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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중생(衆生),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들이여,
저 늪에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 있다.
어떤 것은 물 위에, 어떤 것은 물속에 피어 있다.
그러나 물밑은, 진흙으로 더러워져 있을 것이다.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중생이여, 비구, 비구니들이여,
그대들의 육체도, 저 연꽃과 같다 할 것이다.
눈을 보라, 피로할 때나, 눈병이 나면, 눈꼽이 나올 것이다.
코딱지, 귀지, 땀, 대소변, 한 가지도 깨끗한 것은 나오지 않듯이,
육체는 흡사 진흙의 늪과 같은 것이다.
이 진흙의 늪과 같은 육체에 집착을 가지고 괴로움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육체가 진흙탕처럼 더럽더라도,
마음이 “법”을 깨닫고, 그 법에 따라 생활한다면,
저 연꽃처럼 아름답게,
대자연 속에서 조화되어 마음속은 평안하여,
신(神)의 마음과 조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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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설법한 것이, 법화경의 근본이 되었다.
이것을, 법화경이라고 해서, 중국류로 철학화된 것을,
2,500년 전의 인도의 중생에게 설법해서 이해되었을까.
아마도 이해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知)가 앞서고, 학문화되어 있어,
생활 속에서 살리기가 어렵다.
도대체 대승(大乘)이니 소승(小乘)이니, 원시불교(原始佛敎)니, 하는 자체가 이상하다.
⟨‘법(法)’⟩이란, 신(神)의 마음이며,
신리(神理)는 지금도 옛날도, 또 미래에도 변함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자연의 법칙,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법(法)이다.
대자연은, 또 대신전(大神殿)이고, 신(神)의 신체(身體)이다.
하찮은 것도 믿기 나름이라고 하는데, 신심 신앙이란 그런 것에는 없다.
‘무엇인가에 의지한다.’ ‘대상을 구한다.’
이것은 인간의 약함이며.
인간의 마음이 물질로밖에 보이지 않고,
우주 전체를 꿰뚫고 있는 영원한 생명,
빛과 그림자를 초월한 곳의 혼의 유구성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대지는, 신의 신전이며,
내 마음도 신불(神佛)을 품는, 대신전이기 때문이다.
(주; 법화경에 대해서 설명을 들어보니,
다시 한번, 부처님의 멋들어진 설법, 독화살의 비유가 생각난다.
알아야 할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혜...
전기.. 댐에서 발전기로 만들어진 전기가,
전선을 타고, 변전소로, 다시 전선을 타고,
가정으로, 스윗치를 올려서, 전등에 불이 번쩍, 켜진다..
여기 전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하지만, 밝은 전기의 고마움을 잊지 말고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고맙게 쓰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안이비설신, 색수상행식.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구나.
하지만 금생의 수행을 도와주는 고마운 육신에 대해서,
육신의 주인으로서,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고맙게 쓰라는 가르침...
그리고, 진흙 속에는 순한 것과. 독한 것이 섞여 있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이 빛과 어둠이 섞여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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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선(善)을 좋아하면 선(善)을 하게 하여 주시고,
그 댓가를 받게 하셨다.
악(惡)을 좋아하면 악(惡)을 하게 하여 주시고,
그 댓가를 받게 하셨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연꽃의 비유로 가르쳐 주셨다.
연못속에서 좋은 성분을 취하면,
그 결과는 향기좋은 연꽃을 피우고,
나쁜 성분을 취하면
그 결과는 악취나는 연꽃을 피운다고,
그리고 그 방법을 팔정도로 가르쳐 주셨다.
부드럽고 자비로운 말을 하면,
마음은 평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보내게 되고,
거칠고 난폭한 말을 하면,
마음은 불안하고, 불행한 인생을 보내게 된다고, , , , , ,
6. 정글에서 보는 자연의 섭리 ( = 마음의 눈으로 보는 정견)
이 지상계는, 인간 이외에도 많은 혼이 수행(修行)하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수행장(修行場)이다.
동물도, 식물도, 이 지상에서 혼(魂)을 닦고 있다.
여기서 잠깐, 동물과 식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동물의 종류는, 곤충을 포함해서,
그 수가 몇천, 몇만에 달하여, 다종다양(多種多樣)이다.
미발견의 동물(곤충을 포함)도 아직 많이 있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박테리아를 먹고 있는 벌레, 그 벌레를 먹고 있는 곤충,
다시 그 곤충을 잡아먹는 보다더 큰 동물,
이라고 하는 구조로. 큰 동물은 작은 동물을,
강한 것은 약한 것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 것이 그들의 세계이다.
동물의 세계를 밖에서 바라보면,
거기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지며,
애처로운, 생물의 숙명을 느끼게 한다.
자연에 대해서, 분노(憤怒)마저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동물들의 생태 그 자체는,
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게 되어있어,
거기에는 모순도 당착(撞着)도 없다.
백수(百獸)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는 말 그대로, 대적할 상대가 없다.
사자를 눕힐 상대가 없으므로 왕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길 상대가 없으면 지상은 사자로 메워질 것이다.
그런데 사자의 수는 조금도 늘지 않는다.
늘지 않는 이유는, 먹이(다른 동물)의 숫자에 의해 제약되고,
또한 비례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자의 먹이가 되는 동물의 수도 조금도 줄지 않도록 되어있다.
가령, 사자에게 먹히는 동물의 수가 백 마리 있다고 하면,
그것을 먹는 사자의 수는, 그것에 비례하는 범위 안에서,
그들이 존속을 계속하는 수(數)만이 살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 하면, 자연이 그들을 감시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의 습격도 받지 않고 성장한 사자는,
분명 왕자이고 우아하며 특권 계급의 레텔을 붙여도 좋을 것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불공평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굶주림이라고 하는 고통이 주어져 있다.
그들은 먹이를 잡는 일에 몹시 고생한다.
때로는 몇십 일이나 굶주림과의 싸움을 강요당할 때도 있다.
기진맥진해서야, 겨우 먹이가 얻어걸린다.
이것은 비단 사자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식동물의 이른바 숙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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