冠巖 洪敬謨 筆
조장빈 / 산악문화연구소
서(序)
조선시대 삼각산의 동북쪽 끝자락의 계곡을 우이동(牛耳洞)이라 했다. 삼각산과 도봉산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에워싼 자락으로, 어언동(於焉洞)에서 내린 우이천(牛耳川)이 만경대에서 시작된 물길과 합류하여 수유현(水踰峴)에 이른다. 이 동천(洞天)의 서편에는 소귓골로 불렸던 우이동(牛耳洞), 조계동(曹溪洞), 보동동(普東洞)이 자리하고 맞은편으로 도봉산의 한 자락이 우이천을 따라 남으로 흐르는데, 우이동에서 달맞이 고개를 넘어서면 해등촌(海等村)으로 도봉산 시루봉(甑峯)이 있다.
북한성도 〈동국여도〉(19세기 전반) / 도성도 〈광여도〉(19세기 전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세상 사람들이 도봉산(道峯山)을 ‘소봉래(小蓬萊)’라 일컬으니 그 아래의 우이동은 서른여섯 곳의 동천(洞天)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라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동천은 기이한 봉우리와 맑은 여울이 흐르고, 굽이마다 그윽하고 깊으며, 깊은 골은 신령스러운 경계요 곳곳마다 입을 벌린 듯 웅장하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고 구름과 안개가 빽빽하게 모여든다.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며,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니, 참으로 신령스럽고 진인(眞人)이 거니는 원유(苑囿)요 인간 세상 같지가 않다.”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선경(仙境)을 따라 조선 중·후기의 왕실과 경화세족들은 별서(別墅)를 경영하였다. 전하는 기록에는 해등촌(海等村)과 우이동 일대를 소유했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시루봉 아래 해촌전장(海村田莊)을,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은 삼각산 최고의 경관으로 불렸던 조계동에 송계별업(松溪別業)을 두었다. 우이동 어귀에 바위 위에 세워진 재간정(在澗亭)은 소고(嘯皐) 서명균(徐命均, 1680~1745) 별서(別墅)의 누정이었다. 재간정에서 해등촌으로 가는 달맞이고개 너머에는 이안눌의 현손(玄孫)인 이주진(李周鎭, 1692~1749)이 해촌전장을 물려받아 소요했으며 그 이웃에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명오정(名吾亭)이 있었다. 조현명은 1744년 9월 명오정이 낙성되자 서명균, 이주진 소기영회(小耆英會)를 결성하고 그를 기념하여 도봉산 원통암(圓通菴)을 올랐는데, 원통암의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는 이들의 유람을 기념하여 새긴 것이다. 그리고 홍양호는 천관봉(天冠峰)에서 시작된 물길 가에 소귀당(小歸堂)을 짓고 구곡(九曲)을 경영하였으며 그의 손자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 1774~1851)는 천석(泉石)의 바위 하나 물길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실로 동(洞)의 주인으로 많은 기록을 남겨 동천을 빛냈다.
한국 알피니즘(Alpinism)의 발상지인 우이동. 본 회에서는 홍양호가 설정한 우이구곡의 존재를 처음 알리고 여러 차례 조사와 글을 발표하였다. 클라이머의 손길이 닿기 전에 동천의 산수를 향유했던 조선 선비들의 자취를 찾아 그를 기억해보고자 한다.
1. 홍양호와 소귀당(小歸堂)
2. 우이구곡(牛耳九曲)
3. 인평대군의 송계별업(松溪別業)
4. 서명균의 소고별서 재간정(在澗亭)
5. 조현명의 명오정(名吾亭)
6. 화계별서(花溪別墅)
7. 동천(洞天)의 유산(遊山)
8. 북한산의 진경(眞景)
9. 인수제일봉(人壽第一峰)
10. 법화사(法華寺)의 목련과 부석금표(浮石禁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