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에 만난 名詩④ 목가시인牧歌詩人 신석정辛夕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森林帶(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湖水(호수)에 힌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野薔薇(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마서요
나와 가치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山(산) 비탈 넌즈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힌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洋(양)을 몰고 돌아옵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五月(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 한들 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果樹園(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때
나와함께 고 새 빨간 林檎(능금)을 또옥똑 따지않으렵니까?
(신석정 시집 《촛불》(인문사, 1939)
문학박사 홍윤기 평설
-.주제:이상향의 형상 추구
-.형식:9연의 자유시
-.경향:서정적, 낭만적, 목가적
-.표현상의 특징:대화 형식의 산문체로 내재율을 살리고 있다. 9연으
로 엮었으나 내용상 전편이 3단락으로 구분되고 있다. “알으십니까”를 5
번이나 동어반복하며, 수사의 점층적인 강조를 한다.
이해와 감상
1939년 11월에 시집 《촛불》에 발표한 작품이다. 일상어로 꾸밈이 없이 엮으면서도 시적 감동을 주고 있는 빼어난 시이다. 우선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일제 말기인 탄압이 격심해졌던 시기였다. 시인 신석정 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비분은 컸던 것이다. 여기서 특히 목가적인 순수 서정시를 즐겨 썼던 신석정은 하나의 시적 ‘이상향’을 절실히 갈구했던 것이다. 물론 《유토피아》를 쓴 영국인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는 희랍어의 ‘ou’(영어의 no) 와 ‘tops’(영어의 pace)를 짝 맞추어 제목을 붙였으니 글자 그대로 ‘no place’, 즉 아무데도 없는 곳이 ‘이상향’ 이다.
신석정은 그의 심오한 내면세계에다 이상향을 설정하고 이토록 절실하게 그의 시세계에다 구축했던 것이다. 그 ‘이상향’ 은 일제의 쇠사슬을 끊고 자유해방을 맞이하는 ‘광복의 터전’ 을 상정한 것이다. 그것은 숨막히는 고통의 현실상황에서 이 겨레가 희구하는 바를 절실히 보여준 눈부신 경지의 시라고도 하겠다. 물론 그 당시 일부 젊은 시인들이 현실 도피의 한 방편으로 이상향을 추구했던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시적 경향에는 당시 서구 낭만주의의 영향도 컸었다.
이 시에 있어서 ‘어머니’는 ‘조국’ 이요, ‘민족’이며, ‘절대자’ 이다. 김영랑金永郞, 박용철朴龍喆 등과 더불어 심미주의 시세계의 구축에 참여했던 목가시인 신석정의 순수 정신의 표상表象을 엿보게 한다.(《신시 백년, 한국 현대시 해설》(홍윤기))
고향에서의 전원생활을 택한 석정夕汀
불행한 소년시절이 지나갔다.
가난과 학문이 누대를 억누르는 속에서 나의 소년시절은 꿈과 낭만을 가꾸기도 전에 가실 길 없는 상채기 투성이로 유치할 수 없는 고독과 우울에서 보냈던 것이다. 극히 내성적이고 염세적인 소년은 문학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아오다가 열일곱 나던 봄에 〈기우는 해〉라는 짧은 시가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래 문학이라는 고질을 앓게 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노장철학老壯哲學을 섭렵하다가 끝내 청운의 뜻을 품고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 스물네살 나던 봄. 아내와 어린 것은 그대로 소작 논 몇 마지기에 매달아 둔 채 훌쩍 ‘중앙불교전문강원’생이 되었다.
《불유교경》과 《사십이장경》을 손쉽게 떼고 난 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강을 받게 되던 5월 어느 날, 뜻밖에도 난데없는 엽서 한 장이 날아 왔다. 동대문 밖 지리엔 서투르니 틈내서 한번 꼭 나와 달라는 사연이었다. ‘시문학사’의 박용철이 띄운 것이다. 강원 앞뜰에는 보리수나무 꽃이 만개하여 향기가 진동하는 오후, 나는 기신론 강을 끝내던 길로 낙원동 시문학사를 찾아갔다. 한복 차림의 창백한 얼굴에 몹시 수척한 청년이 바로 용철이었다. 서로 문통文通이있던 사이라 일면여구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정지용鄭芝溶과 이순석李順石이 들어왔다. 까만 명주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으로 차린 두매 샛님 같은 지용의 모습은 양복 차림으로 스마트한 청년 화가 이순석과는 대조적인 인상을 주었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왔다. 주거니 받거니 술이 거나하게 되자 지용은 자작시를 비롯하여 나의 시, 편석촌片石寸의 시를 원고를 펼쳐들고 낭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낭랑한 목소리로 읊어 내리는 솜씨가 어찌 멋이 철철 흐르던지 우리는 귀를 모아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시를 읊고 나더니 불쑥 “석정은 프로 시를 쓰지 않고, 왜 이런 시를 쓰는 거야?” 지용의 말이다. 그 무렵 프로 시가 문단을 풍미하던 때라, 신진이라면 으레 프로시를 써야만 행세하는 판이었다. 지용의 말에는 야유 반 의문 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마냥 취한 우리는 밤이 이슥해서야 낙원동 시문학사를 나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거리로 나왔으나, 밤이 이슥한데다가 전차도 이미 끊어지고 어떻게 곤드레가 되었던지, 동대문 밖 대원암大圓庵까지 갈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어 그 길로 당주동에 사는 종자형 성해星海 댁까지 겨우 찾아가서 그날 밤을 앓다시피 보냈다.
그때부터 불경 공부는 부업으로 밀어붙이고, 틈만 나면 시문학사로, 연건동 편석촌 집으로, 명동 다방으로 쏘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같은 강원에 있던 조종현趙宗玄도 곧잘 나의 동행이 되어주곤 했다. 종현은 이은상을 찾아다니며 시조 공부에 여념이 없던 때로, 같이 나가는 날이면 동아일보 학예부로, 동광사로, 불교사로 돌아다니는 게 일과였다.
춘원春園을 만나고 요한을 만나고, 만해萬海 스님을 만나던 때가 모두 그때의 일이었다. 편집실 문 밖에까지 전송을 나오는 춘원, 동광사에 가면 시 원고를 내놓고 가라던 요한, 불교사에 들러서 듣던 만해 스님의 그칠 새 없는 장광설, 모두 기억이 새롭다.
여름방학이 닥쳐왔다.
나는 매일 총독부 도서관(지금의 국립도서관)에 나가서 루소와 타고르의 작품을 찾아 탐독하고, 일찍이 섭렵해 오던 노장철학을 다시 굽어보기 시작했다. 《도덕경道德經》은 하상공河上公 주注와 왕필王弼의 주注를 구해 놓고, 다케우치 요시오의 《노자연구老子硏究》를 샅샅이 읽어 내리고,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을 굽어보면서 그해 여름을 보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나는 강원생들과 함께 《원선圓線》이란 ‘회람紙’를 시작했다. 문학 지망생들의 동인지로 철판에 긁어 등사로 냈던 것이다.
그 뒤 30여 년이 지나갔으니 문단에 등장한 친구도 없지 않으련만, 그당시 동인들의 이름도 기억할 수 없으니 알 길이 전혀 없다. 다만 대원암 뒤채에서 내 시중에 정성을 들이던 광조라는 소년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다. 그는 지금쯤 어느 절 주지를 맡아보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포교소를 지키고 있는지 문득 생각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해가 바뀌었다. 만주사변이 터지고 세상은 뒤숭숭하기 시작했다.
“기신론을 떼었으니 이제 금강에 들자”는 스승의 권유를 사양하고 고향에서의 전원생활을 택한 석정.
“선심이 안 나다니 신 군은 헛것을 배웠구먼” 태연하게 하시는 말씀인데도 그렇게 명랑한 얼굴은 아니었다. 학문에 신념을 갖는 것과 선심을 내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는 문제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스승의 마음을 후리게 한 것만은 오늘에 이르도록 죄스럽기 짝이 없다.
금강산으로 입산수도의 길을 떠나자는 동료들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고 나는 귀향의 길을 서둘렀다. 몇 마지기 안 되는 전답이지만 그 악랄한 지주의 착취 대상으로 젊은 아내를 그대로 맡겨 두기가 너무 가슴 아팠을 뿐 아니라, 서울생활을 더 지탱해 낼 도리가 없었던 데도 그 원인이 컸다.
시골로 떠나면 문학하는 데 시간은 있겠지만 자극을 받을 길이 없으니 떠나지 말고 더 견디어 보라는 편석촌의 간곡한 이야기도 좋은 충고엔 틀림이 없었으나, 시골로 돌아가 물려받은 가난과 싸우면서라도 좀 더 인생을 건실히 살아야겠다는 나의 결의는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말았다.
돌아오던 길로 소작전답을 얻어 들이고, 저 도연명이나 카펜터처럼 일생을 조촐한 속에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삼년을 걸려서 소작농에서 얻은 벼로 집을 하나 마련해서 그동안 우거하던 오막살이를 면하고 청구원靑丘園이라고 격에 맞지 않은 멋진 이름을 붙이고 앞뜰에는 은행나무, 벽오동나무, 자귀대나무, 모란을 심어 가꾸고, 동쪽에는 감나무, 서쪽에는 시누대를 심어 놓고 측백나무로 울을 두른 뒤 제법 조촐한 집으로 꾸몄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처녀시집 《촛불》에 나오는 은행나무와 대숲과 푸른 하늘은 모두 청구원에서 얻은 것들이다. 모두 꿈과 낭만이 넘치는 나의 초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안서岸曙의 칭찬도 컸지만, 그때 편석촌은 나를 목가시인牧歌詩人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 무렵에 멀리 황해도에서 찾아온 문학 소년이 바로 중학을 갓 나온 장만영張萬塋이요, 중학 2년을 다니던 서정주徐廷柱도 이때에 처음 만난 문학 소년이었다. 거의 매년 찾아주다시피 만영과 정주는 청구원 시절의 가장 반가운 손님이었으니 그것이 인연이 되어 만영은 나의 동서가 되었던 것이다. 가람과 조운이 찾아주던 것도 이 무렵이다. 그것이 인연으로 가람은 오늘에 이르도록 나의 문학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6·25 뒤 7, 8년을 같이 전북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된 것도 모두 그때 맺은 인연의 탓이다.
1939년 오래 벼르던 나의 첫 시집이 나왔다. 12월 28일 오후 6시 경성그릴에서 《촛불》 출판기념회를 열게 되었으니, 상경하라는 편석촌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나서 서울로 뛰어 올라갔다. 실로 9년 만의 상경이었다. 그 동안에도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엔 만영을 찾아 매년 겨울 서울을 거쳤지만 서울을 목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만영萬의 《축제》와 공동으로 이루어진 기념회에는 가람, 안서岸曙, 기림起林을 비롯하여 문단 지우 30여 명이 모여 자못 성황을 이뤘으며, 소운素雲, 육사陸史, 석초石艸, 원조源朝, 임화林和도 모두 처음 대하는 얼굴들이었다. 그 뜨거웠던 악수는 지금도 내 체온의 한 구석에 남아있는 것만 같다.
그 뒤 세상은 자꾸 어두워만 갔다. 《문장文章》지에 기고한 시가 두 차례나 교정쇄에 붉은 잉크로 상처를 입고 되돌아오더니 끝내 문장지는 폐간을 하고, 《인문평론》이 ‘국민문학’이라는 일문日文 잡지로 둔갑을 하고나서, 일본말로 써 내라는 협박장에 가까운 원고청탁서가 날아들더니, 끝내 문인들은 뿔뿔이 헤어져 금강산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시골로 모두 떠나고, 서울에 가야 ‘국민문학’에 종사하는 어용들 외에는 좀체 만날 길이 없었다. ‘국민문학’사[人文評論]에서는 일문으로 시를 써 보내라고 성화를 내던 것도 그때의 일이다.
해방이 되던 이듬해 출판된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는 그 동안에 숨막혔던 속에서 써 두었던 작품들이다. 그동안 흩어졌던 문인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왔다. 나도 서울로 기어 올라왔다. 1년을 꼬박 참고 견디다가, 나는 또다시 귀향을 하고 말았다. 해방된 서울은 너무도 숨이 막히는 곳이었다. 시골 중고등학교를 전전하다가 전주로 온 지도 벌써 17년. 이젠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30여 년을 살다 온 청구원은 내 마음의 고향, 그 옛날 심은 은행나무, 벽오동나무가 이미 아름드리 거목이 되는 동안 손주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나도 그 거목보다 허망하게 이순耳順을 넘었다.
전주에 나와서 얻은 제3시집 《빙하氷河》가 있고, 지금 제본을 서두르고 있는 《산山의 서곡序曲》이 네 번째의 수확이 된다. 《촛불》에서 자연의 품에 깊숙이 묻어 꿈과 낭만을 엮던 시절을 생각하면 옛날 다녀온 먼 여로에서 눈여겨보았던 산줄기만 같아 몹시 그립고, 《슬픈 목가》 시절은 악몽 같으면서도 뼈에 저리도록 망각할 수 없는 나의 역정이요, 《빙하》 또한 허전한 생활을 다스리면서 내일을 모색하는 안간힘이라면, 《산의 서곡》 또한 몸부림에서 오는 저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금 나는 《촛불》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내가, 그리고 여러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의욕과는 너무나 먼 세계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산의 서곡》을 내 인생의 오버추어로 삼고 싶다.
인생을 피날레 할 때까지 나는 줄곧 시와 더불어 살리라.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서 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된 행동의 일단이기 때문에.(수필〈못다 부른 목가牧歌〉 중 부분인용)
신석정
본명:錫正, 아호:夕汀, 釋靜, 石汀(1907∽1974), 전북 부안 동도면 동중리, 중앙불교전문강원 졸업(국어국문학), 〈기우는 해〉(1927)로 문단에 데뷔, 시집:《촛불》(1939), 《슬픈목가》(1947),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