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원 연구생을 지냈으니 나는 지금으로 따지면 바둑 시관학교 출신인 셈이고
한시대를 풍미했던 김희중(지금은 은퇴)사범님에게서 바둑을 배웠으니 기본이
충실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바둑의 배움에 정통과 사파가 어디 있겠는가.
열심히 배우면 느는것이, 이기면 강한것이 바둑아닌가! 지금처럼 많은 정보가
유통되면 얼마든지 혼자 배우고 때로 익혀도 바둑은 금세 는다고 생각한다.
바둑을 접한지 몇 년이 지나서 프로의 실력을 갖춰가는 연구생이 많아지고
바둑서클에서 놀면서 바둑을 두어도 강1급까지는 쉽게 되는(?)요즈음,
아마강자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나의 실력이 과연 아마추어 정상급일까
하는 자문을 해본다.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워 동네바둑 3급 정도의 실력이
되어 있을 무렵,김희중사범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사범님의 첫번째 제자로서 분에 넘치는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에 보답하지
못한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하지만 그때의 가르침 때문에 그나마 이정도라도
되었다고 생각한다.중,고등학교 때는 거의 바둑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2학년때 연구생추천으로 입단대회 본선에 나간것과 고교왕위전에
한 번 나간것이 고작이다.입단대회 본선에 나갈 당시에는 조대현 사범님과는
2점 치수였다.그 대회에서는 1승 9패였는데,1승은 유창혁9단에게 거둔 것이었다.
초중고시절에는 바둑말고도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탁구는 바둑정도로 잘했었고
수영과 스케이트도 수준급이었다.열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끼니가 간데 없다는
것은 바로 나에게 해당되는 속담이었다.
그러나 바둑이 늘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 역시 기재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외대 중국어과에 입학하고 그때부터 많은 바둑을 두었던 것 같다.
박상남,최준 등과 막강트리오를 구축해 대학바둑을 평정해 나갔다.
아마강자가 전반적으로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던 대학4학년 말에는 아마대왕전에서
우승,아마강자의 호칭을 얻게 되었다.이전에도 각종 아마대회에 참가했는데,
그때는 예선통과도 힘들었다.언젠가는 마산에서 벌어진 학초배 참가해 첫 판에서
탈락을 하면서 승부의 허무함을 맛보기도 했다.그러다가 1994년에 아마국수전에서
우승하고 이후 97년까지는 정상권을 맴돌았다.
지난번 "주간바둑361"에 기고한 "아마강자 인물탐구"편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한 바둑행를 이렇게 적은적이 있다.
"예전에는 세계아마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목표였는데,그것은 다른선수들이
달성을 했으니,이제는 오픈된 프로기전에서 32강에 오르는것을 목표로 삼고있다...
유년(幼年)의 한때 바둑의 향기에 취해 집을 나선 것이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뒤돌아 보면 멀리 걸어온 길....중략...."
그러나 지금은 프로기전 32강에 오르는것,신작로같이 곧게 뻗은 아마추어의 길을
과연 정상적으로 갈수 있을까,또한 내가 심취했던 바둑의 향기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가는 것이 못다핀 바둑의 길을 찾는 오늘의 내 일기(日記)이다.
언젠가 바둑TV에서 바둑을 둘때,양상국 사범님이 나를 "항시 정통바둑을 구사하고
무리가 없는 바둑을 둔다."고 소개 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아마추어가 자기의 기풍을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겠지만,굳이 나의
기풍을 말하라면,내 바둑이 정통바둑인 것처럼 보이는것은,평소 내가 프로의 바둑을
열심히 모방하는 연유일 텐데,그것도 처음부터 그런것이 아니라 대회에 나가 실전을
쌓으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변해온 것인지 모른다.
아마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하려면 보통 열 판 정도를 이겨야 하는데,제한시간이 짧기
때문에 화려한 행마를 구사한다든지,난해한 전투 바둑으로 이끄는 것 등은 만만치가
않다.따라서 결정적인 장면이 아닌 이상 대부분은 프로가 둔 수를 흉내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승산이 있는데,그런 스타일에 익숙해져 버린것이다.
앞으로도 포석 단계에서는 일본의 모양바둑을 골간으로 하되 대세점을 잃지 않도록,
많은 기보를 놓아볼 작정이고,실전에서도 끝까지 무리를 하지 않고,지면 그냥 지는
요다(依田紀基)고바야시(小林光一)9단의 바둑과 같은 스타일을 추구할 생각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풍의 소유자는 누가 뭐라든 다케미야(武宮正樹)9단이라고
생각한다.온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지만,끝까지 고집했고 지금도 고집하고 있는
구도적인 면에서의 우주류는 20세기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아니,설령 실패한 기풍일지라도 우주류는 신포석을 능가하는 철학적 시도였고,
화점바둑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중앙에 대한 탐구를 한차원 끌어 올렸기에
감히 기풍의 넘버원이라고 말하고 싶다.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일본에는 "화려(華麗)"니 "치밀(緻密)"이니 하는 등의 말들로 표현되는 다양한 기풍이
있지만,이창호9단의 기풍은 그런 기풍들의 의미를 무력화시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9단의 기풍은 우주류를 능가하는 것으로,천하제일의 무기풍의 기풍일것이다.
어찌보면 노자의 철학에서 말하는것과 같이 우리가 말하는 기풍은 기풍이 아닐진데,
무기풍이야말로 정말 본질적인 기풍이 아닌가!따라서 나는 "유수(流水)이창호"또는
"무심(無心)이창호"의 경지가 최고의 기풍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말해놓고 보아도 말에 모순이 있지만,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것인지 독자들께서는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실력향상을 위한 일반적인 방법론은 제외하고 말한다면,취미로 적당히 두면 늘 수가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그래서 구력(?)이 20년이라는 사람도 간단한 사활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본인이 5급이라는 애기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18급수준의 행마가 나온다고 본다.
그 무엇도 온몸으로 부딪쳐 터득하지 않으면,또 기본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어느 한계이상은 늘 수가 없다고 믿기에 조금은 취미이상으로 집중해,단기간에 실력을
배양하는것이 좋다고 본다.
바둑은 자기 마음대로 아무곳에나 두는 자기 창조형의 게임이 아니라,어느 수준까지
가기위해서는 외워서 하는 모방의 게임이다.그렇기에 정석을 외우고 사활을 외우고
맥을 외워야 한다.그 안에 법칙이 있기에 외우기가 쉽고 복기가 가능한지도 모른다.
외워서 비슷하게 두면 바둑은 는다.
요즘 같은 시대라면,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정상급의 기사들이 여러명 자웅을 겨룬다면,
군계일학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만,골프처럼 일년에 우승자가 계속 바뀔 수 있다고본다.
그런데고 불구하고 이창호 9단이 독주하고 있는것은,그에게는 특출난 기재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부동심,그리고 체력이 있기때문이다.
게다가 승부처에서의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목진석5단을 비롯한 유망한 신예가 있지만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위의 글은 2000년 "바둑361"아마강자파일에서 퍼 온 글입니다.
다음은 김7단의 프로필입니다.
1964년 서울 출생이시고,89년에 아마대왕전 우승(제7회),93년 아마국수전우승(27회),
95년 아마유단자대회우승(25회),96년 세실배우승(16회),96년 직장인 바둑대회우승(2회),
97년 지송배 우승(2회)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