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리 여지당과 벼락수골
주류역사는 승자인 지배자의 기록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의 자기중심성이 반영되어 지배자의 입장에서 지배자의 세계관을 보급하고 지배자의 지배행위를 합리화한다. 이에 반해 피지배자인 민중은 역사 대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즉 구비설화의 형식을 통해 민중의 세계관과 애환을 투영하곤 한다. 때문에 지배의 역사이데올로기와 대립된 지역민중 특유의 사유와 행동방식을 구비문화의 흔적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교육과 산업화의 영향으로 민중고유의 구비전승 문화가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 근대화를 통해 민중은 스스로를 타자화 하고 전면적으로 지배문화의 일부로 편입되어 살게 되었다. 학교와 책,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을 통해 민중은 지배담론을 흡수한 채 원자화된 개인이자 국민으로 생산되고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 없는 사람과 뭇 생명의 다양한 목소리가 가지는 가치는 크다. 왜냐하면 참된 풍요와 행복, 그리고 지속가능성은 다양성과 상호적 관계를 바탕으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몇 줄 남겨진 사료와 채록물을 바탕으로 민중 삶의 진실을 유추하고 추척하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오래된 미래로서 여전히 이 땅의 자연과 교섭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방식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생성형 AI 시대를 맞아 지식의 지배와 권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실제의 삶 영역이 화소 단위의 정보로 환원되거나 삭제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날 것이고, 민주주의의 위기도 심화될 것이다. 우리가 언어, 즉 말을 가지고 소유한 자들이 아니라, 말을 가지지 못한 민중과 생명 그리고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도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다. 그것이 인권과 생명권, 나아가 존재권을 수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상호 존재성을 회복할 때만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강진읍, 지금의 사의재가 있는 동성리의 동문마을 북쪽에는 향교가 있는 교촌과 목화마을이 있다. 목화마을이 있는 보은산 자락 큰 벼락수와 작은 벼락수라는 두 계곡이 만난 곳에 지금은 사라진 여지당이 있었다고 한다. 여지당에서는 1960년대까지 벼락수 두 골짜기와 여지당에 관한전설이 내려온다. 큰 벼락수와 작은 벼락수에서 죽은 여러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제사를 매년 음력 2월 1일 지낸다는 것이다. 골짜기에 떨어진 벼락에 억울하게 죽은 생명들을 위한 제사는 퍽 낯선 이야기다. 관심이 갔다.
『강진군 마을사-강진읍편』을 보니 여지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개가 나온다.
‘과거 향교에 출입하던 사람들이 음력 2월 1일에 서성리 탑동 사직골에 있는 사직단에서 제를 지내고 난 후, 본 마을 여지당에서 제를 지냈으며, 이후 향교에서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향교에서 출입하던 사람들이 제를 지내지 않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제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여제(厲祭)는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여귀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제사를 받을 수 없는 무사귀신(無祀鬼神) 또는 무적귀신(無籍鬼神)을 말한다. 이들 무사귀신은 사람에게 붙어 탈이 나기 때문에 이를 제사지냄으로써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여지당의 유래다.
조선초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厲壇 在縣北’ 다섯 글자가 나온다. 즉 여제를 지낸 여단은 강진현의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여지당을 일컫는 말 같다.
그러므로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여지당은 여제단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귀를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려(癘)’의 뜻은 창질, 염병, 문둥병 등의 유행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향교의 기능이 점차 소멸되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마을에서 제를 이어받아 제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역병으로 죽은 귀신을 위한 여제가 마을 전설과 만나 벼락을 맞아 억울하게 죽은 뭇 생명들을 위한 여제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유추의 배경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보은산 자락인 동성리 북쪽 계곡엔 묘지가 많아 지금도 곳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당연히 역병 등으로 인한 다양한 희생자들도 묻혔을 것이다. 동학혁명과 6.25를 겪으며 실제로 강진지역에서도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묘지가 많다는 것은 역시 지역민에게 꺼림직 하고 부담스런 일이다. 보은산은 읍민에게 북망산에 해당한다. 실제로 고읍의 산야엔 이렇게 만들어진 공동묘지들이 있는 곳이 많다.
둘째 목화마을에서 보은산의 두 골짜기가 만나는데 바로 큰 벼락수와 작은 벼락수라는 골짜기다. 벼락수는 아무래도 비가 많이 올 때 물이 갑자기 불어 쏟아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실제로 비가 많이 오면 큰물이 흘러 마을 도로가 유실되곤 했다고 한다. 산의 사태와 낙토가 흘렀고, 마을의 토양도 사질토라 농사가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나무를 때 산이 헐벗고 묘까지 썼으니 비가 내리면 큰물이 지고 사태 지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골짜기 이름을 큰 벼락수, 작은 벼락수라 지었겠는가? 이런 문제적 현실에 기대어 살았을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의 발명이 더해진다. 이야기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인간적인 발명이며 방편이기도 하다.
『강진군 마을사-강진읍편』에 소개된 이야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형제와 벼락수골
본 마을 뒤에 벼(배)락수골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옛날 천국에서 형제가 죄를 짓고 쫓겨내려와 이 골짜기에서 각각 집을 지어 살았다. 그런데 여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칼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하늘의 노여움으로 벼락이 떨어져 두 형제가 죽었는데 그 자리에는 죽은 뱀 두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마을 뒤 여지당에서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당시 벼락으로 죽은 많은 각종 짐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두 형제가 죽은 자리는 이후 벼락수골이라 불려오는데 비만 오면 사태나 낙토로 인하여 황토물이 쏟아져 내려온다고 한다.‘
‘벼락수골’의 지명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예부터 벼락은 비도덕적인 사람에게 하늘이 내리는 천벌로 여겨졌다. 여기서는 한 여성을 놓고 싸우는 형제에 대한 심판으로 벼락이 내려진다. 그런데 벼락을 맞아 죽은 두 형제가 뱀 두 마리로 남았다. 뱀은 물론 이드, 무의식적 욕망이며, 자연을 상징한다. 하늘은 슈퍼에고의 도덕이고, 벼락은 에고인 이성의 절제를 의미한다. 그래도 죽음은 너무 가혹하다. 살아남은 자들의 마을에 그늘을 드리운다. 죽은 자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화해의 장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제사다.
이렇게 해서 벼락수골 전설이 여제의 제사와 만나게 되었다.
여제의 제사는 두 가지 심적 갈등을 해결해준다.
염병과 벼락은 하늘의 심판으로 느껴진다. 비록 하늘의 심판이라 하지만 책임을 개인화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염병도 벼락도 사회적인 면을 안고 있다. 염병은 빈부격차와 관련이 없을 수 없고, 천벌이라는 벼락도 도덕적 처벌이기에 사회적이다. 고통받으며 죽은 개인은 이래도저래도 억울하다. 원한과 책임이 남는다.
제사는 사회적 방식의 의례다. 죽은 자와의 소통을 통해 죽은 자를 위로하고, 산 자들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한다. 그렇게 해서 존재는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제사의 공동체적 기능이다.
타자인 사람의 억울한 죽음에서 비롯된 제사가 뱀으로 상징되는 짐승의 억울한 죽음으로 치환이 여지당에서는 일어난다. 여지당 여제를 통해 제사의 기능과 의미가 토착화 되고 확장하게 된 것이다.
지역민은 여제에 지역전설을 결합해 확장하면서 현실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 교훈과 더불어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되살린다. 이를 통해 지역민은 균형감을 회복한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과 억울하게 죽은 동물을 위로하고 균형을 회복하려는 생태적 사고와 마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주변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없고, 억울하게 죽은 동식물이 없을까? 세계 곳곳에 야만의 전쟁이 지속하고 있고, 인간세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희생자들은 목소리를 빼앗긴 채 사라진다. 목소리 없는 혹은 목소리를 빼앗긴 존재들에게 제를 지내 대화하고 삶에 연결해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것이 제사다. 제사를 통해 민중은 기억하고 균형과 조화를 위한 책임을 확인한다.
마을에서는 오염방지와 지역의 공동묘지화에 반대하여 ‘마을 뒷산에 묘지를 설치할 수 없음’이라는 공고문을 붙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