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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학 강의/ 신성한 어머니에 대한 가르침 ( 쿤달리니와 탄트라)
신성한 어머니에 대한 가르침 : 쿤달리니와 탄트라
'신성한 어머니'에 관한 가르침을 소개하겠습니다. 신성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쿤달리니와 탄트라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쿤달리니는 우리 안에서 불꽃으로 자리잡고 계신 신성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요가에서는 쿤달리니를 각성시켜 정수리의 챠크라까지 상승시켜야 최고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대사학에서는 쿤달리니를 상승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요가의 전통적 방법 외에 추가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관해 '예수의 잃어버린 가르침'에 실린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잃어버린 가르침 중에서 - 쿤달리니의 상승
쿤달리니 : 글자 그대로의 뜻은 "감겨 있는 뱀"; 척추 베이스 챠크라에 잠복한 채로 감겨 있는 에너지 ; 생명력, 모성 에너지. 특수한 요가 테크닉이나 자세, 비쟈 만트라, 영적 훈련 또는 신에 대한 극도의 사랑으로 쿤달리니가 활성화되면, 척추를 타고 이다Ida, 핑갈라 Pingala, 슈슘나 Sushumna를 지나서 상승하여 각 챠크라를 활성화시킨다.
과거 생의 부정적 모멘텀에 대한 영혼의 정화나 변환이 있기 전에 쿤달리니의 상승이 일어나면 정신이상, 귀신들림, 절제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성적 욕구 또는 모든 챠크라에서 생명 에너지의 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쿤달리니의 상승에 관한 동양적 전통에서 결여된 것은 '아앰 댓 아앰I AM THAT I AM'과 코잘체로부터 성부의 빛을 하강하게 하기 위한 발언(Spoken Word)의 과학에 입각한 다이나믹 디크리의 사용과 상부 챠크라의 빛이 척추 베이스의 빛을 심장으로 끌어 당기는데 쓰인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디크리에 의해 내려온 성부의 빛이 어머니의 빛인 쿤달리니의 상승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승된 모성의 빛은 성부의 더 큰 빛을 끌어오는 역할을 합니다.) 하강하는 부성의 빛은 척추 베이스로부터 상승하는 모성의 빛과 심장에서 결합하여 거룩한 불의 깨달음과 알파와 오메가의 전체됨wholeness의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복된 성모께서는 사랑과 흠승의 열기에 의해 급작스런 에너지의 폭발없이 모성의 빛을 상승시키는 안전한 방법으로서 로사리오를 주었다. 바이올릿 불꽃에 의해 오라와 챠크라를 깨끗이 하는 일 또한 위험없이 쿤달리니를 점차로 상승케 한다.
신성한 어머니께 바치는 비쟈 만트라는 바이올릿 불꽃과 함께 사용했을 때, 세인트 저메인의 후원을 받음으로써 안전할 수 있다. 명상과 다이나믹 디크리 그리고 모성의 신성에 바치는 만트라의 암송을 결합한 변환에 관한 세인트 저메인의 동/서양적 실험은 양쪽 전통의 제자들에게 가속화 의 길을 제공한다. 세인트 저메인은 그런 수행의 토대로 빛의 튜브를 부르는 디크리와 대천사 미카엘에 의한 보호를 권유하고 있다.
(대사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쿤달리니가 본래부터 척추 베이스 챠크라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보다 상위의 챠크라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인류가 오랫동안 거룩한 에너지를 남용함에 따라 점점 밑으로 내려가 바닥에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sex는 신의 sared energy(거룩한 에너지)로 바로 신성한 어머니로부터 나온 에너지입니다. 신성한 어머니인 샥티가 신의 창조력이므로 거기서 나온 性 에너지도 창조 에너지의 일종이지요. 이는 다양한 창조활동에 쓰일 수 있습니다. 남녀의 성적 결합을 통한 생명의 창조야말로 그 창조력의 정점이지요.
性이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이 뱀의 꾀임에 빠져 이기적인 쾌락의 추구 속에서 성에너지를 쓰면서부터입니다. 성이 본래부터 쾌락의 수단이었던 건 아니지요. 그러나 성을 쾌락으로 추구하면서 나쁜 카르마(죄)가 생기고 이는 죄의식과 결합해서 성을 신성한 것이 아닌 더러운 것, 불경스런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성을 창조적으로 쓰기보다는 쾌락의 도구로 쓰다보니 그런 방향의 모멘텀이 강해져서 성적 욕구는 아주 뿌리깊고 강력한 패턴으로 인류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즉 오랜 습관의 결과 신성한 어머니의 에너지는 약간의 자극만 가해도 강력한 성적 충동으로 쉽사리 발현되게끔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적 욕구는 거의 본능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성적 욕구는 사람에게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친 성적 쾌락의 추구의 결과 생겨난 강력한 습관 또는 모멘텀인 것입니다. 일부 영화나 예술, 매스컴에서는 성적 욕구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능처럼 부추깁니다만 그 배후에는 인류를 언제까지고 성적 쾌락의 노예 상태에 묶어 두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처럼 성적 욕구는 사람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올바른 방법만 적용한다면 능히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적 충동이나 욕구는 굉장히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섣불리 다루다간 오히려 화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레 다스려야 합니다.
대사들이 제시하는 성적 욕구를 다스리는 방법은 먼저 오랜 세월 동안 키워온 성적 모멘텀을 약화시키고 저급한 형태로 거룩한 에너지가 발현토록 만드는 의식의 패턴들을 파괴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바이올릿 불꽃의 디크리와 첫번째 광선과 관련된 디크리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에 대한 순결한 헌신을 키워 나갑니다. 즉 거룩한 에너지를 고차원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로사리오2)가 효과적입니다.
대사들은 제자들에게 금욕을 요구하진 않습니다. 성적 욕구란게 그리 쉽사리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지혜롭게 다스려야 하는 이유는 그 에너지가 신에게 돌아가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나친 성적 탐닉 속에서 탕진해 버리면 연료가 부족한 로켓트처럼 신에게로 승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어머니의 에너지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적 쾌락의 추구에 쓸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창조적 예술 행위에 쓸 수 도 있고, 사업하는 데 쓸 수도 있고, 고시공부 하는데 쓸 수도 있지요. 또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 정진에 쓸 수도 있습니다.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6년간 고시를 위해 바친 에너지나 바람둥이가 여자들 치마폭 속에서 6년간 바친 에너지나 석가모니께서 6년간 수행 속에 바친 에너지 모두다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신성한 어머니의 에너지입니다. 그들 세 사람이 6년간 사용한 에너지나 노력을 양적으로 비교하긴 곤란하겠지만 양적으로 엄청 크게 차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지요.
궁극적인 깨달음을 위해 명상같은 수행에 사용되는 에너지와 성적 쾌락을 위해 쓰이는 에너지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신성한 어머니의 에너지라고 하면 性을 수행과 연관시키는 탄트라가 연상될 것입니다. 탄트라는 남녀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탄트라 문파는 깨달음의 방편으로 남녀간의 육체적 결합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뉴에이지 계열의 외국 잡지를 보니까 거기에 영국의 탄트라 모임을 취재한 내용이 실렸더군요. 기사 내용은 못보고 사진만 봤는데 모임에 참석한 남녀들이 전부 쌍쌍이 결합되어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사들은 이렇게 직접적인 성적 결합을 추구하는 탄트라는 절대 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탄트라가 아니라 좌도적 탄트라라고 합니다. 탄트라의 궁극적 목표가 성부의 에너지와 신성한 어머니의 에너지의 융합으로 생겨 나는 깨달음(그리스도 의식의 탄생)이라고 볼 때, 그러한 융합은 결국 수행자의 내면에서 일어나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수행자 안에 남성(성부)과 여성(신성한 어머니 또는 성령의 신부로서 영혼)이 다 있거늘 그걸 밖에서 찾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음은 저번에 이어 프라펫 여사의 '신성한 어머니의 도' 라는 강연에서 탄트라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 안에 계신 어머니인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탄트라의 영적 수련에 관한 가르침을 본다. 여러분 중에 많은 이가 나에게 탄트라에 관해 질문해 왔고, 그에 대한 강의를 요청했다. 따라서 이것은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어떤 힌두교파는 모든 것은 환상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탄트라는 어머니인 하느님이 바로 세계라고 가르친다. 그녀는 우리가 쓰고 있는 몸이고, 우리가 먹는 음식이며,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각자 다르게 보이지만) 거대한 우주적 어머니의 배경 위에 그려진 그림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내가 아주 오래 전에 받았던 아주 재미있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많은 커다란 종이 위에 많은 사물들이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그것들은 사물 자체는 아니고 종이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간단한 비유는 우리가 신성한 어머니의 몸이라는 배경 위의 윤곽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시켜 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전부이다. 서로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신성 한 어머니께서 그린 윤곽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눈과 코와 입의 다른 위치, 걷는 모양 등으로 서로를 인식한다. 그런 것을 빼고 나면 우리는 신성한 어머니이다. 우리 자신의 즉 모든 이들 안에 있는 '우리의 어머니 자아(our Mother Self)'의 무수히 많은 일면들을 보니 놀랍지 않는가! 그처럼 어머니는 우리 자신을 속박할 사슬과 해방의 열쇠를 둘 다 주었다.
그녀는 우리를 그 사슬로부터 뿐만 아니라 세계로부터 해방시키는 에너지이다. 탄트라는 힌두교와 불교 모두에서 발견된다. 그 목적은 구도자를 참된 주체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실체와의 합일이다. 힌두 탄트라는 그 궁극적 실체를 베다의 정의와 동일한 '삿-칫-아난다(Sat-Chit-Ananda), 존재-의식-지복'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베다에서 '삿-칫-아난다'는 마야라고 불리는 상대의 영역으로 내려온 순수한 영으로 간주된다. 탄트라에서 '삿-칫-아난다'는 영이고 물질이며, 쉬바이며 동시에 샥티이다. 브라만 또는 영을 의미하는 쉬바는 존재의 수동적 원리로 간주된다. 에너지 또는 힘을 의미하는 샥티는 우주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이다. 샥티는 최고의 여신이고 신성한 어머니이다.
그녀는 모든 창조물들을 존재 속으로 데려왔다. 시간의 끝에 이르면 모든 존재는 그녀의 존재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유대 신비주의에서 비나는 모든 창조물들이 궁극적으로 되돌아 갈 신성한 어머니이다. 스와미 프라바난다는 라마크리슈나가 그들의 합일을 어떻게 지각했는지를 말한다.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마치 불과 그 불의 타는 힘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브라만과 그 샥티는 분리될 수 없다' 그는 또한 말했다.'내가 궁극의 실상을 명상할 때, 나는 그것을 브라만이라 부른다. 내가 창조적 실상을 명상할 때, 나는 그것을 샥티라고 부른다.' 그는 또한 말했다. '그대가 브라만이라 부르는 그를 나는 어머니라고 부른다." 불교도들도 남성과 여성의 극성에 관한 상징들을 만들었다. 여성적 원리는 프라즈나(Prajna: 般若 지혜)라고 부른다. 프라즈나 파라미타(Prajna Paramita)는 초월적 지혜를 말한다.
그녀는 힌두 탄트라의 신성한 어머니와 유사하게 숭배된다. 남성원리는 우파야(Upaya :방편)라고 부른다, 그 것은 의지, 묘한 수단을 뜻한다. 학자들은 탄트라의 근원에 대해 불일치한다. 디엔보는 그것들의 가장 오래된 힌두경전인 고대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종교적 원리와 철학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고 있다. 힌두 탄트라 경전은 대화의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대개는 쉬바와 그의 배필인 샥티와의 대화이다.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것들은 쉬바가 자격있는 수용자에게 드러낸 비밀스런 본성을 기록한 텍스트로 간주된다. 탄트라에 의하면 신성한 우주 에너지인 샥티는 우주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도 있다. 그녀를 쿤달리니라고 부른다, 쿤달리니, 이는 인간의 미묘한 몸의 제일 아래에 있는 챠크라 안에서 뱀과 같은 코일로 존재한다.
탄트라의 요기는 만트라와 기도, 명상이 포함된 영적 훈련을 통해서 쿤달리니를 자극한다. 그들은 그녀를 깨운다. 그러면 쿤달리니는 챠크라들을 지나가는 척추의 중심 통로를 타고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때 탄트라 구도자의 영적 각성이 일어난다.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샥티의 발현 중에 하나인 칼리 여신에게 헌신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안에서 쿤달리니가 활현되는 경험을 했다.
그의 전기작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처음에 척추의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는 힘을 보았다. 그것이 깨어나자 슈슘나의 통로를 따라 정수리의 사라 스바라(천련화)까지 여섯 가지 센터 혹은 연꽃들을 지나며 상승하였다. 그는 쿤달리니가 올라감에 따라 다른 연꽃들이 꽃피우는 것을 보았다. 쿤달리니가 정수리의 챠크라까지 이르렀을 때 그것은 쉬바(영)와 결합하였다.
그때 수행자는 쉬바와 샥티의 합일을 깨달았다." 탄트라는 쿤달리니를 일깨우기 위한 몇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좌도로 의식적(儀式的) 성행위를 추구한다. 수행자는 욕망을 제압하는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다섯 가지 수행을 하도록 충고받는다. 그것은 곡식, 생선, 고기, 술을 먹는 것 그리고 성적 합일의 실행이다.
탄트라 수행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동물적 인간, 영웅적 인간, 신적인 인간이 그것이다. 동물적인 성향의 사람은 세속적인 행위를 통해서 삶의 장점과 결점을 얻는다. 그는 탄트라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욕정에 사로잡혀 있다. 영웅적인 성향의 구도자는 글자 그대로 불같이 행동하여 카르마적인 매듭을 풀 내적인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다섯가지 수행을 육체적으로 행하라는 조언이 주어진다. 세번째의 신적인 성향의 구도자는 제압해야할 아무런 욕망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다섯 가지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승천대사들은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엘 모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상황 아래서도 영적인 구도자는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 위하여 육체적인 성적 합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상 좌도 탄트라의 길을 이용하는 많은 요기들은 영적인 성장을 위해 전혀 일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목표는 개인적인 힘이다." 학자 제이 마크리베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 요기들은 쿤달리니와 미묘한 중추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신적인 에너지를 바른 길로부터 의도적으로 전환시켜 상대적인 불멸성을 획득하는데 사용한다."
상대적인 불멸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애에서 생애로 지상에서의 존재를 영속시킬 목적으로 道와 몸과 시디(siddhi), 챠크라와 쿤달리니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생애를 다른 사람을 부리는데 이용한다. 남을 부리기 위해 신의 에너지를 쓰는 것이 바로 흑마술이다. 그들은 어떤 힘을 얻고 남의 칭찬과 이익을 끌어내기 위해 특정 챠크라에 멈춘다. 바른 탄트라의 가르침은 다섯 가지 육체적 수련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구도자는 일체의 부당한 욕망에 대한 절제를 통해 어머니의 빛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에는 성적인 요소도 포함된다.
어느 탄트라 경전은 그러한 구도자를 가리켜 말을 삼가며, 내향적이고, 꾸준하며, 남의 행복을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결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악을 행할 수 없다. 만사에 선한 그는 쉬바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그는 내면의 여인과 포도주를 즐기며 항상 황홀경에 들어 있다. 영웅적 성향의 사람이 사용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그는 의식과 지복, 고양됨으로 대체한다. 라마 크리슈나는 영웅적 성향의 구도자들에게 권해지는 행위들 즉 생선, 고기, 술을 먹음과 성적 교합에 빠지는 것을 제자들에게 금지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좌도적 탄트라가 고대의 경전에 사용된 상징 언어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본다. W. Y. 에반스 웬즈는 다섯 가지 성스런 요소들의 상징적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술은 파라브라만(Parabrahman: 자아 너머의 자아)의 요가(합일)에 의해 획득된 취하게 만드는 지식을 말한다. 고기는 진짜 고기가 아니고 자신의 모든 행위를 신에게 위탁하는 행위이다. 생선은 일체 중생의 즐거움과 고통을 동정하는 순수한 지식이다.
곡식은 속박을 초래하는 악과 연관된 모든 행위를 버리는 행위이다. 성적 결합은 숭배자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샥티(쿤달리니)와 쉬바의 결합이다." 에반스 웬즈는 결론을 내리길 "이 요소들을 사용함은 신성한 것으로, 그것의 남용은 신성모독"이라고 했다. 이 문제들을 좀 더 고찰해보자. 힌두와 티벳의 탄트라 경전들은 교의를 설명하기 위해 성적 용어들을 사용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티벳인들은 여성원리를 "지혜"라고 불렀다. "의지"는 남성 원리로 보았다. 가장 높은 깨달음을 위해서 그 두 가지의 합일이 있어야만 한다.
라마 고빈다는 "성적인 상징들은 일종의 비밀 언어로, 그 안에서 가장 높은 것이 가장 저급한 것의 형태로, 가장 거룩한 것이 가장 평범한 것의 형태로 아주 자주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입문자를 위한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지나친 지적, 철학적 풍조 때문에 필요했던 일 종의 충격요법이었다.
파드마 삼바바와 같은 싯다(siddha 완전한 이)들은 생의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한 울타리 안에 갇힌 수도원 생활의 자기 도취적 경향에 대해 혁명적이었다. 라마 고빈다는 설명한다. "티벳의 미술과 문학이 부처들이 그들의 배필과 성적 합일의 상태로 있는 모습을 그렸을 때, 그것은 인간으로서 행할 훈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명상으로부터 오는 체험과 비젼(vision)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탄트라의 남성과 여성 원리의 양극은 단순한 성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 높은 지평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양과 음의 수학적 병치(竝置 juxtaposition)와 같은 것이었다." 라마 고빈다는 불교 경전의 구절을 인용한다. 거기서 파드마 삼바바는 왕과 그의 가신들을 파괴하고 그들의 여인들을 정화하고 종교적 심성을 지닌 아이들의 어머니로 만들기 위해 데리고 간다. 이것은 그가 여인들과 성행위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텍스트는 파드마 삼바바가 악의 힘들과 싸웠던 내적인 투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적인 통합과정에서 여성 원리에 대한 인식은 그의 본성의 두 원리, 즉 '활동'의 남성원리와 '지혜'의 여성원리의 통일로 이루어진다."라고 라마 고빈다는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외부에 있는 남자나 여자와의 성적 합일을 추구하는 대신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 내부에서 명상의 과정 중에 일어나는 남성적 여성적 본질의 합일에 의한 합일을 찾아야 한다.
* 다음은 신성한 어머니께 바치는 바잔(VAJAN)입니다. 바잔은 힌두교 찬송을 말합니다. 따라서 만트라와 달리 멜로디가 있는 노래입니다만 만트라와 다를 게 없습니다. 두르가는 쉬바의 샥티, 락슈미는 비슈누 또는 나라야나의 샥티, 사라스바티는 브라마의 샥티입니다. 우주의 어머니의 승리는 바로 우리 영혼의 승리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 는 장자 세상을 다스릴 남아를 낳으려는 산고에 처한 여인은 바로 우리 영혼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어머니입니다.
JAI DURGA LAKSMI SARASVATI 자이 두르가 락슈미 사라스바티 SAI JAGAN MATA 사이 자간 마타 JAI DURGA LAKSMI SARASVATI 자이 두르가 락슈미 사라스바티 SAI JAGAN MATA 사이 자간 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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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어머니시여, 나를 보호해 주소서 우주의 어머니시여, 나를 보호해 주소서 우주의 어머니시여, 나를 보호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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