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 (論語集注) - 1 - 학이(學而) -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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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子夏曰 賢賢하되 易色하며 事父母하되 能竭其力하며 事君하되 能致其身하며 與朋友交하되 言而有信이면 雖曰未學이라도 吾必謂之學矣라 하니라 자하가 말하길,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하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서 하며, 부모를 섬김에 그 힘을 다 할 수 있고, 임금을 섬김에 그 몸을 바칠 수 있으며, 벗과 더불어 사귐에 말에 신의가 있다면, 비록 (그가) 미처 배우지 않았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일컬어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고 하였다.
子夏, 孔子弟子, 姓卜, 名商. 賢人之賢, 而易其好色之心, 好善有誠也. 致, 猶委也. 委致其身, 謂不有其身也. 四者皆人倫之大者, 而行之必盡其誠, 學求如是而已. 故子夏言有能如是之人, 苟非生質之美, 必其務學之至. 雖或以爲未嘗爲學, 我必謂之已學也. 자하는 공자님의 제자로서 성은 복이고 이름은 상이다. 남의 어진 점을 어질다 여기되, 그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으로써 하면, 선을 좋아함에 정성이 있게 된다. 致는 맡긴다는 말이다. 그 몸을 맡겨서 내던진다는 것은 자신이 그 몸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4가지 모두 인륜의 대사이지만, 그것을 행함에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해야 하니, 배울 적에 추구함이 이와 같을 따름이다. 그래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만약 타고난 바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반드시 배움에 힘쓴 지극함 때문일 것이니, 비록 누군가 아직 학문을 하지 못하였다고 여길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일컬어 이미 학문을 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자하가 말하였다.
問伊川云 見賢而變易顔色 集註何故取范氏好色之說 朱子曰 孔子兩言 未見好德如好色 中庸亦以遠色爲勸賢之事 已分曉了 變易顔色有僞爲之者 不若易好色之心 方見其誠也 故范氏說爲長 누군가 묻기를, “정이천이 이르길, 어진 이를 보고서 안색을 바꾼다고 하였는데, 집주에서는 무슨 이유로 범씨의 好色之說을 취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공자께서 덕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고 2번 말하였고, 중용에서도 또한 여색 멀리하기를 어진 일이라 권장함의 일로 삼은 것을 이미 분명히 알고 있다. 안색을 바꾸는 것에는 거짓으로(억지로) 하는 것이 있으니,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꾸면 바야흐로 그 정성을 알 수 있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범씨의 설이 더 나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不有其身 是不爲己之私計也 주자가 말하길, “不有其身이란 자신을 위하여 사사로이 따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賢賢亦朋友之倫也 尊賢取友 雖均屬朋友之倫而賢賢爲重 集註以四者言之 人倫莫重於君親 此以賢賢居先者 以好善有誠方能行下三者也 中庸九經 以尊賢先親親亦此意 쌍봉요씨가 말하길, “어진 사람을 어질게 대하는 것 역시 붕우의 윤리다. 어진 사람을 높이고 벗을 취하는 것은 비록 모두 붕우의 윤리에 속하지만, 어진 사람을 어질게 대하는 것이 더 중한 것이다. 집주에서는 4가지로 말하였는데, 인륜 중에서 임금과 부모보다 중한 것은 없지만, 여기에서 어진 사람을 어질게 대하는 것을 제일 앞에 둔 것은 善을 좋아함에 정성이 있어야만 비로소 아래 3가지 것도 능해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용의 9경에서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을 부모를 친애하는 것보다 앞에 둔 것도 역시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易色是誠於好賢 竭力是誠於事親 致身是誠於事君 言信是誠於交友 신안진씨가 말하길, “안색을 바꾸는 것은 어진 사람을 좋아함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고, 힘을 다하는 것은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며, 몸을 바치는 것은 임금을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고, 말에 신의가 있는 것은 벗을 사귐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朱子曰 人固有資稟自好不待學而自能盡此數者 然使其爲學 則亦不過學此數者耳 故曰 人雖以爲未學而吾必以爲已學也 주자가 말하길, “사람 중에는 본래 타고난 자질이 저절로 좋아서 배우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저절로 이 몇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배우도록 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이 몇 가지를 배우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래서 말하길, 남들이 비록 미처 배우지 못했다고 여길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미 배운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雖使未學 所行固學者之事也 남헌장씨가 말하길, “비록 설사 아직 배우지 못했더라도, 행하는 바는 원래부터 배웠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 游氏曰: “三代之學, 皆所以明人倫也. 能是四者, 則於人倫厚矣. 學之爲道, 何以加此. 子夏以文學名, 而其言如此, 則古人之所謂學者可知矣. 故「學而」一篇, 大抵皆在於務本.” 유씨가 말하길, “3대(하은주)의 학문은 (그 목적이)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인륜에 두터울 것이다. 배움이 도가 되려면, 무엇을 여기에 더해야 하겠는가? 자하는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는데도, 그 말이 이와 같으니, 옛사람이 말한 이른바 배움이라는 것을 가히 알 만하다. 그런 까닭에 학이 편은 대저 모두 근본에 힘쓰는 것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可見子夏之文學 非事文藝之末而重躬行之本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자하의 문학은 문예의 말단을 일삼은 것이 아니라 몸소 실행하는 근본을 중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
3 | 吳氏曰: “子夏之言, 其意善矣. 然辭氣之間, 抑揚太過, 其流之弊, 將或至於廢學. 必若上章夫子之言, 然後爲無弊也.” 오씨가 말하길, “자하의 말은 그 뜻이 훌륭하다. 그러나 말의 기운 사이에 누르고 올림이 너무 지나쳐 그 말류의 폐단이 장차 혹시 학문을 그만두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반드시 윗 장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과 같이 한 연후에야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子夏此言 被他說殺了 與子路何必讀書之說同 其流弊 皆至於廢學 若行有餘力則以學文 就正有道 可謂好學之類 方爲聖人之言 주자가 말하길, “자하의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 상쇄되었다. 자로가 한 ‘하필이면 책을 읽은 후에 벼슬을 해야 하느냐?’는 말과 더불어 같으니, 그 流弊는 모두 배움을 그만두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행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운다는 경우라면, 바로 도가 있는 것에 나아갔으니, 가히 배움을 좋아하는 부류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비로소 성인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天下之理 有大小本末 皆天理之不可無者 故學者之務 有緩急先後而不可以偏廢 但不可使末勝本 緩先急耳 觀聖人所謂行有餘力則以學文者 其語意正如此 若子夏之論 則矯枉過其正耳 천하의 이치에는 크고 작음이나 근본과 말단이 있으니, 모두 天理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힘써야 할 바에는 천천히 하고 급하게 하며 앞세우고 뒤로 할 것이 있지만, 어느 한쪽을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말단이 근본을 이기게 하거나 늦게 할 것을 급히 할 것보다 먼저 하게 하지 않도록 할 따름이다. 성인께서 하신 이른바 ‘행하고도 여력이 있거든 글을 배운다’는 말씀을 살펴보면, 그 말의 뜻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자하가 논한 것의 경우라면, 즉 굽은 것을 고치려다가 그 올바른 정도를 오히려 지나쳐간 것일 따름이다.
問夫子言 則以學文 子夏言 吾必謂之學矣兩章 曰 聖人之言 有本及末 先後有序 其言平正 無險絶之意 子夏則 其言傾側而不平正 險絶而不和 易狹隘而不廣大 故未免有弊 然子夏之意 欲人務本 不可謂之不是 但以夫子之言比之 則見其偏之若此也 누군가 공자님께서 여력이 있거든 글을 배우라고 말씀하신 장과 자하가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고 말한 장 등 이 2장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말하길, “성인의 말씀은 근본과 말단이 있고 선후에 순서가 있으며, 그 말씀은 평이하고 올바르니, 기울어지고 끊기는 뜻이 없다. 자하의 경우에, 그 말은 기울어져 있되 평이하고 올바르지 않으며, 기울어지고 끊기며 온화하지 않고, 좁아지기 쉽고 광대하지 않다. 그러므로 폐단이 있음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하의 뜻은 사람들이 근본에 힘쓰는 것을 바란 것이므로, 그것을 일컬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공자님의 말씀으로 비교해보면, 그 치우침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以未學爲生質之美者 人固有得氣質之淸粹而所爲與理暗合 然質之美有限而學之益無窮 故吳氏又慮其抑揚之有偏也 호씨가 말하길,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타고난 자질이 좋다고 생각한 것은, 사람에게 본래부터 기질을 얻음이 맑고 순수하여 행하는 바가 이치와 저절로 부합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질이 좋은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배움을 더하는 것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오씨는 또한 그 抑揚에 치우침이 있음을 염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子夏此語 與曾子三省 是皆心存乎誠 求造其極者也 然子夏務實行而抑文學 曾子務實行而兼傳習 則曾子之用功愈密而用心愈弘 是則子夏之所不能及矣 면재황씨가 말하길, “자하가 여기에서 한 말은 증자의 三省과 더불어 모두 誠에 마음을 보전하는 것이자, 그 지극함에 나아가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하는 실행에 힘을 쓰되 문학을 억눌렀고, 증자는 실행에 힘을 쓰면서도 전수받은 것을 익힘을 겸하였으니, 증자가 공력을 들인 것이 더욱 엄밀하면서, 마음을 쓴 것도 더욱 넓었다. 이 점이 바로 자하가 미칠 수 없었던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 桓玄詣殷荊州, 殷在妾房晝眠, 左右辭不之通. 桓後言及此事, 殷云: “初不眠. 縱有此, 豈不以‘賢賢易色’也?” 환현은 殷을 찾아 형주에 갔다(詣). 殷은 첩의 방안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좌우 시종들에게 말을 넣었으나 통하지 못하였다. 환이 나중에 이 일을 언급하자, 은이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잠들지 않았네. 설령 잠든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어진 이를 대우함에 여색 좋아하는 마음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