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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권순악/ 화려한 고독/ 한강문학 6호, 봄호
화려한 고독
권 순 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한 날씨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리기 시작한다. 하늘의 뜻과 남편의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갑자기 비가 오려는가?
수정이가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다. 매월 첫째 화요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점심 식사 모임이다. 이왕이면 맛과 분위기가 좋은 식당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모임이다. 네 명의 모임이지만 다 환경이 다르다. 아직 서른 아홉 살의 여학교 동창생인데, 정상적인 가정의 주부로는 중학교 학생 아들을 둔 미라뿐이다. 안나는 올드미스고, 윤정이는 몇 년 전에 이혼을 했고, 수정이는 결혼 십년이 넘는 데도 아직 임신을 못하고 있다. 졸업 후에도 지금까지 만나는 반가운 친구들이다. 못 만나면 전화로 수다라도 떨어야 했다.
수정이가 지하 주차장을 나와 아파트 출구를 지날 때였다.
부동산 컨설팅 김 사장이 급히 뛰어 나오며 수정이 차를 세웠다.
-사모님, 어디 가세요?
-왜요?
수정이가 차를 세우고 창문 유리를 내렸다.
-마침 박 회장님이 부탁한 손님이 왔어요.
-예?
-박 회장님이 집을 내놓으셨잖아요? 마침 작자가 나타났어요. 회장님 전화가 안 돼서 사모님께 전화 드릴 참이었어요.
-뭐라고요?
-회장님이 집을 내놨어요.
-우리 집을 내놔요? 누가요?
-예! 상의가 안 됐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잘못 아셨겠지요.
-아뇨. 일주일이나 됐어요. 회장님께서 집을 내놓으셨다고요.
-그럴 리가!
김 사장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수정이에게 가까이 와서 큰 소리로 말한다.
-집을 내놓으셨다고요.
수정이가 창문 유리를 올리려고 하자,
-그럼 지금 손님이 와계신데 그냥 보낼까요?
-난 모르는 일이예요. 집 안 팔아요..
-거참, 이상하다.
김사장이 머리를 극적거린다.
-그럼 회장님께 전화를 한 번 해 보세요.
수정이가 핸드폰을 꺼냈다. 남편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잠심 시간이라 모두 밖으로 나갔겠지.
몇 번을 핸드폰으로 걸어도 받지를 안는다.
-집 안 팔아요. 갑자기 집은 왜 팔아요?
-학교 근방이라 시끄럽다구 내놨어요.
-예!? 학교 근방이라 시끄럽다고요?
-예!
수정이는 창문 유리를 올리고 급히 달렸다. 집을 팔다니?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참 이상하다.
결혼 초 학교 근방이 좋다고 일부러 샀는데, 시끄럽다고 집을 내놓다니?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럴 리가 없다. 부동산컨설팅에서 다른 집으로 착각했겠지. 다시 스마트폰을 꺼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거다. 어떻게 된 일인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수정이는 시간이 늦었다. 늦을수록 빨간 신호등이 자주 켜졌다. 약속 시간 늦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수정이었다.
-늦는 사람은 항시 늦더라.
-그래. 성의가 없는 거지.
오늘은 수정이가 늦어 공박을 받게 됐다. 오늘 따라 길도 많이 막혔다.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받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거다. 에라, 모르겠다.
푸른 신호로 바뀌었다. 차를 빨리 몰았다.
북한산 밑 아늑한 숲 속에 새로 개업한 식당. ‘황진이’이라는 상호와 간판이 매혹적이면서 고풍스럽다.
현대 감각으로 세련되게 설계된 한옥 식당이다. 정원도 잘 꾸며졌고 실비 제공이면서 맛깔스런 한정식 집이다.
줄 서서 접시 들고 돌아다니는 뷔페보다 훨씬 좋았다. ‘청산리’, ‘벽계수‘, ‘달뜨는 언덕’, ‘별이 빛나는 밤,’ ‘흰 구름’ ‘매화’, ‘국화,’ 등 방 이름도 특이하고 좋았다. 방 이름에 걸맞게 실내 장식도 잘 꾸며 놓았다.
식당 분위기에 흡족한 회원들은 수정이 늦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다.
이 식당을 소개한 것은 안나였다.
-이실직고해. 너, 누구하고 왔었니? 그 때 그 사람이었니?
-개업 날 우연히 왔었어..
-실컷 먹고는 어디로 갔어? 그 꽃미남하고 놀던 집까지 안내해. 이 내숭아.
돈 많은 애인하나 구해 달라고 안나에게 농담 잘 하는 윤정이었다.
-이실직고해.
수정이도 거들었다.
다 알고 있는 비밀, 까르르 까르르 모두들 허리를 꼬았다.
음식이 나오자 윤정이가 먼저 잔을 들었다. 건배 제의다.
-우리들의 앞날에 건강과 사랑이 이 술 잔에 항상 철철 넘치기를 바라며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를 힘차게 외치며 잔을 서로 부딪쳤다.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손뼉을 짝짝 쳤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냥 마시는 것 보다는 건배 제의가 재미있다.
소주가 나오고, 맥주병이 쌓이고, 마음 놓고 마시고 먹었다. 잔을 권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목소리가 커져갔다
-자식 하나 못 낳는 신세들, 술이나 실컷 먹자.
수정이가 잔을 자주 비웠다.
-자식도 남이라더라.
안나는 체념한지 오래다.
-무자식 상팔자다.
윤정이는 이혼했어도 후회가 없다.
-야, 술맛 떨어지는 소리 집어치고 잔이나 빨리 돌려
미라가 술을 재촉했다.
-자식 가르치기에 세월 다 간다. 이건 아들과 매일 밤 같이 밤을 새다시피 한다. 학교 야간 학습 끝나면 학원 데려다 줘야지, 끝나면 또 데리고 와야지, 아침부터 새벽 두시까지 자식 운전기사다. 같이 졸고 같이 깬다. 대학 들어 갈 때까지 이래야 한다. 또 아침 밥 서둘러야지. 맘 놓고 잠이라도 실컷 자봤으면 좋겠다. 이게 사람 사는 거냐?
미라는 오늘이 모처럼 시간 있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술맛이 당긴다.
-잘난 아들은 장모 아들로 뺏긴다지. 키우고 가르치고 결혼 시키고, 아이구. 고생바가지다.
오늘 따라 미라의 푸념이 많았다.
-넌 행복한 고민이다.
-행복한 고민? 난 지금 시어머니하고 전쟁 중이다.
-전쟁, 왜?
세 사람의 시선이 미라에게 쏠렸다.
-아, 글쎄, 나보구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 더 나라는 거다. 내 참, 기가 막혀서! 외아들은 외로워서 안 된다는 거다. 내가 미친다, 미처. 자식은 형제건 남매건 둘 이상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래야 형제가 있고 일가친척이 생기는 것이니,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는 거다. 이러니 내가 안 미치겠니?
-뭐라구! 그 나이에 애를 나라구?
모두 깜짝 놀랠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이 똥그래졌다.
미라의 푸념이 이어 갔다.
-무슨 돈으로 키우느냐니까 우물 파면 개구리 생긴다는 거다. 저 먹을 거 타고 나니 나이 더 나이 먹기 전에 어서 아들이건 딸이건 빨리 하나만 더 나라고 성화니, 이거 팔짝 뛸 일이 아니냐?
-네 남편은?
-이론은 맞는 말이니, 결정은 나보구 하래. 내참!
-그래서?
-난 그 사람과 살만 대도 애가 생기니 이것도 환장할 일이다.
모두들 까르르 까르르 시원스럽게 웃었다.
-네 팔자가 좋은 거냐, 우리들 팔자가 좋은 거냐? 자, 술이나 마시자.
윤정이가 술잔을 돌렸다.
-자식이 있건 없건,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부부로 살다 죽건 혼자 살다 죽건...
-사랑엔 동행자가 있어도 죽음에는 동행자가 없다.
-일가친척! 나 살기 바쁜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다 옛말이다.
-인생이 별거냐!
-우리는 혼자 사는 복을 하늘이 주었고, 너는 자식 낳는 복을 주었다.
-그러니 술이나 마셔라.
-우리는 자식 없는 복을 가졌고.
-무자식 상팔자다.
서로 말이 뒤엉키며 까르르 까르르 즐겁기만 하였다.
이런 말을 지껄이며 수다 떠는 재미로 만난다. 만나봐야 어떤 결론도 없다. 안 만나면 기다려지고 만나면 즐겁다.
수정이도 밤늦게 왔는데, 남편 경호는 아직 전화도 없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수정이는 남편 오기만 벼르고 있었다.
갑자기 집을 팔아? 상의도 없이 집을 판다? 아무리 생각해 봐야 팔아야 할 이유가 없다. 집에 오니 마신 술도 다 깼다. 정신이 멀쩡해졌다. 회사 운영에? 아니면 어떤 계집에? 그런면,,,? 왜 상의도 없었나. 집 팔고 사는 게 아이들 장난인가!
수정은 꼬박 뜬 눈으로 밤을 보냈고 남편은 오지 않았다.
이튿날도 남편은 회사에 출근을 않고 지방에 있다는 연락만 있었다고 한다. 어디에 무슨 일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며칠 후에 올라온다는 말만 있었다니 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점심 때 윤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빨리 나오란다. 해장 점심 겸 커피나 마시자고 한다. 커피숍으로 갔다. 안나도 불렀다. 안나는 자리에 앉아마자 전화를 받았다. 항시 바쁜 안나다.
-응, 알았어.
수정과 윤정이를 보며 말했다.
-내 잠깐 갔다 올게. 천천히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이면 돼. 한 시간 쯤.
-누군데?
대답 없이 안나가 급히 나갔다.
-누굴까?
-뻔하지 뭐.
-뭔데?
-또 하나 새로 생겼어.
안나는 급히 커피숍 옆 캘리포니아로 갔다. 새로 개업한 호화 호텔이다. 손님이 많아 대기실까지 있다고 한다.
안나는 001호실 문을 열었다. 나이트에서 한 달 전에 만났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박대환이란다. 본사 회장이건 지점장이건 안나에겐 별 관심이 없다. 만나면 스텝이 잘 맞아 즐겁고, 깨끗한 호텔로 가서 놀다가 수표 몇 장 받으면 그만이다. 굳이 길게 사귈 욕심도 없고 형편 되는 대로 즐기면 된다.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 항구엔 드나드는 배가 많지 않은가. 누구냐고 상대를 물을 필요도 없다. 거래로 정을 주고받으면 그만이다. 뭐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것도 없다. 첫사랑에 배신당하고 얻은 결론이다. 사랑도 돈이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앞두고 짓밟힌 사랑이었다. 친정이 가난하면 밑 빠진 독이란다. 그 부모에 그 아들이었다. 정 줘봐야 언젠가는 가슴만 아프고, 정에 속고 정에 울고 돈에 울고 만다. 올드미스의 아픔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살다 가면 그만이다. 오늘의 현재가 중요하다. 내일은 내일이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도 늦지 않다. 나에겐 청춘이 있다.
-오늘은 바쁜가 봐.
-응.
박대환은 벌써부터 침대에 누워있었다.
-지방으로 출장 갈 일이 있어서.
-언제 오는데?
-가 봐야 알겠어.
-오는 대로 연락해요.
-그럴게.
-당신은 무정할 때가 많더라.
안나는 공연히 해보는 소리다.
대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안해.
안나는 어느새 온 몸이 불덩어리였다. 파도치는 육체, 육체는 거짓이 없다. 거래라도 뜨거울 때는 뜨겁다. 푸짐한 잔치는 짧을수록 흥이 많다. 아쉬워도 잔치는 끝나기 마련이다.
안나는 여유 있게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미안해.
윤정이와 수정은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쏠께. 아주 비싼 걸로.
안나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넘쳤다.
-우리는 한심하게 커피나 마시고.
-커피 타임에도 인생을 즐기는데..
목이 터져라 웃으며 거리로 나왔다.
이 사회는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 어딘가에 바람은 불고 지나가면 그뿐이다.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굳이 그걸 탓하고 바람을 따질 필요도 없다. 베일 속에 흔적도 없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갔다.
수정이가 집에 가니, 뜻밖에 남편 경호가 와 있다.
수정이는 반가움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수정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경호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구요!
-후배가 늦둥이 아들을 낳는데, 돌이라고 연락이 와서 돌집에 갔다 왔어. 열 살 연하의 아가씨와 재혼한 후밴데 그런 경사가 어디 있어. 기분도 그렇고 해서 말도 않고 갔어.
-기분이 왜?
-기분 좋을 거 뭐 있어? 남들은 아들딸을 잘도 낳는데...
-뭐요! 우리는 포기한지 오래됐잖아요. 부부로만 만족하게 살자고.
-그랬지.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그게 아니더라.
-그래서 이혼하고 새 장가 갈려고? 새색시 얻겠다고?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긴 뭐가 아녀요! 당신 요즘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녀요. 여자는 직감이 있어요.
경호는 대구할 기분이 없었다.
-참! 집 팔려고 내 놨어요?
-응, 이사 갈려구?
-이사? 왜 이사를 가? 상의도 안고.
-학교 앞이라 꼬마들 학교 다니는 걸 보면 속이 상하더라.
수정이는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신혼 초에는 친구들 꼬마 잔치 찾아다니기 바빴다. 백일이다, 돌이다,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 아니면 현찰이 좋을까, 내 집 경사처럼 바삐도 다니고 즐거웠다. 이것도 다 품앗이다. 주면 받는 것이니 아까울 것도 없었다. 남편은 그 꼬마들을 보면 예쁘고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는 더 예쁘게 낳자. 둘, 셋...하하하
-당신두.
-아들 둘, 딸 하나.
밤마다 즐거운 밤이었다. 희망이 넘치는 밤이었다. 뜨거운 육체는 사랑의 확인이었다.
학교 앞에 새 아파트도 당첨이 되었다. 꿈과 기대가 날마다 쌓였다.
그렇게 십 년 세월은 꿈같이 흘렀다. 그러나 그 부풀었던 꿈은 어디로 가고 없다.
-집 팔고 어디로 갈려구? 이사 간다고 애가 생기나? 산 속으로 들어갈려구?.
수정은 화가 날대로 났다.
경호는 입을 다물었다.
-난 그렇게 못 해요.
수정이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그런 말 안하기로 했잖아. 둘 만의 부부로 살자고 약속하고.
-그랬지.
-그런데? 왜 약속 안 지켜?
-누가 안 지킨대?
-그럼 왜 그래?
수정이의 숨소리가 색색거렸다.
-피곤해. 내일 얘기하자.
경호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빨리 얘기해. 나는 그냥 못 참아.
일어서려는 경호의 소매 자락을 붙잡다.
-이거 놔.
경호는 수정이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방문을 꽝 닫았다.
경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옷을 대충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결혼 십년이 넘는다. 신혼이 아니다. 어느새 나이 사십이 넘었다.
부부만의 생활은 가정이 아니다. 그것은 동거일 뿐이다. 부모 자식이 있어야 가정이다. 어머니 아버지 소리를 못 듣고 사는 게, 그게 어떻게 가정이란 말인가. 가정이 없는 부부만의 동거 생활, 가정은 여보 당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신혼 때는 사랑만으로 만족해도 나이 들면 가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부부는 인생을 같이 살아가는 동행자일 뿐이다. 부모자식이 모여 있는 곳, 그 곳이 가정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새사람을 맞이할 수도 없는 일이다. 흔히 말하는 아들 딸 낳고 잘 살아라 하는 말이 내게는 왜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 평범한 복이 나에게는 없는 것인가. 이게 내 운명이라면, 그 운명은 나에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식 없다고 부부간의 정과 의리를 버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아내에게 잔인한 일이다. 차라리 집을 팔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살면 마음이 편할 것만 같다. 분명 아내는 반대일거고!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신혼 초, 결혼하면 아들 딸 나아서 학교에 손잡고 데리고 가고. 크면 은 책가방 들고 가는 모습을 보려고 학교 앞 아파트로 이사 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신혼 초의 부푼 꿈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부부만의 쓸쓸한 노년이 싫다. 남들처럼 자식 있는 가정을 갖고 싶다. 경호의 방황과 고민은 수정이에게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술만이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허전하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세상이 넓기만 하여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
수정이도 밤새도록 눈물만 쏟아졌다. 원망이라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으나 누구와 가슴 터놓고 위로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또 위로를 받은 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남편의 마음을 돌리는 일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어쩌면 좋은가! 남들은 가족계획이다, 피임이다 법석을 부리는데 나에겐 왜 자식하나 없는 몸이 되고 마는가. 미라는 하룻밤만 남편과 몸을 대도 임신이 된다는 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그것도 다 내 팔자란 말인가.
수정이도 결혼하고서 남편이 출근하면 밖으로 나가보았다. 집 앞의 거리가 꽉 차게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이 재갈거리며 학교로 간다. 그럴 때마다 자기 배를 만져본다. 가슴이 철썩 내려앉는다. 초조하고 허전하다. 내겐 왜 저런 기쁨이 없단 말인가.
둘이서 병원도 많이 가 보았다. 별 이상이 없다는 거다. 좋다는 방법은 다 해 보았다. 체외 수정이다 뭐다, 어느 병원, 어느 한방 병원이 좋다더라 하면 거리가 멀거나 금전 관계없이 찾아 다녔다. 돈도 많이 들었다. 교회와 절에 가서 기도도 간절하게 하고, 불공도 많이 드렸다.
밤새도록 울면 다정하게 달래주던 남편이었다.
-우리 둘 만으로도 충분한 인생이다.
-자식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밤마다 팔벼개를 해주며 꼭 안아 주었다.
-자식 없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많다. 그들도 행복하게 잘 살고만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자.
-당신 미안 해.
-당신만의 잘못인가?
수정이는 남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밤마다 숨 가쁜 뜨거운 침실이었다.
-죽을 때도 같이 죽자.
믿음직한 남편이었다.
그러던 남편이 작년이던가, 어느 날 출근을 늦게 했다. 남편은 베란다에 서 있었다. 학교운동장에는 학생들이 가득히 모여 놀고 있었다. 남편은 우두커니 서서 학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이도 남편 옆으로 가서 오랜만에 학교 운동장을 같이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남편이 우리 집 꼬마도 저기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면서 잘 보라고 하였다.
수정이는 남편이 자식을 포기하고 있는 줄 알았다.
-내 눈이 나빠서 안 보이나!
-여보, 당신도!
경호는 갑자기 수정이를 끌어안고 침실로 들어왔다.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라도 낳자.
울음 반, 웃음 반 미친 듯 얼굴 부비며 긴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헛팔매질, 빈 세월만 갔다.
-우린 부부만의 인생이다.
다시 약속을 다짐했다. 서로 신뢰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호는 요즘 잠자리도 자주 요구하지 않는다.
술 취하고 들어오는 밤이 잦았다.
남편 경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윤정이가 왔다.
-너 얼굴이 말이 아니다. 무슨 일 있었니?
-응. 문제가 있다.
어제 남편과의 일을 말하였다.
-저런!
-어쩌면 좋으냐?
윤정인들 뾰죽한 해답이 있을 수 있는가.
-너도 이제라도 빨리 재혼해서 아들 딸 낳고 살아라.
-난 혼자 사는 것이 편하고 좋다. 왜 사서 고생하니?
-그래두.
-결혼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자식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고. 서로가 살아 온 생활이 굳어졌는데, 그걸 고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 안 맞는 다고 또 헤어질 수도 없는 일이고. 초혼보다 재혼이 더 어렵다. 난 차라리 이렇게 혼자 살련다. 그게 속 편하다.
-외롭잖니?
-그럴 때도 많더라.
-그러니까....
-혼자 생활에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넌 속 편해서 좋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결혼을 안 하는 건데. 결혼한 것이 후회 된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자식이 뭐 필요해!
-안나나 너처럼 혼자 살아야 하는 건데. 나도 이제부터 혼자 사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그 즐거움을 내게 일러줘.
수정의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매달 화요일은 돌아온다. 만나면 즐겁고, 말해봐야 그 말이 그 말이다. 그래도 만나면 즐거운 것이 우정이다. 술잔을 부딪치고 이것저것 새로운 음식을 먹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고. 실없는 말에 그저 웃고 떠들면 그만이다.
오늘은 넷이서 경춘 가도를 달렸다. 차창 밖으로 산에 들에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청평을 지나고 가평을 지나고 차는 신나게 달렸다.
-야! 저 하늘, 저 단풍!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웠다.
휴게소에서 차를 세웠다. 그냥 지나치기가 아까웠다. 심호흡을 하였다.
-야, 멋있다.
네 사람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아름다운 단풍, 푸른 하늘과 넘실넘실 흘러가는 맑은 강물, 산과 들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저 아름다운 자연 속에는 낙엽 지는 쓸쓸한 가을과 눈보라치는 겨울은 없었다. 다음에 다가 올 계절은 없다. 그저 바라볼수록 아름다울 뿐이다. 언제까지나 즐거울 뿐이었다.
다시 언덕을 넘고 구부러진 긴 도로를 지났다. 아름다운 경치는 끝없이 펼쳐졌다. 예약한 식당에 도착하였다. 안내원의 친절한 도움을 받으며 차를 세웠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 왔다.
가을 날씨는 고양이 눈 같다더니 하루 일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날 경호는 아파트를 수정이 명의로 이전하고, 그 우편물을 등기로 부쳤다. 간단한 메모도 남겼다.
-언제 다시 만날지, 잊혀진 남일지.
너를 사랑했던 남편 경호가.
가을비답지 않게 천동 소리가 요란하고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권순악 경력
* 충남서산출생, 소설가 시인 수필가, 서라벌예대문예창작과. 경희대국문과, 고려대교육대학원졸업, '90년 '한국수필', '91년 농민문학'에 소설, '11년 월간 한맥문학에 시 등단, 한국문협 문단정화위원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농민문학, 한맥문학, 착각의 시학, 한국영상문학 자문위원, 한국창작문학 지도위원
* 저서 : 우리는 무엇을 잃고 사는가, 매화는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빛에 길을 묻고,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랑 다하여라, 춤추는 노신사, 세월이 머문 그리움, 꽃냄새 흙바람, 꽃길따라 구름따라, 동양인문학강의록, 수필문학강의록 외
* 수상 : 옥조근정훈장, 흙의 문예상, 농민문학상, 한맥문학상, 좋은 문학상, 선교문학상, 방촌문학상, 한마음 문화상, 류승규문학상
* 중등학교장정년퇴임, 백령도 심청각건립 추진위원역임, 의정부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현), 롯데수필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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