 단군조선계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 아래에 방국邦國으로서 존재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삼국유사는 태백산(백두산)에 신령스런 박달나무가 있어 환웅桓雄이 그 곳에서 제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다.
청靑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의 [만성통보萬姓統譜]에도 <백씨>가『황제헌원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유래에 대해서 종합해 편저編著한 [만성통보萬姓統譜]를 보면『백씨계출중국풍익 황제지후 白氏系出中國馮翊 黃帝之后-여기에서도 黃帝가 풍이馮夷 즉 풍이風夷의 가지로 인식되고 있다
《산해경(山海經)ㆍ대황동경(大荒東經)》백민은 성이 소(銷)씨이고 기장을 먹고 살며 호랑이 ㆍ표범ㆍ곰ㆍ말곰 네 종류의 짐승을 부린다."고 되어 있는데 <사기 오제본기> 에는 以與炎帝戰於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헌원씨는) 웅熊*비羆*비貔*휴貅*추貙*호虎를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황제는 염제와 판천의 벌판에서 싸워 세 번이나 전투를 한 끝에 마침내 그 뜻을 얻었다고 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이들이 동물들로서 상징을 삼은 부족들이라고 해석한다. [동방계] 방국邦國들을 기술할 때는 반드시 네 종류의 조수鳥獸를 부린다는 기록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유사하여 고조선과 부여에서는 오가五加 혹은 사출도四出道가 있었다. 중앙에 한 부족이 그리고 동서남북 사방에 네 개의 부족들이 있어 양가羊加*마가馬加*저가猪加*우가牛加*구가狗加였다.
[산해경]을 보면 『동방에 조선朝鮮이 있고 그 나라에 帝俊이 있다』고 천자天子를 의미하는 제帝를 써서 지칭指稱하고 있다. 즉 중국 신화엔 복희씨伏羲氏로부터 시작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도 포함되지 않는 전설적인 임금 [천제天帝 제준帝俊]의 이야기가 있다. 제준帝俊 즉 준俊이라는 임금은 아예 [동방의 천제天帝]로 불린다.
- 요堯가 천제天帝인 제준帝俊에게 가뭄과 백성들의 반란 등 국가적 난국을 제거하도록 요청하자 명궁수名弓手인 예(羿)를 보낸 기록이 있다.
[산해경 해내경]에 제준帝俊이 예羿에게 궁시弓矢를 주어 하국下國을 구원(부휼扶恤)해주었다는 기록과 태평어람太平御覽의 비슷한 기록이 일치되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천제국天帝國이 동방의 大國임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 순舜이 홍수로 곤란을 겪자 제준帝俊은 식양(息攘)을 곤(鯀)의 아들인 우(禹)에게 주어 이를 막게 한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 하우夏禹가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에게서 오행통수五行通水의 이치를 배워 홍수를 다스리는데 성공한 기록과 일치됨 (황제 헌원이 아닌 동이족 天帝가 존재하고 있다)
-동이족의 역사
사고전서(四庫全書)-‘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하상주)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邾)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殷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菟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沈伯綱
(http://opencast.tistory.com/entry/%EB%8F%99%EC%9D%B4%EC%A1%B1%EC%9D%98-%EC%97%AD%EC%82%AC)
1)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는 진원룡陳元龍이 칙명勅命을 받아 역대(歷代-주周에서 명明까지)의 부賦를 4161편을 모아 편집하였는데 단군 기록은 도읍都邑부분 조선부(朝鮮賦-명효종明孝宗 때 조선에 사신使臣으로 온 동월董越이 보고 들은 것과 관련 자료를 참고해 기록하였다)에 있다. 그런데 원原 사부史部의 자료에는 빠져있고 청淸때의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에만 실려 있다. 이는 바로 명明이 조선 역사를 부정한 모종의 기록 말살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이를 청淸이 찾아내어 수록한 것이다.
2) 정개양잡저鄭開陽雜著도 명明나라 사람 정약증鄭若曾이 지은 것으로 조선朝鮮 기록의 존재가 [사고전서] 사부史部로 말미암아 비로소 밝혀졌다. 그동안 철저히 은폐된 것이다.
3) 어정패문운부御定佩文韻府는 앞서 편찬된 음유우陰幼遇의 운부군옥韻府群玉과 능치융凌稚隆의 오차운서五車韻書에 대대적인 증보增補를 하여 총 444권으로 되어있다. 편찬체계는 운조韻藻에 앞의 두 저서著書 내용을 실었고 여기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을 수집하고 밝혀 증자增字임을 표시하여 추가로 기록하였다(단군 기사는 권 12의 2에 실려 있다).
4) 조선사략朝鮮史略은 명明때 조선인 저작著作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略이 단지 2권卷 1책冊(3-4권)만 전해지고 다른 여러 학자들의 저술 가운데 단지 박상朴祥과 유희령본柳希齡本이 남아있을 뿐이다. 허나 [유희령본]은 [사고전서]의 수록내용과는 전혀 다르고 [박상본]과는 내용이 조금 비슷하나 권수卷數가 다르다.
5) 조선지朝鮮志도 저자著者는 조선 사람으로 추정되고 편찬연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단군 기록이 네 군데에서 산견散見된다. 우리나라 서적 가운데 [삼국유사]나 다른 몇몇 문헌에서만 단군관련 기록이 보이는 실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수록된 사료는 모두 그동안 우리에게 한 번도 알려진 일이 없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며 한족漢族의 고전古典 중의 간접 자료가 아닌 단군에 대한 풍부하고도 명시적인 표기자료이다.
2) [사고전서]는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편찬체계를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보완해주며 전체적이며 편향되지 않는 동양역사를 연구하는데 유용하고도 직접적이며 학술적인 가치가 풍부한 저본으로서 사료적인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문)韓國上古史와 司馬遷 史記-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동이족의 대이동>
근래 중국학자들이 동이족에 대해 설명하는 요지는 분명하다. 고대 중원지방에 살던 동이족이 치우천황 때는 물론 주나라와 보다 후대인 진시황에 밀려 남ㆍ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북쪽으로 간 부류는 부여인 등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운남성이나 귀주로 가서 오늘날 묘족(苗族) 또는 요족(瑤族)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으로 절강성의 越族들이 이루어 놓은 양저문화와 하모도문화가 동이문화와 유사한 문신 등의 풍습들을 갖고 있는 이유가 충분하게 설명된다. 이동식은 越族 즉 절강성의 고대인들이 산동성의 동이족과 본질적으로 같은 계통의 문화를 갖고 있는데 송편과 월병도 한 예로 들었다.
한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송편으로 일반적으로 달의 모양을 흉내 낸 것이라고 설명된다. 반면에 중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월병으로 달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든 일종의 떡이자 과자이다. 한국의 송편은 상현달을 본뜬 것이며 중국의 월병은 보름달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월병은 고대 월국의 중심지인 항주이다. 강남에 살고 있던 월족은 과거부터 떡을 만들어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나눠먹는 습속이 있었는데 그 기원이 은나라까지 올라간다.
월(越)은 월(月)과 발음이 같다. 한국의 한자 독음과도 같다. 이것은 월병(月餠, 달떡)은 원래 월병(越餠, 월나라 떡)이었는데 달을 숭상하는 풍속과 결합이 되어 월병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이종호>
---위 내용은 모두 인터넷에서 수집한 내용들이며 수정을 많이 하다보니 원문표기가 지워진 부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