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氣)란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기 쉽다. 바람이 강한 곳에는 기가 모이지 않는다.
아울러 기는 물을 만나면 진행하는 것을 멈추고 그 곳에 머물게 된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어야 했다. 바람을 갈무리하고(藏風) 물을 얻는 게(得水) 줄임 말로 풍수다.
바람을 제대로 가두고 물을 얻을 있는 곳이 명당(明堂)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 장풍득수를 제대로 할 수 있게 한다고 풍수에서는 믿는다.
산을 등지고 앞쪽에 물이 흐르는 지형이 명당의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조선왕릉은 바람과 물을 조화있게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이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어
명당다운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선왕릉 입구를 들어가면 매표소를 지나 한옥 재실(齊室)을 만난다.
왕릉의 진입공간이 시작된다. 이곳은 왕릉 관리를 담당하는 능 참봉이 살던 곳이다.
제향을 주관하는 제관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기도 하고 제향에 쓰이는 기물들을 간수한다.
재실은 제향을 맡아보는 관리인 수복(守僕)의 거처이기도 하다.
재실을 지나면 울창한 숲을 만나게 되고 개천이 나온다.
왕릉의 풍수장치는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선의 기(氣)는 수영을 못한다." 좋은 생기(生氣)도 물을 만나면 맥을 못춘다.
사특한 나쁜 기도 물을 만나면 여지없이 주저 앉는다. 바로 금천(禁川)이다.
왕릉의 진입공간에 금천(禁川)으로 단단하게 바리케이트를 친 것이다.
금천은 속세와 성역의 경계역할을 하는것이다. 궁궐이나 사당 사찰에도 금천을 둔다.
그 금천 위에는 작은 돌다리 금천교(禁川橋)가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면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지역으로 옷매무새를 고치고
왕릉을 참배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한다.
만일 사특한 기(氣)가 금천을 넘어 능역으로 잠입했다면 홍살문에서 줄행랑 칠 것이다.
신라때부터 사특한 무리를 물리친 용맹스러운 전설을 안고 있는 홍살문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왕조 헌강왕 때 처용이라는 천하의 한량이 살았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서 나쁜 귀신들도 탐을 내었다.
하루는 서라벌 도깨비가 꾀를 내어 처용이 집에 없을 때 처용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처용의 아내에게 갔다.
아내는 처용인 줄만 알았다. 처용이 밤 늦게 집에 들어와보니 이불에 다리가 네 개가 있는 것이다.
처용은 힘만 센게 아니라 아주 현명했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방에서 나와 달을 보고 시를 지어 읊었다.
처용은 얼굴색이 붉은 아라비아 상인이었다. 밤새 술까지 마셨고 성질까지 꾹꾹 참고 있었으니
그 붉은 얼굴이 훨씬 더 붉게 되었다. 그 도깨비는 붉디붉은 처용의 얼굴을 보자 그만 질겁을 하고
처용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사죄하며 다시는 처용 근처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줄행랑첬다고 한다.
이후 신라세시 풍속은 동짓날 자기 집 대문입구에 처용 얼굴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을 칠하였다.
"붉은 색깔만 얼씬 거려도 이유 불문하고 도망부터 쳐라!"
그 날 혼줄난 도깨비 대장이 전국 도깨비들에게 긴급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홍살문에도 붉은 색을 칠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홍살문의 붉은 색은 신성한 공간으로 침입하려는 잡귀를 막기 위함이다.
홍살문이라는 단어에서 살이라는 글자는 화살 전(箭) 자의 음이 아닌 살이라는 뜻을 딴 글자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이 꽂혀있는 문이다. 문의 위쪽을 보면 화살들뿐만 아니라 삼지창도 꽂혀있고
삼지창에는 삼 태극이 붙어있다. 청색 적색 황색의 삼색이 바람개비 모양을 이루고 있는 삼 태극은
천+지+인 3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를 상징화한 것이다.
홍살문은 능 주변의 지형에 따라서 크기 및 넓이가 다소 다르기도 하며 홍살의 수도 10개 12개 14개 짜리가 있다.
아무리 사특한 기라도 감히 싫어하는 색깔로 비보(裨補)한 공간은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도 화살과 삼지창으로 방어하고 있으니 육해공의 완벽한 방어진으로 능역을 경비하고 있는 것이다.
홍살문 옆에는 4각형 모양의 돌판이 있다. 판위(版位), 배위(拜位)라고 한다.
왕릉 제사 때 왕은 먼저 판위에 올라서서 왕릉을 향해 절을 한다.
능을 찾은 왕이 선왕에게 올리는 절은 국궁사배(鞠躬四拜)라 했다.
"국궁! (鞠躬; 무릎을 꿇어앉으시오) 사배! (四拜; 4번 절하시오) 흥! (興; 일어나시오)
평신! (平身; 몸을 바르게 하시오)"
그 판위 옆에는 돌길이 있다. 박석(薄石)이라는 납작한 돌로 만든 길이다.
이 길을 참도(參道)라고 한다. 이때 참(參)은 긴 모양 '참'이다.
참도는 왼쪽이 오른쪽 보다 넓고 높이가 한 단 더 높다.
한 단 높은 왼쪽 길은 신들만이 다닌다는 신도(神道)이다.
오른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해서 어도(御道)라고 한다.
신도는 신로(神路), 어도는 인로(人路)라고도 한다.
어도의 오른쪽 잔디로는 능역에서 왕을 늘 곁에서 보필하는 능참봉이 간다.
'능참봉이 되어라'....
퇴계 이황은 대제학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여 수양에 전념하는 처지에서 제자들에게 항상 한 말이다.
비록 종9품이지만 여러면에서 능참봉은 당시로서는 매력있는 자리였다.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왕이 파견한 관리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종9품에 해당되는 참봉 품계를 받는다.
대기만성을 노리는 인물들에게는 능 참봉 자리가 아주 인기가 높았다.
재실 안에서는 왕이 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능 안에는 백 여명의 노비들이 알아서 일을 처리하였기에 한가로웠다.
눈치 볼 상관이 없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다.
왕이 능행할 때는 왕을 지근거리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왕을 모셨다.
왕과 함께 산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왕의 눈에 들면 발탁될 수 있었다.
녹봉을 받으면서 공부도 할 수 있고 왕과의 독대로 벼락출세의 길이 열린
능 참봉이다. 능 참봉하다 왕의 측근 실세가 된 인물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이첨이다. 세조왕릉에서 능 참봉을 하다 선조의 눈에 들었다.
그 후 예조판서까지 오른 왕의 측근으로 조정의 실세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