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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彼蒼欒欒元嗣圖永孝思 納銘玄墟 昭示無期 금호세고권지일 琴湖世稿卷之二 敬庵先生逸稿 附錄 神道碑銘 黃景源 撰 惟許氏世家慶州河陽縣自康安見於譜後 七世大將軍裕以淸嚴爲世聞家公大將軍之 玄孫也 曾祖諱綏判典客寺事贈 資憲大夫 吏曹判書曾祖妃安氏贈 貞夫人祖諱允昌 都官正郞贈 崇政大夫 贊成 議政府事祖妣 李氏贈 貞敬夫人考諱貴龍開城尹贈 大 |
저 푸른 하늘아 어인 일고 훌륭한 맏아들 효심이 깊으니 무덤에 명을 넣어 먼 장래까지 밝게 보이리 금호세고권지일 -------------- 금호세고권지이
경암선생일고
부록. 허씨의 세가는 경주부하양현에서 강안께서 비로소 족보에 나타나고, 그뒤 대장군유께서 청렴하고 엄격함으로 세상에 소문높은 집이었다.공은 대장군의 현손이다. 증조부 휘 수께서는 판전객시사 증 자헌대부이조판서이고 증조비 안씨는 증 정부인이시다. 조부 휘 윤창은 도관정랑 증 숭정대부 찬성의정부사시고 조비이씨는 증 정경부인이며 부는 휘 귀룡께서는 개성윤 증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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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府事妣李氏贈 貞敬夫人都官外祖文成公安先生裕得 孔子 以下七十弟子像始修國學置奴婢春秋釋奠 故都官習於租豆知節文훈 行方正有外祖安先生風自王氏時士大夫皆從浮屠而許氏獨上儒術好禮儀由都官始公諱稠字中通幼師事權文忠功諱近彊學有文太祖受命充左補闕知製敎改奉常寺丞六年遷成均館典簿 太宗卽位入司憲府雜端坐言事貶補判官完山府未幾召拜吏曹正郞遷內書舍人 . 65 又以事寧貶之越郡事明年遷集賢殿 兼 世子左文學改敬丞府 少尹明年遷直藝文館以司憲府 執義從世子朝京師充書狀官世子還以輔德判司瞻寺事)趙文忠公浚下巡軍獄公坐繫流于春州居數月下敎特釋受)되어 경승부윤(敬丞府尹遷禮曹左右參議兼儀禮祥定提調遷入吏曹參議改兵曹陞漢城府尹明年以禮曹叅判兼藝文館提學奉常寺提調出開爲開城府留候兼京畿觀察使 世宗卽位由恭安府尹陞禮曹判書居四年改參贊議政府事遷 |
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이시며. 선비는 이씨 증 정경부인 도관 이시다. 외조는 안선생유인데 공자 이하 칠십 제자 화상을 얻어 와서 비로소 국학을 세우고 노비를 두고 춘추로 석전제를 올림으로 제사의 진설이나 절차에 밝아 행의가 선생의 붕도를 닮은 것이 많았다. 왕씨 조정때 부터 사대부가 다 불교를 숭상하되 허씨 만은 유술을 즐기어 예의를 숭상하였다. 선생의 휘는 조요 자는 중통이시고 어려서 권문충공 휘 근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힘쓰고 행실을 닦았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후에 좌보궐지제교에 명하고 다시 봉상시승으로 하고 육년 후에 성균관전부 옮기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헌부에 들어가 잡단 좌언사가 되고 좌천하여 판관으로 완산부에 복직되고 얼마 않있다 불러 올리어 이조정랑에 있다가 내서사인에 옮기었다
65 또 무슨일로 인하여 영월군사로 좌천하였다가 명년에 집현전 겸 세자좌문학으로 하고 다시 경슨부 소윤으로 고치고 명년에 예문관에 있다가, 사헌부 집의가 되어 세자를 따라 경사에 가시어 서장관으로 있었다. 세자가 환국한 후에 세자우보덕 판사첨사사로 있을때 조문충공준의 옥사가 있을때 선생이 연류되어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두달 뒤에 특사되어 경승부윤 예조좌우참의 겸의례상정제조 이조참의병조참의를 역임하고 다시 승진되어 한성부윤에, 또 명년에 예조참판겸 예문관제학 봉상사제조를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개성유후겸경기 관찰사로 되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공안부윤에서 예조판서로 승진하여 사년후에 참찬의정부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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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位吏曹判書居六月復拜參贊兼世子賓客宣德元年復入吏曹爲判書居三年陞判中軍都摠制府事進贊成議政府事復入吏曹爲判書明年判中樞府事改兼禮曹判書正統三年拜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陞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世子傅自洪武宣德以來天子明聖海內無事世宗踐阼三十年敬承 皇朝擧賢才以弘至治公家世篤於 儒術嘗欲隆庠 序之敎肅名分定喪制 屛斥浮屠遵守古制故自補闕至爲相朝夕
67 諷議未嘗不先明治體黜去權數一切出於先王之政也 於是乃修續六典固勸人主專任使寬刑罰止絶諛佞爲國家萬世之慮與 皇朝俱饗太平人皆謂王佐之才也 初成均不立學舍公上書曰學者春誦而夏絃古之制也 然國家不立學舍則學者雖欲絃誦不可得也世宗乃命立學舍公又言古者聖王立四學以敎禮樂今國家旣立太學宜下敎又立四學使學者皆治禮樂 世宗從之又命有司立四學民有上書告其縣令之犯法者公 啓曰禮 |
이조판서로 옮기고 유월이 지난 뒤에 다시 참찬겸 세자빈객에 봉하여 졌다. 세종팔년명나라 선덕원년에 이조판서가 되어 삼년후에 승진하여 판중군도총제부사로, 찬성의정부사에 나가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명년에 판중추부사겸 예조판서가 되시었다. 세종이십년에 명나라 정통삼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을 배하고 승진하여 좌의정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 세자부로 되시었다. 세종임금님이 왕위에 오른 후 삼십년동안에 어진인재를 써서 나라 정치가 잘 되었고 선생은 유술을 즐기어 옛 유교를 숭상하여 명분을 엄격히 정하고 장사지내는 제도를 정하고 불교를 배척하여 예전 제도를 지키기에 힘써왔으므로 대궐에 들어가 정승이 된 뒤로는 68 언제나 밝은 정치 앞세우고 권모술수를 배격하여 선대선왕의 정치를 본받아 왔었다. 이에 이어서 육전을 수찬하니 이것은 나라 임금에게 형벌에 대하여 너그럽게 하고 아첨한 무리를 근절시키어 국가 만세의 장래를 위함일러라. 나라 안이 잘 다스려져서 국민이 모두 태평한 생을 누리게 되니 세상 사람들은 왕을 보필하는 인재가 있는 덕이라고 칭송하였다. 처음에는 성균관에 학사를 세우지 아니하였던바 선생이 글을 올리니 왈 배우는 사람은 봄에는 글을 읽고 외우며 여름에는 시나 노래를 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 예전의 제도입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학사를 세우지 아니하여 배우는 사람이 비록 현송하고자 하오나 할 수가 없습니다. 세종께서 명하여 태학을 세우게 되었다. 또 선생은 장계를 올리어 예전에 성왕은 사학을 세워서 예악을 가르치어 었으니 이제 나라에서 태학을 세웠으니 마땅히 하교하시고 또 사학을 세워 학자들로 하여금 예악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세종께서 또 그말을 쫓아서 사학을 세워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민간에서 글발이 올아왔으니 자기 고을군수의 범법한것을 고발하여 왔다.공이계문하여 가로되 예라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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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者防民以章其尊卑之分 故記曰貴賤有等此之謂也 今吏民疾其縣令得一瑕釁輒告之苟無其防君不得以育其臣父不得以育其子不可以不嚴其防也 世宗下敎凡吏民告其縣令觀察使者皆抵罪 太宗薨議群臣服斬衰三年旣葬釋衰公駁曰君喪苴絰菅屨自世子達于卿士是君臣同服斬衰也今聖上慈孝篤至冠繩纓以終其制群臣服衰五月纔卒哭乃服吉服可乎 請群臣陪祭原廟皆衰絰以終三年之制敎曰可明年四月天 69 子遣內官劉景禮部郞中楊善賜祭使者入臨廣孝殿見百官皆服衰絰陪 王祭謂祝曰是中於禮矣初諸功臣爲 太宗就浮屠寺設經齊名曰水陸公啓曰禮大夫不敢祭諸侯今諸功臣雖自謂忠於國家安敢以浮屠之禮饗 先生乎宋福寧殿設水陸翰林學士作齊文非禮之正也功臣設先王位於下壇何其褻也夫壇廟祭祀之禮有正制不可踰也今 殿下方嚮儒術罷經行僧獨功臣猶爲 先王設水陸豈不惜哉 上稱善命罷水陸議者請改 |
68 예라는 것은 존비의 구분을 지키는 것이니 옛말에 귀천이 등차가 있다 한 것도 이것을 이름 한바 이제 백성들이 자기 “고을” 군수의 한 가지 흠을 잡아 고자질 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 임금은 신하를 거느릴 수 없고 부모는 그 자식을 키울 수 없게 될 것이니 이런 일은 엄하게 막아야 합니다. 세종께서 하교하시어 아전이나 백성이 그 현령이나 관찰사를 고발하는 자는 죄로 다스리게 하였다. 태종께서 승하하시니 조정 신하들이 삼년간 상복을 입기로 의논 되었으나 국장이 지난 후에는 상복을 벗는지라. 선생이 말하기를 임금의 장사에는 세자와 신하가 다 같이 굴건제복을 하고 삼띄와 삼신에 상장을 짚고 참쇠복으로 하는 것이 옳은 일인데 더욱이 성상께서는 그 복제를 다하시는데 신하로서는 오개월 동안 참쇠복 입고 졸곡에 길복 을 입으니 이 어찌 옳다 하오리까? 청컨대 조정 신하도 참쇠복을 입고 삼년 동안 종묘에 제사 지내도록 하소서. 세종께서 옳다고 하교하시다. 명년 4월에 69 명나라에서 내관유경과 예부랑중 양선을 보내어 제사지내게하니 사신이 조정백관이 모두 굴건제복으로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되 “예절에 맞는다”고 하였다. 태종국상처음에 공신들이 태종을 위하여 절에 나가 제를 올리니 이것을 수륙이라 하였다. 선생이 상계하되 이제 공신들이 스스로 이르되 국가를 위한다하여 불도의 예식으로 선왕을 제사지내어 송복령이 수륙을 차리고 한 점 학사가 재문을 지어서 선왕의 위패를 불단 이래 모시니 이와 같은 와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제단을 제사지내는 제도 밖에 있을 수 없아 온데 지금 전하께서 유교에 힘쓰고 불교를 물리치려하고 있는 이때에 유독 공신만이 선왕을 위하여 수륙을 배설하는 것은 딱한 일이 아니 겠습니까 ? 세종(世宗)께서 옳다고 칭찬하고 수륙(水陸)을 파(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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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婦人服公以爲儀禮女次純衣纁袡次者髢也純衣者綠衣也纁袡者裳下綠襈也言純衣而不言純裳者純衣之下纁袡爲裳也亦明矣然則女服純衣而纁袡合於古制也臣奉使嘗過闕里見孔壁有婦人圖像純衣纁袡如本朝婦人之服此古制猶可徵也今不當改上以爲然遂不改婦人之服參贊金漸勸 世宗親引獄囚而審覈之公駁曰王制司冠聽之告於王王命三公聽之三宥然後制刑故王者分職授官各有攸 司周官曰各麗其法 以議獄訟此
71 之謂也今參贊請引獄囚親決之不顧治體將焉用有司爲哉 世宗曰卿言是也漸又言萬幾之務宜自摠攬固不可委之臣下公駁曰古之明王勞於求賢逸於任人說命曰恭黙思道夢帝賚予良 弼此高宗勞於求賢也畢命曰嘉績多于先王予小子垂拱仰成此成王逸於任人也故君之於臣也任則勿疑疑則勿任今殿下宜擇大臣俾率六卿而責其成顧不當內挾權數下行臣職也 世宗曰善漸盛怒公色 益和辨說從容以折之 世宗以此知其賢初 |
70 이때에 부인복을 고치자는 의논이 있어서 선생이 이르기를 의례에 여자는 순의에 훈염을 입는다. 하였으니 순의 녹의요 훈염 붉은 치마를 말한 것이니 녹의홍상임이 분명하며 고제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신이 중국 갔을 때 공자사당 벽화의 부인상을 보았더니 순의훈염 즉 녹의홍상으로 우리 나라의 부인복장과 같아서 이것이 예전 제도임을 증명하오니 지금의상을 고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세종께서 참 그렇다 하시고 부인)의 의복을 고치지 아니 하였다. 참찬 김점이 임금께 친히 죄수를 국문할 것을 권하는 것을 보고 선생이 말하기를 예전 법에 유사가 죄상을 들어 조사한 후에 이것을 왕께 고하면 왕은 삼공을 명하여 의논게 하고 충분히 의논을 거듭한 뒤에 형량을 정하게 되었으니 왕은 본래직책)을 구분하여 벼슬을 주고 그 맡은바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을 예전 주관에도 각기 그 법을 다루어 옥송을 의논하였습니다 71 이제 참찬이 옥수를 친히 결정하여야한다 함은 체통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유사는 무엇에 쓸 것입니까? 세종께서 경의 말이 옳도다 하였다. 김점은 또 말하기를 나라의 모든 일을 전하께서 친히 거느리어 살피시고 신하들에게 맡기지 않도록 하옵소서. 공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예전의 밝은 임금님은 어진 사람을 구하기에 힘썼고 어진사람에게는 마음 놓고 일을 맡기었으니 예전에 고종은 어진사람을 구하기에 급급정도로 힘썼고 또 강왕은 어진사람에게 마음 놓고 일을 맡기었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의심나면 일을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어진 대신을 가리어서 육경을 거느리고 각기 맡은 바를 책임지게 하여 신하된 책무를 다하도록 하옵소서. 세종께서 옳은 말이 로다 하시니 김점은 더욱더 노하나 선생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조용히 변론하여 설득시키니 세종께서는 이때에 깊이 선생의 현명을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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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請立久任法集賢殿以爲不便公盛言虞舜任賢以治天下而三考黜陟幽明爲其要此九功之所以敍而九歌之所以成也今臣請立久任法議者喧然或以爲有害於民或以爲先王之法不可改異言蜂起願 殿下行臣之議主錢穀者三年郡縣六年久其職然後考績以明黜陟 上命公立法精密堅守不變中外宴然萬民樂業而官吏奉職益謹公以爲自古國家立法輕者其命長 或作遲 立法重者其命短 或作速 命之長短 遲速 惟在於法之輕重今國家受
73 命百年行仁義不上刑罰然立法猶有重者非 所以宣養國脈也乃定六典凡罪人非逆惡者 毋收努不緣坐者兄弟子孫宗族姻婭皆不錮 諫官侍從士大夫坐事當杖者皆聽贖峻刻之 政無不埽除刑罰始平而仁德施及無窮公力 居多知申事安崇善等請作樂章歌 聖上守 文之德公乃與孟文貞公思誠等爭曰周頌昊 天有成命與執競篇皆康王以後詩是周公作 樂歌詩未嘗美成王之德也漢高帝初作安世 房中歌武帝又作象載瑜及天馬詩唐太宗作 |
72 선생이 구임법을 세우고자 청하니 집현전에서 불편하다 하는 사람이 많아서 선생이 말하기를 예전에 순임금은 어진사람에 맡기어 천하를 다스리되 신하중 에 면직할 사건이 있으면 세 번 생각하여 정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구임법을 청함에 있어 법을 의논하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혹은 선왕의 법에 어긋나느니 하여 고치면 아니 된다고 이의가 벌 때같이 일어나나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건의를 들어주시어 전곡을 맡은 사람들은 삼년, 군현은 육년으로 하여 그 직무를 오래본 뒤에 그 성적을 고사하여 승진이나 면직을 정하옵소서. 세종께서 선생을 명하여 다시 법을 정하여 준수하여 바꾸지 못하게 하니 일로부터 상하가 서로 믿고 나라 안팎이 안 변하여 만백성이 생업을 즐기고 관리들은 자기 직무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선생께서 또 계장을 올리어 말하기를 예부터 국가의 법이 경한 나라는 오래 지탱하고 국가의 법이 중한 나라는 짧게 망하여서 나라의 수명의 장단은 법의 경중에 달려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73 건국한제 백년이 넘었는데 인과 의를 힘써서 형벌을 올리지 아니하였으나 아직도 중한 법이 있어서 국맥을 튼튼히 기르는 데는 합당치 못한바가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육전에 정하여 죄인이 역적이 아니면 처자를 몰수하지 않고 연좌되지 않는 자는 형제, 자손, 종족이하 친척을 다 금고하지 않도록 하고 간관이나 시종이나 사대부라도 죄가 중하면 다 준멸하게 다스려야 형벌이 비로소 평등하게 어진덕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생은 나라의 일에 안온하고 선정을 베풀기에 힘써 왔었다. 다시 악장을 지어서 성상의 문치의 높은 덕을 찬미하는 노래를 짓고 하는 것을 보고 선생이 아뢰기를 주나라 때에는 주공이 지은 주송이 있고 한, 고제대에는 안민방중가), 무제때에 또 상재유, 천마시가 있고 당태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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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七德舞是美堂世也然王者建中和之德作歌 舞以遺萬世豈可遵漢唐故事乎請以周頌爲 儀則 上納其言命館閣毋頌當時作樂章公 嘗明 國家利害不求近功不務小仁初 世 宗命判中樞院事崔潤德征李滿注於婆猪江 公諫曰滿注桀黠之種也世世結黨以報其怨 罪當伐然禮諸後 侯賜弓矢然後征之賜鈇鉞然後殺之今 天子不命之征則滿柱雖有大罪 烏可伐乎已而潤德入婆猪江其人口滿注遁 天子聞之卽賜勅悉還人口忽剌溫陰結 滿注 75 侵北邊 世宗下敎招撫之公又諫曰忽 刺溫各分散無以羈縻 且 天子置建州衛屬 之外激今 殿下義無私交豈宜使人招撫哉 後二十年 天子遣使忽刺溫得董山招撫之 跡乃命刑科給事中陣嘉奠 賜剌 戒諭對馬州 倭奴商賈數千人雜居海堧 諸郡縣出入無常 公 啓言倭奴陰교 有野心伺國之釁久矣今 不斥遂 而慈育之俾安其巢安知羽毛之不長 成也 世宗下敎發還之後百餘年倭奴歲居 東萊館爲國家患士大夫至今服公之能遠慮 |
74 칠덕무를 지었으니이것은 다 그때 당시를 찬미한 것이 온바 왕자는 마땅히 중화의 덕을 세워서 만대에 끼쳐나가도록 하여야 하옵기에 한 당을 따를 것이 아니오라 주송으로써 의측을 삼도록 하옵소서. 세종께서 선생의 말을 좇아 관과 각에서 당시에 지은 악장은 송하지 않도록 하였다. 선생이 국가대사에 밝아서 눈앞에 보이는 공을 구하지 아니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은 힘쓰지 아니하였다. 세종께서 판중추원사 최윤덕을 명하여 이만주를 파저강에 치게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만주는 오랑케 종류라 대대로 당을 모아 옛 원한을 갚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죄는 정벌하여야 마땅하오나 그러나 명나라의 기별이 없이는 칠 수는 없습니다. 얼마되지 아니하여 최윤덕 파저강 지대에 들어가 그의 인민을 빼앗아오니 만주가 도망하였다. 그 뒤 명나라에서 인민을 돌려보내도록 측사를 보내 왔다. 홀랄온이 몰래 만주와 결탁(結託)하여
75 북쪽을 침노하여오니 우리나라에서는 상하가 모두 귀순시키고자 하여 선생이 또 간하여 말하기를 홀랄온은 제각기분산하여서 매인데가 없는자요 또 명나라가 건주위를 두고 그에 속하여 두었으니 지금전하께 그 사람들을 초무 시킬 수 있습니까 그 뒤에 二十 年이 지난 후에 명나라 천자가 홀자온을 시키어 동산에 초무한 흔적이 있음을 알고 진가유를 사신으로 보내와 계유한바 있었다. 이 때에 대마도의 왜노장사꾼 수천명이 바닷가에 흩어져 살아서 무상출입하고 있었다. 선생이 상계하여 아뢰되 저 왜노들은 음흉하고 교활하여 야심이 있는 자들이어서 우리나라의 흠을 엿 본제가 오래이오니 지금축출하지 아니하면 장차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세종께서 하교하여 왜노들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후 백여년지난 뒤에 왜노가 동래관에 살아있어 나라의 화근이 되었다. 사대부 지금 왔어 선생의 원려한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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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也公兼禮曹常引疾乞骸骨歸 上不許特遣 內醫往視之存問交道及爲相上剳請免又不 許 命賜几杖明年疾革請見都承旨 上惻 然命都承旨金墩往視之公屛左右與墩語 國家重事未嘗一言及其私卒于正寢享年七 十一訃聞 世宗率百官擧哀輟膳罷朝三日 賜弔祭諡曰文敬公始以洪武乙丑進士爲 中郞將後擧丙科補典儀丞入 本朝見知於 太宗始拜吏曹正郞時 太宗嘗閱文臣簿 見公之名 下敎曰吏曹得人矣遂授之 太
77 宗親狩令郡縣置講武場公流涕爲 太宗言 曰講武雖不可廢然 殿下馳騁原野猛獸幾 何其不犯羽旄也 太宗感動遂止狩嘗謂 世宗曰許稠眞宰相也其後 世宗侍宴離宮 太宗以手拄公肩顧謂 世宗曰此予柱石 也公在朝多所補益嘗建議存恤舟師減平安 郡縣田租省畿輔貧民요 役又請置修城之官 先築濱江七鎭城皆見施行公爲人淸愼端重 雖倉卒不失繩墨好學文日誦中庸大學書尤 精於禮自 太廟社稷城隍山川祭祀之事朝 |
76 대하여 감복하였다. 선생)이 예조)때부터 항상 병이 있어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전하께서 허락(지 아나하고 특히 내의를 보내 간호)하게 하였다. 정승이 된 뒤에 또 사면하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또 허락하지 아니하고 명하여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시었다. 그 뒤에 병세가 위독(하게 되자 도승지를 청하여 보내고자 하니 세종께서 슬프게 생각하여 도승지김돈을 가보도록 명하였다. 선생이 좌우에 있는 사람을 다 물리치고 김돈과 나라의 중대사만을 말씀하시고 사사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병세가 더하여져 정침에서 세상을 뜨시니 향년이 칠십일이시다.부음이 대궐에 들리니 세종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슬퍼 조상하시고 조석 때에 수라상에 고기 반찬을 금하고 삼일동안 조회를 받지 아니하였다. 이어서 제수를 하사하여 제사지내어 조상하시고 시호를 문경이라 하였다. 선생이 십칠세에 사마시에 올라 중랑장이 되어 전의에 봉직되었다. 이조에 이르러 태종때에 비로소 이조정랑에 봉직하니 이때에 태종께서 문신명부를 열람하시여 선생의 성명을 보고 “이제 사람을 얻었구나”하시며 벼슬을 내리였다. 77 태종께서 각 군현에 친히 사냥다니며 강무장을 두니 선생이 봉명하고 평안도 산성에 수행하였다가 돌아와 태종께 간하여 말하기를 강무는 비록 폐하지 못할 것이라 하나 전하께서 산하 들을 달리면 맹수가 범할까 두렵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며 지성껏 간하니 태종께서 감동하여 각 고을에 순시하며 사냥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태종께서 세종을 보고 말하기를 허조는 참말 재상다운 재상이로다. 하였고 또 이궁에서 잔치에 배석하였을대 태종께서 손으로 선생의 어깨를 만지며 세종을 보고 말하되 ‘이 사람은 나의 주석이로다.“ 하였다. 선생이 나라에 건의할 때에는 국방에 힘쓰는 육군수군을 불쌍히 여기고 평안도군현의 세금을 감하도록 하고, 가난한 백성과 근로자를 위하는 일에 힘썻고 또 수성관을 두어 먼저 바닷가에 칠진을 쌓도록 하니 이 모든 것이 경윤대로 시행하게 되었다. 선생은 하나에서 열까지 왕도에 근본을 두고 말 소리나 얼굴빛이 변하는 바가 없었다.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국기가 태산같이 안정되었다. 선생은 예의에 밝게 정통하여 종묘 사직성황 산천제사에 대한 일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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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騁賓客蒐狩軍旅館學釋奠養老乞言之制至 士庶人冠昏喪葬鄕射鄕飮之儀一皆考正翕 然合於周官節文獨貢擧猶襲唐制公慨然言 於 世宗請先經術而後詞章作成人材 上 未及改貢擧法而公已卒矣然學者知好經術 而子諒純粹正直高明之士作實由 世宗與 公表章之功也詩曰愷悌君子遐不作人其是 之謂歟公以正統四年冬十有二月壬寅卒明 年春三月庚申有司俱儀衛葬于原平府北向 陽里之原景泰三年配享 世宗廟庭公娶寧
79 海朴氏大司憲經之女生子二人女三人長曰 詡參贊議政府事諡貞簡公次曰訥司醞署令 女長適弼善崔有悰次適平山府使鄭箴次適 正言尹彌堅貞簡公取署令之子慥修撰集賢 殿司醞生三子長曰慥出繼次曰憺進士次曰 惇曾孫以下若干人景源先祖翼成公與公同 時相 世宗爲國元老及旣卒俱配於 廟故 景源慕公之德而不敢忘也今年秋公之後孫 黙以故藝文應敎南秀文所爲文字乞銘于碑 景源再拜不敢辭遂爲之銘銘曰 |
78 조빙빈객군려과학석전국교양로육영에 대한 모든 제도와 공경 사대부 관 혼 상 제에 관한 의식)향사 향음 사상견례에 이르기 까지 의식 절차를 다 고정 하였으며 이것이 모두 주관절문에 부합되었다. 대개 이것이 조정에서 이루어진 사업의 대략이다. 그리고 학문의 연원은 공자의 도학에 근원하여 성리학에 전심하여 우리 유도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밝게 후세에 학자의 길을 열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공중에도 가장큰 공이라 하겠다. 오직 나라에서 사람을 추천받아 쓰는 제도가 중국 당나라 때 제도에 따르고 있어서 선생이 개탄하여 여려번 경술을 먼저하고 사장을 뒤에 하여 인재를 양성하기에 힘쓰도록 간청하였으나 공거법을 고치지 못하고 선생은 세상떳다 그러나 그 후에 명경거사지법 즉 경술을 밝히어 인재를 추천하는 법이 시행케 되어 학자들이 지금도 경술을 숭상하여 어진인재가 많이 났으니 선생의 말씀은 만고불역의 진리를 담은 말이라 하겠다. 시경대아에 이르기를 개제군자 하불작인 점잖은 우리 군자께선 어찌 인재를 고루 등용 않으리요? 하였으니 선생을 두고 한 이름이라 하겠다先生이 세종이십일년 1439 기미십이월이십팔일임인에 세상을 뜨시어 명년 봄 삼월에 유사가 장례식을 갖추어 원평부향양리에 갑좌에 안장하였다. 79 영해박씨대사헌경의 따님을 아내로 삼아 이자)삼녀를 낳으니 장자는 허후인데 참찬 의정부사벼슬을 하고 시호 정간)이며 차자)는 눌이니 벼슬은 사온서령이다.맏따님은 필선최유종에개 시집가고 둥째는 평산부사정잠에게 셋째는 정언윤미견에게 시집갔다. 정간공께서 아들이 없어 아우 서령의 아들을 들이세우니 이름은 조이고 집현전수찬벼슬을 하였다.서령이 사자를 두었으니 장남은 출계하고 차남은 진사담이고 삼남은 돈이고 사남은 강)이며 증손이하는 약간명이다. 경원의 선조 익성공께서 같은 때에 정승이 되어 국가원로가 되었고 작고하신 뒤에는 함께 종묘에 배향되어 있어서 경모하는 마음 간절하던 차에 선생의 후손묵이 고예문응교의 문자를 가지고 와서 나에 글을 청하기에 감히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명기하노라. |
신도비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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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顯允先生旣亮且直率履有繩 型仁有墨 昔在 宣德輔我世宗 正色山立 百官肅雝 世宗 曰咨 修予五禮 制度休明 惟汝是啓 世宗曰 咨 熙予六典 律令寬綽 惟汝是撰 凡百君子 各 專官守 吏安基位 民樂其畝 上下有秩 節文孔 懿 王朝之儀 自公始備 苛政旣除 四方永淸 國步無疆 由刑之平 維時三揚 爲帝保衡 考 其賢能 孰與公爭 公居相府 仍乞骸骨 治成告 老 其志則哲 念余先祖 與公同德 銘公之墓 先 祖是焯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提學世孫 右賓客 黃 京源撰
81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提學 世孫 右賓客 黃 景源撰 |
80 顯允先生(현윤선생) 높으신 선생님이시여 旣亮且直(기량차직) 밝고도 정직 하시 도다. 率履有繩(솔이유승) 성품과 행실에는 규범이 있고 型仁有墨(형인유묵) 어진일은 하시되 법칙이 있도다. 昔在宣德(석재선덕) 예전 선덕(연호)년 간에 輔我世宗(보아세종) 우리 세종임금을 도우실 때다. 正色山立(정색산립) 정색하고 태산같이 움직이지 아니하니 百官肅雝(백관숙옹) 만조백관이 정숙하고 화목하도다. 世宗曰咨(세종왈자) 세종께서 말씀하시되 아! 아름답다 修予五禮(수여오례) 내가 모든 예절을 갖추게 되어. 制度休明(제도휴명) 나라 안의 제도가 밝게 된 것은 惟汝是啓(유여시계) 오직 경의 품계에 따른 것이니라. 世宗曰咨(세종왈자) 세종께서 말씀하시되 아! 아름답다 熙予六典(희여육전) 나에게 법전을 밝히어주어. 律令寬綽(율령관작) 법령이 까다롭지 않고 너그러운 것은 惟汝是撰(유여시찬) 오직경이 이 법을 만든 덕분이니라. 凡百君子(범백군자) 모든 관원들은 各專官守(각전관수) 제각기 맡은바 책임에 전념하고. 吏安基位(이안기위) 벼슬아치는 그 자리에서 안심하고 일하며 民樂其畝(민악기무) 백성들은 생업에 즐기어 사는 도다. 上下有秩(상하유질) 상하가 서로 질서 있고 평화롭게 사니 節文孔懿(절문공의) 제도와 문물이 아름답기만 하도다. 王朝之儀(왕조지의) 왕조의 의범(儀範)이 自公始備(자공시비) 공의 힘으로 비로소 완비 되었도다. 苛政旣除(가정기제) 까다로운 정치는 없어지니 四方永淸(사방영청) 나라 안이 오래도록 밝고 깨끗하도다. 國步無疆(국보무강) 나라 운세가 끝없이 펴지는 것은 由刑之平(유형지평) 행하는 법이 공평하기 때문이다. 維時三揚(유시삼양) 삼차례(三次例)나 큰 이름을 날리어 爲帝保衛(위제보위) 제왕의 재상답기만 하도다. 考其賢能(고기현능) 선생의 어질고 능한 것을 생각하면 執與公爭(집여공쟁) 그 누가 공과 맛서 서 다툴 자가 있을까?. 公居相府(공거상부) 공이 저승자리에 있다가 仍乞骸骨(잉걸해골) 늙어서 사임을 청하다. 治成告老(치성고노) 나라 일을 다 한 뒤에 내 몸 늙음을 고하니 其志則哲(기지칙철) 그 지혜가 깊고 뜻이 명철하도다. 余余先祖(여여선조) 나의 선조 (黃喜황희) 익성공(翼城公)이 與公同德(여공동덕) 공과 같은 때에 덕을 쌓았는데. 銘公之墓(명공지묘) 이에 공의 비명을 쓰니 先祖是焯(선조시작) 나의 선조도 함께 빛나는 도다. 숭정대부행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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