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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
저는 사회생활 은퇴 후 2015년 봄에 계간지 ‘한국문학예술’ 소설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었습니다.
웹 소설 프랫폼인 ‘문피아’에서 필명 ‘맘세하루’로 웹소설 여러 편을 올렸습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여, 2018년에 등재한 제 현대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소설 ‘황제의 꿈’에 나오는 관련 부분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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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세바스토폴 5 (러시아의 만행)
유럽의 가장 오랜 기독교 국가는 ‘아르메니아’이다.
그 이웃의 ‘조지아’도 나라 이름을 로마시대의 기독교 성인 ‘게오르기우스’를 따서 ‘그루지아’라고 지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국가이다.
이 말의 뜻은 조지아 국민들의 심성이 악하지 않고 선하다는 것이다.
조지아 출신의 민족주의자 중에 세계적으로 널리 이름을 날린 사람은 1890년대에 활동했던 ‘이오세브 주가슈발리’라는 낯선 이름의 한 청년이다.
이 청년이 바로 러시아어로 “강철”이라는 뜻을 가진 ‘스탈린’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구 소비에트연방 총리가 되는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가난한 구두공의 셋째로 태어나 형제들 중에 어린 시절 유일하게 살아남은 스탈린은 노래와 시, 문학을 좋아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또한 운동도 좋아해서 비록 키가 작고 왼팔이 오른팔보다 짧은 장애가 있었지만 육체적으로도 건장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길 원하여 가난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보냈다.
스탈린은 조지아의 수도 트리블리시에 있는 신학교를 다니던 중 공산주의 서적들을 접하고 점점 종교와 민족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우선시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볼셰비키파의 지도자로 성장하면서 고향 조지아가 아닌 러시아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스탈린이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있었던 1924년부터 1953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숙청되어 그가 죽은 후에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러시아나 조지아에서는 ‘독일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영웅’이라는 인식이 강해 아직까지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조지아는 ‘조지아 민주공화국’이라는 공식 국명으로 서방 사회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승인 받는다.
그러나 1921년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다시 조지아를 점령하고 볼셰비키 정부를 세우게 된다.
특히 소련이 조지아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자캅카스 연방’에 편입시키려고 하자 볼셰비키 온건파에서 격렬한 저항이 발생했다.
강경파 스탈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지아 민족주의자 10만명 이상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낸다.
(한 때 조지아의 민족주의자였던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과 야욕을 위해 수많은 조지아인들을 숙청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36년에 자캅카스 연방은 해체되고 조지아는 1991년 독립을 할 때까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의 종숙국이 된다.
조지아가 독립한 후에도 조지아 서쪽의 ‘압하지야’는 러시아의 지원으로 분리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조지아 중북부의 ‘남오세티아’도 푸틴이 집권한 러시아가 직접 조지아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이김으로써 러시아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어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조지아는 ‘코카서스’의 이탈리아로 불릴 정도로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특히 조지아는 와인의 최초 발생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듯 흑해 연안에서 8천년전의 포도 씨앗이 발견되기도 했다.
조지아에서 행해진 구 소련과 현 러시아의 침략근성은 크림반도의 ‘우크라이나’에서도 예외 없이 시현되었다.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는 1918년 러시아 내부에 적백내전(볼셰비키당과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여러 연합당파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독립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赤)군 볼셰비키당이 내전에 승리한 후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강제로 합병되고 만다.
그와 함께 스탈린이 사회주의 집단화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의 모든 경작지를 국가소유로 제정하고 농부들을 집단농장의 노동자로 일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농부들은 자신들 소유의 가축까지 도살해가며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결국 소련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자영농들을 대거 탄압하였고, 이로 인해 곡물 생산량이 대규모로 감소되었다.
더욱이 스탈린은 각 집단농장에 높은 목표 생산량을 할당하고 농부들이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생산량을 못 가져가게 하는 법을 제정해버렸다.
경지율이 약 70%나 되는 우크라이나는 땅이 비료가 따로 필요 없는 비옥한 흑토인 ‘체르노젬’으로 이루어져, 옛날부터 세계적인 곡창지대로 유명하다.
겨울밀, 옥수수, 보리, 사탕무, 해바라기, 포도의 재배, 가축 사양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곡창지대 전역이 기근에 처해 수백 만 명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우크라이나 대기근(1932~33년)’이 발생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행정수도였던 ‘하르키우’에는 거리에 아사자의 시체가 시내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는 최소 7백만명에서 최대 1천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스탈린이 고의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발생시켜 많은 사람들을 아사시켰는지,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로 간주해야 할지는 아직도 논의 중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사건을 ‘홀로도모르(Holodomor: 기아로 인한 말살)’로 규정하며 오늘날까지, 특히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의 반(反) 러시아 성향과 강한 민족주의의 주된 동기가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농촌지방이 파괴되면서 전통적으로 농경문화인 우크라이나를 지탱해오던 순수 우크라이나인들이 대거 사라진 이후, 1937~39년경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을 굳건히 한다는 명목으로 당시 우크라이나를 이끌고 있던 공산당원 장관들 및 당원들 약 17만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냈다.
이러한 러시아의 공포정책으로 인해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2차대전 때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으나, 1941년 나치독일은 오히려 유태인들과 함께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을 인종청소의 명목으로 대량 학살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연방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독일군과 추축국이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를 쳐부쉈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고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과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죽이거나 강제추방 하였고,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애기도 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보다도 더 악랄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포함하여 7백만명정도로 추산된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백만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중 4분의 1인 270만명이 우크라이나 계였다.
그러니 2차대전 때 우크라이나인은 민간인 650만명에 군인 270만명, 합계 920만명이 죽은 셈이다.
그래서 1941년~1944년의 우크라이나 국민의 기대수명은 남자 15세, 여자 25세에 그쳤다.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붐으로 1992년에 5,200만명을 넘겼으나 소련붕괴 이후 낮은 출산율과 높은 영아 사망률로 인해 2013년에는 4,547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모두 포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역사적으로 전쟁의 요충지였던 ‘크림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된다.
‘니키타 호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모스크바 차르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할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 간에 더 나쁜 분쟁의 소지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에는 그 유명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사건이 발생한다.
수도 키예프에서 북쪽으로 불과 100Km 거리에 있는 원전의 폭발로 일어난 방사능 누출 사건인데, 60여명이 목숨을 잃고 화재진압과 복구에 동원되었던 20여만명이 방사능에 피폭되었으며, 방사능 낙진이 전 유럽과 아시아 일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입었다.
사고의 원인은 구 소련 당시 채르노빌 발전소의 부소장이던 ‘아나톨리 디아틀로프’가 무모한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원자로 가동이 중단될 때 그 관성으로 전기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 실험을 한 것이다.
비상전력공급을 해결하기 위한 취지의 시험이었지만, 시험을 수행하던 운전원은 원자로의 출력제어에 실패하였고, 급속한 출력변동으로 정상적인 제어범위를 벗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저런 일로 소련의 지배에 반감을 품고 있던 우크라이나는 1991년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직후 혼란 속에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의 15개 공화국 중에 독립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의 창립 회원국이 된다.
그런 과거의 아픈 상처를 씻고 이제 독립국가로 잘 살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북극곰 같은 더러운 러시아는 아직도 우크라이나를 그냥 놔두질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인 1991년 12월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인수한 장비와 병력을 재편성하여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16개 군 관할 구역 중 키예프, 오데사, 트랜스카르파티아 등 3개의 군 관할구를 그대로 인수하였는데, 인수 당시 병력은 78만 명으로 유럽 내 1위였다.
군장비와 무기로는 전차 6천5백대, 전술항공기 1천5백여대, 함정 350척, 대륙간탄도미사일 1천2백여기, 핵탄두 2천5백여개를 인수했다.
그러나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핵탄두는 핵 폐기 합의에 따라 러시아에 이관하거나 해체했다.
우크라이나는 다른 독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변환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높은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 등의 경제침체를 겪게 된다.
그 결과 대규모 군축을 강행하여 우크라이나의 군사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정식 군대인 ‘내무군’ 외에 예비군인 ‘국가방위군’이 있었는데, 2000년 1월에 제2대 대통령인 ‘레오니드 쿠치마’의 ‘비용 절감 운동’의 일환으로 국가방위군은 해체되었다.
그러면서 쿠치마는 군 개혁방안으로 2015년까지 병력을 20% 감축하고 초과 보유하고 있는 무기와 장비도 줄이기로 했다.
그래서 감축된 병력에 맞춰 구 소련에서 인수한 군 장비를 외국에 팔아먹었는데,
1991년의 병력 78만명일 때와 비교하면,
2012년에 병력이 14만명(-64만명)이고 전차 776대(-5천724대), 전술항공기 208대(-1천292대), 함정 26척(-324척)으로 줄어들었다.
그 14만명의 병력도 2015년까지 11만3천명(육군 5만7천, 공군 4만2천, 해군 1만4천명)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다만 ‘전투 의무군’과 ‘특수 작전군’ 등 5천명 규모의 추가 기능부대를 설립하겠다고 했다.
쿠츠마가 임기만료로 물러나면서 2004년 대선은 쿠츠마의 후계자 격인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 간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대선을 두 달 반 남긴 2004년 9월 5일, 유셴코 후보는 우크라이나 보안국의 전 국장, 전 차장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독살을 당할 뻔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다.
혈액에서 다이옥신이 기준치의 1천배가 넘게 나온 유셴코는 멋지고 잘 생긴 간지남의 얼굴이 완전 괴물처럼 변해버렸다.
러시아 측에서 친러파 후보인 야누코비치를 당선시키기 위해 음식에 다이옥신을 집어넣었을 것이란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오렌지 혁명’을 주도했던 유셴코는 다행히 약물중독에서 회복되었고 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5년 1월23일부터 5년간의 임기를 수행하게 된다.
오렌지 혁명은 유셴코의 지지자들에 의한 일종의 정치적 시민저항이다.
중앙선관위가 예비결과에서 야누코비치가 승리한 것처럼 발표하자 2004년 11월~12월에 10일간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선거조작이라며 재투표를 요구한 것이다.
진압경찰에게 꽃을 건네며 오렌지 혁명을 주도했던 여성 ‘율리야 티모센코’를 총리로 지명하고 5년간의 임기를 마친 유셴코는 2010년 1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했으나 러시아를 등에 업은 빅토르 야누코비치에게 패하고 만다.
4대 대통령에 취임한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와의 경제적 무역 이점과 친러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2013년과 2014년에 유럽연합(EU)과의 조약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전역에 EU 통합을 지지하는 ‘유로마이단(Euromaidan)’ 데모가 일어났다.
2013년 11월21일부터 시작된 데모는 경찰의 탄압이 심해지자 시위대가 점점 늘어 수십 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2014년 1월23일에는 서부 우크라이나 주 정부청사 및 지역 의회에 대한 점령 운동이 시작되었다.
2014년 2월18일 키이우에서 2만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여 75명이 죽고 1,100명이 부상당했다.
배후에서 폭력시위를 주도해온 민족주의 성향의 우익 섹터와 스보보다(우크라이나 자유당) 계열의 시위대는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키이우 시내를 장악했다.
이에 놀라 행방불명이 되었던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한 것이 확인되었고, 결국 2014년 2월22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야누코비치를 탄핵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를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친러 성향의 동부는 이를 반대하고 돈바스 지역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곧바로 우크라이나 정부와 전쟁을 시작한다.
러시아 정부는 2월28일 야누코비치의 요청이라며 크림반도에 2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주요 시설을 점거하였고 3월16일 실시된 크림 자치공화국과 세바스토폴 특별시의 러시아 귀속 찬반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는 95%이상의 찬성으로 크림반도는 사실상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과도정부의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대통령 지휘하의 우크라이나는 힘이 약해 크림반도의 러시아군을 몰아내지도 못하고,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반군과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세계는 크게 반발했으나 군사력으로 러시아를 몰아낼 수는 없는 일이라 경제제재로 지금까지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는 독일은 은연중에 러시아에 기울어 있다.
우크라이나에는 이민 나가는 사람도 많고 이민 들어오는 사람도 많다.
1991년~2004년 동안 220만명이 이민을 왔고(주로 구 소련의 우크라이나 계), 250만명이 이민을 떠났다.
전체 인구의 14.7%가 이민자 출신이며 2014년 이후의 혼란으로 백만 단위의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러시아로 이주했다.
총인구의 77.8%가 우크라이나 인이고 러시아인은 17.3%밖에 안 된다.
서부 쪽은 우크라이나어가 사용되고 수도 키예프를 비롯한 중부에는 러시아어가 함께 사용된다.
동부 쪽은 이미 러시아의 속국이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지하 경제 규모가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 GDP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
2018년의 실질 GDP 성장률은 1.5% 수준이며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8.8%이다.
2015년 통계 기준으로 정세불안에 의해 출산율이 1.31로 급락했고, 사망률 천 명당 15.76명으로 세계 2위를 기록했으며, 인구감소가 가장 빠른 나라도 일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우크라이나는 미녀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국기의 절반 위쪽은 푸른 하늘을 나타내는 파란색이고 아래 절반은 밀밭을 상징하는 노란색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심성 고운 농민 출신들의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변해서 알코올중독자가 득실거리는 나라도 아닌 나라로 변해간다는 말인가?
넓은 국토와 천혜의 부존자원을 지닌 부자 나라 러시아면 주변의 약소국가들에게 도움은 못 줄지언정 대국답게 사이 좋게 지내는 모범이라도 보이면 좀 좋겠는가.
이건 넘쳐나는 연어를 질겅질겅 씹어 던져버리고 굳이 맛있는 꿀을 먹어야 되겠다며 나무 속 벌집을 통째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게걸스러운 북극곰을 닮아서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 이제 제대로 천벌을 좀 받아야 할 텐데···
순수한 예술적 심성의 소지자였던 러시아 국민성의 문제가 아니고, 그 시대에 러시아라는 북극곰을 부리는 위정자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지금까지 변방의 조지아 촌놈 흑수저 출신 스탈린이 저지른 악행을 훑어봤다.
그걸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제 쥐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던 빈민가 출신인 푸틴이란 북극곰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더러운 혀를 날름거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우리의 ‘구국대열’ 전사들이 나서서 손 좀 봐줘야 쓰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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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런 과거의 아픈 상처를 씻고 이제 독립국가로 잘 살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북극곰 같은 더러운 러시아는 아직도 우크라이나를 그냥 놔두질 않는다.
맘세하루님의 선견지명
이제 쥐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던 빈민가 출신인 푸틴이란 북극곰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더러운 혀를 날름거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우리의 ‘구국대열’ 전사들이 나서서 손 좀 봐줘야 쓰겄다.
네, 난정 작가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공군을 물리치고 돈바스 이외의 지역은 되찾을 수 있어야 할 텐데요. ㅠㅠ
(흑해에 출정한 우리 '구국 대열' 특전대에게 세바스토폴 항구에 주둔한 러시아 흑해 함대를 공격하랬더니,
어제 순양함 한 척 격침했답니다. ㅎㅎ)
@삼일 이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