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영국 공군에대해서 자료 조사를 하면서 저는 제가 지금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잘못알고 있던 지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최초의 독립공군은 저는 지금껏 독일의 루프트 바페인줄 알았건만 'ㅅ' ㅋ 실제로는 지금부터 열심히
소개할 RAF 영국 공군이 최초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제가 알던 공군은 전부 육군 소속으로 알고 있었고, 제 1차대전때
독일 공군전력이나 영국 공군전력 모두 육군에 속해 있는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정정합니다. 영국 공군은 1918년 4월에
정식 출범하였고, 그대로 2차대전때 루프트바페와 싸웠으니 'ㅅ' ㅋ 세계 최초일줄은 아닐지몰라도-혹시 또 모르니- 독일공군
보다 영국공군이 먼저 였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편에 휴 트렌차드 장군에 대해서 설명하기전에
잠깐 영국이 처한 상황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번 편에는 영국공군의 아버지이자 1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승장이면서
2차대전에 대비해 영국공군에 열심을 다했던 휴 트렌차드 장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합니다.
-영국 공군의 아버지 휴 트렌차드 장군의 예복샷-
휴 트렌차드 장군은 1873년 2월 3일 영국 타운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경보병대의 대위였고, 그의 어머니는
해군 대령의 딸이었습니다. 즉 휴 트렌차드 장군은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던 것이지요. 그리고 트렌차드 집안은 상당히 유서깊은
집안이었는데 그의 선조는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할때 따라왔던 기사가 선조였습니다. 휴 트렌차드가 크자 그의
부모들은 그를 군인으로 키우자 했고, 그의 어머니는 그의 외할아버지처럼 해군이 되길 원했으나 그의 집안 가세가 기운데다가
휴 트렌차드도 해군엔 별로 흥미가 없었기에 그는 육군쪽으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이미 10대때 군인학교에 들어갔으나 2번에 걸친
시험에서 낙제를 하여 3번째 시험에서 통과한뒤에 장교가 될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0세였습니다. 그리고 곧 그는
보직을 받아 인도로 떠났습니다. 그는 왕립 스코트 연대에 배치되었는데 인도에서 그는 자기와 뜻이 맞는 동료를 만나게되는데
그는 나중에 영국 수상이 되는 처칠이었습니다.
-1874년생 처칠이 휴 트렌차드장군보다 동생입니다. 사진은 젊은날의 윈스턴 처칠-
인도에서 그는 주로 폴로와 전술 연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권위주의 적인 영국군내 문화를 싫어했고, 사교적인 예절을
무시하며 큰 목소리로 대화하곤 했는데요 그때 그의 별명은 움직이는 폭탄이었다고 합니다 -_-;; 하여간 인도에서 군생활을
잘 보내다가 1900년 보어 전쟁이 터지자 그의 연대는 남아프리카로 향했고, 휴 트렌차드 역시 보어 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는 호주 경기병대를 지휘하여 보어 기병대를 추격하다가 보어 군이 총 쏜에 폐가 관통당하고 척추 뼈에 총이
스치는 중상을 당했고, 결국에는 영국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재활에 온 힘을 다했지만 지팡이 없이는 걸어다닐 수 도
없었다고 하네요 -_-; 하지만 그는 포기를 하지 않았고, 요양을 위해 스위스의 생모리츠를 찾은 그는 재활을 위해 알프스
산맥의 30여개의 언덕을 찾아다니며 썰매를 타며 재활을 했다고 합니다.
-생 모리츠의 휴 트렌차드, 그의 노력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지팡이 없이도 걸어 다닐수 있었고 다시 군대에 복귀한 그는 나이지리아를 거쳐서, 아일랜드에
왔고 39세에 소령으로 진급할수 있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군 생활을 하던중 그는 나이지리아에서 같이 군생활을 했던
로레인 대위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로레인 대위는 그때 나이지리아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당시 최신 기술인 비행을 배우고
있었는데 휴 트렌차드에게도 같이 배우자는 권고의 편지를 보낸 것이었죠, 휴 트렌차드는 이에 흥미를 느꼈고, 1912년 6월
그는 런던으로 가서 자신의 친구인 로레인 대위를 찾아 항공대를 찾았지만 로레인 대위는 바로 전날 비행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죠.
-휴 트렌차드 장군을 비행의 세계로 초청한 로레인 대위의 묘비,
그는 그의 친구가 나중에 공군의 아버지가 된 사실에 하늘에서 기뻐 했을까요??-
슬픔을 거두고 그는 항공대에 지원을 했지만 문제는 그의 나이였습니다. 항공대는 40세 이상은 받지 않았는데 휴 트렌차드는
당시 39세였기에 항공대는 그의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3주를 끈질기게 버텼고, 결국 그는 비행 교습을 받은뒤에
270번째 면허를 가진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공대에서 열정적으로 일했고, 2년을 훈련한뒤에 그는 중앙 비행 학교의 교관
나중에는 교장이 되어서 비행사들을 양성했습니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휴 트렌차드 교장님-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던 휴 트렌차드는 앞으로는 공군이 전장을 지배할거라 믿었고 공군의 미래를 밝게 본 선각자였습니다.
그리고 1914년 제 1차대전이 터지자 휴 트렌차드는 항공대의 지휘관으로 프랑스 전선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앞으로 공군이 전장을 지배할 것이다. 그러니까 시시한 정찰 & 조사 따위 일은 거부하겠다'며 뻐팅겼습니다. 처음에 주위 동료
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만 곧 그의 이런 호기로운 말이 영국군 사령관 헤이그 장군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헤이그 장군은
공세에 앞서 항공대가 앞장서서 공격을 하기 원했고, 휴 트렌차드 장군은 앞장서서 적진에 폭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첫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주변 동료들은 트렌차드를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 원인을 면밀히 분석했고, 폭격의 양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헤이그 장군은 트렌차드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었고, 트렌차드는 멋지게 항공대를 이끌고
가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적을 향한 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죠. 이 전술의 성공은 여러 장군들의 눈길을 끌었고,
휴 트렌차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모든 항공대의 지휘관이되고 대장으로 까지 진급했습니다.
-전선에서의 휴 트렌차드-
그리고 그는 프랑스군에게도 비행 전술을 가르쳤고, 1917년 참전한 미국에게도 비행교습을 했으며, 1918년에는 본국으로 돌아와
영국 항공위원회를 창립하고 독립 공군을 창설한뒤에 공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육군과 해군의 반발에 열받은
그는 2주만에 참모총장자리를 때려치웠지만 독일이 다시 공세로 돌아서서 프랑스로 진격하자 전선으로 복귀한 트렌차드는
연합 공군을 구성하여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적의 비행장과 철도를 공격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차대전이
종전한뒤에 그는 다시 공군참모총장이되었고 새로이 출범한 옛 동료 처칠내각에서 그는 공군의 독립성에 대해 부던히 노력하며
공군의 새로운 전술및 장교들을 양성하는데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20년대 영국 식민지였던 소말리아와 이라크에서
게릴라 소탕을 위해 마을을 향해 전략 폭격을 시도했고, 그의 전략폭격은 큰 민간인 피해를 입혔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적
이었습니다. 그는 전략 폭격의 필요성을 처칠에게 역설했지만 민간인이 죽는 전략 폭격에 처칠은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다시는 전략 폭격을 시도 하지 말라고 말이죠. 1927년 원수의 자리에 오른 휴 트렌차드는 1929년 군에서 은퇴했습니다.
-원수 시절 휴 트렌차드-
하지만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에는 영국공군의 시련기였습니다. 대공황이 세계를 휩쓸었고, 영국도 재정 위기를 맞게 되자
공군을 다시 육군과 해군 밑으로 넣으려고 했고, 그의 동료인 처칠이 재정위기로 실각하자 새로이 등장한 체임벌린 내각은
공군의 발전 지원을 거부했습니다.1930년 남작이 된 휴 트렌차드는 이런 공군을 흔드는 대 위기에 비록 은퇴한 몸이지만
공군에 힘을 실어주기위해 부던히 노력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여 공군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1937년에는 괴링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휴 트렌차드는 괴링의 뜻 밖의 도발을 받게 됩니다.
-훗 영국의 늙은이에게 독일 공군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연회가 한참 무르익었을때 갑자기 불이 꺼진 연회장에 미리 녹음해놓은 슈투카의 급강하 소리를 크게 틀자 당황한 휴 트렌차드
에게 헤르만 괴링이 다가가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독일 공군의 위력입니다." 휴 트렌차드는 침착하게 대꾸 했습니다.
"괴링씨 당신은 미쳤군요. 영국 공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뭐 결과는 'ㅅ' ㅋ 여러분 모두 아시는 거죠 ㅋ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온 휴 트렌차드는 전쟁에 대비해 폭격기와 전투기 개발에 힘을 쏟았고, 2년뒤에 그가 예상 했던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는 이마 70대의 고령이었기에 현역으로는 복귀하지 못했고 다시 집권한 처칠 내각에서 그동안 모아온 영국공군의
폭격기를 통해 예전부터 주장해온 전락폭격 실시를 다시금 강하게 주장하였고, 그의 주장은 2차대전 내내 영국의 주요 전략이
되었죠. 그는 노구를 이끌고 최전선 공군기지들을 방문하여 병사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자신의 제자들-공군의 주요 장성이
되었습니다-에게는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에 그는 완전히 은퇴하였고, 1956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2차대전 영국공군의 이론을 뒷받침 해주었고, 영국 공군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ㅅ' 새로운 기술 개발에 앞장섰고, 언제나
병사들을 격려했던 장군이었습니다. 이렇듯 휴 트렌차드가 혼신의 힘을 다해 영국공군의 발전에 기여했으니, 영국공군이
독일 공군에게 이길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첫댓글 음성 지원 도발에 전장에서 맞대응 쳐준 멋진 장군님이쿤요 우옹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영국이라는 나라는 별종에 의해 구원받는 나라인 것 같아요.^^
역시 뛰어난 지휘관이 있어야..전쟁을 리드할 수 있는거구만요...
영국 공군을 탄생,발전시컨 선각자였네요..
가터 훈장도 받았을법한데 받았나요?
아쉽게도 위키 검색결과 받지는 못한 걸로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