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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신춘문예 당선작
동아일보
묘목원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2002년 경기 수원시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재학
<심사평>
‘체험의 일단’을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 뛰어나
올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생활감상문과 같은 시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시는 생활에서 나온다. 소재를 취하고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도 시의 중요한 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변용과 깊은 사유의 맛이 결여된 감상은 넋두리와 소품에 그칠 뿐이다. 구성이 승했던 때에 작위가 문제였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진술은 절제와 엄밀함을 통해 독자에게 호소하는 시적 문장의 힘을 아쉬워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현대시와 관련한 고전적인 경구를 떠올리며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었음을 덧붙여 본다.
‘히에로글리프’는 미술관에서의 감상을 시공을 넘나드는 사유로 확장시킨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후반부 이후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템플 스테이’는 일상에서 길어온 잔잔한 사유가 매력적이지만 마지막 대목에 있는 다소 이질적인 논평자적 마무리가 사족이 되고 말았다.
‘묘목원’에 대한 숙고가 있었다.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고려함과 동시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는 한 작품을 내밀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다. 그 결과, 심사위원들은 과장과 작위가 없이 단정한 문장을 통해 체험의 일단을 문제적인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을 믿어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건에서 중층적인 의미가 배어나게 하는 시적 구성도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일보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이예진
△1998년 경기 하남시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심사평>
"담담하게 펼친 일상의 세목들로, 가계·욕망·폭력의 민낯을 기록하다"
새로운 시인의 작품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면 으레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의심의 방향은 작품과 시인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스스로를 향한다. 이제껏 내가 시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추궁하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안도를 바라는 일은 아니다. 늘 내가 가진 관점이 보기 좋게 깨지기를, 그리하여 아프게 갱신되기를 원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함께 쓰는 이가 아니라 함께 읽는 이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심사에 임하는 위원 모두가 이러한 마음이었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외 4편을 투고한 이예진 씨를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로 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선명하고 정직하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어느새 의무도 당위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시인은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그러모아 큰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불필요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세목들을 담담하게 펼쳐내면서도 그 안에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
시인이 창출해내는 이미지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유와 관념을 단단히 비끄러매면서도 일순간 낯선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사유와 언어, 서사와 이미지 사이를 마음껏 횡보하며 시작(詩作)해주기를 당선자께 바란다. 진정한 문학적 자유로움과 균형감이란 조심스레 살피며 걷는 일이 아닌 어떤 극단까지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시와 문학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순하게 응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하는 일에만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며 여전히 읽고 쓰는 일만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낙선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와 살아낼 시간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도 함께.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될까.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어야 할까. 그러면서도 어떤 온전한 미감에 깨어지지 않을 삶을 기대야 하겠지. ‘신춘문예’. 계절만 벌써 새봄이다.
심사위원 이수명, 김민정, 박준(대표 집필)
조선일보
멜로 영화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심사평>
당선자가 시집을 낸다면 누구보다 먼저 살 것이다
장석주 시인, 김기택 시인
최종심에 오른 열세 분의 작품들이 취업 절벽, 사회 양극화, 저출산, 이주 노동, 기후 재난 같은 사회의 현안을 제치고 기분에 쏠린 현상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기분이란 미시적 영역에 천착한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이번 신춘문예의 공동 주제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품을 지경이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의 메아리이고, 생의 사소한 기미를 머금은 감정 생활의 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기분을 배제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 쏠림은 다소 염려스럽다. 이것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오늘의 비정한 세태를 반영한 징후이고, 자기애의 과잉 때문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탓이다.
그렇다면 이 사소한 감정의 굴곡인 기분이 어떻게 시의 모티브가 되는가를 눈여겨볼 수밖에. 먼저 경험과 이미지 사이 표면 장력이 작동하는 힘이 느슨한 시, 얕은 경험과 조각난 이미지의 흩어짐으로 끝나는 시, 감각적 명증성을 견인하는 데 실패한 시를 걸러냈다. 최종으로 남은 ‘멜로 영화’ 외, ‘손자국’ 외, ‘연안’ 외 등등은 좋은 시는 “운명을 동봉한 선물”(파울 첼란)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생의 변곡점일 수 있는 순간을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시적 명증성을 붙잡은 한 응모자의 ‘멜로 영화’ ‘홈커밍데이’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들은 범속한 생활 감정을 의미가 분광하는 이미지로 빚어낼 뿐만 아니라, 자연스 언어 감각과 섬세한 느낌의 표현은 시의 풍부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되었다. 숙고와 머뭇거림에서 길어낸 사유를 자기의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능력, 능숙한 악기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듯이 시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귀한 재능이다. 이 응모자가 첫 시집을 낸다면 서점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집을 구입해 읽고 싶다는 게 우리 속마음이다. 당선 문턱에서 멈춘 두 예비 시인께도 아낌 없는 박수를 드린다.
서울신문
볼트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심사평>
코끼리와 사회의 연결, 그 상상력과 호흡에 감탄
“한 명.” 신춘문예는 한 명을 찾는 일이다. 인파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년보다 응모작이 많은 데다가 수준 또한 높아서 심사장은 후끈후끈했다. 한 명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93명이 응모한 3001편의 시들을 집중하며 읽었다. 팬데믹의 여파가 경기 침체, 청년 실업 등의 양상으로 응모작에 나타났다. 삶의 피로와 미래에 대한 비관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기후 위기를 염려하는 시도 눈에 띄었다.
본심에 올라온 세 명의 응모자는 개성으로 빛났다. 개와 오리와 코끼리 등 동물이 시를 이끄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여름의 잠’(외 2편)을 보낸 응모자는 정적인 장면을 상상으로 부풀리는 데 거침없었다. 상상이 끝나고 질문이 바닥나도 여운은 오랫동안 현장에 머무를 수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 주었다. ‘문에 기대지 마시오’(외 2편)를 쓴 응모자는 예사로운 풍경에서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능했다. 골목길과 지하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복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만히 설득해 냈다.
토론 끝에 ‘볼트’ 외 2편을 응모한 임후성을 그 ‘한 명’으로 결정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나아가되 주변의 작은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응모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신해욱•오은•정끝별
문화일보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김혜린
1995년 서울 출생. 숭실대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심사평>
‘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문태준·박형준
매일신문
박스에 든 사람
박장
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여져 있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준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택배는 내가 받고 내역서는 그가 받는다. 방금 도착한 복숭아가 물러 있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반품이라 쓴다. 뽁뽁이로 싸맨다. 구겨, 몸을 넣는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아이스팩을 끼운다. 뚜껑을 닫는다.
칼로 뜯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나는 나를 열고 나온다. 뜯긴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팔과 다리의 얼룩을 눌러본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 상자를 열고 다시 몸을 넣다가,
그를 주문한다.
[심사평]
시적 상황을 다층적 구성…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 포착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되었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평이한 감각에 머물거나 시적 긴장을 견인하는 힘이 부족한 작품들이 일차적으로 걸러졌다.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내면의 감정을 응축한 절제의 미학과 시어의 갱신을 이루어낸 작품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재독과 윤독을 거쳐 5편으로 압축한 뒤 다시 3분의 작품을 두고 최종적으로 깊은 논의를 거쳤다.
박이음의 시는 세련된 형식과 새로운 화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관계의 어려움과 현실의 불안을 포착하는 감각이 돋보였다. 툭툭 끊기는 질문과 대화들 속에는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이 담겨 있었다. 내밀한 고백과 연계된 낯선 이미지가 감정의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시적 대상의 관계와 상황의 맥락이 잘 잡혀 있지 않아 시적 주체의 사유와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감각적인 언어 구사와 주제에 따라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능력도 좋고, 시의 도입부를 도발적인 진술이나 감각적인 묘사로 제시하여 흡인력 또한 있었으나, 환상적인 상황 설정이 혼돈스러운 시적 전개와 맞물려 의미를 잡기 어려웠고 흐릿한 환상으로 처리된 종결부에서 오히려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면이 아쉬웠다.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편차가 있다는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박선민의 시는 새로운 발견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중심에서 이탈되거나 인식의 '외곽'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낯선 사유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또한 정해진 중심과 질서가 포섭하지 않는/ 못하는 주변의 것들, 중간과 평균으로 재단된 것들 너머를 지향하는 이미지들이 교직되면서 주제로 응집되어 시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상상력의 폭이 예상된 범위 안에 머물러 있고, 관념적인 진술이 사유의 깊이를 동반하지 못하거나 체험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동어반복에 그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투고된 작품들이 엇비슷한 시적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목소리도 일정해 단조로운 인상을 받았다. 시적 대상과 현실의 고통이 맞닿는 자리를 섬세하게 잇대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박장(본명 박미영)의 시는 언어의 내포와 외연의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려 역전된 현실에 대한 감각으로 밀고 가는 힘이 있었다. 시적 상황을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형식적 실험과 세계 내의 상징적 폭력에 따른 고통이 핍진하게 담겨 있었다. 일상적 상황과 사건을 시적 소재로 삼으면서 시적 상상이 현실과 떨어지지 않는 접착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행한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형상화해내는 것도 장점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박스에 든 사람'은 자본주의의 상품 체계에 종속된 삶, 비굴하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존재가 지워지는 현실이 아버지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삶의 힘겨움과 겹쳐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간명한 상황 전개가 주는 시적 긴장, 안과 밖을 역전시키는 상상력, 언어의 굴곡과 뒤틀림을 통해 찢어지고 뜯어지고 구겨진 삶의 맨살이 드러난다. 주문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파악,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지워진 삶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이 신인의 단단한 내공이 앞날의 시작(詩作)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문태준(시인), 손진은(시인), 신철규(시인)
강원일보
귤이 웃는다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심사평]
시부문 심사위원 이문재, 이홍섭 시인
올해는 응모작의 편수도 역대급이었고.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 또한 그 어느 해보다 많았다. 특히, 오랜 수련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윤계순의 「계량」, 서희의 「침전의 방식」, 원미소의 「원룸」, 김송리의 「카블」,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 등이었다. 「계량」은 폐지 트럭의 무게를 재는 계량에 대한 묘사를 통해 삶의 고단함과 “헐값의 부피”를 그려낸 작품으로, 리얼한 현장성과 빈틈없는 직조 능력이 돋보였다. 「침전의 방식」은 감자 전분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평생 고름 쏟던 마음을 치마폭에 담아/ 어레미로 감자 전분 내리던 어머니”와 가계를 그려낸 작품으로, 제목처럼 잘 ‘침전’된 비유가 빛을 발했다. 「원룸」은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 있는 원룸”에서의 일상을 묘사하면서 관계와 외로움을 그려낸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젊은 감각이 돋보였다. 「카블」은 제목 그대로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카블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전쟁의 상처와 전장 같은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숨가쁜 리듬과 강렬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최종에 오른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과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 잘 짜인 작품이 주는 익숙함 때문에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감소시키는 면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는 무엇보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과 전개가 돋보였다. 이러한 활달함 속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나”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등의 구절을 뽑아내는 힘이 있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장점들이 풍요롭게 펼쳐지고 있어 최종에 오른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날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설렘이 이어질 수 있도록 당선자의 정진을 빈다.
경향신문
버터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심사평
기후위기•참사•불안… 시대의 문제를 관통한 감정들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시의 무력함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용하고 무력한 자리를 지켜온 까닭에 존재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시가 절실하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부문 응모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섬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응모작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서 모종의 감정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애도의 문제, 청년세대의 불안,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 등을 그린 시가 비교적 자주 눈에 띄었다.
응모작 중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 네 명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의 장에 올라온 시는 사이의 ‘매트릭스(Matrix)’ 외 4편, 한백양의 ‘피카레스크’ 외 4편, 이자연의 ‘물과 풀과 건축의 시’ 외 4편, 박선민의 ‘버터’ 외 4편이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며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들이었다. 사이의 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신뢰가 가고 무심한 세계에 상처 입은 주체가 던지는 발화가 매력적이었지만 아포리즘을 조금 줄여본다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백양의 시는 사람들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적 주체가 포착하는 세계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취하는 주체의 태도를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눈길을 끌었지만 자기 고백적인 말이 흘러넘치는 시들은 여백이 필요해 보였다. 이자연의 시는 나무와 풀과 건축과 물을 오가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낯선 감각도 매혹적이었지만 참신한 비유의 매력을 상쇄하는 평이한 비유가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민의 ‘버터’는 뭉쳐지고 흩어짐, 얼음과 불, 저온과 고온의 대비적 상상력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사각이었다가 물처럼 녹아버리는 버터의 속성을 포착해 펭귄, 오두막, 당나귀, 저울, 안녕, 창문으로 이어지는 낯선 상상력을 전개해 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버터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바탕에는 버터가 탄소발자국이 많은 음식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각이 돋보였다.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점도 믿음이 갔다. 말을 예민하게 다룰 줄 알고 상상력의 전개가 독창적이면서도 이 시대의 가장 첨단의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인류세로 접어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생태시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버터’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마음을 모았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빛나는 개성을 열어가기를 바란다. 예비 시인들에게도 쓰는 자로 살아가는 한 머잖아 우리는 지면에서 만날 거라고, 쓰는 시간이 우리를 버티게 할 거라고 응원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행숙 이경수 송경동 황인숙
경인일보
세계, 고양이
김현주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시부문 심사평]
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감각적 문장·세련된 은유로 한층 높인 시의 격조"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도 마감 당일까지 1천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한편 한편이 응모자들의 땀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예심 없이 심사위원 두 사람에게 응모작품이 전달된 것이 12월 중순쯤이었다.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보내고 12월 20일, 심사위원 두 사람은 경인일보 사장실 옆 접견실에서 만나 당선후보자들의 작품을 놓고 협의를 계속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올려놓는 응모작마다 담당 기자가 일일이 인터넷 검색을 해나갔다. 순수 신인이어야 한다는 응모 요강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모든 인쇄매체에 소개된 경력이 있는 응모자는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많은 응모자가 이 조항에 걸려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
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
'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
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
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세계일보
드라이아이스 / 민소연
-결혼기념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심사평
안도현·유성호 “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농민신문
구 일째
황정희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머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나간 지도
구 일째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매매 반듯하게 기다리고 있다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심사평] 감정 노출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새로운 시공 ‘매혹적’
장석남 시인 . 나희덕 시인
분명 신춘문예는 축제다. 사는 일 곁에서 문학(시)을 알게 되고 배우고 쓰고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소출을 모아 제출한다.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한창 운동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는 지나간다.
그 가운데 단 한사람이 남는다. ‘구 일째’ 외 4편을 보낸 황정희씨가 올해 당선자다. 축하를 보낸다.
투고된 작품들의 대체적인 경향은 ‘농민신문’이라는 제호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춤한 시들을 모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선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는 매체 성격과는 별개로 단지 ‘문학(시)’을 발견하고 싶고 그것도 새로운 문학을 설레며 기다릴 뿐이다.
당선작을 포함한 다섯편 시 모두 잘 정제되어 있었다. 세상의 비극을 응시하되 그 현상을 자기 안에 끌어들여서 앙금으로 가라앉힌 모습이다. 얼핏 보면 아무 이야기도 아닌 듯하나 그 이면에는 들끓는 아픔과 성찰이 놓여 있다. 이즈음 떠도는 시들, 노래방 조명처럼 휘도는 언어의 쇄말 속에서 분명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산불을 만난 할머니가 키우던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모는 텔레비전 영상과 화자의 사적인 경험이 중첩되어 전개된다든지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싸움 구경에서 자신이 “아침에 산뜻하게 다려준 청색 남방이 찢겨져 있는 (‘지나쳤다’)” 장면을 발견하고는 이내 모른 척 돌아서는 모습에서 독자는 각각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성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감정의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이 새로운 시공(時空)은 음미해볼수록 매혹적이다. 앞으로도 이 시의 축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읽는 바닥들’과 ‘저수지의 집필방식’ 등이 최종 토의 대상이었으나 이른바 ‘운때’가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음을 ‘굳이’ 밝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